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 태황제 (풍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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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 태황제 이찬(聖祖 太皇帝 李燦)은 [[조선국 (풍운)|조선국]]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풍운)|대한제국]]의 초대 대황제이다. 아명은 융준(隆俊)이다.
성조 태황제 이찬(聖祖 太皇帝 李燦)은 [[조선국 (풍운)|조선국]]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풍운)|대한제국]]의 초대 대황제이다. 아명은 융준(隆俊)이다.


조선 제25대 국왕인 [[덕조 원황제 이변|덕조]]와 그의 정비인 철인장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자 유일한 적장자로 1864년 부왕이 승하하자 5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너무 어리고 병약하여 조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이후 장성하자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에 나선다. 친정 이후 안동 김가를 견제하고자 개화파를 등용하고 갑신정사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태시개혁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하고, 1,2차 동아대전을 거치며 고토를 수복하고 칭제건원에 성공하며 불멸의 위치에 올랐고, 1920년 향년 61세를 일기로 붕어한다.
조선 제25대 국왕인 [[덕조 원황제 이변|덕조]]와 그의 정비인 철인장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자 유일한 적장자로 1864년 부왕이 승하하자 5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너무 어리고 병약하여 조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이후 장성하자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에 나선다. 친정 이후 안동 김가를 견제하고자 개화파를 등용하고 무인정사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태시개혁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하고, 1,2차 동아대전을 거치며 고토를 수복하고 칭제건원에 성공하며 불멸의 위치에 올랐고, 1920년 향년 61세를 일기로 붕어한다.


== 생애 ==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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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11월 22일 신시<ref>15~17시.</ref> 창덕궁 대조전에서 적장자인 원자로 출생하였다. 부왕인 덕조는 원자가 지낼 처소에 이극문이라는 휘호를 써서 현판으로 내리는 한편 백일을 맞은 아들을 위해 소명<ref>어린 아이일 때 쓸 이름.</ref>을 고르는데 홍복(洪福), 장록(長祿), 윤중(胤重), 융준(隆俊) 중 융준을 택하였다.
1858년 11월 22일 신시<ref>15~17시.</ref> 창덕궁 대조전에서 적장자인 원자로 출생하였다. 부왕인 덕조는 원자가 지낼 처소에 이극문이라는 휘호를 써서 현판으로 내리는 한편 백일을 맞은 아들을 위해 소명<ref>어린 아이일 때 쓸 이름.</ref>을 고르는데 홍복(洪福), 장록(長祿), 윤중(胤重), 융준(隆俊) 중 융준을 택하였다.


성조는 어릴때부터 외모가 빼어나고 총명하다는 칭송을 받았고 덕조의 유일한 아들로써 큰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다. 성조는 병으로 요절한 다른 이복형제들<ref>덕조의 후궁 소생 자식들을 말한다.</ref>과 달리 잔병치레 없이 잘 크는 듯했으나 생후 6개월이 된 1859년 5월 25일 급작스런 열병을 앓았고 이때의 휴유증으로 평생 허약하여 잔병치레가 잦았다.  
성조는 어릴때부터 외모가 아름다우며 총명하다는 칭송을 받았고 덕조의 유일한 아들로써 큰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다. 성조는 생후 6개월이 된 1859년 5월 25일 급작스런 열병을 앓은 것을 제외하면 병으로 요절한 다른 이복형제들과 달리 잔병치레 없이 잘 성장하였다.
 
1870년 덕조가 붕어하자 세자였던 성조는 보위에 올랐다. 성조가 즉위한 이후 조대비의 수렴청정이 시행되었다. 즉위 이후 성조는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았지만, 쓸쓸하고 허전하다는 명분으로 종친을 대거 등용하고 대규모 사냥을 벌였으며, 유학 경전을 등한시 하고 실학이나 잡기에 관심을 표하여 대신들이 염려를 표하기도 했다.
=== 내정 개혁과 개화 ===
=== 내정 개혁과 개화 ===
1864년 덕조가 사망하자 세자였던 성조는 즉시 보위에 오른다. 성조가 즉위한 이후 조대비의 수렴청정이 시행되었다. 1871년 성조가 13세가 되던 해에 성조는 수렴청정을 거둔다. 이때부터 성조난 세도가를 견제하기 위해 종친과 비주류 인사들을 등용하기 시작한다. 이때 박규수, 이경하 등을 발탁했고, 이유원, 이최응, 김병국을 제수(除授)하여 세도가를 서서히 견제하기 시작한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이 강화도 영종진 앞바다에서 터진다. 운요호는 조선군이 위협 사격을 하자 즉각 공격을 감행했고 수비대는 일본 수병 36명의 상륙에 전멸한다. 이때 성리학적 세계관에 갇혀있던 성조는 매우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수렴청정 1년만인 1871년, 성조가 13세가 되던 해에 조대비는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성조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성조는 부왕 덕조의 개혁이 미진했던 이유를 친위세력의 부재라고 평가했고,  남인, 소론은 물론, 북인과 반역향이라고 소외된 영남 유림, 서북인, 함경도인, 고려 왕씨 등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 왕가의 종친 등을 끌어들여 비주류를 등용하여 조정에 근왕파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때 박규수, 이경하 등을 발탁했고, 이유원, 이최응, 김병국을 제수(除授)하였다. 특히 박규수는 어린 성조가 개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자신의 세력을 키우던 성조는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기점으로 서서히 정치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한다. 당시 집권 세력인 안동 김씨들은 일본의 무력에 놀라기는 했지만 문호 개방으로 얻을 이익에 관심이 있었기에 "나라 문(國門)을 열고 관(館)을 설치하여 통상(通商)을 하면 백성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강화도 조약을 조정과 제대로 된 협의없이 체결한다.
 
