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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국 제95대 내각총리대신 노다 요시히코 野田佳彦 | Yoshihiko Nod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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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57년 5월 20일 (69세) | ||||||||||||||||
| 치바현 후나바시시 | |||||||||||||||||
| 현직 | 홈 프로텍터 | ||||||||||||||||
| 재임기간 | 제93대 내각총리대신 | ||||||||||||||||
| 2017년 8월 18일 ~ 2017년 10월 18일 |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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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생애
1957년 5월 20일 치바현 후나바시시에서 태어났다. 도야마현 출신 6남매 중 막내였던 아버지와 치바현의 농가에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을 접하며 처음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1976년 노다는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이 때 그는 저널리스트 타치바나 타카시를 동경해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어 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신자유클럽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 1977년 참의원 선거 때는 전단지를 배포하기도 했다. 같은 해 TBS의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해 우승, 미국 여행권을 받기도 했다.
1080년 3월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노다 요시히코는 NHK와 요미우리 신문 모두 입사 내정을 받고도 마쓰시타 정경숙에 입숙해 1기생이 된다. 이 때 마쓰시타 정경숙의 평의원 중 한 명이던 호소카와 모리히로, 훗날 민주당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마에하라 세이지 등 훗날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이들과 만난다.
민주당 입당 전
1992년 전 구마모토현지사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일본신당을 창당하자 고이케 유리코, 야마다 히로시와 함께 가담한다. 이듬해 치러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구) 치바 1구에 출마해 1위로 초선 의원이 된다. 이 선거에서 일본신당은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와 함께 비자민 연립정권을 수립한다.
호소카와 내각, 하타 내각이 모두 단명하며 비자민 연립정권이 무너진 뒤 신진당이 설립되었고, 노다 역시 참가한다. 이후 첫 소선거구제로 치러진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치바 4구에 출마한다. 그러나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각 비례대표 블록별 중복 입후보를 한 명에게만 허용하던 신진당의 방침으로 득표 1위였던 자민당의 다나카 쇼이치에게 105표 차이로 아쉽게 지고도 석패율제 부활에 실패했다. 이 당시 노다의 석패율은 소선거구 선거에서 네 번째로 높았다.
입당 후 총리 취임까지
낙선 후에는 신진당을 탈당, 1998년 민주당에 입당한다. 신진당을 이탈한 시기에는 호소카와 전 총리의 지원을 받았다. 이후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치바 4구에 출마해 당선되며 국회로 복귀한다. 같은 해 민주당 총무국장에 취임했고, 이듬해 민주당의 그림자 내각인 다음 내각의 차기 행정개혁·규제개혁 담당대신에 임명된다.
2002년 9월 민주당 대표 선거를 앞두고 간 나오토와 하토야마 유키오의 이른바 하토칸 체제에 위기감을 느끼고 마에하라 세이지, 마쓰자와 시게후미, 가와무라 타카시 등 중진·소장파 의원들과 제2기 민주당을 만드는 유지회를 창설했다. 대표 선거에서 누구를 후보로 내세울 것인지 난항을 겪다 노다가 출마하기로 정리된다. 비록 하토야마 대표의 3선을 저지하진 못 했으나 대표 선거를 통해 체급을 높이며 위협적인 대항마로 입지가 높아진다.
하토야마 유키오는 위협적이었던 노다를 품기 위해 정책조사회장을 제안했으나 노다는 하토야마를 지지하며 사퇴한 나카노 칸세이의 간사장 임명을 두고 논공행상이라 비판하며 정책조사회장 임명을 거부한다. 같은 해 12월 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하고, 2004년 민주당 그림자 내각의 차기 재무대신으로 임명된다.
2005년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후보에게 고전했으나 944표 차이로 신승하며 4선 의원의 고지에 올라선다. 당시 치바현 지역구 민주당 당선자는 노다 요시히코 한 명 뿐이었다. 총선 패배 이후 오카다 가쓰야 후임으로 선출된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 체제에서 국회대책위원장에 유임됐으나 2006년 2월 나가타 히사야스 의원이 일으킨 호리에 메일 문제의 파장이 커지며 나가타를 옹호하던 노다 요시히코는 국회대책위원장에서 물러난다.
후일 이를 두고 "일반적인 기업이라면 갖추고 있어야 하는 위기관리 능력과 통치 능력이 부재했다"며 "당 집행부의 친목 집단화가 정보 독점을 초래했다"고 회고했다. 더불어 한 때 화제회에 속했던 마부치 스미오의 증언에 의하면 노다와의 술자리에서 "여러 일이 있었지만 무덤까지 가져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이 사건의 파장으로 인해 2008년 민주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시도했으나 호리에 메일 문제에 관한 비판을 받으며 추천인 20명을 확보하지 못해 출마에 실패한다.
2009년 정권교체 성공 후 오자와 내각이 출범한 뒤 노다를 방위대신에 임명하자는 목소리가 나왔으나 연립을 구성하는 사민당이 그의 매파적 성향을 우려하며 보류되고 대신 특명담당대신에 임명된다. (오자와 내각 부분 생략)
(오카다 가쓰야 내각 부분 생략)
2017년 오카다 가쓰야 총리가 차기 대표 선거 불출마 의사를 표명하자 민주당 대표 선거에 출마를 결심한다. 노다 요시히코가 센고쿠 요시토 내각관방장관과 오카다 가쓰야 총리의 지지를 받은 한편 반 오자와 노선이 노다를 중심으로 세워지자 오자와 이치로 전 총리를 비롯한 오자와 파벌이 가이에다 반리를 옹립한다. 한편 노다의 소비세 증세 노선에 대한 우려를 느낀 일부 반 오자와 성향 의원들이 마에하라 세이지를 대표 후보로 내세우자는 주장을 폈고 이에 마에하라가 출마를 선언한다.
