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빌레펠트}}[[분류:빌레펠트]][[분류:제2차 벨트크리그/전투]] {{제2차 벨트크리그/연표 (빌레펠트)}}[[분류:제2차 벨트크리그]] {| class="wikitable" style="float:right; max-width:450px; border:2px solid #536349; color:#000;" ! colspan="3" style="width:450px; background:#536349; color:#fff;" | {{large|김제 전차전}}<br>Die Schlacht von Gimje<br>金堤戦闘 |- ! colspan="3" | [[제2차 벨트크리그 (빌레펠트)|제2차 벨트크리그]] 중 [[전광 작전]]의 일부 |- | colspan="3" align=center | <div style="margin: -5px -9px">[[파일:땅크전.webp|450px]]</div> |- ! colspan="3"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날짜 |- | colspan="3" style="width:450px; background:#; color:#; text-align:center" | 1943년 11월 1일~1943년 11월 3일 |- ! colspan="3"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장소 |- | colspan="3" style="width:450px; background:#; color:#; text-align:center" | [[대한국 (빌레펠트)|대한국]] 전라북도 김제시 |- ! colspan="1" Width="20%"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교전국 | colspan="1" width=40% style="background:#; color:#; vertical-align:top;" | [[파일:동방의 카이저라이히.svg|24px]] [[대한국 (빌레펠트)|대한국]] | colspan="1" width=40% style="background:#; color:#; vertical-align:top;" | [[파일:일본공산당 당기.webp|24px]] [[일본인민공화국]] |- ! colspan="1" Width="20%"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지휘관 | colspan="1" width=40% style="background:#; color:#; vertical-align:top;" | [[파일:동방의 카이저라이히.svg|24px]] 권준<ref>7기동군단장</ref><br>[[파일:동방의 카이저라이히.svg|24px]] 류경수<ref>105 전차사단장 대리</ref><br>[[파일:동방의 카이저라이히.svg|24px]] 신철휴<ref>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ref><br>[[파일:동방의 카이저라이히.svg|24px]] 박일우<ref>20전차사단장</ref><br>[[파일:동방의 카이저라이히.svg|24px]] 이종건<ref>제2공정사단장</ref> | colspan="1" width=40% style="background:#; color:#; vertical-align:top;" | [[파일:일본공산당 당기.webp|24px]] 요시다 신<ref>기갑군단장</ref><br>[[파일:일본공산당 당기.webp|24px]] 호시노 도시모토<ref>1전차사단장</ref><br>[[파일:일본공산당 당기.webp|24px]] 오카다 다스쿠<ref>2전차사단장</ref><br>[[파일:일본공산당 당기.webp|24px]] 토아먀 히로미치<ref>교도전차여단장</ref><br>[[파일:일본공산당 당기.webp|24px]] 오자키 요시하루<ref>19보병사단장</ref> |- ! Width="20%"; colspan="1"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병력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44,200명<br>전차 208대<br>자주포 72문<br>장갑차 206대<br>포 152문<br>대전차포 17문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45,920명<br>전차 256대<br>포전차 32문<br>장갑차 225대<br>포 72문<br>속사포 52문 |- ! Width="20%"; colspan="1"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피해규모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전사 1,052명<br>부상 2,785명<br>전차/자주포 92대<br>장갑차 51대<br>각종 포 52문<br>항공기 24대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전사 1,281명<br>부상 3,052명<br>전차/포전차 145대<br>장갑차 81대<br>각종 포 85문<br>항공기 18대 |- ! colspan="3"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결과 |- | colspan="3" style="width:450px; background:#; color:#; text-align:center" | '''대한국의 승리''' |- ! colspan="3"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영향 |- | colspan="3" style="width:450px; background:#; color:#; text-align:center" | 일본의 전라도 전선 붕괴 |- |} {| class="wikitable" style="float:left; border: 2px solid #536349; max-width:450px;" | colspan="1" style="background-color:#536349; border:1px solid #536349; text-align: center;" | <div style="margin: -4px -9px">[[파일:땅크전2.jpg|600px]]</div> |- | colspan="1" style="color:#FFF; background-color:#536349; text-align: center; width: 450px; font-size: 10pt;" | '''105 전차 사단의 221호차 '대호'''' |- |} {{-}} {{목차}} =개요= {{인용문1|지금까지 그런 규모의 대열은 본 적 없었다. 대지와 창공이 인간의 전쟁기계로 가득 메워진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가? (...)큐폴라 창이 흐릿해져 닦고 보니 흐릿해진 것은 내 눈이었다. 절로 울음이 나왔다. 극도의 공포 속 한 인간은 무력해질 수 밖에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반쯤은 큐폴라를 부여잡고 서있는 수준이었지만, 승무원들은 울부짖으며 전투에 임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손장래 저서 <기갑병> 中.}} 김제 전차전은 [[제2차 벨트크리그]] 도중 1943년 11월 1일 부터 3일까지 [[대한국 국군 (빌레펠트)|대한국 국군]]과 일본 인민군 간의 김제 평야 일대에서 전개된 전투다. 한국군의 [[전광 작전 (빌레펠트)|공세]]를 저지하기 위한 일본군의 역습에서 비롯되었으며, 양측 도합 400대<ref>자주포까지 합하면 거의 600대에 육박한다.</ref>가 넘는 전차가 투입된 '''아시아 사상 최대의 전차전'''이었다. 이만한 가공할만한 전력이 투입된 것은 유럽전선에서도 [[리사 전투 (빌레펠트)|리사 전투]]나 [[론세 전차전 (빌레펠트)|론세 전차전]] 정도 밖에 없다. =서론= {{youtube|q7LQmhg_A2c}} 1943년 말 일본군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대성공으로 끝난 남방작전은 막대한 점령군을 필요로 하며 일본군의 역량을 소모시키고 있었고, 창더 전투에서의 격전은 더 이상 중국군이 예전만 같지 않다는 것을 실감 시켰다. 태평양에서는 미군이 서서히 전세를 뒤짚고 절대방위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전선에서 수세에 밀리고 있던 와중 김제 전차전은 사실상 일본군의 마지막 발악이었다.<ref>물론 전세 반전을 위한 노력은 패망 직전까지 지속되었으나 대부분 작전 계획 단계 부터 이미 파국이 예견되었다. 그나마 대륙타통작전은 겉으로 보기엔 전선을 크게 돌파하고 중국을 벼랑까지 몰아붙힌 것 처럼 보였으나, (애초에 작전 목표 자체가 망상에 가깝긴 했지만)본래에 작전 목표에 비하면 턱도 없었고 확보한 점령지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채 중국군의 공세에 다시 밀려나기 시작했다.</ref> 일본군은 최소한 삼남 지방만큼은 사수해야했으며, 만약 한반도의 모든 지역에서 축출된다면 중국과 동남아를 향한 보급선이 방해받으므로 더 이상 전쟁 수행이 불가능 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전북 부터 경북까지 걸쳐 형성된 방어선이 이타가키선<ref>방어선을 계획한 17방면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이름을 땄다.</ref>이었으며 이 방어선의 붕괴는 사실상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전광 작전 (빌레펠트)|전광 작전]]이 전개되면서 전북 지역의 방어선은 맥없이 무너졌다. 수십만의 한국군이 돌파구를 통해 방어선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왔고 그 선봉에는 2개 전차사단, 1개 공정사단, 1개 기보사단으로 구성된 제7기동군단이 있었다. 이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배치된 일본의 '기갑군'은 일본군의 최대 기갑전력이었으며 한국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역습을 가한 곳은 한반도 최대의 평야 김제 평야였다. 3일 동안 김제에서는 양측 600대에 달하는 기갑전력이 맞부딪히며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양측 모두 손꼽는 정예병력만을 동원하였으므로 한치 물러섬도 없는 호각이었다. 하늘에서는 압록강 방공전 이후 역량을 키운 한국 공군과 일본 공군 간의 수십대가 넘는 전투기의 도그파이팅이 펼쳐졌다. 