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맥거번 (비바 케네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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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5" style="background: #214388;" | [[파일:Seal_of_the_United_States_Senate.svg|30px|link=미국 상원]] [[미국 상원|{{글씨 색|#FFF|미국 상원의원}}]] [[사우스다코타|{{글씨 색|#FFF|(사우스다코타 클래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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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 30%; background: #FFF; color: #000;" | 제87대<br>[[조지프 H. 버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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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 30%; background: #FFF; color: #000;" | 제88~93대<br>조지 맥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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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 30%; background: #FFF; color: #000;" | 제93~99대<br>[[하비 울먼]]<ref>리처드 F. 닙(민주당) 사우스다코타 주지사에 의해 임명됨, 1974년 특별선거에서 재선에 성공.</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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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 (비바 케네디)}}
{{역대 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 (비바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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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기 1기 ===
=== 임기 1기 ===
[[파일:1972_미_대선.png|350px|썸네일|오른쪽|[[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
[[파일:1972_미_대선.png|350px|썸네일|오른쪽|[[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
1972년 대선을 앞둔 [[리처드 닉슨 (비바 케네디)|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 초반으로 내려가있었다. [[베트남 전쟁 (비바 케네디)|베트남 전쟁]]의 참상이 널리 알려진데다, [[닉슨쇼크 (비바 케네디)|닉슨쇼크]](금태환 중지)로 인한 경제난이 미국 전체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 내에서는 차기 대통령 후보를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구도는 크게 험프리파의 지지를 받은 [[에드먼드 머스키 (비바 케네디)|에드먼드 머스키]] 대 케네디파의 지지를 받은 조지 맥거번으로 나뉘었다. 또다른 유력 후보였던 보수파 [[조지 월리스 (비바 케네디)|조지 월리스]]가 총격을 받아 출마를 포기하면서 구도는 양자 대결로 굳혀졌는데, 근소하게 맥거번의 승리로 끝났다. 경선 직후 [[존 F. 케네디 (비바 케네디)|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맥거번의 지지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면서 맥거번은 민주당 지지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또한 초당적 지지를 위해 험프리 전 부통령의 측근이었던 [[월터 먼데일 (비바 케네디)|월터 먼데일]]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ref>맥거번 본인은 [[테드 케네디 (비바 케네디)|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을 선호했으나, 테드 케네디 자신과 험프리 상원의원이 먼데일을 추천했다.</ref> 그러나 당내 보수파는 강경 좌파 성향이었던 맥거번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리처드 닉슨 (비바 케네디)|리처드 닉슨]]은 민주당의 대표적인 우파 정치인이었던 [[존 코널리 (비바 케네디)|존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를 부통령 후보로 교체하면서 민주당의 분열을 유도했다.
1972년 대선을 앞둔 [[리처드 닉슨 (비바 케네디)|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 초반으로 내려가있었다. [[베트남 전쟁 (비바 케네디)|베트남 전쟁]]의 참상이 널리 알려진데다, [[닉슨쇼크 (비바 케네디)|닉슨쇼크]](금태환 중지)로 인한 경제난이 미국 전체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 내에서는 차기 대통령 후보를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구도는 크게 험프리파의 지지를 받은 [[에드먼드 머스키 (비바 케네디)|에드먼드 머스키]] 대 케네디파의 지지를 받은 조지 맥거번으로 나뉘었다. 또다른 유력 후보였던 보수파 [[조지 월리스 (비바 케네디)|조지 월리스]]가 총격을 받아 출마를 포기하면서 구도는 양자 대결로 굳혀졌는데, 근소하게 맥거번의 승리로 끝났다. 경선 직후 [[존 F. 케네디 (비바 케네디)|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맥거번의 지지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면서 맥거번은 민주당 지지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또한 초당적 지지를 위해 [[필립 하트 (비바 케네디)|필립 하트]]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ref>맥거번 본인은 [[테드 케네디 (비바 케네디)|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을 선호했으나, 테드 케네디 자신과 험프리 상원의원이 필 하트를 추천했다.</ref> 그러나 당내 보수파는 강경 좌파 성향이었던 맥거번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리처드 닉슨 (비바 케네디)|리처드 닉슨]]은 민주당의 대표적인 우파 정치인이었던 [[존 코널리 (비바 케네디)|존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를 부통령 후보로 교체하면서 민주당의 분열을 유도했다.


초반에는 미국판 보수대연합을 구상한 리처드 닉슨이 현역 프리미엄까지 얻어 근소하게 우세할 것으로 점쳐졌지만, 선거 운동이 진행되며 대선의 구도는 전반적으로 맥거번의 우세로 기울었다. 1972년 10월의 1차 토론회에서 맥거번이 닉슨을 제압한데다가, 닉슨의 첫번째 부통령이었던 [[스피로 애그뉴 (비바 케네디)|스피로 애그뉴]]의 심각한 부패 혐의가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닉슨은 최후의 발악으로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추태까지 벌였지만 이것이 [[워싱턴포스트 (비바 케네디)|워싱턴포스트]] 기자들에 의해 폭로되며 대선일에 닉슨의 지지율은 대폭락했다. 결국 리처드 닉슨은 북부 대부분의 주에서 패배하며 [[허버트 후버 (비바 케네디)|허버트 후버]] 이후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안게 되었다. 조지 맥거번은 유효표의 49.4%, 선거인단 286인을 얻으며 제37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초반에는 미국판 보수대연합을 구상한 리처드 닉슨이 현역 프리미엄까지 얻어 근소하게 우세할 것으로 점쳐졌지만, 선거 운동이 진행되며 대선의 구도는 전반적으로 맥거번의 우세로 기울었다. 1972년 10월의 1차 토론회에서 맥거번이 닉슨을 제압한데다가, 닉슨의 첫번째 부통령이었던 [[스피로 애그뉴 (비바 케네디)|스피로 애그뉴]]의 심각한 부패 혐의가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닉슨은 최후의 발악으로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추태까지 벌였지만 이것이 [[워싱턴포스트 (비바 케네디)|워싱턴포스트]] 기자들에 의해 폭로되며 대선일에 닉슨의 지지율은 대폭락했다. 결국 리처드 닉슨은 북부 대부분의 주에서 패배하며 [[허버트 후버 (비바 케네디)|허버트 후버]] 이후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안게 되었다. 조지 맥거번은 유효표의 49.4%, 선거인단 286인을 얻으며 제37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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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맥거번 행정부에서 있었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이었다. 대법원에서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에 접근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가 헌법에 합치한다고 판결했으며, 이는 미국 50개주에서 낙태가 합법화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이 조치를 환영하고 여성의 생식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법을 의회에 주문했다. 1973년 12월 17일, 미국 상원은 [[테드 케네디 (비바 케네디)|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비바 케네디)|에이브러햄 리비코프]] 상원의원의 주도 하에 여성의 생식권을 위한 보편적 의료 복지와 안전한 피임을 홍보하는 [[케네디-리비코프 생식권 보장법 (비바 케네디)|케네디-리비코프 생식권 보장법]](Kennedy-Ribicoff Reproductive Security Act, 1973)을 59대 38로 통과시켰다.
조지 맥거번 행정부에서 있었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이었다. 대법원에서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에 접근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가 헌법에 합치한다고 판결했으며, 이는 미국 50개주에서 낙태가 합법화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이 조치를 환영하고 여성의 생식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법을 의회에 주문했다. 1973년 12월 17일, 미국 상원은 [[테드 케네디 (비바 케네디)|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비바 케네디)|에이브러햄 리비코프]] 상원의원의 주도 하에 여성의 생식권을 위한 보편적 의료 복지와 안전한 피임을 홍보하는 [[케네디-리비코프 생식권 보장법 (비바 케네디)|케네디-리비코프 생식권 보장법]](Kennedy-Ribicoff Reproductive Security Act, 1973)을 59대 38로 통과시켰다.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NASA의 여러 우주 업적을 지켜보며 임페리얼 단위로는 세계를 아우르는 과학 기술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해 미터법 도입을 추진하였다. 맥거번 대통령은 이를 행정조치 2365호로 통과시켰으며, 미국 국내에서 반발이 있었으나 10년이라는 긴 유예 기간을 두고 병행표기하게 함으로서 국민의 반발을 최소화했다. 맥거번 대통령의 임기 내에 미터법이 미국에 완전히 정착하지는 못했으나, 제럴드 포드 대통령 역시 당이 달랐음에도 이 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1980년대에는 "마일"이 구시대의 것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을 정도로 미터법이 표준화되었다.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NASA의 여러 우주 업적을 지켜보며 임페리얼 단위로는 세계를 아우르는 과학 기술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해 미터법 도입을 추진하였다. 맥거번 대통령은 이를 행정조치 2365호로 통과시켰으며, 미국 국내에서 반발이 있었으나 10년이라는 긴 유예 기간을 두고 병행표기하게 함으로서 국민의 반발을 최소화했다. 맥거번 대통령의 임기 내에 미터법이 미국에 완전히 정착하지는 못했으나, [[마이클 록펠러 (비바 케네디)|마이클 록펠러]] 대통령 역시 당이 달랐음에도 이 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1980년대에는 "마일"이 구시대의 것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을 정도로 미터법이 표준화되었다.


