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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총선을 앞두고 자유당 진보파의 루스벨트, 인민당-진보당 연합의 [[조지 W. 노리스 (제국)|조지 노리스]], 사회당의 [[노먼 토머스 (제국)|노먼 토머스]]는 시카고에서 당을 통합하기로 약속했다. 자유당 내에서 4당 통합 안건이 앨 스미스의 방해로 인해 부결되자, 루스벨트가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집단 탈당해 통합 참여를 타진했다. 그렇게 1932년 시카고에서 열린 [[1932년 진보당-미국사회당 전당대회 (제국)|진보당-사회당 전당대회]](PSNC)에서 4개의 세력이 통합안에 서명하며 농민노동당이 탄생했다. | 1932년 총선을 앞두고 자유당 진보파의 루스벨트, 인민당-진보당 연합의 [[조지 W. 노리스 (제국)|조지 노리스]], 사회당의 [[노먼 토머스 (제국)|노먼 토머스]]는 시카고에서 당을 통합하기로 약속했다. 자유당 내에서 4당 통합 안건이 앨 스미스의 방해로 인해 부결되자, 루스벨트가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집단 탈당해 통합 참여를 타진했다. 그렇게 1932년 시카고에서 열린 [[1932년 진보당-미국사회당 전당대회 (제국)|진보당-사회당 전당대회]](PSNC)에서 4개의 세력이 통합안에 서명하며 농민노동당이 탄생했다. | ||
1932년 | [[1932년 미국 총선 (제국)|1932년 총선]]에서 인기있는 주지사 루스벨트를 내세운 신생정당 노동당은 381석을 획득, 93석의 보수당과 23석의 자유당을 누르고 명실상부한 미국 내 최대정당으로 발돋움한다. 루스벨트는 취임 직후 사회보장법, 공공사업진흥법, 노동관계법, 테네시 유역사업법, 글래스-스티걸법 등 미국의 경제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혁신적인 입법안을 통과시켰고, 그의 지지율은 90%대에 육박했다. 이러한 루스벨트의 개혁안을 "뉴딜정책"이라고 부르며, 이 시기의 농민노동당을 "뉴딜노동당"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 ||
1934년 총선에서 421석을 획득하며 압도적으로 승리한 루스벨트는 더욱 가열차게 뉴딜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재임 2기 도중 대법원 판사 임명건으로 남부 보수파가 반발하며 당이 분열되기 시작했고, 루스벨트의 지지율은 하락했다. 그럼에도 보수당의 지리멸렬한 선거전략과 루스벨트의 개인기 덕분에 루스벨트는 1938년 총선에서도 압도적인 3선에 성공했다. 때맞춰 터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 경기가 유례없는 호황을 맞으며 루스벨트의 지지율은 다시 상승했고, 1942년 총선에서 유례없는 4선 총리가 되었다. 루스벨트는 자유당 출신의 [[웬델 윌키 (제국)|웬델 윌키]]를 부총리로 하는 거국내각을 수립해 2차 대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였으며, 1950년 노환으로 사망할때까지 무려 '''18년간 5선 총리직'''을 맡으며 미국 역사상 최장수 총리로 남았다. | 1934년 총선에서 421석을 획득하며 압도적으로 승리한 루스벨트는 더욱 가열차게 뉴딜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재임 2기 도중 대법원 판사 임명건으로 남부 보수파가 반발하며 당이 분열되기 시작했고, 루스벨트의 지지율은 하락했다. 그럼에도 보수당의 지리멸렬한 선거전략과 루스벨트의 개인기 덕분에 루스벨트는 1938년 총선에서도 압도적인 3선에 성공했다. 때맞춰 터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 경기가 유례없는 호황을 맞으며 루스벨트의 지지율은 다시 상승했고, 1942년 총선에서 유례없는 4선 총리가 되었다. 루스벨트는 자유당 출신의 [[웬델 윌키 (제국)|웬델 윌키]]를 부총리로 하는 거국내각을 수립해 2차 대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였으며, 1950년 노환으로 사망할때까지 무려 '''18년간 5선 총리직'''을 맡으며 미국 역사상 최장수 총리로 남았다. |
2024년 4월 20일 (토) 17:52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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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진보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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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er-Labor Part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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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명칭 | 농민노동당 |
