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 style=" float: right; " | {{여백|0.5em}} {{엔조 인물 정보 | 색 = #AD0000 | 글색 = #F5C72E | 테두리색 = #000 | 제목 = '''<span style=" font-size: 12pt; ">에사드 톱타니</span>''' <br /> '''Esad Toptani''' | 사진 = [[파일:Esat Pashë Toptani (c. 1902).jpg]] | 작위아이디1 = 1 | 작위비움1 = | 작위1 = <span style=" font-size: 12pt; ">'''제2대 [[알바니아 전쟁부장관|<span style=" color: #F5C72E; ">전쟁부장관</span>]]'''</span> | 임기1 = [[1913년]] [[7월 5일]] - [[1913년]] [[8월 1일]] | 대관식1 = | 전임1 = | 후임1 = | 재상1 = | 수상1 = [[이스마엘 체말리]] | 총리1 = | 작위아이디2 = 2 | 작위비움2 = | 작위2 = <span style=" font-size: 12pt; ">'''[[중앙알바니아 공화국|<span style=" color: #F5C72E; ">중앙알바니아 공화국</span>]] 정부 수반'''</span> | 임기2 = [[1913년]] [[10월 12일]] 혹은 [[10월 14일]] - [[1914년]] [[2월 4일]] | 대관식2 = | 전임2 = | 후임2 = | 군주2 = | 재상2 = | 수상2 = | 총리2 = | 작위아이디3 = 3 | 작위비움3 = | 작위3 = <span style=" font-size: 12pt; ">'''제3대 [[알바니아 전쟁부장관|<span style=" color: #F5C72E; ">전쟁부장관</span>]]<br />제6대 [[알바니아 내무부장관|<span style=" color: #F5C72E; ">내무부장관</span>]]'''</span> | 임기3 = [[1914년]] [[3월 14일]] - [[1914년]] [[5월 18일]] | 대관식3 = | 전임3 = [[페이지 알리조티]] | 후임3 = [[카라 세이트]]<span style=" font-size: 9pt; ">(전쟁부장관)</span> <br />[[아치프 엘바사니]]<span style=" font-size: 9pt; ">(내무부장관)</span> | 군주3 = [[스칸데르베우 2세]] | 수상3 = [[투르한 퍼르메티]] | 총리3 = | 이름 = | 국적 = | 출생일 = 불명 | 출생지 = [[오스만 제국]] [[티라나]] | 사망일 = [[1914년]] [[5월 19일]] | 사망지 = [[알바니아 공국]] [[두러스]] | 가문 = [[톱타니가]] | 부친 = 알리 톱타니 | 모친 = 바스피예 알리조티 | 형제 = | 배우자 = | 자녀 = | 학력 = | 종교 = [[이슬람교]] | 신장 = | 몸무게 = | 혈액형 = | 정치아이디 = | 정치색 = | 정치글색 = | 정치테두리색 = | 정당 = | 의원선수 = | 의원대수 = | 지역구 = | 현직 = | 약력 = | 군경력아이디 = | 군경력색 = | 군경력글색 = | 군경력테두리색 = | 복무 = | 복무기간 = | 최종계급 = | 참전 = | 서훈 = | 서명 = [[파일:Esad Toptani2 (nënshkrim).svg|150px]] }} |} '''에사드 톱타니'''(<small>[[알바니아어]]:</small> Esad Toptani, [[1863년]] 4월 혹은 [[1875년]] ~ [[1914년]] [[5월 18일]])는 [[오스만 제국]]의 군인이자 [[알바니아 공국]]의 정치인이었다. [[발칸 전쟁]] 이후 중부 [[알바니아]]에 [[두러스]]를 중심으로 한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후 [[알바니아 공국]]에 등용되어 쿠데타를 조직하다 실패하고 [[국제 헌병대]]가 던진 수류탄에 의해 사망한다. [[알바니아]] 중부의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에사드는 이후 [[1893년]], [[오스만 제국]]의 헌병 장교로 경력을 쌓았으며, [[1908년]]에는 [[청년 튀르크당]]에 가입하여 [[콘스탄티니예]]에서 하원 의원을 지녔다. [[1912년]] 10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의해 포위된 [[슈코더르]]를 방어하다가 [[1913년]] 1월, [[슈코더르]]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하산 르자]]를 살해하고 퇴각 시 부대를 공격하지 않는 것과 후일 중부 알바니아의 야망을 지원하는 대가로 비밀 협상을 통해 4월에 도시를 [[몬테네그로]]에 양도한다. 