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관계 (개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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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시대===
===전쟁의 시대===
{{이미지|한국 각료들 만주옷.jpg|만주를 국빈방문해 만주 복식을 입은 한국 각료들 (1938)<ref>앞줄 중앙이 방문단 단장이었던 부총리 [[이동녕 (개화)|이동녕]].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2년 후 전시수상을 맡게 되는 당시 내무총판 [[김창암 (개화)|김창암]]</ref>}}
{{이미지|한국 각료들 만주옷.jpg|만주를 국빈방문해 만주 복식을 입은 한국 각료들 (1938)<ref>앞줄 중앙이 방문단 단장이었던 부총리 [[이동녕 (개화)|이동녕]].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2년 후 전시수상을 맡게 되는 당시 내무총판 [[김창암 (개화)|김창암]]</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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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냉전===
앵커리지 조약에서 소련은 한국에는 독소전 개입 금지 외에는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으나 만주에는 중립국 선언을 강요했다. 이로 인해 냉전의 시작과 동시에 한국은 자유진영에, 만주는 제3세계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만주는 강제적으로 중립 선언을 했을 뿐 실제로는 친한 친서방 성향이었는데, 한국이 냉전의 최전방으로서 미국 마셜 플랜의 혜택을 입으며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가 재건에 있어 많은 지원을 받았던 것과 달리 표면상으로나마 중립국이었던 만주는 특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만주는 [[국가중건총체규획 (개화)|적극적인 전후복구사업]]에도 불구하고 아주 조금의 원조와 자체적인 역량을 통해 1950년대 후반까지 전후복구를 해야만 했다. 다만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전후복구가 완료된 한국이 만주에 대규모 지원을 퍼붇기 시작했고 만주의 잔후 재건도 1960년대 초반에 마무리된다.
앵커리지 조약으로 인해 양국 간의 동맹조약은 파기되었지만 소련의 침공을 경계하는 양국의 입장으로 양국은 군사 부문에서도 비밀리에 협력했다. 한국은 만주에 비밀리에 각종 무기를 지원했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해 만주군 훈련을 돕기도 하였다. 또 1950년대 후반에 만주 다칭에서 엄청난 매장량을 지닌 다칭 유전이 발견되자 양국은 합자회사를 만들어 공동으로 석유를 개발하였다.
이렇듯 한만 양국은 냉전 시기 공개적으로는 평범한 국가간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물밑에서는 매우 친밀한 상태에서 다양한 협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데탕트 분위기에 힘입어 물밑에서만 이루어지건 한만 협력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도 하였다.


===현대===
===현대===
{{이미지|멍반.jpg|[[멍훙웨이 (개화)|멍훙웨이]] [[만주 부총리대신 (개화)|부수상]]과 [[반기문 (개화)|반기문]] [[대한민국 국무집정(개화)|국무집정]]}}
{{이미지|멍반.jpg|[[멍훙웨이 (개화)|멍훙웨이]] [[만주 부총리대신 (개화)|부수상]]과 [[반기문 (개화)|반기문]] [[대한민국 국무집정(개화)|국무집정]]}}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건의 데탕트가 벌어지던 1980년대, 소련에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정책과 대외불간섭 정책으로 인근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를 기회로 한만 양국은 다시 공개적으로 밀착하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과거 소련의 강요로 파기할 수 밖에 없었던 양국 간의 동맹조약을 한만상호방위조약이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켰고 만주 영내에 한국군이 주둔하였다.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였던 소련과 경제 개발로 먹고살기 바쁘던 중국은 이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1991년 소련 붕괴로 [[녹우크라이나 (개화)|녹우크라이나]]가 독립하자 한만상호방위조약은 녹우크라이나까지 합류하여 [[극동조약기구 (개화)|극동조약기구 FETO]]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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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들어서도 한국과 만주는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 중 하나로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다방면에서 협력을 거듭하며 공동번영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s>라고 한국 학자들은 주장한다</s>.