약칭 | FLP |
슬로건 | Build Back Better 더 낫게 재건하자 |
전신 | 인민당, 진보당, 미국사회당, 자유당 (일부) (1932년 대회를 통해 4당 통합) |
창당일 | 1932년 7월 2일 |
당수 | 개빈 뉴섬 / 초선 (하원, 69대) |
사무총장 | 마크 켈리 / 재선 (상원, 77~79대) |
상원 원내총무 | 척 슈머 / 5선 (70~79대) |
하원 원내총무 | 짐 클라이번 / 8선 (62~69대) |
이념 | 사회민주주의 사회자유주의 진보주의 |
스펙트럼 | 중도 ~ 중도좌파 |
상원의원 | 50석 / 125석 (40.0%) |
하원의원 | 173석 / 500석 (34.6%) |
주지사 | 24석 / 58석 (41.4%) |
당색 | 빨강 (#CC0000) |
초록 (#436F4D) | |
국제조직 | 진보동맹 |
청년조직 | 청년 농민노동당 (YFLP) |
전국 대학생 농민노동연합 (NCFLC) | |
여성조직 | 여성 농민노동당 (FFLC) |
당원 수 | 1,517,845명 (2024년 1월) |
공식 사이트 | |
SNS |
개요
미국의 정당이다. 미국의 양당제 보혁구도에서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현재 제1야당의 지위에 있다.
1932년 진보당-미국사회당 전당대회를 통해 진보당과 미국사회당을 필두로 한 여러 농민, 노동자 조직이 참여하여 창당되었다. 창당 이후 치루어진 첫 총선인 1932년 선거에서 대공황 책임론으로 지지율이 하락한 보수당을 대신해 집권하였으며, 1952년까지 20년 연속으로 집권하며 당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존슨, 베이, 고어 등 여러 총리를 배출하면서 현재까지 보수당과 함께 좌우 양당 구도를 구축하고 있다.
현재 당수인 개빈 뉴섬을 중심으로, 급진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당내좌파부터 제3의길을 추구하는 우파까지 스펙트럼이 보수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으며, 블루칼라와, 대도시 거주자, 고학력자, 유색인종, 청년층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당명
- 영어
- 미국식 영어: Farmer-Labor Party (FLP)
- 영국식 영어: Farmer-Labour Party (FLP)
- 스페인어: Partido Laborista-Campesino (PLC)
- 프랑스어: Parti paysan-travailliste (PPT)
- 중국어
- 간체자: 农工党
- 번체자: 農工黨
- 표준 중국어 발음
- 한어병음: Nónggōngdǎng
- 주음부호: ㄋㄨㄥˊ ㄍㄨㄥ ㄉㄤˇ
- 한국어: 농민노동당
역사
창당 배경
본래 미국은 농민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유당과 도시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당의 양당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남북전쟁 이후 자유당 내에서 좌익대중주의 성향의 잭슨주의자가 쇠락하고, 이들을 계승한 버번주의자들이 부상하면서 자유당은 점차 재정보수주의적 성향을 지니게 된다. 1890년대에 들어서는 자유당과 보수당 양당의 정책이 무역관세를 제외하면 사실상 다를바가 없어졌다.
이러한 불만 속에서, 독점자본을 타도하는 농민의 정당인 인민당과 사회주의 정당 미국사회당이 창당된다. 또한 자유당 역시 1896년 전당대회를 통해 보수파가 축출되고 좌익대중주의를 표방하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세력이 부상했다. 한편, 공화당에서도 산업주의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 반발하는 세력이 떨어져나가 진보당을 창당했다. 진보당, 인민당, 자유당, 사회당은 이른바 좌익 4당 연합을 맺고 1896년부터 1920년까지 4년의 기간을 제외한 기간동안 장기집권하였다.
허나 4당의 성향이 약간씩 달랐고 이익이 상충하는 부분이 많아 갈등하는 일이 잦았으므로, 이들의 연립정권은 다소 위태로웠다. 1918년 각 정파의 이권을 최대한 조정하려고 노력한 우드로 윌슨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4당 연정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1920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500석 중 411석을 차지한 반면 좌익 4당은 89석만을 획득하는 참패를 당했다. 1920년대 내내 보수당이 일당우위제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며 장기집권하자, 좌익 정당을 통합해야한다는 요구가 대두되었다.