맥거번 행정부는 페미니즘적인 의제를 추진한 첫 정부로서 기록되었으며, 맥거번 스스로도 페미니즘 행정부라는 별명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조지 맥거번은 [[베티 프리단]], [[셜리 치좀]],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 온건한 페미니즘 운동가들과 여러차례 만남을 가지고 여성을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맥거번은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대신 과부에게는 사회보장급여와 위자료, 나이든 여성에게는 직업훈련, 이혼한 여성에게는 양육권을 보장하는 삶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온건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맥거번 행정부는 사회 보장 혜택을 확대하고 개선하는 조치를 시행하여 여성 인권을 크게 신장시켰다.
맥거번 행정부는 페미니즘적인 의제를 추진한 첫 정부로서 기록되었으며, 맥거번 스스로도 페미니즘 행정부라는 별명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조지 맥거번은 [[베티 프리단]], [[셜리 치좀]],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 온건한 페미니즘 운동가들과 여러차례 만남을 가지고 여성을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맥거번은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대신 과부에게는 사회보장급여와 위자료, 나이든 여성에게는 직업훈련, 이혼한 여성에게는 양육권을 보장하는 삶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온건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맥거번 행정부는 사회 보장 혜택을 확대하고 개선하는 조치를 시행하여 여성 인권을 크게 신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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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기 2기 ===
=== 임기 2기 ===
[[파일:1976_미_대선.png|350px|썸네일|오른쪽|[[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
[[파일:1976_미_대선.png|350px|썸네일|오른쪽|[[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
1976년 대선을 앞둔 조지 맥거번 대통령의 지지율은 60%대 초반에 육박했으며, 재선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민주당에서 조지 맥거번은 만장 일치로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었다. 공화당에서는 온건파 [[제럴드 포드 (비바 케네디)|제럴드 포드]], 전 뉴욕주지사 [[넬슨 록펠러 (비바 케네디)|넬슨 록펠러]], 초강경파 [[로널드 레이건 (비바 케네디)|로널드 레이건]], 중도우파 [[조지 H. W. 부시 (비바 케네디)|조지 H. W. 부시]], 닉슨파의 지지를 받은 [[존 코널리 (비바 케네디)|존 코널리]] 등이 경쟁했다. 각 후보의 지지율이 워낙 경합이었기에 공화당 경선은 시작도 전에 내분으로 흘러갔으며, 경선에서 매우 근소한 차이로 레이건이 1위를, 포드가 2위를, 부시가 3위를 차지하면서 1976년 공화당 전당대회(RNC)는 경선 결과를 불복하는 각 후보자 지지자들의 난투극으로 마무리되었다.
1976년 대선을 앞둔 조지 맥거번 대통령의 지지율은 60%대 초반에 육박했으며, 재선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민주당에서 조지 맥거번은 만장 일치로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었다. 공화당에서는 온건파 [[마이클 록펠러 (비바 케네디)|마이클 록펠러]], 전 뉴욕주지사 [[넬슨 록펠러 (비바 케네디)|넬슨 록펠러]], 초강경파 [[로널드 레이건 (비바 케네디)|로널드 레이건]], 중도우파 [[조지 H. W. 부시 (비바 케네디)|조지 H. W. 부시]], 닉슨파의 지지를 받은 [[존 코널리 (비바 케네디)|존 코널리]]등이 경쟁했다. 각 후보의 지지율이 워낙 경합이었기에 공화당 경선은 시작도 전에 내분으로 흘러갔으며, 경선에서 매우 근소한 차이로 레이건이 1위를, 록펠러가 2위를, 부시가 3위를 차지하면서 1976년 공화당 전당대회(RNC)는 경선 결과를 불복하는 각 후보자 지지자들의 난투극으로 마무리되었다.


선거운동 초반의 여론조사에서, 맥거번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60%의 지지를 받아, 38%의 지지를 받는데 그친 로널드 레이건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크게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맥거번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 철수, 미소 정상회담, SALT II 협정, 경제 회복 등 재임 기간 내의 성과를 언급하며 긍정적인 캠페인을 이어나간 반면, 레이건 대통령 측은 맥거번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TV 광고를 내보내며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맞섰다. 레이건 후보는 베트남에 다시 선전포고해 베트남에 자유를 되찾게 해야한다는 폭탄 같은 발언을 해 지지율이 크게 하락했고, 맥거번 대통령의 재선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더구나 레이건 후보는 평등권(ERA)에 반대하며 흑인, 여성, 소수자의 표를 모조리 잃고 말았다. 뒤이은 TV 토론회에서도 레이건이 평소와 달리 초조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인 반면, 맥거번 대통령은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판세가 뒤집어지지 않았다. 선거 결과, 조지 맥거번은 '''71.4%'''를 득표해 레이건의 25.7%를 크게 앞섰고, '''선거인단 538명 전원'''을 확보하며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대통령 선거 승리를 이루어냈다.
선거운동 초반의 여론조사에서, 맥거번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60%의 지지를 받아, 38%의 지지를 받는데 그친 로널드 레이건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크게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맥거번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 철수, 미소 정상회담, SALT II 협정, 경제 회복 등 재임 기간 내의 성과를 언급하며 긍정적인 캠페인을 이어나간 반면, 레이건 대통령 측은 맥거번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TV 광고를 내보내며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맞섰다. 레이건 후보는 베트남에 다시 선전포고해 베트남에 자유를 되찾게 해야한다는 폭탄 같은 발언을 해 지지율이 크게 하락했고, 맥거번 대통령의 재선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더구나 레이건 후보는 평등권(ERA)에 반대하며 흑인, 여성, 소수자의 표를 모조리 잃고 말았다. 뒤이은 TV 토론회에서도 레이건이 평소와 달리 초조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인 반면, 맥거번 대통령은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판세가 뒤집어지지 않았다. 선거 결과, 조지 맥거번은 '''71.4%'''를 득표해 레이건의 25.7%를 크게 앞섰고, '''선거인단 538명 전원'''을 확보하며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대통령 선거 승리를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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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번 대통령은 자신의 1기 임기 동안 큰 진척을 이룬 "미국 식량계획"을 국제적인 규모로 확장시켜 공산권 국가에 식량을 판매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촉구했다. 일부 극보수파 의원들이 반발하기도 하였으나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소련과 미국 사이 관계에서의 큰 도약일 뿐더러, 미국의 식량 수출에 의존하는 소련의 모습은 공산주의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서 홍보 효과가 있다"라는 이유를 들어 간신히 상원에서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 법안은 적국과의 교역을 확대시켰다는 비판을 받았고,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 (비바 케네디)|페레스트로이카]]로 소련이 시장을 개방할 때까지 성공적으로 진척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맥거번 대통령은 자신의 1기 임기 동안 큰 진척을 이룬 "미국 식량계획"을 국제적인 규모로 확장시켜 공산권 국가에 식량을 판매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촉구했다. 일부 극보수파 의원들이 반발하기도 하였으나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소련과 미국 사이 관계에서의 큰 도약일 뿐더러, 미국의 식량 수출에 의존하는 소련의 모습은 공산주의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서 홍보 효과가 있다"라는 이유를 들어 간신히 상원에서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 법안은 적국과의 교역을 확대시켰다는 비판을 받았고,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 (비바 케네디)|페레스트로이카]]로 소련이 시장을 개방할 때까지 성공적으로 진척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75년 파산에 이른 뉴욕시의 재정 상태로 인하여 [[존 린지 (비바 케네디)|존 린지]] 뉴욕 시장이 구제금융을 요청하자, 1977년 1월 맥거번은 재선과 동시에 160억 달러 규모의 뉴욕시 파산 구제법에 서명하였다. 하지만 이는 맥거번을 지지한 린지 시장에 대한 정치적 거래라는 논란이 일었고 맥거번 대통령은 이를 1회성 지급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이는 하나의 선례가 되어 재정이 부실했던 몇몇 도시에 대한 제한적인 제정 지원은 맥거번 행정부 뿐 아니라 후대의 포드, 테드 케네디 행정부 때에도 이루어졌다.
1975년 파산에 이른 뉴욕시의 재정 상태로 인하여 [[존 린지 (비바 케네디)|존 린지]] 뉴욕 시장이 구제금융을 요청하자, 1977년 1월 맥거번은 재선과 동시에 160억 달러 규모의 뉴욕시 파산 구제법에 서명하였다. 하지만 이는 맥거번을 지지한 린지 시장에 대한 정치적 거래라는 논란이 일었고 맥거번 대통령은 이를 1회성 지급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이는 하나의 선례가 되어 재정이 부실했던 몇몇 도시에 대한 제한적인 제정 지원은 맥거번 행정부 뿐 아니라 후대의 록펠러, 테드 케네디 행정부 때에도 이루어졌다.