민주당 대표 당선과 총리
차기 총리감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던 마에하라의 당선이 유력했으나 재일한국인 정치자금 문제 등으로 당내 인망을 잃은 마에하라가 3위로 미끄러졌고, 가이에다와 함께 결선 투표를 거친 끝에 반 오자와 세력의 몰표를 받으며 민주당 대표로 선출된다. 여당 대표 선거에서 결선투표를 거쳐 역전승을 거둔 경우는 1956년 이시바시 단잔 이후 61년 만이었고, 민주당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중참 양원에서 열린 내각총리대신 지명투표에서 제95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선출된다.
| 오카다 가쓰야의 후임 대표로 선출된 노다 요시히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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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로 취임하며 임기 초 허니문 효과로 높은 지지율을 얻었으나 외국인 정치자금 문제가 또 터지며 다시 한 번 위기를 겪게 됐다. 노다 요시히코 역시 재일한국인 두 명에게 30만 엔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처벌 시효는 이미 지났으나 이 보도로 인해 도덕적인 타격을 입었다.
대표 선거 당시 일부가 우려한 대로 증세 노선을 펼치며 소비세 인상안을 강행했으며, 오자와 이치로 전 총리를 비롯한 증세 반대파가 노다를 비판하며 증세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당내 최대 계파인 오자와 그룹이 증세에 반대하며 소비세 인상이 불투명해지자 노다 총리가 아베 신조 총재와 회동하며 자민당과의 연립정권 추진설이 불거지기도 했으나 무산됐다. 증세를 두고 난맥상이 이어지자 지지율이 20%대까지 폭락했다.
자민당이 증세에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자 거듭 증세를 압박하던 노다 총리는 2017년 9월 10일 당수토론에서 기어이 중의원 해산을 확답하는 대형 사고를 쳐버린다. 아베 신조 총재와의 당수토론 중 "16일에 해산하겠다"며 해산을 밀어붙이고, 기어이 진짜로 해산해버리며 취임 한 달여 만에 선거 정국에 들어간다.
당초 민주당과 자민당의 접전 정도로 예상됐으나, 에다노 아오이 의원의 공인 거부를 시작으로 당내 좌파 성향 의원들에게 공인 거부 및 이당 권고를 내리며 당은 한 순간에 혼란에 빠져버린다. 당초 대표 선거 당시 그를 지지했던 오카다 가쓰야 전 총리가 공개적인 비판을 가하는 한편 오자와 파벌도 집단 탈당, 자유당을 창당한다. 공천 배제당한 의원들은 사민당에 가담하며 정국이 혼돈에 빠진다.
결국 자민당, 민주당, 자유당, 사민당 4파전으로 갈려버린 선거전에서 민주당이 00석에 그치며 참패한다. 그러나 노다 대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민당과 손잡을 수 있어도 사민당과의 연립정권은 상상도 할 수 없다"며 "예비 사민당원을 공천에서 배제한 건 잘못되지 않았다"는 망언을 쏟아냈다. 백미는 공천 배제 및 이로 인해 일어난 탈당 엑소더스에 대해 "개혁은 원래 뼈를 깎아야만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명언을 발사하는 장면.
민주당에서의 제명, 그 후
결국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노다 대표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하는 데 이어 당내 징계 절차를 밟아 제명이 결정된다. 일말의 연민이나 동정심도 사라지게 만드는 퇴장이었기 때문인지 노다를 따르는 조직도 없어졌으며, 본인이 회장이던 화제회에서도 내쫓기듯 나왔다. 이후 정치적 입지도 매우 좁아지며 사실상 없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제49대 중의원 의원 총선거, 제50대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추천은 물론 지지조차 받지 못했으나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으며 사실상 노다를 지지해 연이어 당선되며 정치적 생명을 연장했다. 다만 민주당 내부 관계자가 "도의적으로 잠시 호혜를 베푸는 것일 뿐"이라는 인터뷰를 내는 등 수시로 조롱당했으며, 결국 제51대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후보를 공천하며 자민당 후보에게도 밀려 낙선한다. 초라한 결말과 함께 다시 한 번 일말의 연민이나 동정심도 사라지게 만드는 퇴장을 보여줬다.
소속 정당
| 소속 | 기간 | 비고 |
|---|---|---|
| 무소속 | 1987 - 1992 | 정계 입문 |
| 일본신당 | 1992 - 1994 | 입당 |
| 신진당 | 1994 - 1997 | 합당 |
| 무소속 | 1996 - 1998 | 낙선 후 탈당 |
| 민주당 | 1998 - 2017 | 입당 |
| 무소속 | 2017 | 제명 |
선거 이력
|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 1993 |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치바 4구 | 일본신당 | 175,671 (20.54%) | 당선 (1위) | 초선[3] |
| 1996 |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치바 4구 | 신진당 | 73,687 (31.94%) | 낙선 (2위) | |
| 2000 |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민주당 | 116,156 (47.27%) | 당선 (1위) | 재선 | |
| 2003 |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5,522 (55.77%) | 3선 | |||
| 2005 |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9,834 (44.90%) | 4선 | |||
| 2009 |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62,153 (53.64%) | 5선 | |||
| 2012 |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63,334 (57.28%) | 6선 | |||
| 2014 | 제4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9,193 (51.69%) | 7선[4] | |||
| 2017 | 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000,000 (00.00%) | 8선 | |||
| 2020 | 제4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무소속 | 000,000 (00.00%) | 9선 | ||
| 2024 | 제5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000,000 (00.00%) | 10선 | |||
| 2025 | 제5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000,000 (00.00%) | 낙선 (3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