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자치구 (민국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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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관 설명 ]
[ 세계관 설명 ]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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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주요 군주: 칭기즈 칸 · 복드 칸 · 린포체 칸 · 뱌쿠렌 칸
주요 정치 지도자: 담딘 수흐바타르 · 허를러깅 처이발상 · 욤자깅 체뎅발 · 잠빙 바트뭉흐 · 푼살마깅 오치르바트 · 차히아깅 엘벡도르지
동물 몽골야생말 · 쿨란

몽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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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몽골 자치구 | 내몽골성

동아시아의 국가 및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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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중국[1] 일본국[2] 일본인민공화국[3]
홍콩 마카오 몽골 [4] 류큐
[ 각주 펼치기 · 접기 ]
  1. 영토의 일부가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북아시아로 분류되기도 함
  2. 영토의 일부가 미크로네시아로 분류되기도 함
  3. 영토의 일부가 북아시아로 분류되기도 함
  4. 중앙아시아, 북아시아의 일부로 분류되기도 함

중앙아시아의 국가 및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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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1] 카자흐스탄 [2]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3] 몽골 [2]
[ 각주 펼치기 · 접기 ]
  1. 소련은 유라시아 전역에 영토가 걸쳐있으며 일반적인 경우 중앙아시아 국가로 분류되지 않음
  2. 2.0 2.1 동아시아, 북아시아의 일부로 분류되기도 함
  3. 서아시아, 남아시아의 일부로 분류되기도 함

틀:몽골계 민족 (민국 38)


중국의 비주권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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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국 38)의 기 중국자치구
몽골 자치구
ᠮᠣᠩᠭᠣᠯ ᠤᠨ ᠥᠪᠡᠷᠲᠡᠭᠡᠨ ᠵᠠᠰᠠᠬᠤ ᠣᠷᠤᠨ | 蒙古自治區
Mongolia Autonomous Region
깃발 휘장
ᠵᠢᠪᠬᠤᠯᠠᠩᠲᠤ ᠮᠠᠨᠠᠶ ᠤᠷᠤᠨ ᠮᠠᠨᠳᠤᠲᠤᠭᠠᠢ᠅
우리의 장엄한 조국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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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독립 1911년 12월 29일
인민혁명 1921년 3월 1일
몽골 인민 공화국 건국 1924년 11월 26일
중국으로의 재복속 1954년 n월 n일
행정구역 정보
정부 소재지 후레시 14201
하위 행정구역 1개 현급시, 20개 현, 1개 자치현
면적 1,564,116㎢[1]
인구
총 인구
3,331,932명[2]
인구 밀도
2.13명/㎢
민족 몽골인 (92.3%)
오이라트인 (3.9%), 카자흐인 (3.8%)
GRDP 전체 $173억 4,603만(2029)[3]
1인당 $5,206(2029)[4]
대칸 뱌쿠렌 칸 (2대)
정부주석 몽골 인민당
구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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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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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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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n석
현급행정구 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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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민주동맹 16석[14]
무소속 5석[15]
상징 구화 솔체꽃
구조 세이커매
구수 몽골야생말
구가 백냥의 노새의 걸음
시간대 UTC +7 ~ +8
지역번호 0814 ~ 0835
행정구역약칭
행정구역코드 530000
ISO 3166-2 CN-MN
| | | | |
몽골 자치구의 위치

개요


8K로 촬영된 몽골 자치구의 경관
ᠰᠠᠶᠢᠬᠠᠨ ᠮᠣᠩᠭᠣᠯ ᠤᠨ ᠴᠡᠯᠡᠭᠡᠷ ᠣᠷᠣᠨ
아름다운 몽골, 장엄한 나라
ᠵᠢᠪᠬᠤᠯᠠᠩᠲᠤ ᠮᠠᠨᠠᠶ ᠤᠷᠤᠨ ᠮᠠᠨᠳᠤᠲᠤᠭᠠᠢ᠅
우리의 장엄한 조국이여 영원하라

몽골 자치구 혹은 외몽골은 중국의 성급행정구역으로, 성도는 후레[16]이다. 행정구역 약칭은 멍(蒙).

중국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소련과, 동쪽으로는 신장, 남쪽으로는 닝샤, 내몽골, 싱안과 접한다. 불과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독립국으로 존재한 만큼 티베트와 더불어 중국 내에서 가장 이질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으로 중국 내에서 한족의 비율이 가장 적은 지역 중 하나이다.