루스벨트 총리 시대
1928년 총선에서 앨 스미스 뉴욕주지사를 총리 후보로 내세운 자유당은 71석을 얻는데 그치며 참패하면서, 사실상 진보정당의 주도권을 유지할 수 없음이 명확해졌다. 앨 스미스의 후계자였으나 공직임명 문제로 인해 스미스와 결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신임 뉴욕주지사는 스미스보다 더욱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표명하며 자유당의 차기 지도자로 떠올랐다. 1929년, 대공황이 찾아옴에 따라 후버 내각의 지지율이 하락했고, 1931년 후버 총리는 낮아지는 인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퇴한다. 이로서 1932년 총선에서 좌익의 정권교체가 유력해졌다.
1932년 총선을 앞두고 자유당 진보파의 루스벨트, 인민당-진보당 연합의 조지 노리스, 사회당의 노먼 토머스는 시카고에서 당을 통합하기로 약속했다. 자유당 내에서 4당 통합 안건이 앨 스미스의 방해로 인해 부결되자, 루스벨트가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집단 탈당해 통합 참여를 타진했다. 그렇게 1932년 시카고에서 열린 진보당-사회당 전당대회(PSNC)에서 4개의 세력이 통합안에 서명하며 농민노동당이 탄생했다.
1932년 총선에서 인기있는 주지사 루스벨트를 내세운 신생정당 노동당은 381석을 획득, 93석의 보수당과 23석의 자유당을 누르고 명실상부한 미국 내 최대정당으로 발돋움한다. 루스벨트는 취임 직후 사회보장법, 공공사업진흥법, 노동관계법, 테네시 유역사업법, 글래스-스티걸법 등 미국의 경제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혁신적인 입법안을 통과시켰고, 그의 지지율은 90%대에 육박했다. 이러한 루스벨트의 개혁안을 "뉴딜정책"이라고 부르며, 이 시기의 농민노동당을 "뉴딜노동당"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1934년 총선에서 421석을 획득하며 압도적으로 승리한 루스벨트는 더욱 가열차게 뉴딜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재임 2기 도중 대법원 판사 임명건으로 남부 보수파가 반발하며 당이 분열되기 시작했고, 루스벨트의 지지율은 하락했다. 그럼에도 보수당의 지리멸렬한 선거전략과 루스벨트의 개인기 덕분에 루스벨트는 1938년 총선에서도 압도적인 3선에 성공했다. 때맞춰 터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 경기가 유례없는 호황을 맞으며 루스벨트의 지지율은 다시 상승했고, 1942년 총선에서 유례없는 4선 총리가 되었다. 루스벨트는 자유당 출신의 웬델 윌키를 부총리로 하는 거국내각을 수립해 2차 대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였으며, 1950년 노환으로 사망할때까지 무려 18년간 5선 총리직을 맡으며 미국 역사상 최장수 총리로 남았다.
월리스 총리 시대와 1950년대의 침체기
1950년, 루스벨트 총리가 사망하면서 그의 후계자로 낙점된 헨리 A. 월리스 부총리가 직위를 계승했다. 월리스 총리는 사이비종교 신봉과 과도한 친소련 성향, 당내 기반 부족으로 논란이 있었으나 루스벨트의 장례식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동정표로 근소하게 승리하며 논란을 불식시키는 듯 하였다.
그러나 월리스 총리는 1950년의 단기공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며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소련에 친화적인 태도로 남한의 자유정부가 무너지는 것을 방조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1951년 3월 부산이 함락되고 자유대한 정부가 함락되었을 때 월리스 내각의 지지율은 10%대로 추락한 상태였고, 결국 월리스는 총선 승리 이후 얼마 가지도 않아 내각불신임 결의안에 직면했다. 월리스 총리는 내각불신임안이 통과되기 직전 총리직을 사임했고, 곧바로 연정 파트너였던 자유당이 연정 해소를 선언, 보수당과 연정을 맺으면서 20년에 걸친 노동당 정권은 종말을 맞이한다.
