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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일본 제국이 포츠담 선언 수락을 거부하고 본토결전을 선언하면서 한반도 역시 전시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에 중국에 주둔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국)|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설국)|한국광복군]]은 미군과의 협력하에 국내로의 진공을 결정하였으며, [[1945년]] [[8월 18일]] [[국내진군 (설국)|국내진군]]을 개시하였다. | 1945년 8월 일본 제국이 포츠담 선언 수락을 거부하고 본토결전을 선언하면서 한반도 역시 전시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에 중국에 주둔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국)|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설국)|한국광복군]]은 미군과의 협력하에 국내로의 진공을 결정하였으며, [[1945년]] [[8월 18일]] [[국내진군 (설국)|국내진군]]을 개시하였다. | ||
이러한 진군작전이 계획되고 실행되기까지, 임시정부와 미국은 수십만에 달하는 조선 주둔 일본군을 수백에 불과한 광복군으로 대등한 전투를 벌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므로, 국내로의 진입 자체에 의의를 두고자 했다. 하지만 광복군의 국내진군을 미리 알고있던 지하언론이 진군 당일 기습적으로 광복군의 진군과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대서특필하여 배포하자, 전국 각지의 학생 조직, 노동 단체, 농민 조직이 일제히 봉기에 나섰다. 국내에서의 호응에 감격한 | 이러한 진군작전이 계획되고 실행되기까지, 임시정부와 미국은 수십만에 달하는 조선 주둔 일본군을 수백에 불과한 광복군으로 대등한 전투를 벌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므로, 국내로의 진입 자체에 의의를 두고자 했다. 하지만 광복군의 국내진군을 미리 알고있던 지하언론이 진군 당일 기습적으로 광복군의 진군과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대서특필하여 배포하자, 전국 각지의 학생 조직, 노동 단체, 농민 조직이 일제히 봉기에 나섰다. 국내에서의 호응에 감격한 임시정부는 [[8월 20일]] [[광복혁명선언 (설국)|광복혁명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의 통치권을 부정하고 민족국가의 복국과 대한민국의 환국 두 가지 층위에서 혁명을 선언하였다.<ref>[[조소앙 (설국)|조소앙]]이 작성하고 [[김구 (설국)|김구]]의 최종 수정을 거쳐 발표되었다.</ref> 이후 경성·평양·대구·광주·함흥 등 조선반도 주요 도시에서는 총독부 산하 행정기관과 경찰조직이 [[8.20 광복항쟁 (설국)|전민적 항쟁]]으로 인해 마비되었으며, 비슷한 시기 나진·청진까지 남하한 소련군은 평양과 원산까지만 진주하고, 사회주의 조직들과의 협력을 모색하면서 소련군이 이북을 관리하게 되었다. 한편 이남에서는 [[9월 5일]] 베이커-포티(Baker Forty) 작전이 시행됨에 따라 서울로 상륙한 미군이 이남의 통치조직을 지휘하게 되었다. 미국은 조선반도의 행정 공백을 막기 위해 기존 총독부 행정조직의 선별적 인수에 착수하였다. 총독부와 헌병·경찰 수뇌부 등 식민통치의 핵심 기관과 지방행정과 철도·통신·항만 등 국가 기반시설을 미군이 인계 받았다. 짧게는 이 시기까지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광복혁명 (설국)|광복혁명]]으로 본다. 길게는 광복정부 수립까지. | ||
이후 [[몰락 작전 (설국)|몰락 작전]]의 실행으로 일본의 패전이 가시화되면서 연합국 내부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직접 군정 또는 일정 기간의 국제 신탁통치가 검토되었다. 당시 미국 국무부와 군부 일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하나로 보았을 뿐, 조선을 대표하는 정식 정부로 인정하는 데에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연합국은 광복 직후 한반도에 존재하던 다양한 | 이후 [[몰락 작전 (설국)|몰락 작전]]의 실행으로 일본의 패전이 가시화되면서 연합국 내부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직접 군정 또는 일정 기간의 국제 신탁통치가 검토되었다. 당시 미국 국무부와 군부 일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하나로 보았을 뿐, 조선을 대표하는 정식 정부로 인정하는 데에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연합국은 광복 직후 한반도에 존재하던 다양한 정치세력의 영향력을 우려하며 직접적인 통제를 선호하였다. | ||
그러나 연합국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국내 여론은 매우 빠르게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광복군의 국내진군과 | 그러나 연합국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국내 여론은 매우 빠르게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광복군의 국내진군과 해방을 거치며 임시정부는 단순한 망명정부가 아닌 실질적인 해방의 지도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각지에서 조직된 인민위원회, 청년단체, 학생조직들 역시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상징적 지도부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해방 과정에서 희생된 인사들을 기리는 추모집회와 환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임시정부의 정치적 권위는 급격히 상승하였다. | ||
