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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6일 (수) 21:43 기준 최신판
중국의 비주권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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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비주권 군주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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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소조정(대청국)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 遜清皇室小朝廷(大清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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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斯萬年亞東大帝國 만년을 내려온 동양의 대제국 | |||||||||
상징 | |||||||||
국가 | 공금구 | ||||||||
국화 | 보춘화 | ||||||||
역사 | |||||||||
지리 | |||||||||
수도 | 자금성[1] | ||||||||
면적 | 7.8km2 | ||||||||
접경국 | 중국 | ||||||||
인문환경 | |||||||||
인구 | 총인구 | 213명(2022년) | |||||||
인구 밀도 | 0.03명/km2[2] | ||||||||
출산율 | 0명(2021년) | ||||||||
언어 | 공용어 | 만주어(명목상), 중국어 | |||||||
공용문자 | 만주 문자(명목상), 한자 | ||||||||
국교 | 티베트 불교 | ||||||||
군대 | 금위군[3] | ||||||||
정치 | |||||||||
정치체제 | 절대군주제, 비주권 군주제, 중국의 소조정 | ||||||||
황제 (국가원수) |
창성제 | ||||||||
정부 요인 |
내각의정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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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신기오로 헝전 | |||||||
금위군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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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더진 | ||||||||
연성공 | 쿵추이창[4] | ||||||||
국성 | 아이신기오로(애신각라)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愛新覺羅) | ||||||||
경제 | |||||||||
공식 화폐 | 중국 위안(CNY)[5] | ||||||||
국고 | 약 $1,520만[6] | ||||||||
단위 | |||||||||
법정 연호 | 창성(蒼晟) | ||||||||
시간대 | UTC+8 | ||||||||
도량형 | SI 단위 |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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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존호는 계속 유지되며, 폐지되지 아니한다.」 중화민국은 대청 황제를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우대한다. 一 大清皇帝辭位之後,“尊號仍存不廢”。中華民國以“待各外國君主之禮”相待 황실 우대 조건 제1조 |
동아시아에 위치한 도시국가이자 중국 베이핑시에 둘러싸인 내륙국. 명목상 청나라 황제이자 아이신기오로 가문의 수장인 황제를 국가원수로 한다.
워낙 작고 특수성이 강한 국가이다 보니 정치 체제 역시 독특한데, 중국에 존재하는 유이한 비주권 군주국이다.[7]
국가 상징
국명
공식적인 국호는 신해혁명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청국이며 이는 1616년 청나라가 건국될 때 부터 유지되어오던 명칭이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고 현재의 비주권 군주국인 소조정 형태로 개편된 이후로는 혁명이전의 청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청나라 소조정(혹은 청황실 소조정)과 같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외에도 베이핑 조정, 자금성 조정등의 이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국기
황룡기 黃龍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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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 청나라의 국기 |
비율 | 2:3 |
청나라 소조정은 구 청나라의 연속을 주장하는 만큼 국가의 주요 상징 대부분을 청나라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국기또한 그중 하나이다. 구 청나라의 국기인 황룡기가 그대로 국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황제의 경우 삼각형의 황룡기가 쓰이고 있다. 민족자치법 통과 이전에는 만주족의 상징기 역할을 하기도 했다.[8]
국장·국새
국장 | 국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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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구 청나라는 대부분의 전근대 동양권 국가들이 그랬듯이 별도의 국장이 없었으며 황제의 직인인 국새가 국장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현재의 국장은 청 말기에 만들어진 국장으로 추정되는 그림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1] 이외에도 서양의 문장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문장이 존재하나 해당 문장은 아이신기오로 가문의 문장으로써 쓰이고 있다.
국새의 경우는 이전 청나라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국새로 평시에는 국립고궁박물원 지하보관소에 보관하고 있다가 선위나 기타 필요시마다 꺼내서 쓴다.