베트남 전쟁 병역 기피자에 대한 전면적인 사면은 1978년 이루어졌다.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비양심적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 도중 징병을 기피하거나 병역에 저항한 사람들을 양심적 병역 회피자로서 전면적 사면을 실시했고, 이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국론 분열 이후의 국가적 치유와 화해를 촉진하는데 목표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사면 정책은 퇴역 군인이 사회에 복귀하고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확대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양심적 병역 기피자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참전용사와 보수층의 반발을 샀다. 1971년 ABC와의 인터뷰에서 "윈터솔져"라는 말로 유명해진 반전운동가 겸 참전용사 [[존 케리 (비바 케네디)|존 케리]] 하원의원<ref>3개의 퍼플하트 훈장과 은성 훈장, 동성 훈장 등 13개의 무공 훈장을 베트남에서 땄음에도 베트남 전쟁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민주당의 청년 반전파를 대표했다.</ref>은 병역기피자의 심정을 이해하나 더욱 긴 기간의 숙고와 사회적 통합이 부재했음을 비판했다.
베트남 전쟁 병역 기피자에 대한 전면적인 사면은 1978년 이루어졌다.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비양심적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 도중 징병을 기피하거나 병역에 저항한 사람들을 양심적 병역 회피자로서 전면적 사면을 실시했고, 이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국론 분열 이후의 국가적 치유와 화해를 촉진하는데 목표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사면 정책은 퇴역 군인이 사회에 복귀하고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확대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양심적 병역 기피자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참전용사와 보수층의 반발을 샀다. 1971년 ABC와의 인터뷰에서 "윈터솔져"라는 말로 유명해진 반전운동가 겸 참전용사 [[존 케리 (비바 케네디)|존 케리]] 하원의원<ref>3개의 퍼플하트 훈장과 은성 훈장, 동성 훈장 등 13개의 무공 훈장을 베트남에서 땄음에도 베트남 전쟁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민주당의 청년 반전파를 대표했다.</ref>은 병역기피자의 심정을 이해하나 더욱 긴 기간의 숙고와 사회적 통합이 부재했음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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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 ====
==== 외교 ====
* 미소 정상회담
조지 맥거번은 재선 성공 이후 개각에서 유진 매카시를 국무장관으로 유임시켰으며, 국가안보보좌관으로 [[해롤드 손더스 (비바 케네디)|해롤드 손더스]](Harold Saunders)를 임명했다. 해롤드 손더스는 1961년부터 1969년까지 존 F. 케네디 행정부에서 중동 및 남아메리카 외교 차관보를 지낸 인물로 잘 알려져있었다.
*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
 
* 파나마 운하 반환
1978년,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메나힘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을 [[켐프 데이비드]]로 초청해 12일간의 비밀 회담을 가지고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를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라 부르며, 이스라엘은 이 협정으로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게 돌려주게 되었다. 베긴 총리와 사다트 대통령은 이에 대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다만, 아랍 사회에서는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사려깊게 고려하지 못한 협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 이란-이라크 전쟁 개입, 이라크에 물자 지원, 그러나 병력 파견은 거부
[[파일:1980_Summer_Olympics_(Moscow)_boycotting_countries_(blue).svg|400px|썸네일|오른쪽|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한 국가들]]
* 이란 혁명 당시 이란과 평화 협정, 이란 신정부와 재수교
대소 외교에서 맥거번은 일반적으로 비둘기파의 전술을 사용했다. 그는 [[유진 매카시 (비바 케네디)|유진 매카시]] 국무장관을 소련으로 보내 [[알렉세이 코시긴 (비바 케네디)|알렉세이 코시긴]] 국무총리와 회담하게 하였으며, 이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비바 케네디)|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직접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이전 대중외교와 같은 절차를 밟았다. 미국과 소련은 1978년 SALT II(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협정을 체결, 핵무기 군축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동시에 조지 맥거번은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비판하며 [[1980 모스크바 올림픽 (비바 케네디)|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할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어떠한 정치적 세력에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다.<ref>국내적으로 무자헤딘에 지원을 보내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손더스 국가안보보좌관의 반대로 좌절되었다.</ref>
* SALT II 협정 체결
 
또다른 중요한 정책은 파나마 운하의 반환이었다. [[파나마 운하 (비바 케네디)|파나마 운하]]는 관타나모 수용소와 같이 미국의 실질적인 영토인 조차지로 남아있었는데, 이에 관해 파나마 정부가 항의하며 운하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국내적으로 파나마 운하가 가져다주는 막대한 경제적인 이익과 안보적인 이점을 고려해 신중하게 접근해야한다는 여론이 높았으나, 맥거번 행정부는 1977년 파나마의 주권을 우선적으로 인정하고 파나마가 미국에게 운하 이용에 있어 특혜를 주는 조건으로 파나마 운하를 당국 정부에게 반환하였다.
 
맥거번 행정부의 말기는 중동 외교로 요약될 수 있다. 1979년, [[이란 혁명 (비바 케네디)|이란 혁명]] 정국에서 맥거번 행정부는 이란 정부와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고자 했으나, [[이란 대사관 인질극 사건 (비바 케네디)|이란 대사관 인질극 사건]]이 일어나자 맥거번 정부는 단호하고도 확고한 대응을 주문했다. 인질을 구출하는 [[독수리 발톱 작전 (비바 케네디)|독수리 발톱 작전]]은 대성공하였으며 맥거번 행정부의 지지율은 독수리 발톱 작전의 성공 이전 42%에서 이후 68%로 급격하게 상승했다. 또한, 맥거번 행정부는 [[이란-이라크 전쟁 (비바 케네디)|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에 무기를 대여하는 무기대여법 발동을 승인하였으며 병력 파견을 거부하였다.


=== [[조지 맥거번 행정부 (비바 케네디)|조지 맥거번 행정부]] ===
=== [[조지 맥거번 행정부 (비바 케네디)|조지 맥거번 행정부]] ===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맥거번 후보가 승리하여 성립된 행정부로, 1973년 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존속했다. 부통령은 [[월터 먼데일 (비바 케네디)|월터 먼데일]](1973.01.20 ~ 1981.01.20)이었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맥거번 후보가 승리하여 성립된 행정부로, 1973년 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존속했다. 부통령은 [[필립 하트 (비바 케네디)|필립 하트]](1973.01.20 ~ 1976.12.26), [[월터 먼데일 (비바 케네디)|월터 먼데일]](1977.01.20 ~ 1981.01.20)이었다.


== 퇴임 후 활동 ==
== 퇴임 후 활동 ==
[[파일:1980_미_대선.png|350px|썸네일|오른쪽|[[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
1980년 대선에서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민주당 경선 후보로 [[유진 매카시 (비바 케네디)|유진 매카시]] 국무장관을 지지했다. 하지만 매카시는 인기 없던 맥거번 행정부의 인물로 낙인 찍힌 탓에 민주당의 신선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던 [[지미 카터 (비바 케네디)|지미 카터]] 조지아 주지사에게 경선에서 패하고 만다. 맥거번 대통령은 지미 카터의 유세를 도왔으며 카터 열풍으로 카터의 당선이 점쳐지기도 했지만 결국 [[마이클 록펠러 (비바 케네디)|마이클 록펠러]] 뉴욕 주 상원의원이 근소하게 대선에서 승리했다. 조지 맥거번은 1981년 1월 20일, [[마이클 록펠러 (비바 케네디)|마이클 록펠러]]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식에 참여한 후 사우스다코타에 위치한 자신의 목장으로 낙향했다.
{{-}}
 
대통령 퇴임 후 그는 자서전 집필 등의 활동으로 여생을 보냈으며, 민주당 내 좌파의 영수이자 원로로서 퇴임 후에도 민주당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4년 대선에서 [[월터 먼데일 (비바 케네디)|월터 먼데일]]을 지지했으나, 먼데일은 록펠러 대통령의 재선을 꺾지 못했다. 그러나 1988년 대선에서 맥거번이 지지한 [[테드 케네디 (비바 케네디)|테드 케네디]]는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강경좌파 성향이었으나 공화당 정치인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 사적으로 친한 사이였던 [[마이클 록펠러 (비바 케네디)|마이클 록펠러]] 대통령의 초청 하에 몇번이나 백악관을 방문하곤 했다.
 
맥거번이 말년에 집중한 것은 빈곤 퇴치 운동과 제3세계 식량 보급 운동이었다. 그는 1989년 1월 20일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테드 케네디 (비바 케네디)|테드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UN 식량안보대사로 발탁되었다. 조지 맥거번은 아프리카와 중동,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세계 각지의 식량 빈곤 국가에 경제적인 지원을 해야함을 강조했고 거대 식량 유통 기업의 독과점을 비판했다. 1992년, 이러한 노력의 결실 끝에 조지 맥거번은 UN 세계 식량계획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1997년까지 총 5년간 재직하며 "식량 대통령"이라고 불렸다. 1997년 4월 1일 조지 맥거번은 UN 세계 식량계획 사무총장에서 퇴임했다. 1999년, 노벨위원회는 베트남 전쟁 종식 노력, 데탕트, 평화 활동 등에 대한 공로로 조지 맥거번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로써 조지 맥거번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우드로 윌슨 이후 세번째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2010년, 조지 맥거번은 가족이 보는 앞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으며, 많은 미국인들의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유해는 3일동안 미국 국회의사당에 전시되었으며, [[지미 카터 (비바 케네디)|지미 카터]] 전 UN 사무총장이 추도사를 했다.