이후 자신을 알바니아의 왕으로 선포했지만 [[1913년]] 7월, [[이스마엘 체말리]]의 [[알바니아 임시 정부]]에 합류한다. 한 달 후, [[알바니아 임시 정부]]에서 사임하여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알바니아 임시 정부]]와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의 갈등은 무력충돌로 발전하였고, [[국제 통제 위원회 (알바니아)|국제 통제 위원회]]가 중제하며 갈등은 종식된다. [[알바니아 공국]]의 [[퍼르메티 정부]]에서 [[알바니아 전쟁부장관|전쟁부장관]]과 [[알바니아 내무부장관|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 알바니아의 군주가 되고자 [[보스니아인]] 난민과 자신의 영지민을 무장시켜 쿠데타를 계획하였으나, [[국제 헌병대]]와 [[스칸데르베우 2세]]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이후 [[국제 헌병대]]가 [[두러스]]에 있는 그의 집을 포위하였고, 항복을 거부하다가 [[국제 헌병대]]의 수류탄에 의해 사망한다. == 탄생 == 에사드 톱타니는 [[알바니아]] 중부의 [[티라나]]에서 무슬림 지주 가문인 [[톱타니가]]의 알리 톱타니와 바스피예 알리조티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일은 아직까지 논란으로 오랫동안 [[1863년]]으로 예상했다. 10년간 알바니아 수상의 생애를 연구한 롤랜드 카포쿠는 [[1863년]] [[6월 13일]]로, 일리르 이코노미는 그보다 1년 후인 [[1864년]]이라 주장했다. 에사드는 알리 톱타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인 가니 톱타니는 후일 [[콘스탄티니예]]의 궁전 근위대의 장교가 되어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경호원으로 근무했다. 가니 톱타니는 [[1898년]] [[12월 21일]], 서른아홉살의 나이에 하피즈 파샤란 인물에 의해 암살되었다. 에사드의 다른 형제인 베히드 톱타니는 [[오스만 제국]]의 장교가 되었다. [[1913년]], 에사드가 [[몬테네그로]]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무렵, 그는 [[이오아니나]]에서 그리스군과 맞섰다. == 헌병 장교 == 에사드는 어린 시절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다. 1890년 대, 그의 부모님은 사망하였고, 그는 [[알바니아]] 중부의 10,000ha의 가문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고, 연간 약 20만 프랑의 수입을 올렸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부유한 지주 가문의 가장을 고위 공직이나 장교로 임명했기에 [[1893년]], 에사드는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의 헌병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군 경력이 없었으나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 (1897년)|그리스-터키 전쟁]]에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명예훈장을 수여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장으로 진급했다. [[1899년]] 새로이 임명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의 [[발리]]는 에사드와 관계가 악화되었고 [[1902년]] 9월, [[발리]]가 그의 애인과 시간을 보낼 때 에사드와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체포하고 이슬람 도덕에 위배된다며 문책했다. 사건 이후 에사드는 재판을 받지 않고 [[알바니아]] 북부의 [[슈코더르]]로 발령되었다. [[1902년]] [[9월 15일]], 그는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이 된 에사드는 그곳의 헌병 조직을 정비하는데 힘을 썼다. 