국가
공금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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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소조정의 국가인 공금구는 구 청나라 시절부터 이어져온 국가로써 중요행사때 간간히 재창된다.
역사
본래 청나라는 중국대륙 뿐만이 아니라 몽골, 투바, 대만등 동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의 수명이 다하자 청나라 황실은 둘 중 하나의 운명을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분노한 민중들과 한족 혁명군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초라하게 역사의 뒷편으로 퇴장하는 방식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북양의 공화정부가 재의한 청실우대조건을 받아들여 그 명맥이나마 유지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청나라 황실은 후자를 택했고 1912년 2월 12일 효정경황후가 퇴위조서를 반포하며 대륙의 주인으로서의 청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자금성 내조의 주인으로서 새롭게 시작하게 된 청나라 소조정은 초반에 대략 12년 동안 유지되었다. 대륙에 대한 통치권을 포기한 대신에 청나라 황실의 위신과 재산은 유지되었으며 자금성 내부의 구 청나라 정부기관과 연호 및 관보등은 정상적으로 운용되었다. 그러나 1917년 장훈복벽의 실패로 소조정의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1924년 친 청실(親清室)성향의 차오쿤 정권이 붕괴되고 공화파 펑위샹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조정은 해체되고 황실일원들은 재산을 헌납한 채 순왕부로 그 거처를 옯겨야 했다.
이후 1928년 제2차 북벌로 베이양(현 베이핑)을 점령한 장제스는 일본에서 선통제를 이용해 동북에 괴뢰정권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1931년 선통제에게 소조정의 복구를 정식으로 제안했다. 당시 선통제는 청황실의 명예를 다시 일으켜 세울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기쁜마음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후 1931년 12월 12일에 핍궁사건 직후 수정되었던 청실우대조건을 원상복구 시키면서 청황실은 다시한번 자금성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소조정의 복귀이후 선통제는 이전의 사치스럽던 한량의 삶에서 나름 검소하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갔으며 베이핑 시민들 앞에 나서는 등 황제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선양을 공격하는 와중 선양고궁의 일부가 포격으로 인해 파괴되는 일이 일어나자 선통제는 일본을 맹렬히 비난하며 일본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고 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선통제는 결사항전을 외치며 황실의 재산을 군비에 지원했으며 일본이 베이핑을 점령할 때에도 결사항전을 외쳤으나 중국 정부의 설득으로 선통제는 충칭으로 건너가고 그의 동생인 푸제가 항전을 지휘했다. 일본정부는 일본에서 사관학교를 나오고 일본인 사가 히로와 결혼한 푸제(훗날 의영제)를 설득하여 만주국의 수장으로 앉히려고 하였으나 푸제와 사가 히로 모두 거부하여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후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이 끝나고 안정이 찾아오자 소조정은 베이핑으로 복귀하였으며 1996년에는 자금성의 노후화와 문화재 보존을 이유로 거처를 현대적 건물인 청시궁으로 옮겼다. 격변의 중국 현대사의 파도속에서도 소조정은 유지되었으며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고 공산당이 집권하자 소조정 폐지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였으나 저우언라이 총통의 적극적인 보호로 유지될 수 있었으며 현대 중국에서는 국가의 큰어른이자 중국 근현대사의 산 증인으로서 황실은 존중받고 있다.
정치 및 행정
황제와 황실
청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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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제(大清皇帝)는 청나라 소조정의 국가원수이자 전제군주로 명목상 전 중국의 황제이다. 이전에는 실제로 천조질서 속에서 동아시아 권역을 통제하는 만인지상의 군주였으나 신해혁명 이후 현재와 같은 형태의 비주권 군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청나라의 황제는 명목상 몽골의 대칸을 겸하며 아이신기오로 하라의 수장또한 겸한다.