[[10월 10일]] 연합국이 군정 실시 및 신탁통치 가능성을 시사하자 전국적으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학생과 노동자, 종교인, 농민뿐만 아니라 우익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까지 참여한 대규모 항의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는 후일 [[10.15 민중항쟁 (설국)|10.15 민중항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항쟁의 성격은 반외세보다 “임시정부 승인”, “자주정부 수립”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 |||
항쟁이 전국적으로 벌어지자, 좌우각계 인사들은 [[10월 17일]] [[조선국민회의 (설국)|조선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조선국민회의에는 [[김구 (설국)|김구]]를 위시한 임시정부 내각과 광복군 장성, [[여운형 (설국)|여운형]]·[[조봉암 (설국)|조봉암]] 등 사회주의 진영 인사, [[안재홍 (설국)|안재홍]]·[[송진우 (설국)|송진우]] 등 국내 민족주의 계열 인사, [[김창숙 (설국)|김창숙]]을 비롯한 유림, 종교계 및 지방 대표들이 참여하였다.<ref>반면에 신탁통치를 지지한 이들로는, [[박헌영 (설국)|박헌영]]과 일부 친일 관료와 대지주 세력.</ref> 조선국민회의는 연합국에 대해 군정 및 신탁통치 반대 결의안을 채택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 수립을 요구하였다. | |||
[[10.15 민중항쟁|전국적 규모의 항쟁]]과 조선국민회의의 결성은 연합국의 셈법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 미국은 몰락작전의 준비로 인해 병력을 일본 본토전에 집중해야 했으며, 독일 점령과 전후 복구 사업까지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에서 군정을 장기화할 경우 사회주의 세력이 성장하여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될 가능성을 크게 우려했다. 반면 임시정부와 조선국민회의는 이미 전국적 지지와 일정 수준의 행정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ref>조선국민회의에는 독립운동가와 식자층 뿐 아니라 지방의 유지들과 통치기관의 관료들 역시 존재했다.</ref> 이에 미국은 조선에 대한 직접 통치보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 수립이 자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하였으며, 소련 역시 전국적 규모의 임정 지지 여론과 조선국민회의의 존재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결국 연합군은 2년 이내의 정부 수립을 조건으로 임시정부의 권위를 사실상 인정하게 되었다. | |||
[[1946년]] [[7월]]에는 광복 이후 최초의 전국 단위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이를 통해 구성된 임시국회는 같은 달 개원하여 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하였다. 조소앙의 삼균주의 사상과 임시정부 헌정 전통을 바탕으로 작성된 [[광복헌법 (설국)|광복헌법]]은 주권재민, 민주공화제, 사회권 보장, 토지개혁의 원칙 등을 규정하였다. 이후 [[1947년]] [[3월 1일]] 국회 간선을 통해 대한민국 광복정부가 공식 수립되었으며, 김구가 대통령, 김규식이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 |||
삼일절에 맞추어 출범한 [[제1차 광복정부 (설국)|제1차 광복정부]]는 우선 식민지 잔재 청산에 착수하였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와 반민족행위특별재판소가 설치되어 고위 친일 관료와 경찰, 군인, 경제인들에 대한 조사와 재판이 진행되었다. 광복혁명 과정에서 친일 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청산 작업은 속도감있게 추진될 수 있었다. 농지개혁 또한 광복정부 초기의 핵심 정책이었다. 정부는 대지주의 토지를 유상매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는 방식의 개혁을 실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농촌 사회의 불만을 완화하고 민주공화국의 기반을 전국토로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봉암 등 중도좌익 세력이 내각에 합류했다. | |||
[[1949년]] [[3월]] 대통령 직선제 선거를 통해 출범한 [[제2차 광복정부 (설국)|제2차 광복정부]]에서는 김구가 대통령으로 재선출되었으며,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설국)|지청천]]이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당시 정부는 친일 청산의 마무리와 국군 창설이라는 중대 과제를 안고 있었다. 대통령의 지원을 바탕으로, 지청천을 중심으로한 내각은 기존 광복군과 지방 무장조직, 치안대를 통합하여 정규 국군을 창설하였으며, 국가 차원의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동시에 광복혁명 과정에서 형성된 무장세력을 정부 아래 편입함으로써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 |||