취임한 지 얼마 후인 [[1903년]] 2월 무렵, 그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미르디타]] 지역의 가톨릭 주민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력과 협상을 통해 반란을 진압하고 200여 명의 반군을 체포했다. 에사드의 근무지는 [[슈코더르]]였지만 그는 주로 그의 고향인 [[티라나]]에 거주했다. 그는 이전에 살던 집을 철거하고 더 크고 현대적인 [[코낙]]을 지었다. 영지에서 나오는 부를 [[티라나]]를 개선하는데 사용했다. 판자집을 헐어 새 집을 짓고, 거리를 확장하고 포장하며, 공공 위생을 개선하고, [[두러스]]와의 도로를 현대화했다. 기존의 봉건적인 귀족들의 분노를 샀으나 영지의 농민들에게 농기구와 가축을 제공했으며, 때로는 소규모의 영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 오스만 정계 입문 == [[파일:Delegation_to_Abdul_Hamid_II.jpg|섬네일|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폐위를 직접 전하러 간 대표단. 대표단의 대표인 에사드 톱타니가 가운데에 서 있다.]] [[1908년]] 여름, 에사드는 [[청년 튀르크당]]의 승리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들을 지지한 대가로 자유를 얻어 [[콘스탄티니예]]로 건너가 [[청년 튀르크당]]에 가입했다. [[1908년]] [[12월 17일]]부터 [[오스만 제국]]의 하원에서 [[두러스]]의 의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 4월 12일에서 13일 새벽, [[콘스탄티니예]]에서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전제정치를 복원하길 원하는 무장 반혁명이 일어났다. [[청년 튀르크당]]은 2주 만에 반혁명을 격퇴했고, [[4월 27일]], [[압뒬하미트 2세]]는 폐위되었다. 이때 에사드는 [[압뒬하미트 2세]]에게 직접 폐위 사실을 전하는 4명의 대표단 중 한 명을 맡았다. 이전까지 하원에서의 에사드의 발언을 본다면 그는 오스만주의로부터 결별하며 [[알바니아인]]의 민족 자결권을 지지했다. [[1910년]]에는 [[라틴 문자]]의 도입과 이를 비준한 [[마나스티리트 회의|제2차 마나스티리트 회의]]를 지지했으며, 동년 12월에는 무력으로 [[알바니아인]]의 독립을 억압하던 [[콘스탄티니예]]의 정부를 공격했다. 그후 에사드는 [[청년 튀르크당]]에서 탈당했으며, [[1911년]]부터는 야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1912년]] [[1월 12일]], [[알바니아인]] 하원의원 [[이스마엘 체말리]]와 [[하산 프리슈티나]]가 [[알바니아]] 무장 혁명을 위해 [[콘스탄티니예]]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에사드 또한 그의 동포와 함께 이 비밀결사에 참가했으며, [[알바니아]] 중부의 자신의 영지 주민을 무장시켜 투쟁에 참여하겠다고 결정했다. 그 후 [[알바니아]]로 귀국한 에사드는 [[1912년]] 4월, [[알바니아 봉기 (1912년)|알바니아 봉기]]에 휘말린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내무부장관인 [[하즈 아딜 아르다]]의 대표단이 [[티라나]]에 방문하여 에사드와 협상하였다. 그들은 에사드가 봉기에서 손을 떼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온다면 전쟁부에 등용하겠다고 회유했고, 에사드는 봉기 참여를 번복하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갔다. [[1912년]] 8월, 육군사령부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것과 예비 부대를 조직할 것을 명받은 에사드는 [[알바니아]]로 돌아간다. == 슈코더르 공방전 == [[파일:Hasan_Riza_Bey_and_his_staff.jpg|섬네일|에세드 톱타니가 없는 [[하산 르자]]와 그의 참모들]] [[제1차 발칸 전쟁]]의 발발과 함께 [[10월 8일]], [[몬테네그로]]의 군대는 [[슈코더르]]를 공격한다. [[슈코더르 빌라예트]]의 [[발리]]인 [[하산 르자]]는 약 13,000명의 부대로 [[슈코더르]]의 방어를 담당했다. 