이에 근왕파는 나라의 방비를 태만히 하고, 성상을 농락했다며 김병학을 위시한 안동김씨 일가를 대대적으로 탄핵하기 시작한다. 이에 안동김가에 의한 숙청이 벌어질 위기가 벌어지나, 성조는 근왕파의 말에 일리가 있다며 국방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근왕파를 외경직으로 배치하여 지방을 장악하였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훈련도감을 개편하여 일본군 고문단을 바탕으로 교련병대(敎鍊兵隊)를 창설하여 한성의 군권을 장악하여 세도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성조는 왕권 강화와 더불어 각종 폐단에도 손을 대었다. 성조는 근왕파들을 통해 지방을 장악한 이후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은결을 색출해 내는 것으로 전정을 개혁했다. 또한 군정을 개혁하여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기준으로 하는 호포제를 실시, 세수가 확연히 증가했다.
 
또한 서원 철폐도 이어졌다. 성조는 600여 개의 서원을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밀어버렸다. 성조실록에서는 이때 유생들이 반발하여 몇 날 며칠을 울고 불며 집단으로 시위를 벌였으나, “진정 백성에 해가 된다면 문선왕이라도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함께 유생들을 한강 남쪽으로 밀어내 버렸다.
 
이와 더불어 환곡제(還穀制)를 폐지하고, 사창제(社倉制)를 실시, 검소한 생활을 권장하고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펴면서 법제도 바로잡았다. 또한 길거리의 부랑배들을 몰아내 국가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이에 조선의 재정은 크게 확충되었고, 치안도 대단히 진정되어 덕조 시절과 달리 성조 시절에는 민란이 격감되어 성조의 권위는 점차 증가해갔다.
=== 세도정치의 끝 ===
 
성조가 세도가를 압박하였음에도 수십년간 조선을 좌지우지 해온 안동 김씨들의 위세는 드높기 그지 없었다. 이때 성조는 최후의 일격으로 비변사를 철폐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복원하고자 했다. 안동김씨들은 수백 년을 내려온 비변사를 폐지하는 것은 애석하다고 은근슬쩍 반대를 하다가, 성조의 뜻이 확고하자 타협안을 내놓아, 의정부와 비변사의 권력을 반반씩 나누되 대신 경국대전에도 없는 비기구인 비변사의 존재를 공식화하려했다.
 
하지만 성조는 이런 누더기식 타협에 반대하였고, 궁지에 몰린 안동 김씨들도 비변사를 잃지 않기 위해 양측은 강대 강의 대결로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이에 격분한 성조는 1876년 3월 27일 새벽에 교련병대를 동원하여 한성을 장악하고 근왕파 대신들만 창덕궁에 입궐시킨 상태로 의정부와 사간원을 합치어 문하부를 창설하며 비변사를 혁파하고, 비국(備局)의 인신(印信)을 녹여 영원히 부활하지 않을 것임을 선포했다.(병자정변) 문하부와 삼군부는 모두 왕과 직결되는 권력기관이었기 때문에 왕권은 강화되었고, 세도 가문의 세력은 극도로 약화되었다.
 
다만 신 안동 김씨 자체에 대한 숙청은 최소한으로 끝났다. 이는 안동 김씨와 일종의 정치적 거래를 한 것으로, 안동 김씨의 세력을 어느 정도 살려서 또 다른 세도 가문인 풍양 조씨 가문의 성장을 막고자 했
고, 안동 김씨 내의 유능한 인재들을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안동 김씨 일파는 실권과 재산은 크게 잃었지만 명예 등은 거의 잃지 않았다. 김병기는 잠시 경기도 광주유수 등의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복귀하여 좌찬성 등의 요직을 맡았다. 김병학 / 병국 형제는 오히려 더욱 진급, 성조의 치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 나아갈 길을 정하다 ===
성조가 세도정치를 종결하며, 그동안 정쟁으로 인해 미루어진 개화에 대한 논의가 조정의 주된 논쟁이 되었다. 이 당시 수신사로 일본에 방문했던 경평군과 박규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일본의 발전상에 경악했고, 귀국하자 이를 바탕으로 개화파를 형성, 조정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로 갈라지게 된다.


