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본능}} {{본문|오자와 이치로 (본능)}} {{오자와 이치로 (본능)}} {{목차}} == 개요 == [[일본 (본능)|일본]]의 정치인 [[오자와 이치로 (본능)|오자와 이치로]]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 다나카 가쿠에이의 수제자 == [[오자와 사에키 (본능)|오자와 사에키]]<ref>구제 [[카이세이중학교 · 고등학교 (본능)|카이세이중학교]]와 [[니혼대학 (본능)|니혼대학]] 법학부 졸업 후 변호사로 일하다 정계에 입문해 중의원 10선, 운수대신, 체신대신, 우정대신 겸 전기통신대신, 건설대신 등을 역임하였다.</ref><ref>어머니는 치바현의 대지주 가문 출신이었다.</ref>의 장남으로 1942년 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태어났다.<ref>본적은 [[이와테현 (본능)|이와테현]] [[오슈시 (본능)|오슈시]]</ref> 도쿄도립고이시카와고등학교, [[게이오기주쿠대학 (본능)|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 졸업 후 변호사를 지망하여 [[니혼대학 (본능)|니혼대학]] 대학원 법학연구과에 입학, 사법시험 지도를 받고 있었다. {| class="wikitable" style="max-width: 400px; width: 100%; border: 2px solid #3CA324; text-align:center" |- | <div style="margin: -5.0px -9.0px">[[파일:뱃지를 다는 오자와 이치로.webp]]</div> |- ! style="background:#3CA324; color: #fff" | 1969년 초선의원으로서 뱃지를 다는 오자와 이치로 |- |} 그러나 1968년 아버지의 급사로 인해 급히 세습이 결정되어 1969년 자민당에 입당해 자민당 공천을 받아 구 이와테현 제2구에 출마해 그 해 중의원 선거에서 27세의 나이로 당선되었다. 선거운동을 하던 중 [[다나카 가쿠에이 (본능)|다나카 가쿠에이]]의 눈에 띄어 다나카 파벌의 일원들이 조직에 충성심을 유지하도록 감시 역할을 하는 젊은 의원들 그룹<ref>유명 어린이 만화이자 TV프로그램 시리즈의 이름을 따서 '소년 탐정단'이라 불렸다.</ref>의 리더로 오자와가 임명되면서 다나카의 [[수제자]]가 된다.<ref>이후 [[다케시타 노보루 (본능)|다케시타 노보루]]와 [[카네마루 신 (본능)|카네마루 신]]과 공모하여 다나카 가쿠에이를 몰아낸 [[헤이세이 연구회 (본능)|다케시타파]]의 일원이 된다. 오자와는 다나카를 몰아내는 쿠데타를 결행하기 전날 울면서 밤을 지샜다고 전해진다.</ref> 이후 자민당 총무국장과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을 맡으며 경력을 쌓아갔다. 다나카는 전성기에 메지로에 3,000평에 달하는 대저택을 지어놓고 자택정치를 즐겼는데 오자와도 세타가야 후카사와의 1,000평에 달하는 저택에<ref>[[파일:スクリーンショット-2023-08-29-14.12.03.webp]] 한 블럭 전체가 오자와의 집이다.</ref> 의원들을 초청해 파티를 여는 등 다나카와 비슷한 자택정치를 하였다. [[1985년]]에는 제2차 [[나카소네 야스히로 (본능)|나카소네]] 제2차 개조내각에서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으로 첫 입각에 성공했으며, [[가이후 내각 (본능)|가이후 내각]] 아래서는 '''47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ref>[[사토 에이사쿠 (본능)|사토 에이사쿠]] 내각 하의 [[다나카 가쿠에이 (본능)|다나카 가쿠에이]] 간사장과 공동 1위이다. 그 다음 최연소가 49세에 간사장이 된 [[아베 신조 (본능)|아베 신조]].