에사드가 언제 [[슈코더르]]에 합류했는지는 학자들마다 주장이 다르나, 대부분은 10월 초에 1만 여명의 대규모 예비대와 [[엘바산]]에 위치했었고, [[10월 25일]]에 [[슈코더르]]로 합류했다고 봤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10월 25일]]보다 일렀으며, 부대의 규모는 1만 명보다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월 중순 쯔음부터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해 몇 주만에 [[두러스]],[[티라나]], [[카바여]], [[크루여]], [[시야크]] 등지에서 5,500여 명의 [[알바니아인]] 예비대를 모집했다. [[9월 27일]], 에사드는 부대를 이끌고 [[슈코더르]]로 가고자 했으나 카톨릭 성향이 다수인 [[자드리마]] 지역의 지도자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들은 에사드가 [[슈코더르]]를 방어하기 위함이 아닌 북부의 기독교인들에 대항하기 위해 이동한다고 의심했다. 에사드는 그들을 패퇴시키면서 이동할 수 있었다. [[자드리마]]에 몇몇 대대를 남겨두고 [[10월 3일]], 에사드와 그의 부대는 [[슈코더르]]에 합류한다. 도시의 상황은 11월 중순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몬테네그로군은 추가 병력을 투입했으며, 세르비아군 또한 합류했다. 포위는 4개월 가량 지속되었으며, 수비군은 [[콘스탄티니예]]의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었다. [[1913년]] 1월 말, [[알바니아인]]인 [[하산 르자]]는 [[슈코더르]]를 [[알바니아]]의 영토로 선포하고 [[알바니아의 국기]]를 계양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통해 [[슈코더르]] 주교의 기치 아래 싸우고자하는 고지대의 카톨릭 주민들을 도시 방어에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얼마 후인 [[1월 30일]], [[하산 르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에디스 더햄]]의 설명에 따르면 에사드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에사드의 집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여성의 복장을 한 두 명의 암살자의 총을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암살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에사드가 지휘권을 인수하고 그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하산 르자]]의 암살의 배후에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실제로 그의 보좌관 중 한 명은 그로부터 수 년 후 자신과 다른 이가 에사드로부터 암살을 의뢰 받았다고 증언했다. 암살의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가 최소한의 피해로 도시를 방어해 내 유리한 평화 조건을 확보함과 동시에 [[슈코더르]]의 구세주로써 정치적 입지를 얻고자 했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에사드는 실제로 얼마지나지 않아 [[2월 6일]], 공격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파일:Tarabos_kod_Skadra_1913.jpg|섬네일|고지에서 [[슈코더르]]를 포위하는 몬테네그로군]] [[1913년]] [[3월 22일]], [[런던]]에서 합석한 열강 대표들은 [[슈코더르]]의 신생 [[알바니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3월 28일]], 그들은 [[몬테네그로]]에 포위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고, [[몬테네그로]] 정부는 이에 대해 더욱 강력한 공세를 진행한다. 몇 주간 [[몬테네그로]] 정부는 열강의 요구를 무시했다. 에사드는 압도적인 열세와 식량 문제에 직면했기에 싸우는 대신 다른 해결책을 찾았다. 