비록 일본의 무력에 놀라기는 했지만 안동김씨는 문호 개방에 관심이 있었기에 "나라 문(國門)을 열고 관(館)을 설치하여 통상(通商)을 하면 백성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강화도 조약을 성조와 제대로 된 협의없이 체결한다.
본래 박규수로부터 개화에 대해 배워온 성조는 수신사를 알현하며 일본의 발전상을 들으며 개화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개화파를 지지하였다. 성조가 개화파에게 힘을 심어준 이후 조정은 매우 빠르게 개화파가 득세하였고, 개화파는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의 두 갈래로 찢어진다. 조정 대신들은 개화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개화의 진행방식을 두고 분열되기 시작한다. 온건파는 청의 양무운동을 토대로, 급진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토대로 근대화를 주장하였다. 이때 성조는 흥선군을 단장으로 하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의 젊은 급진 개화파들을 포함한 조정의 유력 고관들을 무인조사시찰단으로 파견하여 청나라와 일본, 구미의 발전상을 확인하고 개화의 방향성을 정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성조는 발톱을 들어낸다. 나라의 방비를 태만히 하였다며 안동 김가의 영수인 김병국을 파직하여 운요호 사건을 왕권을 강화하는데 이용했고, 비변사 폐지, 전정 개혁과 서원 철폐등 굴직한 개혁을 펼칠 준비를 하였으며 세도가를 견제하기 위해 왕족들과 개화파를 중용하여 빠르게 출세시켰다.  
무인조사시찰단은 순방 기간 일본의 발전상보다 압도적인 서구의 문명에 충격을 받았고, 귀국 후 성조가 개화의 방향성을 묻자 압도적으로 급진개화를 주장하였고, 성조는 일본을 본받아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흥선군은 조사시찰단 사이에서의 공통된 의견을 모아 성조에게 상주하는데, 이것이 바로 홍범 14조이다. 홍범 14조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개혁에 관한 14개 항목을 내세웠다. 그중의 첫 대목은 임금을 높히고 양이를 배척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5]에 관한 대목이었다. 그 외에는 문벌 개혁(신분제 철폐), 의정부와 6조, 특히 호조 중심의 재정 관할, 규장각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고, 성조가 이를 바탕으로 하는 전면적인 근대화를 국시로 정함에 따라 홍범 14조는 조선의 개화 방침이 되었다.  
=== 중흥군주 ===
=== 어일신 ===
성조가 개화파에게 힘을 심어준 이후 개화파는 안동 김문의 온건 개화파와 성조가 주장하는 급진 개화파의 두 갈래로 찢어진다. 안동김가와 성조 모두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개화의 진행방식을 두고 분열되기 시작한다. 온건파는 청과의 사대외교를 중단하지 않길 바랐고, 급진파는 청에 대한 사대를 신속히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급진 개화파들은 아편전쟁, 영토 할양 등으로 청나라가 이미 기울었고, 청나라는 저물어가는 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와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의 젊은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의 지지를 받아 오밤중에 기습적으로 급집개화파들만 입궐하여 신정부를 수립하고 메이지유신을 모방한 개혁정책을 제안하고 성조의 승인을 받아 이를 공포한다. 이를 임오중흥이라 한다. 급진 개화파들은 신 정부를 구성하고 혁신정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개혁에 관한 14개 항목을 내세웠다. 그중의 첫 대목은 임금을 높히고 양이를 배척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ref>본래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와의 종주 관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성조는 시기상조라며 왕을 떠받들어 오랑캐들을 물리친다는(명목상으로는 양이를 배척하자는 의미이지만, 청나라도 오랑캐로 보던 조선의 시작으로 보면 상당히 묘책이다.)</ref>에 관한 대목이었다. 그 외에는 문벌 개혁(신분제 철폐), 환곡 폐지, 의정부와 6조, 특히 호조 중심의 재정 관할, 규장각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홍범 14조의 반포를 기점으로 사회, 군사, 중앙행정기관의 개편과 함께 여러 개혁이 급격하게 추진된다. 이러한 개혁의 주요 내용으로는 1부6조제를 택한 조선의 행정관제를 개혁하여 의정부와 사간원을 합치너 문하부로 개편하고 승정원을 승선부(承宣府)로 개편하여 1부(府) 6조(曹)제에서 2부(府) 6부(部)제로 개편하며, 삼군부를 원수부로 개칭하여 삼군부를 근대적인 참모본부로 개조하였다. 이후 1882년 병부를 육군부와 해군부로 나누었고, 이후 1883년 외부, 내부, 법부, 농부, 상부, 공부, 육군부, 해군부로 개편하여 최종적으로 2부 8부의 형태로 정착시키는 행정개혁과, 독일 군사고문단 초빙, 프로이센식 내각 체제 도입,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 구 양반중 일부를 공족, 그 이외를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새롭게 성장한 보부상이나 조정 관료 등을 새롭게 공족으로서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승선부의 지배 하에 두어 전제 왕권을 강화한다. 동시에 학제(学制) 개혁, 지조(地租) 개정,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등이 있다.


이 시기 조선은 서양식 제복과 단발령 도입, 중앙정치기구, 군제, 사회문화의 여러 개혁이 급격하게 추진된다. 특히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 귀족과 평민 이외의 모든 신분을 폐지하여,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새롭게 성장한 보부상이나 조정 관료 등을 귀족으로 봉하여 특권 계급화 한다.
이러한 적극적인 개화정책의 추진은 조선을 험난한 국제정세속에서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었다. 이러한 성조의 근대화 정책을 현대 한국에서는 어일신(御一新)이라고 칭한다.
=== 우발적인 전쟁 ===
=== 우발적인 전쟁 ===
1884년 청불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며 다시 한 번 청나라의 취약함이 드러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일본등이 중국에 대하여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조선도 호시탐탐 청나라를 노리게 된다.
1884년 청불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며 다시 한 번 청나라의 취약함이 드러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일본등이 중국에 대하여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조선도 호시탐탐 청나라를 노리게 된다.


1893년 2월 개화파는 대일본제국 헌법을 본딴 [[국제대요 (풍운)|국제대요]]를 반포한다. <ref>정확하게 말하자면 국제대요는 예비헌법으로, 입헌방침을 채택한 상황에서 완전한 입헌주의로 나가기 전에 우선 헌법상 기본적인 내용들을 미리 선언한 것이었기에 법문 끝에 대요라는 말이 붙었다. </ref> 그러나 1893년 헌법대요에서 광서 연호 대신 개국기원 연호를 사용한 사실을 청나라에 들켰고, 격분한 청은 조선에 엄중한 경고를 내리며 양국은 병자호란 이래 최악의 관계에 놓인다.  
1893년 1월 1일을 기해 성조는 기존의 제후국 예법을 버린다. 이때 국왕의 명칭은 바꾸지 않았으나, 예법을 황제와 걸맞게 바꾸었다.
 