== 평가 ==
==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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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록 ==
== 어록 ==
=== 미국 대통령 취임식 연설 ===
=== 미국 대통령 취임식 연설 ===
{{인용문|
{{인용문|Senator Johnson, Chief Justice Burger, President Nixon, Vice President Agnew, Vice President-elect Hart, my fellow Americans--and my fellow citizens of the world community:
Senator Johnson, Chief Justice Burger, President Nixon, Vice President Agnew, Vice President-elect Mondale, my fellow Americans--and my fellow citizens of the world community:


[[린든 B. 존슨 (비바 케네디)|존슨 상원의원님]], [[워런 E. 버거 (비바 케네디)|버거 대법원장님]], [[리처드 닉슨 (비바 케네디)|닉슨 대통령님]], [[스피로 애그뉴 (비바 케네디)|애그뉴 부통령님]], [[월터 먼데일 (비바 케네디)|먼데일 부통령 당선인님]], 친애하는 미국 국민 여러분, 그리고 세계 공동체의 시민 여러분:
[[린든 B. 존슨 (비바 케네디)|존슨 상원의원님]], [[워런 E. 버거 (비바 케네디)|버거 대법원장님]], [[리처드 닉슨 (비바 케네디)|닉슨 대통령님]], [[스피로 애그뉴 (비바 케네디)|애그뉴 부통령님]], [[필립 하트 (비바 케네디)|하트 부통령 당선인님]], 친애하는 미국 국민 여러분, 그리고 세계 공동체의 시민 여러분:


Today, we gather here to mark the beginning of a new era in our great nation's history. It is with a deep sense of humility, gratitude, and a firm commitment to our shared ideals that I stand before you as the 37th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I am honored and privileged to have been entrusted with the responsibility of leading this great nation, and I pledge to devote my every effort to serving the American people and upholding the values that have defined us throughout our history.
Today, we gather here to mark the beginning of a new era in our great nation's history. It is with a deep sense of humility, gratitude, and a firm commitment to our shared ideals that I stand before you as the 37th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I am honored and privileged to have been entrusted with the responsibility of leading this great nation, and I pledge to devote my every effort to serving the American people and upholding the values that have defined us throughout our history.

2023년 10월 13일 (금) 17:34 기준 최신판

Viva Kennedy!
ⓒ Communist 1972, 2023


미합중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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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맥거번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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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유엔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
미합중국 제37대 대통령
조지 스탠리 맥거번
George Stanley McGovern
로널드 레이건 서명.svg 199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출생 1922년 7월 19일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 에이번
사망 2012년 10월 22일 (향년 90세)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 수폴스
재임기간 제37대 대통령
1973년 1월 20일 ~ 1981년 1월 20일
제9대 유엔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
1992년 4월 1일 ~ 1997년 4월 1일
서명 존 낸스 가너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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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조지프 맥거번
어머니 프랜시스 맥거번
배우자 엘리너 맥거번
자녀 슬하 자녀 6명
학력 다코타 웨즐리안 대학교 (B.A.)
노스웨스턴 대학교 (Ph.D. M.A.)
종교 가톨릭[2]
신장 185cm
정당 민주당
의원 선수 2 (하원)
2 (상원)
의원 대수 85, 86 (하원)
88, 91 (상원)

개요


미국 대통령 취임사 (1973)
Come Home, America!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슬로건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1973년 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재직하였다.

미국 진보좌파 진영을 대표하는 인사중 하나이자, 미국 민주당 좌파의 직계 조상으로 꼽히는 전설적인 정치인이다. 본격적인 정계 입문 이전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평화를 위한 식량" 총책임자로 근무했으며, 상원의원으로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전 운동에 나섰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재선을 저지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대통령으로서 베트남 전쟁 즉각 철수, 연 1,000달러 기본소득제, 낙태 전면 합법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퇴임 이후에는 세계식량계획과 관련되어 여러 업무에서 일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 퇴임 후 노벨평화상을 수여받았다.

약력

  • 1957. 제85대 하원의원 (민주당 / 사우스다코타 광역구)
  • 1959. 제86대 하원의원 (민주당 / 사우스다코타 광역구)
  • 1961. 평화를 위한 식량 총책임자
  • 1963. 제88대 상원의원 (민주당 / 사우스다코타)
  • 1969. 제91대 상원의원 (민주당 / 사우스다코타)
  • 1973. 1. 제37대 미국 대통령 (임기 1기, 초선)
  • 1977. 1. 제37대 미국 대통령 (임기 2기, 재선)[3]
  • 1989. 주UN 식량 및 농업 위원회 대사
  • 1992. 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 (~1997)
  • 1999. 노벨평화상 수상
  • 2012.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서훈

생애

정계 입문 이전

조지 맥거번은 사우스다코타의 시골 마을에서 가톨릭 목회자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주 가난하게 살았지만 고등학교 시절 갈고 닦은 웅변 실력으로 지역 대학교에 입학해 웅변 장학금을 받았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이탈리아 전선에서 폭격기 조종사로 복무하며 많은 전공을 쌓았다. 그는 공군 훈장을 4회 수훈받았고 1945년 제대했는데, 이는 그가 1972년 대선에서 당선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또 이때 구호물품을 조달했던 경험이 정치 입문 이후 빈곤 퇴치 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는 바탕이 된다.

제대 이후 다코타 웨즐리안 대학교로 돌아가 1946년에 학사 학위를 따고 잠시 신학교로 진학했지만, 이내 싫증을 느끼고 1949년에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역사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후 모교인 다코타 웨즐리안 대학교로 돌아가 역사 교수로 부임하던 도중 박사 논문 집필을 병행하여 1953년에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고 종신직 교수직을 제의받기까지 한다. 1940년대 내내 그는 정치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 후보 헨리 A. 월리스를 지지하기 위해 진보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1952년, 그는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선거운동을 보고 감명을 받아 민주당에 입당해 교수직을 때려 치고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케네디 정부에서

1956년, 조지 맥거번은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우세 지역구이자 자신의 고향이었던 사우스다코타 주의 연방 하원의원 선거구에 출마했다. 처음에는 낙선이 예상되었지만, 놀랍게도 유권자 하나 하나에 다가가는 전략으로 예상을 뒤엎고 당선되었다. 이후 1958년에도 재선되었다. 그는 하원의원 시절 민주당의 소장파 의원으로 빈곤 퇴치 운동과 농촌 진흥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1960년 선거에서 낙선하게 된다.

1960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존 F. 케네디는 조지 맥거번의 활동을 유심히 보았는지, 그를 "평화를 위한 식량 (Food for Peace)" 프로그램의 첫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제3세계 국가들로 향하는 인도적 지원을 대폭 확대시켜 미국 외교의 큰 축으로 만드는 정책을 시행중이었는데, 이 계획의 식량 관련 임무를 하원 내 농업 및 식량복지 관련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던 맥거번에게 맡긴 것이다.

맥거번은 단 1년 반만에 미국의 잉여 농산품을 전세계의 총 3천5백만명에게 공급하는 활약을 펼친다. 이 공로로 맥거번은 요한 23세 교황을 알현하는 등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고, 훗날 노벨평화상을 타게 되는 유엔세계식량계획의 창설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편 고향인 사우스다코타에서도 처리하기 곤란해서 썩혀버리던 수확을 정부가 좋은 취지로 후한 값을 쳐줘서 사주니 아쉬울 것 없었다.

베트남 전쟁의 반대자

1962년 그는 체급을 높여 사우스다코타 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으로 출마했는데, 케네디 대통령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597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상원 활동 초창기에는 하원 경력과 비슷하게 농민들의 권리를 적극 대변하며 농업 정책 전문가로 평가받았다. 동료 초선의원이자 대통령의 동생이었던 테드 케네디도 농업 관련 법안에는 적극적으로 맥거번의 조언을 구했다. 한편 핵전쟁 시대의 국방정책을 탐탁치 않게 여겨 지속적으로 국방예산의 감축을 제안하고, 베트남 전쟁에서도 소극적인 반대 자세를 취했다. 그는 케네디 행정부 시기, 케네디를 지지하는 소장파 의원인 케네디 키드(Kennedy Kids)의 일원으로 이름을 떨쳤고 민주당 내 좌파 의원으로 꼽혔다.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맥거번은 자신의 동료 진보파 의원이었던 로버트 F. 케네디 의원을 지지하였다.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자, 그는 비슷한 성향의 유진 매카시를 지지했다. 유진 매카시는 케네디파의 지지를 얻으며 경선에서 승리했지만, 정작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당권파와 린든 B. 존슨 상원 원내대표의 지지를 받은 휴버트 험프리가 후보로 결정되었다. 맥거번은 분개하며 지지 거부를 선언했지만 존 F. 케네디의 간곡한 요청 끝에 입장을 철회하고 험프리 당선을 위해 뛰었다. 그러나 결국 험프리는 근소한 차이로 닉슨에 밀려 낙선한다.

