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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개요== | ||
1884년부터 1920년까지 존재했던 [[조선 (개화)|조선]], [[대한국 (개화)|대한국]], 그리고 [[대한민국 (개화)|대한민국]]의 [[자유주의]] 정당. | 1884년부터 1920년까지 존재했던 [[조선 (개화)|조선]], [[대한국 (개화)|대한국]], 그리고 [[대한민국 (개화)|대한민국]]의 [[자유주의]]·급진개화파 정당. | ||
==역사== | ==역사== |
2024년 11월 23일 (토) 20:50 기준 최신판
한국의 자유주의 정당 | |||||
급진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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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별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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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별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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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 | |
---|---|
한문명 | 開化黨 |
영문명 | Enlightenment Party (EP) |
창당일 | 1884년 12월 4일 |
전신 | 급진개화파 |
분리된 정당 | / 1918년 분당 |
당병 변경 | |
역대 총리 | 김옥균 / 제1대 • 1884~1896 이완용 / 제2대 • 1896~1899 박영효 / 제5대 • 1906~1912 유길준 / 제6대 • 1912~1914 서재필 / 제7대 • 1914~1918 |
총재 | 김옥균 / 초대 서재필 / 말대 |
이념 | 자유민주주의 급진적 자유주의 국민자유주의 문명개화론 공화주의[2] (1895~) |
스펙트럼 | 중도좌파 ~ 중도우파 |
국민의원 | 77석 / 200석 (38.5%)[3] |
당보 | 독립신문 |
당색 | 하늘색 (#78C3FD) [4]
|
개요
1884년부터 1920년까지 존재했던 조선, 대한국,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주의·급진개화파 정당.
역사
태동
개화당의 기원은 19세기 중후반 고종이 실시한 개화정책과 함께하였다고 평가받는다. 개화 정책에 찬성하는 이들 중 급진적인 개파를 급진개화파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서양의 기술 뿐만 아니라 사상과 사회제도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명개화론을 지지하며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되 조선 고유의 제도와 사상을 유지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지지하는 온건개화파와 대립했다. 이들의 리더는 김옥균이었으며,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이완용, 서재필, 윤치호 등이 핵심 구성원이었다.
갑신혁명과 창당
갑신혁명의 주역들[5] |
고종의 개화가 지나치게 느리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한 급진개화파는 장변을 통해 훨씬 더 급진적인 개화를 이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 공사관이 공사관 경비대를 동원해 정변을 지원하겠다는 의향을 밝혔으나 급진개화파는 민심 이반을 우려하여 이를 거부했다.
1884년 12월 4일, 급진개화파는 생도대 등의 무력집단을 동원해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은 성공적이었다. 급진개화파는 인명 피해를 최소화함과 동시에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고 한성의 국가 주요 기관들을 모조리 장악했다. 속전속결이었다.
한성에 주둔하던 청군은 지일 성향의 급진개화파를 견제하고 있었으나, 워낙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급진개화파는 조련국 사관장[6] 서재필 등이 이끄는 조련국 생도부대를 동원해 군권까지 장악하였고 지방조직을 통해 지방행정까지 통제하면서 청군은 개입일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든 급진개화파는 고종의 입을 빌려 새 인사와 개혁정강을 발표를 단행하였다. 이 인사로 급진개화파 리더였던 김옥균은 총리서리에 임명되었으며 급진개화파 주요 인사들과 급진개화파에 협조적이었던 일부 온건개화파 인사들도 요직에 배치되었다. 주요 멤버들도 동시에 청군 철수도 요구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한성에서의 외국 세력 간 균형 유지를 위해[7] 보류되었다.
다당제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했던 급진개화파는 갑신혁명의 성공 이후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할 서구식 근대적 정당이 필요하다 판단하였고 이로 인해 만들어진 정당이 바로 개화당이다. 총재에는 급진개화파의 리더인 김옥균이 추대되었다.
집권과 실권
개화당 집회 (1897) |
친서방 지식인과 상공인 등 주로 신흥 계층의 지지를 받던 김옥균 내각은 보통선거에 앞서 국민을 계몽하여 기반을 다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개혁을 통해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할 때까지 총선을 연기하기로 결정하였다.
갑신혁명 이후 9년만인 1893년, 역사적인 첫 총선이 치러졌다. 총선에서 개화당은 온건개화파의 보수당과 위정척사파의 보국당을 누르고 중추원 내 단독 과반을 확보, 내각을 구성했다. 총리대신에는 기존 총리이자 개화당 총재였던 김옥균이 취임했다.