그는 빠르면 2월 말부터 [[슈코더르]]의 [[이탈리아]] 영사를 통해 [[몬테네그로]]와 비밀 협상을 진행한다. [[4월 8일]], [[몬테네그로 왕국]]은 그에게 응답했고, [[4월 21일]], 에사드는 몬테네그로군 사령관인 [[얀코 부코티지]]로부터 24,000여 명의 병력을 자유롭게 철수하는 대가로 [[슈코더르]]와 [[드런강]] 계곡까지의 영토를 [[몬테네그로]]에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4월 23일]], 에사드는 이에 동의했고, [[얀코 부코티지]]는 그날 오후 3시에 [[슈코더르]]에 입성한다. 에사드와 그의 부하들은 몬테네그로군에 포대만 넘겨준 체 [[슈코더르]]에서 철수했다. == 알바니아 임시 정부와 중앙알바니아 공화국 == [[슈코드라 공방전]] 동안 [[알바니아]]에는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였다. [[1912년]] [[11월 28일]], [[블로러 회의]]에서 [[알바니아 독립 선언|알바니아의 독립]]이 선포되었고, [[이스마엘 체말리]]의 지도 아래 [[알바니아 임시 정부|알바이아 최초의 정부]]가 구성되었다. [[런던]]의 회의에서는 [[알바니아]]의 경계가 논의되고 있었다. [[슈코드라]]를 떠난 지 나흘 후인 [[1913년]] [[4월 27일]], 에사드는 [[세르비아]]가 통제하던 [[레저]]에서 군사 행진을 통해 자신을 [[알바니아의 왕]]으로 선포했다. 이후 남하하여 자신의 영지의 중심인 [[티라나]]에서 통치를 시작한다. 그러나 자신이 [[알바니아]] 중부를 제외하고는 기반이 없으며, 이는 [[알바니아인]]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그리스 왕국]]과 협력하고자 협상을 병행했다. [[5월 5일]], 에사드는 [[몬테네그로]] 및 [[세르비아]]와 협상에 들어섰으나, [[쉬레야 블로라]]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입장을 대변하며 개입해 에사드가 [[이스마엘 체말리]]와 손을 잡도록 설득했다. 결국 [[1913년]] [[7월 3일]], 에사드는 [[블로러]]로 가 [[이스마엘 체말리]]의 제안을 수락하고, [[7월 5일]], [[무피드 리보호바]]를 대신하며 [[알바니아 임시 정부]]의 [[알바니아 내무부장관|내무부장관]]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에사드의 등용을 우려했다. [[코소보]]의 군벌인 [[이사 볼레티니]]는 에사드를 몰아낼 계획까지 세웠으나 [[이스마엘 체말리]]의 주장에 굴복하며 포기했다. 취임 직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로 떠났다는 사실로 인해 우려는 잦아들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8월 1일]], [[알바니아 임시 정부]]를 반이슬람적이라 비난하며 사임하였고, [[블로러]]를 떠나 [[두러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지지자와 함께 [[알바니아]] 중부를 장악할 준비를 마쳤다. 에사드는 [[이스마엘 체말리]]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최후통첩의 내용으로는 정부를 완전히 개편하고 [[두러스]]를 수도로 지정하고, 의회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이스마엘 체말리]]는 최후통첩을 거절했고, [[1913년]] [[11월 18일]], 에사드는 반정부를 결성했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는 다른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고, [[1913년]] [[10월 12일]] 혹은 [[10월 14일]],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선포한다.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의 영역에는 [[두러스]] 외에도 [[티라나]], [[시야크]], [[카바여]], [[페친]], [[크루여]] 등이 포함되었다.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입법 기관은 앞서 언급한 지역들의 대표로 구성된 플레처시아였다. 