"이 방에 있는 모든 상원의원들이 너무 일찍 묻힌 미국 청년 50,000명을 파병한데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이 방에서 피비린내가 납니다. 다리가 없거나, 팔이 없거나, 성기가 없거나, 얼굴이 없거나, 희망이 없는 청년들의 피비린내가."
Every senator in this chamber is partly responsible for sending 50,000 young Americans to an early grave. This chamber reeks of blood. Every Senator here is partly responsible for that human wreckage at Walter Reed and Bethesda Naval and all across our land—young men without legs, or arms, or genitals, or faces or hopes.
맥거번-햇필드 수정안 투표 전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의 연설.

1968년 4월 북베트남의 기습 공격으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 가운데, 조지 맥거번은 소극적인 반대파에 속했다. 물론 북베트남이 먼저 공격한 것이므로 남베트남을 도와야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남베트남 방문 도중, 남베트남 정치인들의 각종 부패 행각과 미군의 전쟁범죄를 목격한 후 극렬한 베트남 전쟁의 반대파가 되었다. 맥거번은 닉슨의 베트남 정책을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비판한 상원의원이 되었고, 평화적인 반전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얼굴을 보였다. 그의 반전 행보는 1970년 국방예산안에 "1년 이내 미군의 베트남 완전 철수"를 추가할 것을 건의한 '맥거번-햇필드 수정안'으로 절정을 찍는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와 지상파 TV 토론 방송 자금을 마련하는 등 맥거번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이 수정안은 미국민들의 지지를 얻지만 결국 부결되었다. 하지만 민주당 보수파는 물론 심지어 공화당 내 온건파인 넬슨 록펠러 뉴욕주지사의 공식적인 지지까지 받은 끝에 49대 51로 간발의 차로 부결되었으며 맥거번의 판정승리였다는 평가가 많았다. 이때부터 맥거번은 민주당의 대권주자로 발돋움하게 된다.

한편, 조지 맥거번은 베트남 전쟁 외에도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우선 그는 경선과정을 전폭적으로 바꾸는 특별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직접선거인 프라이머리 방식을 확대 추진하고 흑인, 여성 및 청년 할당제를 신설하는 그의 개혁안은 현재도 거대양당이 모두 따르고 있다. 한편 상원에서는 국내 빈곤을 다루는 영양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닉슨 정부와 푸드 스탬프 제도를 놓고 대립각을 세운다.

제37대 미국 대통령

임기 1기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

1972년 대선을 앞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 초반으로 내려가있었다. 베트남 전쟁의 참상이 널리 알려진데다, 닉슨쇼크(금태환 중지)로 인한 경제난이 미국 전체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 내에서는 차기 대통령 후보를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구도는 크게 험프리파의 지지를 받은 에드먼드 머스키 대 케네디파의 지지를 받은 조지 맥거번으로 나뉘었다. 또다른 유력 후보였던 보수파 조지 월리스가 총격을 받아 출마를 포기하면서 구도는 양자 대결로 굳혀졌는데, 근소하게 맥거번의 승리로 끝났다. 경선 직후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맥거번의 지지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면서 맥거번은 민주당 지지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또한 초당적 지지를 위해 필립 하트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4] 그러나 당내 보수파는 강경 좌파 성향이었던 맥거번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리처드 닉슨은 민주당의 대표적인 우파 정치인이었던 존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를 부통령 후보로 교체하면서 민주당의 분열을 유도했다.

초반에는 미국판 보수대연합을 구상한 리처드 닉슨이 현역 프리미엄까지 얻어 근소하게 우세할 것으로 점쳐졌지만, 선거 운동이 진행되며 대선의 구도는 전반적으로 맥거번의 우세로 기울었다. 1972년 10월의 1차 토론회에서 맥거번이 닉슨을 제압한데다가, 닉슨의 첫번째 부통령이었던 스피로 애그뉴의 심각한 부패 혐의가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닉슨은 최후의 발악으로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추태까지 벌였지만 이것이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에 의해 폭로되며 대선일에 닉슨의 지지율은 대폭락했다. 결국 리처드 닉슨은 북부 대부분의 주에서 패배하며 허버트 후버 이후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안게 되었다. 조지 맥거번은 유효표의 49.4%, 선거인단 286인을 얻으며 제37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내정

조지 맥거번은 진보적인 자유주의 행정부를 목표로 72혁명 이후의 많은 정치적 의제들을 담아내 해결하고자 했다. 비록 일부 정책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지만, 대체로 많은 정책들이 실현되었고 이는 미국 역사에 있어 전환점이 되었다. 재무부장관으로 윌버 밀스(Wilbur Mills),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으로 패트리샤 로버트 해리스(Patricia Roberts Harris), 국방부장관으로 사이러스 밴스(Cyrus Vance), 국무부장관으로 유진 매카시(Eugene McCarthy) 등을 임명했고 그 외에 맥거번 대통령은 여러 행정 부서를 만들었다. 맥거번 대통령이 만든 가장 유명한 부서는 환경부(Department of Environment)와 평등부(Department of Equality)이다. 두 부서는 맥거번 행정부의 친환경적, 친소수자적인 정책관을 잘 보여주며, 두 부서의 장관으로 환경부 장관으로서는 케네디 2기 행정부의 내무부 차관이었던 존 A. 카버 주니어(John A. Carver Jr.)가, 평등부 장관으로는 흑인 민권운동가 셜리 치좀(Shirley Chisholm)이 임명되었다. 이처럼 맥거번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굵직한 인사들이 많았고 오늘날에도 성공한 내각으로 평가받는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난 워터게이트 복합단지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맥거번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처리하는 어려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맥거번의 당선 직후 심층적으로 수사되었고 닉슨의 퇴임 당시에는 아치볼드 콕스가 이끄는 특검 팀에 의하여 이미 많은 부분이 알려진 뒤였다. FBI는 G. 고든 리디(G. Gordon Liddy), E.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 등 닉슨 행정부와 관련된 인물들을 체포했고 1973년 10월 9일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을 방조죄 및 위증죄로 기소하였다. 조지 맥거번은 개인적으로 정치적인 보복이 우려된다며 완곡하게 닉슨의 구속을 반대하는 입장을 내비쳤지만, FBI의 수사를 중지시키지 않았고, 닉슨은 1974년 6월 최종적으로 8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그의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 역시 뇌물 수수죄로 체포되어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1982년 석방될 때까지 형을 살았다. 비록 정치 보복이라는 일부의 반발이 있었지만 국민적인 공분이 상당했던 사건이었고 체포 및 구속이 정당했다는 여론이 다수를 차지했다.

조지 맥거번 행정부에서 있었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이었다. 대법원에서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에 접근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가 헌법에 합치한다고 판결했으며, 이는 미국 50개주에서 낙태가 합법화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이 조치를 환영하고 여성의 생식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법을 의회에 주문했다. 1973년 12월 17일, 미국 상원은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상원의원의 주도 하에 여성의 생식권을 위한 보편적 의료 복지와 안전한 피임을 홍보하는 케네디-리비코프 생식권 보장법(Kennedy-Ribicoff Reproductive Security Act, 1973)을 59대 38로 통과시켰다.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NASA의 여러 우주 업적을 지켜보며 임페리얼 단위로는 세계를 아우르는 과학 기술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해 미터법 도입을 추진하였다. 맥거번 대통령은 이를 행정조치 2365호로 통과시켰으며, 미국 국내에서 반발이 있었으나 10년이라는 긴 유예 기간을 두고 병행표기하게 함으로서 국민의 반발을 최소화했다. 맥거번 대통령의 임기 내에 미터법이 미국에 완전히 정착하지는 못했으나, 마이클 록펠러 대통령 역시 당이 달랐음에도 이 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1980년대에는 "마일"이 구시대의 것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을 정도로 미터법이 표준화되었다.

맥거번 행정부는 페미니즘적인 의제를 추진한 첫 정부로서 기록되었으며, 맥거번 스스로도 페미니즘 행정부라는 별명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조지 맥거번은 베티 프리단, 셜리 치좀,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 온건한 페미니즘 운동가들과 여러차례 만남을 가지고 여성을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맥거번은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대신 과부에게는 사회보장급여와 위자료, 나이든 여성에게는 직업훈련, 이혼한 여성에게는 양육권을 보장하는 삶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온건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맥거번 행정부는 사회 보장 혜택을 확대하고 개선하는 조치를 시행하여 여성 인권을 크게 신장시켰다.

맥거번 행정부 주택 공급 계획의 모델이 된 아파트 단지 프루이트 아이고.

경제 정책에 있어, 조지 맥거번은 윌버 밀스 상원의원을 재무장관으로, 패트리샤 로버츠 해리스 변호사를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특히 맥거번 대통령은 임기 1기 내내 서민에게 저렴한 주택을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맥거번 대통령은 "문제는 집이 아니라 정부다"(The Matter is the Government not the House)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전국적으로 집약된 주택을 공급하였다. 세인트루이스프루이트 아이고는 맥거번 행정부 도시재생의 상징적인 사례로 남았고, 맥거번 대통령과 해리스 장관은 전국적으로 이와 유사한 형태의 주택 단지 및 아파트 단지를 건설해 약 1,500만명의 빈곤층에게 무료로 공영 주택을 분양하였다. 비록 맥거번 대통령의 목표였던 "모든 미국인에게 집을"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맥거번은 1952년 아이젠하워 이후 가장 많은 인프라 시설을 지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자신의 주특기인 농업 정책에 있어서도 이점이 두드러졌다. 그는 썩어 남아 돌던 수확 작물을 값싸게 사들여 전국민에게 값싸게 공급하는 "미국 식량계획"을 세웠고, 이로 인해 1973년부터 1977년까지 무려 2,000만명에 달하는 빈곤층이 기아에서 벗어났다. 빈곤층은 맥거번 행정부의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이 되었고 재고를 처리해준 맥거번 행정부를 지지했다. 1976년 대선에서, NFO(전국 농부 협회; National Farmers Organization)는 노동조합만큼이나 강력한 민주당의 지지 조직이 되어 있었다.