</ref>했다. [[리크루트 사건 (본능)|리크루트 사건]]으로 인한 [[다케시타 노보루 (본능)|다케시타 노보루]] 여성 스캔들 문제로 사퇴한 [[우노 소스케 (본능)|우노 소스케]] 전 총리의 연이은 사퇴로 인해 정치개혁에 대한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오랜 동지인 [[하타 쓰토무 (본능)|하타 쓰토무]]를 선거제도조사회장에 취임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를 수락한 하타 쓰토무는 후에 [[소선거구제]] 도입에 힘을 쓰게 된다. [[1990년]] 총선거에서는 당초에 접전일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자민당의 과반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1990년]] [[가이후 도시키 (본능)|가이후 도시키]] 총리에 의해 [[일본령 타이완 총독 (본능)|타이완 총독]]으로 자리를 움기며, 간사장직에서 물러났다. == 타이완 총독 == {| class="wikitable" style="width: 100%; border: 2px solid #3CA324; text-align:center" |- | <div style="margin: -5.0px -9.0px">[[파일:타이완 반환 국기 반환식 (일국양제).png]]</div> |- ! style="background:#3CA324; color: #fff" | 1994년 6월 30일, [[타이완 총독부 (일국양제)|{{글씨 색|#fff|타이완 총독부}}]]에서 개최된 하기식에서 하기된 일장기를 [[주 타이완 자위대 (본능)|{{글씨 색|#fff|주 타이완 자위대}}]] 의장대장으로부터 건내받는 [[오자와 이치로 (본능)|{{글씨 색|#fff|오자와 이치로}}]] [[일본령 타이완 총독 (본능)|{{글씨 색|#fff|타이완 총독}}]] |- |} 이미 [[중일공동선언 (일국양제)|중일공동선언]] 때문에 특별한 돌발 사태<s>낙선 같은거</s>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오자와는 [[1994년]] [[7월 1일]], 즉 [[타이완 반환 (일국양제)|타이완의 주권이 일본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순간]]까지 재직하는 ''''마지막 총독''''이 될 예정이었다. 오자와는 다른 총독들 처럼 부임 당시 대만 현지에서 많이 쓰이는 민남어를 할 줄 몰랐고<ref>중일공동선언 이전의 경우에는 내지의 유력 정치인이 대만총독으로 부임하였지만, 1985년 중일공동선언 이후에는 사실상 자민당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체급이 좀 되는 정치인들의 유배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ref> 그져 당권 경쟁에서 밀려난 그를 유배보낸 유배지에 불과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단순히 현상유지만 하다가 일본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러한 예상과는 반대로 그는 자신의 임기 후에도 타이완의 장래에 막대한 영향을 줄 조치들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오자와는 대만에 부임한 뒤 개혁을 시도했는데, 그 중 하나가 1992년에 있었던 선거 개혁이었다. 당시 타이완인들의 참정권은 제한되어 있었다, 타이완의 선거제도도 [[다나카 가쿠에이 (일국양제)|다나카 가쿠에이]] 총독이 밀어붙여 1978년에서야 도입되었고, 그마저도 국회 격인 입법원 의원들은 간선제로 선출했으며, 직선제의 구의회 의원도 2/3 가량을 총독이 임명했다. 1983년에 입법원 의원 직선제가 되었으나 여전히 제한된 선거권자만이 선출하는 직능대표의원들이 많았다. 1991년에 오자와가 겸임하던 입법원 의장직을 OOO의원에게 넘겨줬고, 1992년에 선거개혁을 실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소선거구제 도입 * 투표연령을 만 18세로 하향 * 임명직 구의원 폐지 * 직능대표의원 선거권자 범위 확대 ---- [[분류:오자와 이치로 (본능)]]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1 (원본 보기) 틀:-1 (원본 보기) 틀:-2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목차 (원본 보기) 틀:본능 (원본 보기) 틀:본문 (원본 보기) 틀:오자와 이치로 (본능) (원본 보기) 오자와 이치로/생애 (본능)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