보수당의 신임 총리 아서 반덴버그는 엄격한 보수주의 성향으로 인해 일반 국민에게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으나, 오랜 의회 경력에서 나오는 관록으로 자신이 지향하는 정책을 관철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반덴버그 총리는 한국에 재개입했으며, 1954년 공산군을 38도선까지 밀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전후 경기호황 덕에 지지율도 높았다. 월리스 이후 당수로 선출된 W. 애버럴 해리먼 전 외무장관은 정책의 중도화를 통해 정권 재창출을 노렸으나, 워낙 내각의 지지율이 높았던 탓에, 1954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1928년 총선 이후 처음으로 단독과반 의석을 차지하며 승리했다. 반덴버그 총리가 건강 문제로 재선을 포기함에 따라 중도온건파인 얼 워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총리직에 올랐다.
1958년, 그해의 단기공황, 스푸트니크 쇼크로 인해 보수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 이에 신임당수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은 노동당 정권 재창출을 노렸으나, 초기 여론조사의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7석 차이로 1당 지위를 얻는데 실패하며 그 리더십에 의심을 받았다.
성향
지지 기반
소속 의원
계파
역대 전당대회
역대 지도부
역대 당수
- 초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1932-1950)
- 제2대 헨리 A. 월리스 (1950-1952)
- 임시 로버트 F. 와그너 (1952-1953)
- 제3대 W. 애버럴 해리먼 (1953-1954)
- 제4대 엘리너 루스벨트 (1954-1956)
- 제5대 애들레이 E. 스티븐슨 (1956-1960)
- 제6대 린든 B. 존슨 (1960-1973)
- 임시 헨리 M. 잭슨 (1978)
- 제7대 휴버트 험프리 (1973-1978)
- 임시 프랭크 처치 (1978)
- 제8대 버치 베이 (1978-1980)
- 제9대 월터 먼데일 (1980-1984)
- 제10대 마리오 쿠오모 (1984-1992)
- 제11대 앤 리처즈 (1992-1994)
- 제12대 앨 고어 (1994-2006)
- 제13대 존 케리 (2006-2008)
- 제14대 힐러리 클린턴 (2008-2014)
- 제15대 엘리자베스 워런 (2014-2020)
- 제16대 개빈 뉴섬 (2020- )
출신 총리
미국 총리 | ||||||
---|---|---|---|---|---|---|
대수 | 이름 | 내각 | 의회 대수 | 취임 | 퇴임 | 부총리 |
38 | 프랭클린 루스벨트 (1882-1950) |
I | 44 | 1932년 3월 4일 | 1934년 7월 1일 | 조지프 로빈슨 (1932-1934) |
II | 45 | 1934년 7월 1일 | 1938년 7월 1일 | 조지프 로빈슨 (1934-1938) | ||
III | 46 | 1938년 7월 1일 | 1942년 7월 1일 | 조지프 로빈슨 (1938-1939) (1939-1942) | ||
IV | 47 | 1942년 7월 1일 | 1946년 7월 1일 | 웬델 윌키 (1942-1944) (1944-1946) | ||
V | 48 | 1946년 7월 1일 | 1950년 1월 17일 | 헨리 A. 월리스 (1946-1950) | ||
대행 | 헨리 A. 월리스 (1888-1965) |
임시 | 1950년 1월 17일 | 1950년 2월 1일 | ─ | |
39 | I | 49 | 1950년 2월 1일 | 1952년 3월 5일 | 로버트 와그너 주니어 (1950-1952) | |
42 | 린든 B. 존슨 (1908-1973) |
I | 52 | 1960년 12월 6일 | 1964년 12월 6일 | J. 윌리엄 풀브라이트 (1960-1962) (1962-1964) |
II | 53 | 1964년 12월 6일 | 1965년 9월 1일 | 마이크 맨스필드 (1964-1965) | ||
III | 55 | 1966년 5월 2일 | 1968년 9월 30일 | 휴버트 험프리 (1966-1968) | ||
46 | 버치 베이 (1928-2019) |
I | 58 | 1976년 9월 30일 | 1980년 9월 30일 | 헨리 잭슨 (1976-1980) |
49 | 앨 고어 (1948- ) |
I | 63 | 1996년 9월 30일 | 2000년 9월 30일 | 조 리버먼 (1996-2000) |
II | 64 | 2000년 9월 30일 | 2004년 9월 30일 | 올림피아 스노 (2000-2004) | ||
III | 65 | 2004년 9월 30일 | 2006년 12월 31일 | 올림피아 스노 (2004-2006) | ||
50 | 존 케리 (1943- ) |
I | 2007년 1월 1일 | 2008년 9월 30일 | 힐러리 클린턴 (2007-2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