외교

유진 매카시 국무장관

베트남 전쟁으로 얼룩진 닉슨 행정부와 달리 조지 맥거번 행정부는 도덕외교의 신념에 맞는 외교를 펼쳤다. 맥거번 행정부 1기의 국가안보보좌관은 케네디 행정부에서 동아시아 안보 차관보를 맡은 윌리엄 번디(William Bundy)였으며, 국무장관은 베트남 전쟁 반대파 상원의원으로 유명한 유진 매카시(Eugene McCarthy)였다. 동아시아 정세와 관련된 두명의 인물을 각각 국무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한 것은 맥거번 행정부의 "베트남 문제 해결"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았다.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대로 베트남 전쟁에서 즉각적인 철수를 선언하였다. 1973년 7월 1일, 미국 국무부는 남베트남과 군사협정을 맺고 치안유지용 병력 5,000명을 제외한 군인 전원을 베트남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공화당 측에서는 준비되지 않은 철수라고 비판하였으나 국내 여론은 남베트남에서의 철수를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맥거번 대통령은 남베트남의 멸망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베트남에 최소한의 물자와 치안 유지 병력을 지속적으로 제공하였으나, 남베트남은 결국 미군의 철수 이후 9개월만에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동아시아 외교에 관한 맥거번 대통령의 또다른 업적은 대일본 및 대한국 외교였다. 조지 맥거번은 196~70년대 미군에 대한 반감에서 일어난 오키나와의 여러 무력 사태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오키나와와 미국의 평화로운 관계를 주문했다. 맥거번은 대통령 취임 직후 일본, 한국, 오키나와를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가졌고 주민투표를 통한 오키나와의 자결권을 결정하는 협상을 체결하였다. 1974년 주민투표 결과, 오키나와 독립 찬성 여론이 근소하게 과반을 차지함에 따라 1976년 맥거번의 재선을 앞두고 미군이 오키나와에 계속 주둔하는 것을 대가로 오키나와가 독립하게 된다. 한편, 대한외교에 있어 맥거번은 박정희 정부를 압박하였으며 민주화운동을 지지하였다. 1972년 유신 헌법과 한국의 핵무기 개발은 미군에 있어 큰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맥거번 대통령은 CIA를 통해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했고, 1975년 박정희 정부의 긴급조치에 대항하는 시민 혁명으로 박정희 정권이 붕괴되고 김대중의 민정 정부가 설립될 수 있었다.

조지 맥거번의 가장 큰 업적은 마오쩌둥-맥거번 회담이었다. 맥거번은 개인적으로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을 경멸하였으나 데탕트(Détente)라 불린 외교적 업적까지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키신저 보좌관은 퇴임하면서 맥거번과 신임 번디 보좌관에게 중국과의 외교 정상화를 위한 여러가지의 정보를 인계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유진 매카시 국무장관이 1973년 12월 중국에 방문해 매카시-저우언라이 회담을 가졌다. 이듬해인 1974년 2월, 맥거번 대통령은 번디 보좌관을 대동하여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이를 마오쩌둥-조지 맥거번 회담이라 부른다. 맥거번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자 했으며, 이는 미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 관용구 맥거번 중국에 가다(McGovern goes to China)가 생기기도 했다.

맥거번 행정부 남미외교의 상징이 된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

대중동 외교에 있어, 맥거번 대통령의 가장 큰 일은 1973년 일어난 욤 키푸르 전쟁이었다. 1973년 10월 9일, 조지 맥거번은 이스라엘 지원을 결정하였으나 동시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로운 양국 방안을 주문하였다. 골다 메이어 총리가 맥거번의 이러한 입장에 반발하였기 때문에 1기 행정부 동안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관계는 여전히 복잡하게 남았지만 그럼에도 맥거번은 이스라엘을 도와 핵전쟁을 막고 이스라엘이 자국의 주권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면서도 맥거번 대통령은 1974년 10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을 순방하여 친선 관계를 다졌고 두 국가로부터 막대한 석유를 수입하여 제1차 오일 쇼크를 빠르게 극복하였다.

남미 외교에서 조지 맥거번은 남아메리카를 "제2의 유럽"으로 만드는 것을 지지했다. 자주권을 보장하되 믿을 수 있는 동맹국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것의 일환으로 맥거번은 1973년 9월 11일 칠레를 방문해 칠레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와 회담을 가지고 아옌데가 소련이 아닌 미국을 지지하도록 설득하였다. 칠레 정부는 미국이 칠레에 여러 경제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한에서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갱신하기로 했고 매카시 국무장관과 맥거번 대통령이 이에 응하였다. 한편 브라질의 반미 군사독재자인 에밀리우 가하스타주 메디시를 축출하고 친미 온건좌파 정부가 수립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다각면도로 남미 외교에 접근했다.

또한, 맥거번 대통령 시기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의 주도로 설립된 G7에 미국이 가입하기도 하였다.

임기 2기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

1976년 대선을 앞둔 조지 맥거번 대통령의 지지율은 60%대 초반에 육박했으며, 재선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민주당에서 조지 맥거번은 만장 일치로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었다. 공화당에서는 온건파 마이클 록펠러, 전 뉴욕주지사 넬슨 록펠러, 초강경파 로널드 레이건, 중도우파 조지 H. W. 부시, 닉슨파의 지지를 받은 존 코널리등이 경쟁했다. 각 후보의 지지율이 워낙 경합이었기에 공화당 경선은 시작도 전에 내분으로 흘러갔으며, 경선에서 매우 근소한 차이로 레이건이 1위를, 록펠러가 2위를, 부시가 3위를 차지하면서 1976년 공화당 전당대회(RNC)는 경선 결과를 불복하는 각 후보자 지지자들의 난투극으로 마무리되었다.

선거운동 초반의 여론조사에서, 맥거번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60%의 지지를 받아, 38%의 지지를 받는데 그친 로널드 레이건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크게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맥거번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 철수, 미소 정상회담, SALT II 협정, 경제 회복 등 재임 기간 내의 성과를 언급하며 긍정적인 캠페인을 이어나간 반면, 레이건 대통령 측은 맥거번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TV 광고를 내보내며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맞섰다. 레이건 후보는 베트남에 다시 선전포고해 베트남에 자유를 되찾게 해야한다는 폭탄 같은 발언을 해 지지율이 크게 하락했고, 맥거번 대통령의 재선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더구나 레이건 후보는 평등권(ERA)에 반대하며 흑인, 여성, 소수자의 표를 모조리 잃고 말았다. 뒤이은 TV 토론회에서도 레이건이 평소와 달리 초조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인 반면, 맥거번 대통령은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판세가 뒤집어지지 않았다. 선거 결과, 조지 맥거번은 71.4%를 득표해 레이건의 25.7%를 크게 앞섰고, 선거인단 538명 전원을 확보하며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대통령 선거 승리를 이루어냈다.

내정

1976년 대선에서 재선한 맥거번 대통령의 2기 임기는 1977년 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보장되었다. 이 시기에는 제2차 오일 쇼크로 대표되는 여러 내우외환의 위기가 있었으며 맥거번의 대처는 양면적인 평가를 받았다.

1977년, 그레그 대 조지아(Greg v. Georgia) 판결에서 에이브 포타스 대법원장이 이끄는 5대 4로 사형제도가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처벌을 금지하는 연방 수정헌법 8조[5]에 위배되는 판결임을 인정하였다. 이에 의하여 앨런 크랜스턴 의원의 주도로 1977년 8월 10일 수정헌법 제27조(The right to life of a citizen of the United States cannot be taken away by punishment under a federal or state law; 미합중국 시민의 생존권은 연방정부 혹은 주 정부의 법률에 의한 형별에 의하여 박탈될 수 없다)가 발의되고 1979년 12월 17일 비준되었다. 이는 사형 제도를 미국에서 전면적으로 금지한 역사적인 판결로 남았으며 인권에 있어 큰 진전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맥거번 행정부 시기 대법원은 파업을 철회하도록 국가가 명령할 수 있는 태프트 하틀리 법(Taft Hartley Act)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한 먼데일 대 미시간(Mondale v. Michigan)을 통하여 파업권을 보장하기도 하였다. 맥거번 대통령은 이 조치를 환영하였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1970년대 내내 미국에서는 노동조합의 가입률이 떨어졌다.

1970년대의 뉴욕시.