1893년 2월 조선은 대일본제국 헌법을 본딴 [[국제대요 (풍운)|국제대요]]를 반포한다. <ref>정확하게 말하자면 국제대요는 예비헌법으로, 입헌방침을 채택한 상황에서 완전한 입헌주의로 나가기 전에 우선 헌법상 기본적인 내용들을 미리 선언한 것이었기에 법문 끝에 대요라는 말이 붙었다. </ref> 그러나 1893년 헌법대요에서 광서 연호 대신 개국기원 연호를 사용한 사실을 청나라에 들켰고, 격분한 청은 조선에 엄중한 경고를 내리며 양국은 병자호란 이래 최악의 관계에 놓인다.
 
이 헌법에서는 청나라의 연호인 광서가 아닌 개국기원 연호를 사용하여 청나라를 자극했다. 청나라는 격분하여 조선 내각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조선도 이에 항의하며 양국의 관계과 악화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상무위원(사실상 공사)으로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사사건건 내정간섭을 시도하나, 조선에 서의 간첩행위로 적발되어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추방되고 양국간의 관계는 병자호란 이래 최악을 맞이한다.


이렇듯 악화일로 속에서 1894년 6월 초, 이홍장은 북양함대 소속 진원과 위원, 양위를 제물포에 입항시켜 조선을 압박하려 한다. 청국 수병들은 1886년 나가사기처럼 [[제물포 만청수병 난동사 (풍운)|제물포의 상점과 주점에서 행패를 부리다 조선 군경과 충돌한다.]] 이에 평소부터 청나라를 경멸하던 개화당 내각은 청국 수병들을 진압하고 진원과 양위를 나포한다.
이렇듯 악화일로를 걷던 양국에 한 가지 폭탄이 떨어지게 된다. 1892년부터 청나라가 간도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에 대한 강경책을 펼치자 이에 저항하던 조선인들을 무참히 탄압하는 간도참변이 발생한다. 간도참변이 진행되던 1894년 조선 육군 1사단 2연대가 독단적으로 국경을 월경하여 길림장군 휘하의 청군을 궤멸시키고 간도의 정착촌을 해방시켰다. [5] 이른바 간도출병이었다. 성조와 군부는 간도출병으로 보불전쟁처럼 단기 결전에서 승산이 있다는 확신을 얻었고,강경 노선을 천명한다. 이에 청나라는 격분하여 책임자의 주살과 사죄사의 파견,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개정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만국공법에 따른 정당한 주권 행사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결국 청나라는 조선과 국왕인 성조의 죄상이 자명하다며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기 시작했고, 조선도 이에 맞서 군대를 증원했다.


북양함대의 최신형 전함인 진원과 양위가 나포당하자 뚜껑이 열린 청은 배와 수병을 인도하고 사죄사를 파견하라 요청하지만, 개화당 내각은 청국 상무위원을 추방하며 응수한다. 이에 서태후는 북양군을 파병하여 조청국경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나, 이들이 조선을 침공하려는 것으로 오해한 조선군의 선제공격으로 청군이 궤멸당한다. 이 충돌에서 승리한 [[김가진 (풍운)|김가진]] 내각은 강경책을 결정하고 청나라와 일전에 돌입할 테세를 갖춘다. 조청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임오중흥 이래 맹방이나 다름 없던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가 조선에 입국하여 청나라에 위협을 막기 위한 양국의 군사동맹을 제안하고, 외무대신 김옥균이 이를 승락하며 제1차 조일맹약이 채결되고 성조를 설득하여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하는 한편 자주국을 선언한다.
조청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임오중흥 이래 맹방이나 다름 없던 일본이 양국의 군사동맹을 제안하여 제1차 조일맹약이 채결되고 성조는 일본과의 동맹을 기점으로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는 한편 국교를 단절하고 자주국을 선포했다.  


