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 style=" float: right; " | {{여백|0.5em}} {{엔조 전쟁 정보 | 색 = #AD0000 | 글색 = #E5C72E | 테두리색 = #000 | 명칭 = {{large|'''알바니아 농민 봉기'''}} <br /> '''Kryengritja e Shqipërisë së Mesme''' | 사진 = <div style="margin: -4.0px -9.0px">[[파일:Luftetare nga Veriu kunder Haxhi Qamilit.jpg]]</div> [[하지 차밀리]]에 대항하는 북부 [[미르디타]] 자원병 | 날짜 = [[1914년]] [[5월 21일]] - 191_년 _월 __일 | 장소 = [[알바니아 공국]] | 결과 = 반란 진압 | 평화조약 = | 진영명칭1 = | 진영명칭2 = | 아이디1 = 1 | 교전국1 = {{국기 알바니아|알바니아 공국|}} <br /> [[국제 헌병대]] ---- '''지원국''' <br /> {{국기나라 그림|Ensign of Austro-Hungarian civil fleet (1869-1918).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br /> {{국기나라 그림|Flag of Romania.png}} [[루마니아 왕국]] | 교전국2 = 무슬림 반군 ---- '''지원국''' <br /> {{국기나라 그림|Flag of Italy (1861-1946) crowned.svg}} [[이탈리아 왕국]] | 아이디2 = 2 | 지휘관1 = {{국기 알바니아|알바니아 공국|0}} [[스컨데르베우 2세]] <br /> {{국기 알바니아|알바니아 공국|0}} [[투르한 퍼르메티]] <br /> {{국기 알바니아|알바니아 공국|0}} [[프렌크 비버 도다]] <br /> {{국기나라 그림|Prinsenvlag.svg}} [[로데베이크 톰손]] <br /> {{국기 알바니아|알바니아 공국|0}} [[이사 볼레타니]] | 지휘관2 = [[하지 차밀리]] <br /> [[아리프 히치메티]] <br /> [[무사 차지미]] <br /> [[무스타파 은드로치]] | 아이디3 = 3 | 병력1 = 약 5,000명 | 병력2 = 약 20,000명 | 아이디4 = 4 | 피해1 = | 피해2 = }} |} '''알바니아 농민 봉기'''(<small>[[알바니아어]]:</small> Kryengritja e Shqipërisë së Mesme <small>크뤼엔그리티아 에 슈치퍼리서 서 메스메</small>)는 [[1914년]] [[5월 21일]]부터 191_년 __월 __일까지 [[알바니아 공국]]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이다. [[에사드 톱타니]]의 쿠데타 시도를 계기로 [[알바니아 공국]] 체제에 반대하는 오스만주의자들에 의해 발생하였다. [[1912년]], [[알바니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알바니아 독립 선언|독립]]한 이후 [[1913년]] 7월, 열강 대표들이 비준한 [[알바니아법]]에 따라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1913년]] 가을, [[독일]]의 [[빌헬름 추 비트]] 공자를 [[알바니아의 공작]]에 추천됐다. [[1914년]] [[3월 7일]], 사실상 왕위에 오른 [[스컨데르베우 2세]]는 초기 부족한 덕목과 행정 경험으로 여러 실수를 일으켜 내부 정치 상황을 일부 악화시키긴 했으나, [[국제 통제 위원회]]의 조언과 축적된 경험 속에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1914년]] 2월, [[그리스 왕국]]의 지원으로 [[북이피로스]]에서 [[북이피로스 자치 공화국]]이 수립되어 남부 알바니아 지역의 통제권을 잃고, 지속적인 군사적 위협이 직면한다. [[스컨데르베우 2세]]는 [[국제 헌병대]] 및 민병대와 별도의 군사 조직―알바니아 정규군―을 조직하기 원하였으나 [[에사드 톱타니]]의 반대와 국고의 한계로 인해 1개 중대 수준의 후일 [[알바니아 왕실근위대]]가 되는 [[에피다믄 중대]]라 불리는 군사 조직을 조직했다. 농민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1914년]] [[5월 17일]]에 [[에사드 톱타니]]가 시도한 쿠데타였다. 