맥거번 대통령은 자신의 1기 임기 동안 큰 진척을 이룬 "미국 식량계획"을 국제적인 규모로 확장시켜 공산권 국가에 식량을 판매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촉구했다. 일부 극보수파 의원들이 반발하기도 하였으나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소련과 미국 사이 관계에서의 큰 도약일 뿐더러, 미국의 식량 수출에 의존하는 소련의 모습은 공산주의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서 홍보 효과가 있다"라는 이유를 들어 간신히 상원에서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 법안은 적국과의 교역을 확대시켰다는 비판을 받았고,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로 소련이 시장을 개방할 때까지 성공적으로 진척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75년 파산에 이른 뉴욕시의 재정 상태로 인하여 존 린지 뉴욕 시장이 구제금융을 요청하자, 1977년 1월 맥거번은 재선과 동시에 160억 달러 규모의 뉴욕시 파산 구제법에 서명하였다. 하지만 이는 맥거번을 지지한 린지 시장에 대한 정치적 거래라는 논란이 일었고 맥거번 대통령은 이를 1회성 지급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이는 하나의 선례가 되어 재정이 부실했던 몇몇 도시에 대한 제한적인 제정 지원은 맥거번 행정부 뿐 아니라 후대의 록펠러, 테드 케네디 행정부 때에도 이루어졌다.

베트남 전쟁 병역 기피자에 대한 전면적인 사면은 1978년 이루어졌다.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비양심적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 도중 징병을 기피하거나 병역에 저항한 사람들을 양심적 병역 회피자로서 전면적 사면을 실시했고, 이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국론 분열 이후의 국가적 치유와 화해를 촉진하는데 목표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사면 정책은 퇴역 군인이 사회에 복귀하고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확대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양심적 병역 기피자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참전용사와 보수층의 반발을 샀다. 1971년 ABC와의 인터뷰에서 "윈터솔져"라는 말로 유명해진 반전운동가 겸 참전용사 존 케리 하원의원[6]은 병역기피자의 심정을 이해하나 더욱 긴 기간의 숙고와 사회적 통합이 부재했음을 비판했다.

더욱이 1978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국의 경제 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맥거번 행정부의 지지율이 처음으로 50%대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맥거번 대통령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험프리-호킨스 완전고용법을 통과시켜, 최대 고용 목표를 설정해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연방준비제도의 권한을 강화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978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사형 폐지, 베트남 전쟁 사면 등의 이슈로 보수층이 결집하면서 민주당은 20여년만에 하원과 상원 다수당을 모두 공화당에게 내어주는 "포드 혁명"(Ford Revolution)을 허용하고 만다. 하원의장으로 새로이 선출된 제럴드 포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는 맥거번의 개혁 정책에 반기를 들어 처음에는 행정부와 의회의 갈등이 예상되었지만, 원만하고 타협적인 태도를 통해 맥거번 행정부의 "연착륙"을 주도했다. 하여간 1978년 중간선거 이후 맥거번 행정부의 레임덕이 심화되었고 민주당에서는 새로운 대권 주자인 제리 브라운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지미 카터 조지아 주지사가 떠올랐다.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1979년 평등권(Equal Right Amendment)을 비준하였으며, 모든 시민에게 성별, 인종, 출신을 불만한 동등한 법적 권리를 보장했다. 비록 평등권은 공화당으로 의회 권력이 넘어간 시점에서 비준되었기에 몇몇 부분에서 타협의 소지가 있었으나 포드 하원의장의 배려로 맥거번의 의도가 많이 살아남은채 공화당 온건파 의원과 민주당 진보파 의원의 초당적인 협력으로 상하원 모두를 통과했다.

외교

조지 맥거번은 재선 성공 이후 개각에서 유진 매카시를 국무장관으로 유임시켰으며, 국가안보보좌관으로 해롤드 손더스(Harold Saunders)를 임명했다. 해롤드 손더스는 1961년부터 1969년까지 존 F. 케네디 행정부에서 중동 및 남아메리카 외교 차관보를 지낸 인물로 잘 알려져있었다.

1978년,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메나힘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을 켐프 데이비드로 초청해 12일간의 비밀 회담을 가지고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를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라 부르며, 이스라엘은 이 협정으로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게 돌려주게 되었다. 베긴 총리와 사다트 대통령은 이에 대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다만, 아랍 사회에서는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사려깊게 고려하지 못한 협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한 국가들

대소 외교에서 맥거번은 일반적으로 비둘기파의 전술을 사용했다. 그는 유진 매카시 국무장관을 소련으로 보내 알렉세이 코시긴 국무총리와 회담하게 하였으며, 이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직접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이전 대중외교와 같은 절차를 밟았다. 미국과 소련은 1978년 SALT II(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협정을 체결, 핵무기 군축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동시에 조지 맥거번은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비판하며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할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어떠한 정치적 세력에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다.[7]

또다른 중요한 정책은 파나마 운하의 반환이었다. 파나마 운하는 관타나모 수용소와 같이 미국의 실질적인 영토인 조차지로 남아있었는데, 이에 관해 파나마 정부가 항의하며 운하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국내적으로 파나마 운하가 가져다주는 막대한 경제적인 이익과 안보적인 이점을 고려해 신중하게 접근해야한다는 여론이 높았으나, 맥거번 행정부는 1977년 파나마의 주권을 우선적으로 인정하고 파나마가 미국에게 운하 이용에 있어 특혜를 주는 조건으로 파나마 운하를 당국 정부에게 반환하였다.

맥거번 행정부의 말기는 중동 외교로 요약될 수 있다. 1979년, 이란 혁명 정국에서 맥거번 행정부는 이란 정부와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고자 했으나, 이란 대사관 인질극 사건이 일어나자 맥거번 정부는 단호하고도 확고한 대응을 주문했다. 인질을 구출하는 독수리 발톱 작전은 대성공하였으며 맥거번 행정부의 지지율은 독수리 발톱 작전의 성공 이전 42%에서 이후 68%로 급격하게 상승했다. 또한, 맥거번 행정부는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에 무기를 대여하는 무기대여법 발동을 승인하였으며 병력 파견을 거부하였다.

조지 맥거번 행정부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맥거번 후보가 승리하여 성립된 행정부로, 1973년 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존속했다. 부통령은 필립 하트(1973.01.20 ~ 1976.12.26), 월터 먼데일(1977.01.20 ~ 1981.01.20)이었다.

퇴임 후 활동

1980년 대선에서 조지 맥거번 대통령은 민주당 경선 후보로 유진 매카시 국무장관을 지지했다. 하지만 매카시는 인기 없던 맥거번 행정부의 인물로 낙인 찍힌 탓에 민주당의 신선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던 지미 카터 조지아 주지사에게 경선에서 패하고 만다. 맥거번 대통령은 지미 카터의 유세를 도왔으며 카터 열풍으로 카터의 당선이 점쳐지기도 했지만 결국 마이클 록펠러 뉴욕 주 상원의원이 근소하게 대선에서 승리했다. 조지 맥거번은 1981년 1월 20일, 마이클 록펠러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식에 참여한 후 사우스다코타에 위치한 자신의 목장으로 낙향했다.

대통령 퇴임 후 그는 자서전 집필 등의 활동으로 여생을 보냈으며, 민주당 내 좌파의 영수이자 원로로서 퇴임 후에도 민주당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4년 대선에서 월터 먼데일을 지지했으나, 먼데일은 록펠러 대통령의 재선을 꺾지 못했다. 그러나 1988년 대선에서 맥거번이 지지한 테드 케네디는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강경좌파 성향이었으나 공화당 정치인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 사적으로 친한 사이였던 마이클 록펠러 대통령의 초청 하에 몇번이나 백악관을 방문하곤 했다.

맥거번이 말년에 집중한 것은 빈곤 퇴치 운동과 제3세계 식량 보급 운동이었다. 그는 1989년 1월 20일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테드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UN 식량안보대사로 발탁되었다. 조지 맥거번은 아프리카와 중동,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세계 각지의 식량 빈곤 국가에 경제적인 지원을 해야함을 강조했고 거대 식량 유통 기업의 독과점을 비판했다. 1992년, 이러한 노력의 결실 끝에 조지 맥거번은 UN 세계 식량계획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1997년까지 총 5년간 재직하며 "식량 대통령"이라고 불렸다. 1997년 4월 1일 조지 맥거번은 UN 세계 식량계획 사무총장에서 퇴임했다. 1999년, 노벨위원회는 베트남 전쟁 종식 노력, 데탕트, 평화 활동 등에 대한 공로로 조지 맥거번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로써 조지 맥거번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우드로 윌슨 이후 세번째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2010년, 조지 맥거번은 가족이 보는 앞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으며, 많은 미국인들의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유해는 3일동안 미국 국회의사당에 전시되었으며, 지미 카터 전 UN 사무총장이 추도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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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어록

미국 대통령 취임식 연설

Senator Johnson, Chief Justice Burger, President Nixon, Vice President Agnew, Vice President-elect Hart, my fellow Americans--and my fellow citizens of the world community:

존슨 상원의원님, 버거 대법원장님, 닉슨 대통령님, 애그뉴 부통령님, 하트 부통령 당선인님, 친애하는 미국 국민 여러분, 그리고 세계 공동체의 시민 여러분:

Today, we gather here to mark the beginning of a new era in our great nation's history. It is with a deep sense of humility, gratitude, and a firm commitment to our shared ideals that I stand before you as the 37th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I am honored and privileged to have been entrusted with the responsibility of leading this great nation, and I pledge to devote my every effort to serving the American people and upholding the values that have defined us throughout our history.