이렇게 청과 조일 양국의 긴장이 높아지던 이때 7월 25일 황해 뤼순 부근에서 일본 해군이 청 해군을 기습 선제공격하며 [[제1차 동아대전 (풍운)|전쟁]]이 시작된다. 일본군의 기습적인 공격이 성공하자, 전황은 조일연합군에 기울었다. 청나라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에게 반격을 시도하였지만, 서구화에 성공한 조선가 일본의 군대는 부패하고 전근대적인 청군의 싸움은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이렇게 삼국간의 긴장이 높아지던 이때 7월 25일 황해 뤼순 부근에서 일본 해군이 청 해군을 기습 선제공격하며 전쟁이 시작된다. 일본군의 기습적인 공격이 성공하자, 전황은 조일연합군에 기울었다. 성조는 원수부를 평양으로 옮기어 친정에 나섰고, 이에 청나라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조일 연합군에 반격을 시도하였지만, 서구화에 성공한 조선과 일본의 군대는 부패하고 전근대적인 청군의 싸움은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육지에서는 조선은 남만주를 점령, 일본은 뤼순을 점령하고 해상에서는 연합함대<ref>일본의 연합함대와 조선 해군이 연합한 함대</ref>가 황해해전과 웨이하이 전투로 북양함대를 궤멸시켰다. 결국 청은 강화 협상을 진행하여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하고, 요동 반도, 대만과 부속 도서, 펑후를 일본에 할양하고 남만주를 조선에 넘기며 조선 정부 고평은 2억 냥을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조일 양국을 최혜국으로 대우하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다.
결국 조선은 남만주를 점령, 일본은 뤼순을 점령하고 해상에서는 연합함대가 황해해전과 웨이하이 전투로 북양함대를 궤멸시켰다. 결국 청은 강화 협상을 진행하여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하고, 요동 반도, 대만과 부속 도서, 펑후를 일본에 할양하고 남만주를 조선에 넘기며 조선 정부 고평은 2억 냥을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조일 양국을 최혜국으로 대우하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심기가 불편해진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 제국에 대대적인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였고, 일본은 뤼순을, 조선은 간도를 제외한 남만주를 토해내게 된다. 이는 훗날 제2차 동아대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심기가 불편해진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 제국에 대대적인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였고, 일본은 뤼순을, 조선은 간도를 제외한 남만주를 토해내게 된다. 이는 훗날 제2차 동아대전의 계기
되었다.
=== 두번째 도전 ===
=== 두번째 도전 ===
제1차 동아대전의 승리 이후 전국적으로 칭제건원에 대한 열망이 성조되었다. 이에 성조는 책봉의례를 통해 성립되는 '조선국왕'에서 왕의 위상을 초월한 ''''대한제국 대황제''''으로 칭호를 바꾸고<ref>이때 '주상 전하'는 '대황제 폐하'로, '왕대비 전하'는 '태후 폐하'로, '왕비 전하'는 '황후 폐하'로, '왕세자 저하'는 '태자 전하'로, '왕세자빈 저하'는 '태자비 전하'로, '전문(箋文)'은 '표문(表文)'으로 바뀌었다. 또 국왕의 자칭인 '과인(寡人)'을 황제의 지칭인 '짐(朕)'으로 바꾸고, 황제의 명령은 제후의 '교(敎/教)'가 아니라 황제가 쓰는 '칙(勅/敕)'이라고 부르게 하였다.</ref>, 원구단을 축조하며, 연호를 태시(太始)로 정하고 원구단에서 황제의 자격으로 고유제를 거행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여 새로운 천자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제1차 동아대전의 승리 이후 전국적으로 칭제건원에 대한 열망이 성조되었다. 이에 성조는 원구단을 축조하고 연호를 태시(建武)로 정하고 원구단에서 황제의 자격으로 고유제를 거행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여 새로운 천자국 대한제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제국으로 변하였지만,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의화단 반란으로 대한제국이 남만주, 러시아가 북만주를 점령하며 긴장이 고조되었고, [[제2차 동아대전 (풍운)|제2차 동아대전]]이 발발한다. 기습적인 한일 연합군의 선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무수한 피의 산을 쌓았으나 결국 한일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이 전쟁으로 대한제국은 남만주를, 일본은 뤼순과 남사할린을 차지한다.
이렇게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제국으로 변하듯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또한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의화단 반란으로 대한제국이 남만주, 러시아가 북만주를 점령하며 긴장이 고조되었고, 제2차 동아대전
이 발발한다. 기습적인 한일 연합군의 선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무수한 피의 산을 쌓았으나 결국 한일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이 전쟁으로 대한제국은 남만주를, 일본은 뤼순과 남사할린을 차지하며 성조는 절대적인 권위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대한제국은 이를 기점으로 동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은 패권국임을 공인받게 되었다.
=== 말년 ===
=== 말년 ===
말년의 성조는 서구에서 들어온 운동인 정구(庭球 테니스)를 즐기며 건강을 회복하고 정사를 돌보기 시작한다. 이 시기 성조는 적극적으로 지방을 순행하고 현장을 돌아보며 두 전쟁과 급작스러운 근대화로 피폐해진 민중을 위문하고 친위독재정을 강화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1913년 지방순행에서 폭우로 폐렴을 얻은 이후 다시 성조는 병으로 골골되며 정치에 손을 놓게 되고, 정무는 [[무종 명황제 이유|황태자]]가 대행하게 된다. 결국 1920년 3월 29일 왕은 자신이 중건한 경복궁의 거대한 서양식 전각인 태극전에서 붕어한다. 사후 덕(德)을 지켜 업(業)을 높였다 하여 성조의 묘호를 받는다.
말년의 성조는 서구에서 들어온 운동인 정구(庭球 테니스)를 즐기며 건강을 회복하고 정사를 돌보기 시작한다. 이 시기 성조는 적극적으로 지방을 순행하고 현장을 돌아보며 두 전쟁과 급작스러운 근대화로 피폐해진 민중을 위문하고 친위독재정을 강화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1913년 지방순행에서 폭우로 폐렴을 얻은 이후 다시 성조는 병으로 골골되며 정치에 손을 놓게 되고, 정무는 [[무종 명황제 이유|황태자]]가 대행하게 된다. 결국 1920년 3월 29일 왕은 자신이 중건한 경복궁의 거대한 서양식 전각인 태극전에서 붕어한다. 사후 덕(德)을 지켜 업(業)을 높였다 하여 성조의 묘호를 받는다.

2025년 12월 25일 (목) 12:2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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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초대 황제
성조 태황제 | 聖祖 太皇帝
이름 이찬(李燦)
덕화(德化)
출생 1858년 11월 22일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現 황성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붕어 1920년 3월 29일 (향년 61세)
황성 한성부 경복궁 태극전
재위기간 조선국 왕세자
1862년 4월 12일 ~ 1864년 1월 16일 (1년)
조선국 제26대 국왕
1864년 1월 16일 ~ 1895년 5월 14일 (31년)
대한제국 초대 황제
1895년 5월 14일 ~ 1920년 3월 29일 (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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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왕 덕조 원황제 이변
모후 철인장황후 김씨
형제자매 1남 1녀 중 1남
황후 명인태황후 최씨
자녀 장남 무종 명황제 이유
장녀 순안공주 이안주
차녀 순녕공주 이안자
종교 유교 (성리학)
아명 융준(隆俊)
묘호 성조(聖祖)
존호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
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
(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
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
(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
시호 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연호 태시(太始, 1895~1920)
계급 대원수

개요

성조 태황제 이찬(聖祖 太皇帝 李燦)은 조선국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대황제이다. 아명은 융준(隆俊)이다.