한편 광복정부 후기로 갈수록 초기의 좌우합작 체제는 점차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 세력은 보다 급진적인 사회개혁과 권력구조 개편을 요구하였고, 범우익 진영은 공화국의 안정과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에 김구는 광복혁명 세대의 상징으로서 좌우 진영을 중재하고자 노력했으나, [[1949년]] [[6월 26일]] 평양에서 암살되면서 광복정부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ref>범인은 공산주의 성향의 청년으로 알려졌으나, 배후를 둘러싼 논란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다.</ref> 후일 ‘[[6.26 국난 (설국)|6.26 국난]]’이라 불린 이 사건을 계기로 광복혁명 세대는 구심점을 상실했으며, 이후 정치권은 급속히 재편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헌법 절차에 따라 국화가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신익희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으나, 광복정부를 지탱하던 좌우합작 체제는 붕괴됐다. | |||
김구 사후 정치권에서는 광복 직후의 과도체제를 종식하고 보다 안정적이면서 좀 더 좌익적인 공화국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다. 이에 국회는 새로운 헌법 제정을 추진하였으며, 장기간의 국가 운영에 적합한 의원내각제 중심의 헌정질서가 채택되었다. 마침내 [[1950년]] [[8월]] [[조선공화국 헌법 (설국)|조선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고, [[8월 23일]] 대한민국 광복정부는 공식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
== 의의 == | |||
대한민국 광복정부는 [[광복혁명 (설국)|광복혁명]]의 성과 위에 수립된 민족사 최초의 실효 공화정부이자,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현실의 국가 권력으로 구현한 정부였다. 광복정부는 광복군의 전국적인, 전민적인 혁명을 통해 확보된 정통성을 바탕으로 임시국회를 개원하고 광복헌법을 제정하여 민주공화국의 헌정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기존 행정조직의 인계, 국군 창설, 지방행정 재건 등을 추진함으로써 식민지 체제를 안정적으로 자주적인 국민국가 체제로 전환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 |||
아울러 광복정부는 민족주의·사회주의·종교계·유림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한 광범위한 연립정부로서 좌우합작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정부는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농지개혁 등 광복 직후의 주요 사회현안에 대응하며 새로운 국가의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박헌영 독재를 타도하고 대한민국을 복원한 [[복국혁명 (설국)|복국혁명]] 이후에는 민주공화정의 원형이자 정통성의 근원으로 더욱 높은 역사적 위상을 갖게 되었다. | |||
== 역대 정부 == | == 역대 정부 == | ||
2026년 6월 12일 (금) 23:1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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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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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大韓民國 | Republic of Korea 光復政部 | Liberation Governmen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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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기 (1947~1949) | 국장 (1947~1949) | ||||||||||
| 국기 (1949~1950) | 국장 (1949~1950) | ||||||||||
| 광복혁명 光復革命 | |||||||||||
| 상징 | |||||||||||
| 국가 | 애국가 | ||||||||||
| 준국가 | 국기가 | ||||||||||
| 국화 | 무궁화 | ||||||||||
| 위치 | |||||||||||
| 수립 이전 | 헌법 개정 이후 |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조선공화국 | ||||||||||
| 연합국 관리하 조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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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 광복정부(大韓民國 光復政府)는 광복혁명의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의 과도적 헌정체제이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최초의 실효 정부이며, 후대 복국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광복정부를 현대 국가의 직접적인 기원으로 규정한다.