청나라의 국성은 아이신기오로(애신각라)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愛新覺羅)이며 청실우대에 관한 법률[9] 아이신기오로 가문의 일원 중 황제와 8촌 이내에 있는 이들을 황실로 취급하며 이들에게는 연금과 함께 여러 혜택이 부여되며 차관급의 의전이 들어간다. 황제의 직계가족들의 경우 일체의 세금이 면제되며 장관급의 의전으로 예우된다.
행정각부
사실상의 도시국가 혹은 그 이하정도로 취급되는 만큼 그렇게 많은 행정기관이 필요하진 않으며 현존하는 행정각부는 아래와 같다.
- 국무원 : 일반적인 행정부의 역할을 맏고 있으며 내각의정대신을 수반으로 한다.
- 내정부 : 타국의 내무부와 같은 역할을 하며 중국의 내정부와 이름이 겹친다. 물론 국토의 크기가 현저히 작기 때문에 국토의 관리 역할은 시설관리부에 위임하였으며 실질적으로 하는일은 자금성이나 기타 황실소유 건물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출입료를 걷고 시위부 인원 면접보는 일
...이다. 이외에도 행정요원들을 배치해 자금성 경내의 경비를 서는 일이나 국무원 명의의 관보발행 등을 한다. - 시위부 : 황제 및 황제의 직계가족들을 보좌하는 기관으로 일본의 궁내청이나 한국의 대통령비서실, 국무총리실에 해당하는 곳이다. 황제 직계가족들에 대한 의전과 비서업부를 책임진다. 연성공을 명목상의 수장으로 두고 있다.
- 종친부 : 황제와 4촌 이상 8촌 이하인 황실의 구성원들을 보좌하는 기관으로 시위부와 맡는 대상만 다를 뿐 하는 일은 비슷하다.
- 경호부 : 황제 및 직계가족들에 대한 경호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금위군이 여기에 편성되어 있다. 경호부장은 금위군 단장을 당연직으로 겸하며 보통 중국 육군 중장급 인사가 맡는다.
- 시설관리부 : 실질적으로 내무부의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자금성과 선양 행궁등 황실소유 건물에 대한 관리는 일체 시설관리부에서 맡고 있다. 단 시설 내의 경비는 내정부에서 맡으며 시설에서 나온 수익의 배분은 재정관리부에서 맡는다.
- 재정관리부 : 황실 소유의 건물과 주식, 부동산 등에서 나오는 모든 수익을 관리하는 부서다.
- 대외소통부 : 소조정이 주최하는 공개행사 및 황실일원들의 기자회견 등 대외 활동을 관리하는 부서이다.
- 내정부 : 타국의 내무부와 같은 역할을 하며 중국의 내정부와 이름이 겹친다. 물론 국토의 크기가 현저히 작기 때문에 국토의 관리 역할은 시설관리부에 위임하였으며 실질적으로 하는일은 자금성이나 기타 황실소유 건물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출입료를 걷고 시위부 인원 면접보는 일
이상의 모든 행정각부는 내각의정대신의 통제를 받는데 이때 내각의정대신은 황제가 종친이나 귀족작위를 가진 자들 중 한명을 낙점하여 임명한다. 현재 내각의정대신은 아이신기오로 헝전이다.
위상
약 300년의 세월동안 중국전역을 통치했던 청나라의 직계후신이라는 점과 중국근현대사의 산증인이라는 점 때문에 중국내에서는 '국가의 큰어른'정도로 여겨지며 대부분의 중국 국민들은 이러한 비주권 군주국의 존재를 긍정하는 편이다.