==양국 간의 협력==
==양국 간의 협력==
===경제===
===경제===
{{이미지|창춘기차역.jpg|창춘 외곽 한만국경지대의 무역기차역}}
{{이미지|창춘기차역.jpg|[[펑톈 (개화)|펑톈]] 외곽 한만국경지대의 무역기차역}}
한국과 만주는 경제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만주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 한국이며 만주는 한국의 제5 무역상대국이다.
한국과 만주는 경제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만주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 한국이며 만주는 한국의 제5 무역상대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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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안보===
===외교·안보===
{{본문|극동조약기구 (개화)}}
{{본문|극동조약기구 (개화)}}
{{이미지|김홍균과 우다웨이.jpg|악수하는 양국 외교수장<ref>좌측이 당시 한국 외무성총판 김홍균, 우측이 훗날 [[만주국 총리대신 (개화)|만주 수상]]역임하는 당시 만주 외교부대신 [[우다웨이 (개화)|우다웨이]]</ref>}}
{{이미지|김홍균과 우다웨이.jpg|악수하는 양국 외교수장<ref>좌측이 당시 한국 외무성총판 김홍균, 우측이 전직 [[만주 대총통 (개화)|만주 대총통]]이자 훗날 [[만주 국무총리 (개화)|만주 국무총리]]역임하는, 당시 만주 외교부총장 [[우다웨이 (개화)|우다웨이]]</ref>}}
한국과 만주는 [[극동조약기구 (개화)|극동조약기구]]에 속한 동맹국으로, 둘 중 하나가 침략받으면 다른 쪽도 자동으로 참전한다. 한국은 만주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고 연합작전의 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주에 군사고문단과 군사감독관을 파견한 상태다. 외교적으로도 양국은 국제적인 사안에 대해 주로 공통된 입장을 가진다.
한국과 만주는 [[극동조약기구 (개화)|극동조약기구]]에 속한 동맹국으로, 둘 중 하나가 침략받으면 다른 쪽도 자동으로 참전한다. 한국은 만주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고 연합작전의 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주에 군사고문단과 군사감독관을 파견한 상태다. 외교적으로도 양국은 국제적인 사안에 대해 주로 공통된 입장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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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공관==
==외교공관==
만주는 한성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이외에도 [[평양부 (개화)|평양]], [[여옥부 (개화)|여옥]], [[동래부 (개화)|동래]], 함흥, 나주 그리고 [[비사부 (개화)|비사]]에 총영사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제주자치도 (개화)|제주자치도]] [[용담구 (개화)|용담구]]에는 동래총영사관 제주파견소가 있다. 한국은 창춘에 대사관을, 봉천과 하얼빈에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
만주는 [[한성부 (개화)|한성]]에 대사관에 대응하는 주한국만주대표공서를 두고 있다. 이외에도 [[평양부 (개화)|평양]], [[여옥부 (개화)|여옥]], [[동래부 (개화)|동래]], 함흥, 나주 그리고 [[대연부 (개화)|대연]]에 총영사관에 대응하는 판공처가 설치되어 있으며, 제주, 대구, 대전, 춘천, 인천, 청진, 국내성에 출장소가 있다. 한편 한국은 대사관에 대응하는 주만주한국대표부를 [[펑톈 (개화)|펑톈]]에 설치하였으며, 하얼빈, 지린, 치치하얼, 청더, 쓰핑, 자무쓰, 하이라얼에 총영사관에 대응하는 사무국을 두고 있다.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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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7일 (금) 22:46 기준 최신판

대한민국 만주

개요

한국만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문서이다.

역사

초창기

전쟁의 시대

만주를 국빈방문해 만주 복식을 입은 한국 각료들 (1938)[1]

냉전

현대

양국 간의 협력

경제

펑톈 외곽 한만국경지대의 무역기차역

한국과 만주는 경제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만주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 한국이며 만주는 한국의 제5 무역상대국이다.

만주 정부의 주 수입원 중 하나인 다칭 유전은 개발 단계에서부터 한국측과 만주측이 지분을 50 대 50으로 나눠가져 현재까지도 공동운영하고 있으며 수익금도 나누어 갖는다. 한국은 다칭유전의 석유 등 만주로부터 매년 많은 양의 석유를 공급받고 있으며, 과거에는 석탄 역시 만주가 한국에 대량으로 수출했지만 한국이 친환경 정책의 일환으로 석탄 수입량을 줄이고 있다.

만주의 넓은 평야에는 한국 식품기업들이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며 각종 농작물과 가축들을 기르며, 농장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한국으로 수출되기도 한다. 또 만주는 낮은 인건비를 바탕으로 경공업 제품을 생산하여 한국에 수출한다. 반면 한국은 만주에 자본집약적이며 발달된 기술이 필요한 전자제품, 자동차 등 각종 공업제품과 반도체 등의 첨단제품을 수출한다.

1999년 한국과 만주 사이에 체결된 비자협정으로 양국 간의 왕래에는 별도의 비자가 필요 없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고, 많은 만주인들이 한국으로 건너와 일을 한다. 이들은 보통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에 종사한다.

만주의 몇몇 시민단체들은 만주의 경제가 한국 경제에 종속되어있다고 비판한다. 이들에 따르면 만주 경제는 한국 경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한국의 경제상황이 좋은지 나쁜지에 따라 만주 경제도 같이 요동친다. 또 한국의 정부와 기업이 만주의 대한(對韓) 경제적 의존을 무기 삼아 만주의 정치·경제·외교정책 수립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한만 양국 정부는 부인하지만 여러 경제학자들로부터 일정 부분 사실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반면 이것이 순전히 일반적인 국가 간 관계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상호의존이리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도 있다.

외교·안보

악수하는 양국 외교수장[2]

한국과 만주는 극동조약기구에 속한 동맹국으로, 둘 중 하나가 침략받으면 다른 쪽도 자동으로 참전한다. 한국은 만주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고 연합작전의 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주에 군사고문단과 군사감독관을 파견한 상태다. 외교적으로도 양국은 국제적인 사안에 대해 주로 공통된 입장을 가진다.

한국-녹우크라이나, 만주-녹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양국의 외교, 안보적 협력은 주로 극동조약기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문화

외교공관

만주는 한성에 대사관에 대응하는 주한국만주대표공서를 두고 있다. 이외에도 평양, 여옥, 동래, 함흥, 나주 그리고 대연에 총영사관에 대응하는 판공처가 설치되어 있으며, 제주, 대구, 대전, 춘천, 인천, 청진, 국내성에 출장소가 있다. 한편 한국은 대사관에 대응하는 주만주한국대표부를 펑톈에 설치하였으며, 하얼빈, 지린, 치치하얼, 청더, 쓰핑, 자무쓰, 하이라얼에 총영사관에 대응하는 사무국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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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한국 관련 문서 (개화)

파일:만주 국장 (개화).png
만주국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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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앞줄 중앙이 방문단 단장이었던 부총리 이동녕.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2년 후 전시수상을 맡게 되는 당시 내무총판 김창암
  2. 좌측이 당시 한국 외무성총판 김홍균, 우측이 전직 만주 대총통이자 훗날 만주 국무총리를 역임하는, 당시 만주 외교부총장 우다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