조선 제25대 국왕인 덕조와 그의 정비인 철인장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자 유일한 적장자로 1864년 부왕이 승하하자 5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너무 어리고 병약하여 조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이후 장성하자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에 나선다. 친정 이후 안동 김가를 견제하고자 개화파를 등용하고 무인정사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태시개혁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하고, 1,2차 동아대전을 거치며 고토를 수복하고 칭제건원에 성공하며 불멸의 위치에 올랐고, 1920년 향년 61세를 일기로 붕어한다.

생애

즉위 이전

1858년 11월 22일 신시[1] 창덕궁 대조전에서 적장자인 원자로 출생하였다. 부왕인 덕조는 원자가 지낼 처소에 이극문이라는 휘호를 써서 현판으로 내리는 한편 백일을 맞은 아들을 위해 소명[2]을 고르는데 홍복(洪福), 장록(長祿), 윤중(胤重), 융준(隆俊) 중 융준을 택하였다.

성조는 어릴때부터 외모가 아름다우며 총명하다는 칭송을 받았고 덕조의 유일한 아들로써 큰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다. 성조는 생후 6개월이 된 1859년 5월 25일 급작스런 열병을 앓은 것을 제외하면 병으로 요절한 다른 이복형제들과 달리 잔병치레 없이 잘 성장하였다.

1870년 덕조가 붕어하자 세자였던 성조는 보위에 올랐다. 성조가 즉위한 이후 조대비의 수렴청정이 시행되었다. 즉위 이후 성조는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았지만, 쓸쓸하고 허전하다는 명분으로 종친을 대거 등용하고 대규모 사냥을 벌였으며, 유학 경전을 등한시 하고 실학이나 잡기에 관심을 표하여 대신들이 염려를 표하기도 했다.

내정 개혁과 개화

수렴청정 1년만인 1871년, 성조가 13세가 되던 해에 조대비는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성조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성조는 부왕 덕조의 개혁이 미진했던 이유를 친위세력의 부재라고 평가했고, 남인, 소론은 물론, 북인과 반역향이라고 소외된 영남 유림, 서북인, 함경도인, 고려 왕씨 등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 왕가의 종친 등을 끌어들여 비주류를 등용하여 조정에 근왕파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때 박규수, 이경하 등을 발탁했고, 이유원, 이최응, 김병국을 제수(除授)하였다. 특히 박규수는 어린 성조가 개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자신의 세력을 키우던 성조는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기점으로 서서히 정치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한다. 당시 집권 세력인 안동 김씨들은 일본의 무력에 놀라기는 했지만 문호 개방으로 얻을 이익에 관심이 있었기에 "나라 문(國門)을 열고 관(館)을 설치하여 통상(通商)을 하면 백성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강화도 조약을 조정과 제대로 된 협의없이 체결한다.

이에 근왕파는 나라의 방비를 태만히 하고, 성상을 농락했다며 김병학을 위시한 안동김씨 일가를 대대적으로 탄핵하기 시작한다. 이에 안동김가에 의한 숙청이 벌어질 위기가 벌어지나, 성조는 근왕파의 말에 일리가 있다며 국방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근왕파를 외경직으로 배치하여 지방을 장악하였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훈련도감을 개편하여 일본군 고문단을 바탕으로 교련병대(敎鍊兵隊)를 창설하여 한성의 군권을 장악하여 세도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성조는 왕권 강화와 더불어 각종 폐단에도 손을 대었다. 성조는 근왕파들을 통해 지방을 장악한 이후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은결을 색출해 내는 것으로 전정을 개혁했다. 또한 군정을 개혁하여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기준으로 하는 호포제를 실시, 세수가 확연히 증가했다.

또한 서원 철폐도 이어졌다. 성조는 600여 개의 서원을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밀어버렸다. 성조실록에서는 이때 유생들이 반발하여 몇 날 며칠을 울고 불며 집단으로 시위를 벌였으나, “진정 백성에 해가 된다면 문선왕이라도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함께 유생들을 한강 남쪽으로 밀어내 버렸다.

이와 더불어 환곡제(還穀制)를 폐지하고, 사창제(社倉制)를 실시, 검소한 생활을 권장하고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펴면서 법제도 바로잡았다. 또한 길거리의 부랑배들을 몰아내 국가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이에 조선의 재정은 크게 확충되었고, 치안도 대단히 진정되어 덕조 시절과 달리 성조 시절에는 민란이 격감되어 성조의 권위는 점차 증가해갔다.

세도정치의 끝

성조가 세도가를 압박하였음에도 수십년간 조선을 좌지우지 해온 안동 김씨들의 위세는 드높기 그지 없었다. 이때 성조는 최후의 일격으로 비변사를 철폐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복원하고자 했다. 안동김씨들은 수백 년을 내려온 비변사를 폐지하는 것은 애석하다고 은근슬쩍 반대를 하다가, 성조의 뜻이 확고하자 타협안을 내놓아, 의정부와 비변사의 권력을 반반씩 나누되 대신 경국대전에도 없는 비기구인 비변사의 존재를 공식화하려했다.

하지만 성조는 이런 누더기식 타협에 반대하였고, 궁지에 몰린 안동 김씨들도 비변사를 잃지 않기 위해 양측은 강대 강의 대결로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이에 격분한 성조는 1876년 3월 27일 새벽에 교련병대를 동원하여 한성을 장악하고 근왕파 대신들만 창덕궁에 입궐시킨 상태로 의정부와 사간원을 합치어 문하부를 창설하며 비변사를 혁파하고, 비국(備局)의 인신(印信)을 녹여 영원히 부활하지 않을 것임을 선포했다.(병자정변) 문하부와 삼군부는 모두 왕과 직결되는 권력기관이었기 때문에 왕권은 강화되었고, 세도 가문의 세력은 극도로 약화되었다.