오늘, 우리는 위대한 조국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제가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으로서 여러분의 앞에 서게 된 것에 깊은 겸손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우리의 공동의 이상에 대한 확고한 헌신을 약속드립니다. 저는 이 위대한 국가를 이끌게 될 책임을 위임받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미국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미국의 역사를 통해 우리를 지켜온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As we embark on this journey together, we find ourselves at a critical crossroads in our nation's path. We face challenges that demand our unwavering determination and collective action. But let me assure you, my fellow Americans, that despite the road ahead being arduous, together we will overcome any obstacle, united as one nation, indivisible, with liberty and justice for all.

우리가 함께 이 여정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미국과 미국 국민들이 역사의 중대한 갈림길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합니다. 우리는 확고한 결의와 집단 행동을 요구하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동포 여러분, 앞으로의 길이 험난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유와 정의로서 하나의 미국으로 통합되어 어떤 장애물도 함께 극복할 것입니다.

The world is changing, and so too must we adapt and evolve. Our commitment to equality, justice, and freedom is unwavering. We must strive to build a society where every American, regardless of their race, religion, gender, or socioeconomic background, can live a life of dignity and opportunity. We will work tirelessly to bridge the gaps that divide us, to heal the wounds of the past, and to create a future where the American Dream is within the reach of all who seek it.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적응하고 변해야 합니다. 평등, 정의, 자유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종, 종교, 성별, 사회경제적 배경에 관계없이 모든 미국인이 존엄성과 기회를 가진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갈라놓는 간극을 메우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We must recognize that true strength lies not in division but in unity. It is only by working together, by setting aside partisan differences and embracing the common good, that we can overcome the immense challenges before us. Let us embark on a new era of bipartisanship, where respectful dialogue and compromise pave the way for progress. Our democracy thrives when we engage in robust debates, but it is through finding common ground that we can achieve lasting change.

우리는 진정한 힘이 분열이 아니라 단결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고, 당파적 차이를 제쳐두고, 공동의 이익을 포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엄청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존중하는 대화와 초당적인 타협이 진보의 길을 열어주는 새로운 시대를 시작합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강력하고도 통합된 토론의 장에 참여할 때 번창하며, 우리가 지속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는 공통점을 찾는 것을 통해서 성장할 것입니다.

Our economy, too, stands at a pivotal moment. We will champion policies that empower the working class, that create opportunities for small businesses to thrive, and that ensure a fair and equitable distribution of wealth. We will invest in education, innovation, and infrastructure, laying the foundation for a prosperous future for generations to come. We will protect our environment, knowing that stewardship of our planet is not just an obligation to ourselves but a duty to future generations.

우리의 경제 또한 미국 역사의 중추적인 순간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노동자 계층에 힘을 실어주고, 중소기업이 번창할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하며, 공정하고 공평한 부의 분배를 보장하는 정책을 옹호할 것입니다. 교육과 혁신, 인프라에 투자해 앞으로 세대가 번영하는 미래를 위한 기반을 마련할 것입니다. 또 우리는 지구에 대한 책임이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 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 대한 의무라는 것 역시 알고 지구의 환경을 보호할 것입니다.

In the realm of foreign policy, we will be guided by the principles of diplomacy, cooperation, and peace. We will seek to build bridges of understanding with our allies, and extend a hand of friendship to those who have been our adversaries. We will promote human rights, democracy, and justice around the world, leading by example and inspiring others to follow suit. We will be a beacon of hope and a force for positive change on the global stage.

외교 정책의 영역에서, 새로운 미국은 협력과 평화의 원칙에 의해 인도될 것입니다. 우리는 동맹국들과 이해의 동맹 관계를 새롭게 구축하고, 우리의 적이었던 국가에게 우정의 손길을 뻗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인권, 민주주의, 정의를 증진하여 모범을 보이고 다른 국가가 미국을 본 받고 따를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새로운 미국은 세계 무대에서 희망의 등불이 되고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힘이 될 것입니다.

We gather here at a time of profound challenges, both at home and abroad. Our nation is deeply divided, our economy faces uncertainty, and the world is marked by conflict and turmoil. But I am filled with hope, for I believe that the United States has always been a beacon of hope and a force for positive change.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이 닥친 바로 이 시기에 이곳에 모였습다. 미국은 깊이 분열되어 있고, 우리 경제는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으며, 세계는 갈등과 혼란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미국이 항상 희망의 등불이었고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힘이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I have taken an oath today in the presence of God and my countrymen to uphold and defend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To that oath I now add this sacred commitment: I shall consecrate my office, my energies, and all the wisdom I can summon, to the cause of peace among nations.

저는 오늘 하나님과 제 동포들 앞에서 미국 헌법을 수호하고 수호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 맹세에 저는 이제 신성한 약속을 더합니다: 나는 나의 직책과 나의 힘과 내가 짜낼 수 있는 모든 지혜를 국가 간의 평화를 위해 바칠 것입니다.

My fellow Americans, let us remember the words of our founding fathers, who envisioned a nation built on the ideals of liberty, equality, and justice for all. It is upon these pillars that we must forge a path forward. We must bridge the divides that separate us, heal the wounds that divide us, and work tirelessly to create a more just and inclusive society.

친애하는 미국 국민 여러분, 자유, 평등, 정의의 이상 위에 세워진 국가를 구상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이 말씀 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갈라놓는 분열을 메우고, 우리를 갈라놓는 상처를 치유하고, 더 정의롭고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Today, I call upon each and every American to join me in building a nation that cares for its people. Together, we will tackle the pressing issues that affect our fellow citizens – poverty, hunger, inequality, and discrimination. We will strive to ensure that every child has access to quality education, that every worker has a fair wage and safe working conditions, and that every American has access to affordable healthcare.

오늘, 저는 모든 미국인들이 국민을 위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어 저와 함께 할 것을 촉구합니다. 함께, 우리는 가난, 기아, 불평등, 그리고 차별과 같은 우리의 동료 시민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어린이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며, 모든 노동자들이 공정한 임금과 안전한 근로 조건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이며, 모든 미국 국민들이 저렴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Together, we will overcome diplomatic difficulties and move toward a bright future of peace. I promise to peacefully withdraw American troops from the Vietnam within my term. No longer will America's children be buried in coffin prematurely due to meaningless wars.

우리는 함께 외교적 난제를 극복하고 밝은 평화의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저는 제 임기 내에 베트남에서 미군을 평화적으로 철수시킬 것을 약속합니다. 더 이상 미국의 아이들이 무의미한 전쟁 때문에 일찍 관에 묻히지 않을 것입니다.

My fellow Americans, let us remember that the strength of our nation lies not just in the actions of its leaders but in the resilience, compassion, and spirit of its people. It is in the hearts and minds of every American, in the countless acts of kindness and generosity, that the true character of our nation shines through. Together, we can build a brighter future, one where the promise of America is realized for all.

친애하는 미국인 여러분, 우리 나라의 힘은 지도자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회복력, 동정심, 정신에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미국의 진정한 위대함이 빛을 발하는 것은 모든 미국인의 마음과 마음 속에, 수많은 친절과 관대함 속에 있습니다. 함께, 우리는 미국의 약속이 모두에게 실현되는 더 밝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In closing, I stand here as your President, humbled by the trust you have placed in me and grateful for the opportunity to serve this great nation. Let us embark on this journey together, guided by the principles that have made America exceptional. May God bless you all, and may God bles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merica finally came home.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이 저에게 주신 신뢰에 겸손하고 이 위대한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하며 대통령으로서 여기에서 서 있습니다. 미국을 특별하게 만든 원칙에 따라 함께 여정을 함께 시작합시다. 여러분 모두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미국에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 미국이 마침내 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Thank you.

감사합니다.

1999년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진보당 1948 입당
민주당 1952 - 2010 정계 입문
정계 은퇴
작고

선거 이력

여담


  1. 리처드 F. 닙(민주당) 사우스다코타 주지사에 의해 임명됨, 1974년 특별선거에서 재선에 성공.
  2. 미국 역사상 두번째 가톨릭 대통령이다. 첫번째는 존 F. 케네디. 케네디가문이 아닌 미국 대통령 중에는 유일한 가톨릭교도였다.
  3. 미국 역사상 최대 선거인단 확보(538명)
  4. 맥거번 본인은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을 선호했으나, 테드 케네디 자신과 험프리 상원의원이 필 하트를 추천했다.
  5. Excessive bail shall not be required, nor excessive fines imposed, nor cruel and unusual punishments inflicted. (과다한 보석금을 요구하거나, 과다한 벌금을 과하거나,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을 과하지 못한다.)
  6. 3개의 퍼플하트 훈장과 은성 훈장, 동성 훈장 등 13개의 무공 훈장을 베트남에서 땄음에도 베트남 전쟁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민주당의 청년 반전파를 대표했다.
  7. 국내적으로 무자헤딘에 지원을 보내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손더스 국가안보보좌관의 반대로 좌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