광복정부는 1945년 광복군의 국내진군과 전국각지의 민중봉기가 결합된 광복혁명을 통해 수립되었으며, 초대 대통령 김구와 국무총리 김규식을 중심으로 민족 국가의 재건과 민주공화국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농지개혁과 반민족행위자 처벌, 좌우통합 등 여러 범국가적 개혁이 추진되었으나, 이후 김구의 피살로 전환기를 맞았고, 1950년 조선공화국 헌법이 제정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역사
1945년 8월 일본 제국이 포츠담 선언 수락을 거부하고 본토결전을 선언하면서 한반도 역시 전시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에 중국에 주둔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은 미군과의 협력하에 국내로의 진공을 결정하였으며, 1945년 8월 18일 국내진군을 개시하였다.
이러한 진군작전이 계획되고 실행되기까지, 임시정부와 미국은 수십만에 달하는 조선 주둔 일본군을 수백에 불과한 광복군으로 대등한 전투를 벌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므로, 국내로의 진입 자체에 의의를 두고자 했다. 하지만 광복군의 국내진군을 미리 알고있던 지하언론이 진군 당일 기습적으로 광복군의 진군과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대서특필하여 배포하자, 전국 각지의 학생 조직, 노동 단체, 농민 조직이 일제히 봉기에 나섰다. 국내에서의 호응에 감격한 임시정부는 8월 20일 광복혁명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의 통치권을 부정하고 민족국가의 복국과 대한민국의 환국 두 가지 층위에서 혁명을 선언하였다.[3] 이후 경성·평양·대구·광주·함흥 등 조선반도 주요 도시에서는 총독부 산하 행정기관과 경찰조직이 전민적 항쟁으로 인해 마비되었으며, 비슷한 시기 나진·청진까지 남하한 소련군은 평양과 원산까지만 진주하고, 사회주의 조직들과의 협력을 모색하면서 소련군이 이북을 관리하게 되었다. 한편 이남에서는 9월 5일 베이커-포티(Baker Forty) 작전이 시행됨에 따라 서울로 상륙한 미군이 이남의 통치조직을 지휘하게 되었다. 미국은 조선반도의 행정 공백을 막기 위해 기존 총독부 행정조직의 선별적 인수에 착수하였다. 총독부와 헌병·경찰 수뇌부 등 식민통치의 핵심 기관과 지방행정과 철도·통신·항만 등 국가 기반시설을 미군이 인계 받았다. 짧게는 이 시기까지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광복혁명으로 본다. 길게는 광복정부 수립까지.
이후 몰락 작전의 실행으로 일본의 패전이 가시화되면서 연합국 내부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직접 군정 또는 일정 기간의 국제 신탁통치가 검토되었다. 당시 미국 국무부와 군부 일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하나로 보았을 뿐, 조선을 대표하는 정식 정부로 인정하는 데에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연합국은 광복 직후 한반도에 존재하던 다양한 정치세력의 영향력을 우려하며 직접적인 통제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연합국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국내 여론은 매우 빠르게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광복군의 국내진군과 해방을 거치며 임시정부는 단순한 망명정부가 아닌 실질적인 해방의 지도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각지에서 조직된 인민위원회, 청년단체, 학생조직들 역시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상징적 지도부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해방 과정에서 희생된 인사들을 기리는 추모집회와 환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임시정부의 정치적 권위는 급격히 상승하였다.
10월 10일 연합국이 군정 실시 및 신탁통치 가능성을 시사하자 전국적으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학생과 노동자, 종교인, 농민뿐만 아니라 우익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까지 참여한 대규모 항의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는 후일 10.15 민중항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항쟁의 성격은 반외세보다 “임시정부 승인”, “자주정부 수립”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항쟁이 전국적으로 벌어지자, 좌우각계 인사들은 10월 17일 조선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조선국민회의에는 김구를 위시한 임시정부 내각과 광복군 장성, 여운형·조봉암 등 사회주의 진영 인사, 안재홍·송진우 등 국내 민족주의 계열 인사, 김창숙을 비롯한 유림, 종교계 및 지방 대표들이 참여하였다.[4] 조선국민회의는 연합국에 대해 군정 및 신탁통치 반대 결의안을 채택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 수립을 요구하였다.