다만 신 안동 김씨 자체에 대한 숙청은 최소한으로 끝났다. 이는 안동 김씨와 일종의 정치적 거래를 한 것으로, 안동 김씨의 세력을 어느 정도 살려서 또 다른 세도 가문인 풍양 조씨 가문의 성장을 막고자 했 고, 안동 김씨 내의 유능한 인재들을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안동 김씨 일파는 실권과 재산은 크게 잃었지만 명예 등은 거의 잃지 않았다. 김병기는 잠시 경기도 광주유수 등의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복귀하여 좌찬성 등의 요직을 맡았다. 김병학 / 병국 형제는 오히려 더욱 진급, 성조의 치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나아갈 길을 정하다

성조가 세도정치를 종결하며, 그동안 정쟁으로 인해 미루어진 개화에 대한 논의가 조정의 주된 논쟁이 되었다. 이 당시 수신사로 일본에 방문했던 경평군과 박규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일본의 발전상에 경악했고, 귀국하자 이를 바탕으로 개화파를 형성, 조정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로 갈라지게 된다.

본래 박규수로부터 개화에 대해 배워온 성조는 수신사를 알현하며 일본의 발전상을 들으며 개화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개화파를 지지하였다. 성조가 개화파에게 힘을 심어준 이후 조정은 매우 빠르게 개화파가 득세하였고, 개화파는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의 두 갈래로 찢어진다. 조정 대신들은 개화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개화의 진행방식을 두고 분열되기 시작한다. 온건파는 청의 양무운동을 토대로, 급진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토대로 근대화를 주장하였다. 이때 성조는 흥선군을 단장으로 하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의 젊은 급진 개화파들을 포함한 조정의 유력 고관들을 무인조사시찰단으로 파견하여 청나라와 일본, 구미의 발전상을 확인하고 개화의 방향성을 정하도록 하였다.

무인조사시찰단은 순방 기간 일본의 발전상보다 압도적인 서구의 문명에 충격을 받았고, 귀국 후 성조가 개화의 방향성을 묻자 압도적으로 급진개화를 주장하였고, 성조는 일본을 본받아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흥선군은 조사시찰단 사이에서의 공통된 의견을 모아 성조에게 상주하는데, 이것이 바로 홍범 14조이다. 홍범 14조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개혁에 관한 14개 항목을 내세웠다. 그중의 첫 대목은 임금을 높히고 양이를 배척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5]에 관한 대목이었다. 그 외에는 문벌 개혁(신분제 철폐), 의정부와 6조, 특히 호조 중심의 재정 관할, 규장각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고, 성조가 이를 바탕으로 하는 전면적인 근대화를 국시로 정함에 따라 홍범 14조는 조선의 개화 방침이 되었다.

어일신

홍범 14조의 반포를 기점으로 사회, 군사, 중앙행정기관의 개편과 함께 여러 개혁이 급격하게 추진된다. 이러한 개혁의 주요 내용으로는 1부6조제를 택한 조선의 행정관제를 개혁하여 의정부와 사간원을 합치너 문하부로 개편하고 승정원을 승선부(承宣府)로 개편하여 1부(府) 6조(曹)제에서 2부(府) 6부(部)제로 개편하며, 삼군부를 원수부로 개칭하여 삼군부를 근대적인 참모본부로 개조하였다. 이후 1882년 병부를 육군부와 해군부로 나누었고, 이후 1883년 외부, 내부, 법부, 농부, 상부, 공부, 육군부, 해군부로 개편하여 최종적으로 2부 8부의 형태로 정착시키는 행정개혁과, 독일 군사고문단 초빙, 프로이센식 내각 체제 도입,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 구 양반중 일부를 공족, 그 이외를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새롭게 성장한 보부상이나 조정 관료 등을 새롭게 공족으로서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승선부의 지배 하에 두어 전제 왕권을 강화한다. 동시에 학제(学制) 개혁, 지조(地租) 개정,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등이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개화정책의 추진은 조선을 험난한 국제정세속에서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었다. 이러한 성조의 근대화 정책을 현대 한국에서는 어일신(御一新)이라고 칭한다.

우발적인 전쟁

1884년 청불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며 다시 한 번 청나라의 취약함이 드러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일본등이 중국에 대하여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조선도 호시탐탐 청나라를 노리게 된다.

1893년 1월 1일을 기해 성조는 기존의 제후국 예법을 버린다. 이때 국왕의 명칭은 바꾸지 않았으나, 예법을 황제와 걸맞게 바꾸었다.

1893년 2월 조선은 대일본제국 헌법을 본딴 국제대요를 반포한다. [3] 그러나 1893년 헌법대요에서 광서 연호 대신 개국기원 연호를 사용한 사실을 청나라에 들켰고, 격분한 청은 조선에 엄중한 경고를 내리며 양국은 병자호란 이래 최악의 관계에 놓인다.

이 헌법에서는 청나라의 연호인 광서가 아닌 개국기원 연호를 사용하여 청나라를 자극했다. 청나라는 격분하여 조선 내각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조선도 이에 항의하며 양국의 관계과 악화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상무위원(사실상 공사)으로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사사건건 내정간섭을 시도하나, 조선에 서의 간첩행위로 적발되어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추방되고 양국간의 관계는 병자호란 이래 최악을 맞이한다.