에사드는 [[세르비아]]와도 계속 소통한 것으로 보인다. [[세르비아 왕국]]의 계획은 에사드를 지원하여 그를 알바니아의 총독으로, 이후 [[알바니아]] 북부 통합이 완료된 이후에 그를 [[알바니아의 왕]]으로 [[알바니아 임시 정부]]를 몰아내고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에사드와 [[알바니아 임시 정부]]의 갈등은 내전으로 발전할 우려를 줌과 동시에 [[알바니아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흔들었다. [[1913년]] 11월, [[알바니아 임시 정부]] [[알바니아 내무부장관|내무부장관]]인 [[하산 프리슈티나]]는 두 정부를 화해시키기 위해 중립지대인 [[엘바산]]으로 그들을 초청한다. 내부의 반대 세력의 위협이 있었기에 타협의 의사를 보였고, [[하산 프리슈티나]]는 새 내각에서 [[알바니아 전쟁부장관|전쟁부장관]]직을 약속한다. [[국제 통제 위원회 (알바니아)|국제 통제 위원회]]는 [[하산 프리슈티나]]의 제안을 지지했으나, [[알바니아]]의 분열을 원한 [[프랑스]]는 에사드가 제안에 반대하도록 종용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1913년]] 말, [[알바니아]]는 내전 직전에 처한다. [[1914년]] 1월, [[콜로보르다]]에서 [[알바니아 임시 정부]] 충성파와 에사드의 군벌 사이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1월 9일]], 에사드의 군벌 300명이 마을을 포위하자 [[엘바산]] 전 지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된다. [[1914년]] [[1월 18일]], [[국제 헌병대]]가 마을에 부대를 보내 해산시키면서 비상사태는 해결되었다. 한편, 열강들은 [[스칸데르베우 2세|빌헬름 추 비트]]를 [[알바니아의 공작]]으로 옹립했고, 그는 지역 군벌이 자신의 왕위를 인정하고 열강이 그의 결정을 순응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1914년]] [[1월 22일]], [[알바니아 임시 정부]]는 [[국제 통제 위원회 (알바니아)|국제 통제 위원회]]에 권력을 위임하고 해산하였으며, 열강은 에사드 또한 같은 결정을 행할 것을 촉구했다. 에사드는 이 요구를 거절했으나 [[영국]]과 [[독일]]의 대표단은 [[1914년]] [[1월 30일]],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의 지도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2월 4일]], 에사드는 [[알바니아 공국]]이 [[두러스]]를 수도로 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이 의회를 구성하고, 자신이 직접 [[스칸데르베우 2세|빌헬름 추 비트]]에게 왕관을 건낼 것을 대가로 합의하고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해산한다. == 알바니아 공국과 쿠데타 계획, 그리고 사망 == [[1914년]] [[2월 21일]], 에사드가 이끄는 17명의 [[알바니아]] 대표단은 [[노이비트]]의 성에서 엄숙한 의식을 거행하며 [[스칸데르베우 2세|빌헬름 추 비트]]에게 알바니아의 왕좌를 물려준다. 에사드가 [[알바니아어]]로 연설하고 [[에치렘 블로라]]가 통역하여 [[알바니아인]]이 새로운 통치자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전했다. [[스칸데르베우 2세|빌헬름 추 비트]]는 [[알바니아인]]의 신뢰에 감사를 표하고 왕위를 수락하며 [[알바니아 공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파일:Msg019.jpg|왼쪽|섬네일|[[스칸데르베우 2세]]가 디자인한 제복을 입은 에사드 톱타니]] [[스칸데르베우 2세|빌헬름 추 비트]]는 [[1914년]] [[3월 7일]], [[두러스]]에 도착하였고, 에사드는 그가 디자인한 진줏빛 제복을 착용하였다. [[3월 14일]], [[스칸데르베우 2세]]는 [[투르한 퍼르메티]]에게 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한다. [[3월 18일]], [[투르한 퍼르메티]]의 공식적인 선서로 새 내각이 수립되었고, 에사드는 [[알바니아 내무부|내무부]]와 [[알바니아 전쟁부|전쟁부]]의 장관직을 맡는다. 