알바니아 중부의 자신의 영지의 주민과 보스니아계 난민들을 무장시킨 후 [[두러스]]를 공격하도록 선동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발각되어 [[5월 18일]], [[제1기 퍼르메티 정부]]에서 해임되었고, 다음날, 체포 도중 폭사하였다. [[5월 21일]], [[에사드 톱타니]]의 사망으로 무장 조직은 중심점을 잃고 많은 이들이 와해되었으나, 일부 열성적인 자들에 의해 [[카바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점차 확대되었고, [[두러스]]는 포위되었다. 초기 반란은 통일된 지도자가 없어 극도로 혼란스러웠으나 이후 [[하치 차밀리]]를 지도자로 세워 조직을 구성했다. 그러나 급진적이고 강압적인 봉기군의 반동적인 행보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고, 진압군은 수도 [[두러스]]를 포위한 봉기군 세력을 돌파해내고 북쪽과 남쪽의 자원병이 남북으로 압박에 오자 마땅히 버티지 못하고 동쪽 산악 지대로 흩어져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19__년]] [[__월 __일]], [[티라나]] 인근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봉기군이 섬멸되면서 양상은 일부 동부 지역에 남은 잔당 토벌로 바뀌었고, 마침내 [[19__년]] [[__월 __일]], [[우더니슈트]] 인근에서 마지막 봉기군이 항복하면서 봉기는 완전히 진압된다. == 배경 == [[1914년]] [[3월 7일]], [[스컨데르베우 2세]]가 [[두러스]]에 도착한다. 이전까지 공무를 담당하던 [[국제 통제 위원회 (알바니아)|국제 통제 위원회]]는 [[3월 18일]], [[알바니아의 수상|수상]]으로 임명된 [[투르한 퍼르메티]]에게 행정권을 넘겼고, [[투르한 퍼르메티]]는 [[스컨데르베우 2세]]에게 공무를 인계했다. 각료협의회 임명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으며, 특히 권력에 대한 야망이 있던 [[에사드 톱타니]]가 [[알바니아 내무부장관|내무부장관]]과 [[알바니아 전쟁부장관|전쟁부장관]]으로 임명된 건에 대해 소란이 있었다. 그 사이 신생 국가는 경제 및 인프라 낙후 외에도 외부적인 여러 위협에 직면했다. 세르비아군은 [[1914년]] 봄부터 여러 차례 국경을 넘어 마을을 공격했다. [[북이피로스]] 지역을 점거하던 그리스군은 [[3월 1일]]까지 철수하라는 열강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2월 28일]], 철수하지만, 그들의 지원을 받는 반란군이 봉기를 일으켜 [[북이피로스 자치 공화국]]을 선포했다. 3월에는 수도인 [[지로카스터르]] 외에도 [[사란더]], [[히마러]], [[델비너]], [[퍼르메트]], [[코르처]]를 포함하는 국가 수립 협상이 시작되었고, 4월에는 [[코르푸 협정]]의 윤곽이 드러났다. 한편 [[4월 10일]], [[국제 통제 위원회 (알바니아)|국제 통제 위원회]]는 [[알바니아의 헌법 (1914년)|헌법]] 초안을 작성했고, 4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집행 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 의회 선거를 요구했다. === 에사드 톱타니의 쿠데타 미수 === [[에사드 톱타니]]는 [[알바니아 국가의회|국가의회]] 구성을 반기지 않았다. 의회의 구성은 그의 군주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방해할 수 있었다. [[알바니아]] 중부의 지지자들을 통해 [[제1기 퍼르메티 정부|정부]]의 영향력 있는 일원으로써 야망을 실현할 세력을 구축하는 동시에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반대파들을 위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14년]] [[4월 10일]], [[에사드 톱타니]]의 조카인 [[아메트 조골리]]가 [[마트족]]의 수장이 되자 그는 [[아메트 조골리]]가 위협이 된다며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아메트 조골리]]는 이전에 [[알바니아 임시 정부]]를 지지한 전적이 있었을 뿐더러, [[알바니아 국가의회|국가의회]] 수립에 호의적이었기에 [[스컨데르베우 2세]]는 그를 신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에사드 톱타니]]의 계획은 실패하였다. [[아메트 조골리]]를 체포하고자 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에사드 톱타니]]는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한다. 