이렇듯 악화일로를 걷던 양국에 한 가지 폭탄이 떨어지게 된다. 1892년부터 청나라가 간도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에 대한 강경책을 펼치자 이에 저항하던 조선인들을 무참히 탄압하는 간도참변이 발생한다. 간도참변이 진행되던 1894년 조선 육군 1사단 2연대가 독단적으로 국경을 월경하여 길림장군 휘하의 청군을 궤멸시키고 간도의 정착촌을 해방시켰다. [5] 이른바 간도출병이었다. 성조와 군부는 간도출병으로 보불전쟁처럼 단기 결전에서 승산이 있다는 확신을 얻었고,강경 노선을 천명한다. 이에 청나라는 격분하여 책임자의 주살과 사죄사의 파견,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개정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만국공법에 따른 정당한 주권 행사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결국 청나라는 조선과 국왕인 성조의 죄상이 자명하다며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기 시작했고, 조선도 이에 맞서 군대를 증원했다.

조청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임오중흥 이래 맹방이나 다름 없던 일본이 양국의 군사동맹을 제안하여 제1차 조일맹약이 채결되고 성조는 일본과의 동맹을 기점으로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는 한편 국교를 단절하고 자주국을 선포했다.

이렇게 삼국간의 긴장이 높아지던 이때 7월 25일 황해 뤼순 부근에서 일본 해군이 청 해군을 기습 선제공격하며 전쟁이 시작된다. 일본군의 기습적인 공격이 성공하자, 전황은 조일연합군에 기울었다. 성조는 원수부를 평양으로 옮기어 친정에 나섰고, 이에 청나라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조일 연합군에 반격을 시도하였지만, 서구화에 성공한 조선과 일본의 군대는 부패하고 전근대적인 청군의 싸움은 비교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조선은 남만주를 점령, 일본은 뤼순을 점령하고 해상에서는 연합함대가 황해해전과 웨이하이 전투로 북양함대를 궤멸시켰다. 결국 청은 강화 협상을 진행하여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하고, 요동 반도, 대만과 부속 도서, 펑후를 일본에 할양하고 남만주를 조선에 넘기며 조선 정부 고평은 2억 냥을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조일 양국을 최혜국으로 대우하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심기가 불편해진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 제국에 대대적인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였고, 일본은 뤼순을, 조선은 간도를 제외한 남만주를 토해내게 된다. 이는 훗날 제2차 동아대전의 계기 가 되었다.

두번째 도전

제1차 동아대전의 승리 이후 전국적으로 칭제건원에 대한 열망이 성조되었다. 이에 성조는 원구단을 축조하고 연호를 태시(建武)로 정하고 원구단에서 황제의 자격으로 고유제를 거행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여 새로운 천자국 대한제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제국으로 변하듯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또한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의화단 반란으로 대한제국이 남만주, 러시아가 북만주를 점령하며 긴장이 고조되었고, 제2차 동아대전 이 발발한다. 기습적인 한일 연합군의 선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무수한 피의 산을 쌓았으나 결국 한일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이 전쟁으로 대한제국은 남만주를, 일본은 뤼순과 남사할린을 차지하며 성조는 절대적인 권위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대한제국은 이를 기점으로 동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은 패권국임을 공인받게 되었다.

말년

말년의 성조는 서구에서 들어온 운동인 정구(庭球 테니스)를 즐기며 건강을 회복하고 정사를 돌보기 시작한다. 이 시기 성조는 적극적으로 지방을 순행하고 현장을 돌아보며 두 전쟁과 급작스러운 근대화로 피폐해진 민중을 위문하고 친위독재정을 강화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1913년 지방순행에서 폭우로 폐렴을 얻은 이후 다시 성조는 병으로 골골되며 정치에 손을 놓게 되고, 정무는 황태자가 대행하게 된다. 결국 1920년 3월 29일 왕은 자신이 중건한 경복궁의 거대한 서양식 전각인 태극전에서 붕어한다. 사후 덕(德)을 지켜 업(業)을 높였다 하여 성조의 묘호를 받는다.

평가

성조는 평생 잔병을 달고 살며 실제로 친정을 한 것은 10년도 안될 정도였다. 그러나 성조가 즉위하던 시절은 조선의 왕이 아닌 천지개벽의 시대였고, 능력있는 신하들을 믿어주며 매우 험난한 조선의 근대화를 방해 없이 추진되도록 하였고, 젊었던 급진 개화파가 폭주하는 것을 능숙하게 조정하고 비록 모두가 만족하지는 못하더라도 받아들일 수준의 타협점을 제시함으로써 분란을 최대한 방지하였다.

상단의 내용만 본다면 성조는 허수아비 군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자신의 병이 났자 곧바로 전제왕권을 휘둘렀고, 전제왕권을 휘두름에도 조정 중신들이 넢죽 기었다. 이는 국민교육을 통해 이 나라의 나랏님이자 성군으로 추앙받게 된 막강한 권위도 존재하지만, 성조의 중재 능력이나 탁월한 국제정치적 견해와 판단력을 신하들이 경외시한 점도 있다.

여담

  • 아버지 덕조를 상당히 그리워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요절하자 자식으로써 아버지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덕조의 잠저인 용흥궁을 성대하게 복원하고 아버지 덕조의 위패를 태묘 정전의 불천위로 지정하는 등 사후라도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 외모가 뛰어났다. 이는 모후인 철인장황후의 영향이 컸다고 하며, 성조의 후손들인 대한의 황족은 외모가 빼어난 경우가 굉장히 많다.

가계

어록

대중 매체에서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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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5~17시.
  2. 어린 아이일 때 쓸 이름.
  3. 정확하게 말하자면 국제대요는 예비헌법으로, 입헌방침을 채택한 상황에서 완전한 입헌주의로 나가기 전에 우선 헌법상 기본적인 내용들을 미리 선언한 것이었기에 법문 끝에 대요라는 말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