1895년, 실권 없는 얼굴마담이던 고종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러시아와 모의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한 아관파천을 감행하였다. 비록 고종 아관파천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일국의 군주가 국민의 지지로 구성된 정부를 외세의 힘을 빌려 전복하려 했던 쿠데타였기에 이 사태는 일대의 정치격변을 몰고 왔다. 이 사태를 계기로 개화당은 헌군주의 지지에서 공화주의 지지로 전향하였고 보수당과 함께 군주정을 폐지, 민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1896년, 김옥균이 아관파천 사태에 대한책임을 지는 모양새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재무부장관이었던 이완용이 당 총재로 추대되어 총리직에 취임했다. 허나 1898년, 영국의 추가적인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김옥균 내각이 부산 절영도를 영국의 석탄 공급기지로 넘기려 하자 대규모의 만심 이반이 발생하였고[8] 개화당은 집권 14년만에 정권을 온건개화파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재집권과 1차 세계대전
1906년 총선에서 개화당은 재집권에 성공했고 박영효를 국무총리로 하는 박영효 내각이 출범했다. 이후 1912년에는 유길준을 총리로 하는 유길준 내각이 출범하였으나 1914년 유럽에서 전운이 고조되면서 유화파인 유길준이 실각하고 실용주의자이자 대서방 외교 전문가인 서재필을 총리로 하는 서재필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해 7월에 세계대전이 터지자 참전을 고심하던 서재필 내각은 주전파의 주도로 참전을 결정하였고 서재필 내각은 전시내각으로 확대되었다. 전쟁의 주 전선은 유럽이었기에 동아시아의 한국은 큰 피해 없이 이권을 챙길 수 있었고 내각의 지지율 역시 높았다.
자유당으로
20세기 초부터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개화당의 전통적 라이벌이었던 보수당과 보국당은 몰락했다. 보수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보국당은 아예 원외로 퇴출되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1차 세계대전 중에 외무성 장관을 역임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이승만이 창당한 대한국민회였다.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후 치러진 8회 총선에서 개화당이 패배하며 실권하였다. 이에 개화라는 당명이 이미 시대에 맞지 않다는 지적과 패배로 인한 분위기 전환을 위해 당명을 전격적으로 자유당으로 변경하였다.
성향
기본적으로 19세기식 고전적 자유주의 성향이었다. 민권 증진과 의회민주주의를 지지하였으며 동시에 상공업과 교육 진흥을 목표로 하여 자유무역과 보편교육을 지지하였다. 초기에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로는 보수당과 함께 공화주의 성향으로 전환하여 민국 건국을 주도하였다. 또 근대적 민족국가의 건설을 지지했다.
외교적으로는 친일, 친미, 친서방 성향을 보였으며 러시아에 부정적이었다. 반면 제국주의적인 모습 역시 보여 중국을 저개화국이라고 칭하며 무시하고 개화된 한국이 미개한 중국인들을 계몽해 문명의 이기를 가르쳐줘야 한다는 전형적인 서구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역대 지도부
역대 개화당 총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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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은 34년의 기간 동안 총 6명이 총재의 자리를 거쳐갔는데 그 중 서광범을 제외한 5명이 총리를 역임했다. 34년 중 12년은 김옥균이 총재였다.
본부
당보
독립신문 |
개화당은 독립신문이라는 이름의 당보를 발행하였다. 당시 표기법 기준으로는 '독닙신문'이었으며 주 1회, 6면으로 구성되었다. 독립신문은 개화당의 후신 정당인 자유당의 당보인 사상계로 이어졌다.
비판 및 논란
개화당은 국내적으로는 민권 신장을 지지하며 국민주권개념 도입, 참정권 확대, 신분제 폐지 등 진보적인 정책을 지지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팽창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개화당 주요 인사들은 중국을 미개한 나라라고 보았으며 만주로의 팽창을 지지하였다.
또 개화당을 주도하던 지식인들의 기본적이 생각이 깨어있는 본인들이 무지몽매한 대중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것이었기에 대중으로부터 괴리된 엘리트주의를 추구하였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지도자 | 의석수 (의석율) | 의석증감 | 지위 |
---|---|---|---|---|
1893 | 김옥균 | 56 / 100 (56%)
|
- | 여당 |
1896 | 이완용 | 61 / 105 (58%)
|
5석 2.1% |
여당 |
1899 | 53 / 120 (44%)
|
5석 13.8% |
야당 | |
1902 | 서광범 | 58 / 120 (48%)
|
5석 4.2% |
야당 |
1906 | 박영효 | 77 / 120 (64%)
|
19석 15.1% |
여당 |
1910 | 65 / 120 (54%)
|
12석 10% |
여당 | |
1913 | 유길준 | 80 / 120 (67%)
|
15석 12.5% |
여당 |
1918 | 서재필 | 77 / 200 (39%)
|
3석 28.2% |
야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