자신의 영지의 주민과 보스니아 난민들을 무장시켜 [[시야크]] 인근에 주둔시켰다. 그러나 [[에사드 톱타니]]에 대한 지지는 특이점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더러 [[스컨데르베우 2세]]에게서도 신용을 잃고 있었다. [[5월 8일]], [[에사드 톱타니]]가 사직서를 제출하며 [[스컨데르베우 2세]]의 의심을 해명하면서 그의 신임을 얻는데는 성공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다. 어찌되었든 [[스컨데르베우 2세]]의 신임을 확인한 [[에사드 톱타니]]는 다시금 민병대를 조직하였고, [[5월 17일]], 그 규모는 200명에 달했다. 명분은 북부 해적 토벌이었으나 [[두러스]]의 군사 사령관인 [[요한 슬라위스]] 소령은 도시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고, [[에사드 톱타니]]가 이를 중지할 것을 명령했음에도 [[스컨데르베우 2세]]가 두둔하면서 계획은 진행되었다. [[5월 18일]], [[스컨데르베우 2세]]는 [[에사드 톱타니]]를 해임했고, 그 다음날 새벽, [[에사드 톱타니]]의 체포를 명령한다. [[요한 슬라위스]]와 그의 부하들은 [[에사드 톱타니]]의 집을 포위하고 항복할 것을 요구했으나, [[에사드 톱타니]]는 이를 거절, 그의 안방에서 수류탄이 폭발해 [[에사드 톱타니]]가 폭사하면서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다음날인 [[5월 20일]], [[제1기 퍼르메티 정부]]는 공식적으로 해산하고 [[에사드 톱타니]]의 세력을 제거한 [[제2기 퍼르메티 정부]]를 출범시킨다. 동시에 [[에사드 톱타니]]의 세력원은 정부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정보조직의 조사 결과, [[에사드 톱타니]]의 쿠데타 시도는 [[이탈리아]]가 배후에 있었음이 밝혀져 [[6월 5일]], [[이탈리아]] 장교 몇 명이 [[알바니아]]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음모는 멈추지 않고 이후 봉기의 배후에 서서 봉기를 지원한다. == 경과 == [[에사드 톱타니]]가 제거되며 정치적 상황은 해소될 것 같이 보였으나, [[5월 21일]], [[카바여]]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에사드 톱타니]]가 무장시킨 병력이 그대로 폭동의 주역이 되었다. 다만 [[에사드 톱타니]]가 사망함으로써 쿠데타 병력 절반 가량은 자진 해산하였으나 몇몇 이들에 의해 세력이 구축되어 그대로 [[카바여]]에서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카바여]]의 봉기 소식을 접한 [[두러스]]에서는 사르 대위와 80여 명의 중무장한 병력을 파견하여 봉기를 초기에 진압하고자 했다. 다음날, [[카바여]]에서 북서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서 사르 대위의 병력과 봉기군 일부가 격돌하였다. [[카바여강]]이 흐르고 다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르 대위는 다리 위에 중기관총 진지를 구축했고, 병력을 강을 따라 배치시켰다. 봉기군은 [[에사드 톱타니]]로부터 전해 받은 신예 이탈리아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지형과 화력, 전문적인 우위에 숫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사르 대위 측의 피해는 2명 부상이 전부였던 반면, 봉기군은 수 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더불어 수 십 정의 신예 소총을 노획했다. [[카바여]]을 시작으로 봉기는 [[티라나]]와 [[크루여]] 등 [[에사드 톱타니]]의 세력권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카바여강]]에서의 전투는 봉기군의 대패로 끝났으나 수 백의 봉기군은 [[카바여]] 도심에 숨어 시가전을 벌였고, 그 사이 봉기군은 [[엘바산]]을 공격한다. [[엘바산]]에는 약 500명의 [[아치프 엘바사니]]의 병력이 있었고, 곧이어 전투가 발생한다. 