전국적 규모의 항쟁과 조선국민회의의 결성은 연합국의 셈법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 미국은 몰락작전의 준비로 인해 병력을 일본 본토전에 집중해야 했으며, 독일 점령과 전후 복구 사업까지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에서 군정을 장기화할 경우 사회주의 세력이 성장하여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될 가능성을 크게 우려했다. 반면 임시정부와 조선국민회의는 이미 전국적 지지와 일정 수준의 행정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5] 이에 미국은 조선에 대한 직접 통치보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 수립이 자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하였으며, 소련 역시 전국적 규모의 임정 지지 여론과 조선국민회의의 존재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결국 연합군은 2년 이내의 정부 수립을 조건으로 임시정부의 권위를 사실상 인정하게 되었다.
1946년 7월에는 광복 이후 최초의 전국 단위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이를 통해 구성된 임시국회는 같은 달 개원하여 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하였다. 조소앙의 삼균주의 사상과 임시정부 헌정 전통을 바탕으로 작성된 광복헌법은 주권재민, 민주공화제, 사회권 보장, 토지개혁의 원칙 등을 규정하였다. 이후 1947년 3월 1일 국회 간선을 통해 대한민국 광복정부가 공식 수립되었으며, 김구가 대통령, 김규식이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삼일절에 맞추어 출범한 제1차 광복정부는 우선 식민지 잔재 청산에 착수하였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와 반민족행위특별재판소가 설치되어 고위 친일 관료와 경찰, 군인, 경제인들에 대한 조사와 재판이 진행되었다. 광복혁명 과정에서 친일 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청산 작업은 속도감있게 추진될 수 있었다. 농지개혁 또한 광복정부 초기의 핵심 정책이었다. 정부는 대지주의 토지를 유상매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는 방식의 개혁을 실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농촌 사회의 불만을 완화하고 민주공화국의 기반을 전국토로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봉암 등 중도좌익 세력이 내각에 합류했다.
1949년 3월 대통령 직선제 선거를 통해 출범한 제2차 광복정부에서는 김구가 대통령으로 재선출되었으며,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이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당시 정부는 친일 청산의 마무리와 국군 창설이라는 중대 과제를 안고 있었다. 대통령의 지원을 바탕으로, 지청천을 중심으로한 내각은 기존 광복군과 지방 무장조직, 치안대를 통합하여 정규 국군을 창설하였으며, 국가 차원의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동시에 광복혁명 과정에서 형성된 무장세력을 정부 아래 편입함으로써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한편 광복정부 후기로 갈수록 초기의 좌우합작 체제는 점차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 세력은 보다 급진적인 사회개혁과 권력구조 개편을 요구하였고, 범우익 진영은 공화국의 안정과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에 김구는 광복혁명 세대의 상징으로서 좌우 진영을 중재하고자 노력했으나, 1949년 6월 26일 평양에서 암살되면서 광복정부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6] 후일 ‘6.26 국난’이라 불린 이 사건을 계기로 광복혁명 세대는 구심점을 상실했으며, 이후 정치권은 급속히 재편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헌법 절차에 따라 국화가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신익희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으나, 광복정부를 지탱하던 좌우합작 체제는 붕괴됐다.
김구 사후 정치권에서는 광복 직후의 과도체제를 종식하고 보다 안정적이면서 좀 더 좌익적인 공화국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다. 이에 국회는 새로운 헌법 제정을 추진하였으며, 장기간의 국가 운영에 적합한 의원내각제 중심의 헌정질서가 채택되었다. 마침내 1950년 8월 조선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고, 8월 23일 대한민국 광복정부는 공식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의의
대한민국 광복정부는 광복혁명의 성과 위에 수립된 민족사 최초의 실효 공화정부이자,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현실의 국가 권력으로 구현한 정부였다. 광복정부는 광복군의 전국적인, 전민적인 혁명을 통해 확보된 정통성을 바탕으로 임시국회를 개원하고 광복헌법을 제정하여 민주공화국의 헌정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기존 행정조직의 인계, 국군 창설, 지방행정 재건 등을 추진함으로써 식민지 체제를 안정적으로 자주적인 국민국가 체제로 전환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울러 광복정부는 민족주의·사회주의·종교계·유림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한 광범위한 연립정부로서 좌우합작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정부는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농지개혁 등 광복 직후의 주요 사회현안에 대응하며 새로운 국가의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박헌영 독재를 타도하고 대한민국을 복원한 복국혁명 이후에는 민주공화정의 원형이자 정통성의 근원으로 더욱 높은 역사적 위상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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