중대한 두 부서의 장관이 된 에사드는 [[퍼르메티 정부]]의 독재자가 되었다. [[1914년]] [[4월 10일]], 에사드의 조카인 [[아메트 조골리]]가 가능한 빨리 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청하자 에사드는 즉각적인 행동을 취한다. [[스칸데르베우 2세]]로부터 독립된 입법 기관인 [[알바니아 국민의회]]가 자신의 권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과 [[마트]] 지역에 수 천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한 [[아메트 조골리]]가 위협이 된다 판단하여 '위험한 사상'을 퍼트리고 있는 그를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스칸데르베우 2세]]가 이에 개입하여 [[아메트 조골리]]의 체포를 막았고, 분노한 에사드는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알바니아]] 중부에 있는 그의 추종자들과 [[코소보]] 및 [[보스니아]]의 난민들을 무장시켜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한다. 또한 그의 요원들은 [[두러스]]의 기독교왕이 무슬림들을 [[소아시아]]로 추방할 것이라 선전하였고, 마침 [[북이피로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이동하자 선전은 효과를 보였다. 한편 [[5월 8일]], 에사드는 [[스칸데르베우 2세]]에게 자신을 둘러싼 음모로 인해 임수를 수행할 수 없어졌다며 사직서를 제출하고 국가의 평화를 위해 해외에 정착하겠다 선언했다. 그러나 [[스칸데르베우 2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계속 등용할 것을 보장했다. [[파일:Dmme03.jpg|섬네일|[[1914년]] 4월, [[두러스]]의 에세드 톱타니의 집 계단에서 에세드 톱타니와 투르한 페르메티 수상]] 에사드의 사병의 무장은 계속되었고, 이것이 [[두러스]]를 향한 공격의 준비임이 [[두러스]]에까지 전해졌다. [[5월 17일]], 에사드의 민병대가 수도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두러스]]를 포위한다. [[5월 18일]], [[국제 헌병대]]의 [[요한 슬라위스]] 소령이 위기감을 느끼고 [[두러스]]의 요새화를 진행하자 에사드는 [[알바니아 전쟁부장관|전쟁부장관]]의 명으로 요새화 작업의 중지를 명령한다. 그러나 갑자기 [[스칸데르베우 2세]]가 해당 결정에 개입하여 [[요한 슬라위스]]에게 [[두러스]]의 요새화 작업을 계속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면서 에사드에게 군대의 해산을 명령했고, 에사드는 부당함을 표출하며 명령을 거부한다. 곧이어 [[스칸데르베우 2세]]는 에사드를 해임하고 동시에 그와 그의 군대를 반란군으로 규정하며 해산시킬 것을 명한다. [[5월 19일]] 새벽, [[국제 헌병대]]의 [[요한 슬라위스]] 소령과 그의 부하들이 에사드의 집을 포위하고 총격을 가한다. [[요한 슬라위스]] 소령은 에사드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으나 에사드는 이를 거부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의 수병이 상륙하여 에사드의 집에 3개의 수류탄을 투척한다. 3개 중 1개가 에사드의 침실에 떨어졌고, 굉음과 함께 에사드는 폭사한다. 그 후 그의 아내가 창문으로 피가 묻은 흰색 목도리를 흔들며 나오며 사건은 일단락된다. == 평가 == == 가족 == 에사드는 총 두 번 결혼했다. 세이리예 볼트와는 3녀를 얻었고, [[1891년]] 이혼 후 샤디예 아지즈트와 재혼했다. 샤디예 아지즈트와 자식은 없었고, [[에디스 더햄]]에 따르면 [[1908년]]에 [[슈코드라]]에서 샤디예 아지즈트를 내쫒고 세 번째 결혼을 했다고 한다. * 나피예 톱타니 * 마흐무데 톱타니 혹은 마흐무디예 톱타니 (? - 1935년 경) - [[사미 브리오니]] ** 오메르 브리오니 혹은 위메르 브리오니 * 페르테페 톱타니 - [[사미 브리오니]] == 같이 보기 == [[분류:알바니아]] [[분류:알바니아의 인물]]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Color (원본 보기) 틀:구분선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무엇보다도 (원본 보기) 틀:엔조 인물 정보 (원본 보기) 틀:엔조 전임후임 상자 (원본 보기) 틀:여백 (원본 보기) 에사드 톱타니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