한편, [[티라나]]와 [[크루여]]에서 봉기한 3,000명의 봉기군 중 2,000명이 [[아메트 조골리]]의 [[마티족]] 세력으로 진격해 200명 가량의 조골리의 병력이 맞서 싸우지만 패배한다. [[아메트 조골리]]는 패잔병 백여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프렌크 비버 도다]]와 [[이사 볼레타니]]의 병력과 합류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이들은 남하하여 [[라치]]에서 추격 부대를 격파한다. 농민 봉기군은 초기에는 통일된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점차 [[하치 차밀리]]를 중심으로 [[아리프 히치메티]], [[무사 차지미]], [[무스타파 은드로치]] 등이 봉기군을 이끈다. 또한 [[카바여]], [[티라나]], [[크루여]]에서 봉기한 4,500명 가량의 봉기군은 [[엘바산]]을 함략시킬 무렵에는 일 만 여명까지 불어났다. 이들은 여러 목적을 가졌으나 서구의 근대적 변화에 대한 반발과 정치적인 반동주의인 하지차밀리스트(<small>[[알바니아어]]:</small> haxhiqamilistët <small>하지차밀리스터트</small>) 혹은 둠바비스트(<small>[[알바니아어]]:</small> dumbabistët <small>둠바비스터트</small>)라 불리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복구시켜야 한다는 친오스만적 반동주의자가 중심이 되었다. 그들의 불만은 지주들로부터 농민을 해방시키려고 하지 않은 부처에 대한 불만과 교사가 성직자보다 많은 돈을 받고 그가 가르키는 것들에 대한 반발, 수 백 년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대한 충성에 기원했다. [[시야크]]를 향한 농민 봉기군의 공격이 수차례 격퇴되고 [[카바야]]가 정부군에 함략되면서 [[두러스]]를 둘러싼 모양새이던 세태는 타파되었다. 또한 [[라치]]에서 [[이사 볼레타니]]와 [[프렌크 비버 도다]]의 병력이 봉기군을 격파하고 [[마티]]를 해방하면서 봉기 세력이 [[스컨데르베우 산맥]] 동쪽으로 개척하는 것을 막았다. 또한 [[카바야]], [[티라나]], [[크루여]] 등 봉기의 중심지가 아닌 각지에서 발생한 소규모 봉기는 각 지역에서 모집된 민병대에 의해 대부분 격퇴되었다. 그러나 [[엘바산]]에서 500명의 방어군이 전멸하다시피 저항했으나 함략되고 [[슈쿰빈강]]을 따라 동쪽으로 봉기 세력이 확장되기도 하는 등 일진일퇴의 양상을 맞이한다. 6월 중순, [[데볼강]]을 따라 [[코르처]]까지 세력을 늘리던 봉기군을 [[베라트]]와 [[블로러]]에서 합류한 지원군이 [[슈터르멘]]에서 기습한다. 정부군의 병력 수는 약 600명인데 비해 봉기군의 병력은 수 천 명에 달했던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봉기군은 패닉 상태에 빠져 제대로된 대응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정부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대열은 빠르게 와해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슈터르멘]] 마을 내로 들어가 저항했고, 몇몇은 패퇴한 잔당을 재조직해 유의미한 무리를 이루는 등 일망타진에 실패한다. 더군나 유의미한 무리는 동쪽과 남쪽의 산과 숲으로 들어가 저항하는 등 상황은 점차 게릴라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분류:무엇보다도]] [[분류:알바니아]]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Color (원본 보기) 틀:KIA (원본 보기) 틀:Large (원본 보기) 틀:Resize (원본 보기) 틀:국기 알바니아 (원본 보기) 틀:국기나라 그림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나라자료 알바니아 (원본 보기) 틀:무엇보다도 (원본 보기) 틀:알바니아 공국 (원본 보기) 틀:엔조 전쟁 정보 (원본 보기) 틀:여백 (원본 보기) 알바니아 농민 봉기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