그러나 이틀째 진행된 공세에서 일본군은 김제시 중심부를 앞에 두고 주저앉았으며 그날 밤 한국군의 역습에 좌익이 무너지면서 삼일째 정읍으로 철수했다. 이 삼일 간의 격전에서 일본군은 한국군의 발전된 역량을 여실히 체감했다. 특히 한국 전차군의 역량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 전투에서 19식 3호 전차 흑표 중전차는 평균적으로 네대의 일본 전차를 격파했고 많으면 10대가 넘었다. 흑표 쇼크가 절정에 이르면서 일본 전차병들은 흑표와의 교전을 피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 전투 이후 일본은 다시는 이만한 규모의 전차를 단일 전투에 동원할 수 없었다. 역습이 실패하면서 전라도 전선은 끝장났다. 잔존 일본군은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며 경상도로 후퇴하기 바빴고 노령산맥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하여 전남 일대라도 사수하려던 17방면군은 그대로 한국군의 공세에 찢겨버렸다. 전선이 완전히 붕괴하는 와중에 대본영은 경상도 공세를 저지하는 1 방면군의 선전에 고무되어 [[제1차 벨트크리그 (빌레펠트)|지난 전쟁]]과 같이 경상도 일대만큼은 사수 할 수 있으리라 낙관적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전라도가 무너진 와중에 북쪽과 서쪽에 걸쳐 경상 수복을 위해 대전열을 이루기 시작한 한국군을 상대로 후퇴할 곳 없는 대한해협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있었고, 전라도가 수복되며 활동량이 급증하기 시작한 한국 해군에 의해 보급선이 방해 받기 시작했다. 결국 7개월 후 신멸 작전이 전개되며 조선파견군은 완전히 끝장났다. = 배경 = 전광 작전이 시작되면서 한국군은 여러 방향으로 진격했다. 제5 공정사단이 금강의 여러 교량들을 향해 강하하여 돌파구를 마련했고, 제1 해병사단이 공정대대들을 앞세워 군산 일대에 상륙했다. 금강을 중심으로 했던 이타가키선은 대전이 함락되며 일순간에 무너졌다. 일본군은 예비대를 동원하여 한국군의 돌파구를 서둘러 차단하려 했지만 제7기동군단의 선봉인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가 이리를 점령하며 오히려 병력이 통째로 포위될 위협에 처했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일본군의 작계는 통째로 어그러졌다. 대전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1방면군의 병력 상당수가 추풍령을 거쳐 경상도로 후퇴하면서 전라도 방면의 병력이 분산됐고, 남하하는 한국군을 상대로 1방면군의 잔존 병력과 2선급 병력인 17방면군으로 막아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만약 방어선이 무너진다면 추풍령으로 후퇴하여 경상도로 향하는 한국군을 저지하기로 되어있던 1전차사단 또한 작계가 어그러지며 그러지 못했다. 결국 대본영은 만경강 일대에 새 방어선을 구축하여 한국군을 저지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또한 전략 예비대로 차출되어있던 기갑군 전체를 북상 시켜 만경강 돌파를 시도하는 한국군을 상대로 일대의 회전을 걸어볼 요량이었다. 이는 한국군의 경북 공세가 시원찮은 시점에서 전라도 일대만 어떻게 막아보면 해볼만 하다는 것이 주요 판단 요인이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군은 당초 전광 작전의 초기 작계가 너무 낙관적이었음을 깨달았다. 경북 북부에서 진행되는 조공은 안동 일대에서 막히며 주저앉았고, 추풍령을 향한 공세는 제1야전군을 초기 단계에서 포위 섬멸하지 못하면서 일본군의 잘 구축된 요새선을 맞닥뜨려야 했다. 그 와중에 만경강 일대로 일본군이 새 방어선을 형성하며 기갑군까지 북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대한국 원수부 (빌레펠트)|원수부]]는 제7동군단과 제1야전군의 병력들을 추풍령 공략에 추가 배치 시키는 것 보단 당초 작계대로 전라도로 남하하는 선택을 했다. 전라도 방면의 공세가 재개 되면서 일본군이 만경강 방어선을 형성하기 전에 제2 공정사단이 김제 일대에 강하하면서 순식간에 김제시 중심부와 만경강의 교량들을 확보했다. 그즈음에 정읍에 집결하고 있던 일본 기갑군 병력들은 제7기동군단 병력들이 제2공정사단이 확보한 돌출부를 통해 진입하기 전에 요격하기 위해 제2 공정사단을 향한 총공세에 나섰다.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 (원본 보기) 틀:DarkMode (원본 보기) (보호됨)틀:Darkmode (원본 보기) 틀:Large (원본 보기) 틀:Resize (원본 보기) 틀:Theme (원본 보기) 틀:Youtube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목차 (원본 보기) 틀:빌레펠트 (원본 보기) 틀:인용문 (원본 보기) 틀:인용문1 (원본 보기) 틀:제2차 벨트크리그/연표 (빌레펠트) (원본 보기) 김제 전차전 (빌레펠트)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