만주족들과 중국 내외의 유학도들은 특히나 더 각별하게 생각하는 존재인데 만주족들의 경우에는 만주족의 자존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대륙을 지배하던 대청국의 황실이라는 점 때문에 거의 영국에서의 왕실처럼 떠받드는 수준이며 1976년 선통제가 붕어했을때는 약 1,200여명의 만주족들이 자금성 앞으로 몰려와 통곡을 했을 정도이며 현재에도 동북의 일부 산골 만주족 마을에는 마을회관이나 가정집에 선통제와 함께 현임 황제의 사진이 걸려있는 경우가 다수 있다.[10]
유학도들의 경우에는 소조정의 존재 자체가 현재 동아시아 전체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는 유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공자가문에게 신해혁명 이후 공화국인 중화민국에서 수여할 수 없는 귀족작위인 연성공직을 대성지성선사봉사관으로 변경해 수여하고 있었는데 장제스 정권당시 군주국인 소조정의 명의로 연성공직 또한 동시에 수여하기 시작하고 이후로도 공자가문에 여러 작위를 내리면서 유학도들의 민심이 결집했기 때문이며 역대 황제들이 붕어했을때도 동아시아 각국의 유학도들이 부고를 보내왔었다.
비판
기본적으로 민주공화국인 현대 중국에서 아무일도 하지않고 무위도식한다는 비판이 존재하며 실제로 원외 극좌정당이나 시민단체들 사이에는 소조정을 당장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오가기도 한다. 이외에도 국민당을 필두로한 범람연맹 내부의 일부 정치인들 또한 소조정의 폐지를 지지하기도 하는데 이는 청황실에 극도로 부정적이었던 쑨원의 뜻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황쿤밍 전 의원이 있다.
또한 민주당이나 사회당 소속 정치인 일부나 이들에 우호적인 지식인들이 소조정을 비판하는 경우가 있는데 민주화 투사들이 시위현장과 지하에서 죽어갈동안 장제스 정권에 협력하여 편안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실의 정치 개입 불가원칙은 1931년 청실우대조건 복구당시 합의된 내용이기도 했고 소조정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에 정상참작의 여지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여담
중국의 일부 극렬 급진주의자들은 소조정을 즉각 폐지하자고 주장하는데 대표적으로는 원외 극좌정당인 중국 공산당 (2018년), 급진좌파당과 극우정당인 중화민족사회당, 중화민족통일당 등이 존재한다.
명목상으로 중국 전역을 통제하는 대청의 황제이다 보니 이들을 중심으로 한 복벽운동이 일부 존재하며 2001년에는 실제로 청황실 복벽을 주장하는 종사복벽당(宗社復辟黨)이 창당되었으나 소조정과 황실은 물론 여론의 관심조자 받지 못한 채 2014년에 해산되었다.
중국의 원외 군소 극우정당인 중화제국당의 당수 마오위안은 스스로를 '대중화제국의 천자'라고 지칭하고 청황실 소조정은 만주 오랑캐 사이비 왕조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소조정 측은 "그런 정신나간 무리들에 대한 관심은 일체 없으며 조정과 황실에 대한 모욕에 대해 법적 대응 할 것."이라는 성명을 이례적으로 발표했다. 이후 어떻게 됬는지는 불명.
같이보기
- ↑ 황실 일원들의 실제 생활은 청시궁에서 이루어지나 주요행사는 자금성에서 이루어진다.
- ↑ 자금성에서 공동경비를 서는 금위군 인원과 자금성 면적을 포함한 결과로 실재로는 이보다 인구밀도가 낮다.
- ↑ 100여명의 규모로 사실상 경호조직이다.
- ↑ 중화민국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 및 총통 국책고문 겸임
- ↑ 자금성이나 청시궁을 방문하면 기념품 용도로 '청나라 위안'이라는 화폐를 주기는 한다... 교환비는 중국 위안과 1대1
- ↑ 청나라 황실이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 주식등의 총합이다.
- ↑ 다른 하나는 간덴포드랑
- ↑ 현재 만주족의 깃발은 난화기로 선통제가 선호했던 꽃인 보춘화에 수수꽃을 더해 만든 깃발이기 때문에 소조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 ↑ 1996년 자오쯔양 총통이 청실우대조건을 대체하고 만든 법률
- ↑ 좌측부터 선통제, 현임황제 창성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