상징

명칭

언어별 명칭
영어 Mongolia Autonomous Region
몽골어 ᠮᠣᠩᠭᠣᠯ ᠤᠨ ᠥᠪᠡᠷᠲᠡᠭᠡᠨ ᠵᠠᠰᠠᠬᠤ ᠣᠷᠤᠨ
한국어 몽골 자치구
표준중국어 (Meng) () () (zhì) ()
일본어 モンゴル () () ()
프랑스어 Région autonome de Mongolie
러시아어 Монголия
스페인어 Región Autónoma de Mongolia
아랍어 منغولي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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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Autonome Provinz Mongolei
포르투갈어 Região Autônoma da Mongólia
이탈리아어 Regione Autonoma della Mongolia
튀르키예어 Moğolistan Özerk Bölgesi
루마니아어 Mongolia
만주어 ᠮᠣᠩᡤᠣ ᡩᠠᠰᠠᠩᡤᠠ ᡤᠣᠯᠣᠠ
힌디어 मंगोलिया

정식 명칭은 몽골 자치구(ᠮᠣᠩᠭᠣᠯ ᠤᠨ ᠥᠪᠡᠷᠲᠡᠭᠡᠨ ᠵᠠᠰᠠᠬᠤ ᠣᠷᠤᠨ, 蒙古自治區)으로, 몽골어 발음은 [몽골룬 외베르테겐 자사크 오론(Mongɣul-un Öbertegen Jasaqu Orun)]이다. 몽골이라는 명칭은 몽골족이라는 민족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몽골어로 "용감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몽골이라는 명칭이 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국 당나라 시대로, 실위의 부족 중 하나인 몽올(蒙兀)이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북송 시대부터는 몽고(蒙古)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하였고 현재까지도 중국에서는 몽골을 몽고라고 표기한다.

그러나 어릴 몽(蒙)자가 어리석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고 옛 고(古)자도 낡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몽골인들은 이 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실제로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자신들 기준에서 "오랑캐"로 분류되는 민족들의 언어를 음차할 때 일부러 좋지 못한 뜻을 지닌 글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했기에[17] 중국에서 오랑캐니까 일부러 안 좋은 뜻의 글자를 썼다고 받아 들여지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전통적으로 몽고라고 해왔으나 1991년 외래어 심의를 통해 몽골 또한 복수 표준어가 되었으며 현대에는 대부분 몽골로 표기한다. 하지만 몽고라는 표기가 워낙 오래된 표기이다 보니 지금도 "몽고 반점"등 일부 고유명사나 조금 오래된 문헌에는 몽고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국기

몽골 국기
ᠮᠣᠩᠭᠣᠯ ᠤᠯᠤᠰ ᠤᠨ ᠲᠥᠷᠥ ᠶᠢᠨ ᠲᠠᠮᠠᠭ᠎ᠠ
지위 몽골의 국기
채택일 1955년 1월 13일
근거법령 몽골 헌법 제1장 제12조 5항
비율 1:2
국기는 직사각형으로 중앙은 청색, 양측은 붉은색으로 삼등분 되어있다. 중앙의 청색은 "영원히 푸른 하늘"을 상징하며 양측의 적색은 진보와 번영을 상징한다. 좌측 깃대 부분의 적색 위에는 황색의 소욤보 문양이 그려져 있다. 국기의 폭과 길이의 비율은 1:2이다.
몽골 기본법 제1장 제12조 5항

국장

몽골 국장
ᠮᠣᠩᠭᠣᠯ ᠤᠯᠤᠰ ᠤᠨ ᠲᠥᠷᠥ ᠶᠢᠨ ᠰᠦᠯᠳᠡ
지위 몽골의 국장
채택일 1955년 2월 12일
근거법령 몽골 헌법 제1장 제12조 3항
사용처 국가기관
국가문서
여권
훈장
해외공관
국장은 몽골의 독립과 주권 및 정신을 상징하는 황금색 소욤보 아래에 금색 연꽃이 받침을 이루고 있다.
몽골 헌법 제1장 제12조 3항

국가

현행 몽골 기본법(헌법)에는 국가를 규정하는 항목은 존재하지 않으나 1994년 제정된 "국가 상징에 관한 법률" 부록에 명시된 "몽골 국가"와 "백냥의 노새의 걸음"이 몽골의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몽골 국가

몽골 국가
ᠮᠣᠩᠭᠣᠯ ᠤᠯᠤᠰ ᠤᠨ ᠲᠥᠷᠥ ᠶᠢᠨ ᠳᠠᠭᠤᠯᠠᠯ
지위 몽골의 공동 국가
채택일 1950년 4월 26일 (최초 가사)
2006년 7월 6일 (현행 가사)
작사 첸딘 담딘수렌
작곡 빌레긴 담딘수렌
루브산잠빈 모르도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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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성한 자주 국가는
ᠳᠠᠷᠬᠠᠨ ᠮᠠᠨ ᠤ ᠲᠤᠰᠠᠭᠠᠷ ᠤᠯᠤᠰ
모든 몽골인들에게 내려온 보금자리라네
ᠳᠠᠶᠠᠭᠠᠷ ᠮᠣᠩᠭᠣᠯ ᠤᠨ ᠠᠷᠢᠭᠤᠨ ᠭᠣᠯᠣᠮᠲᠠ
이 세상의 선한 곳으로서
ᠳᠠᠯᠠᠢ ᠶᠡᠬᠡ ᠳᠡᠭᠡᠳᠦᠰ ᠦᠨ ᠭᠡᠭᠡᠨ ᠦᠢᠯᠡᠰ
영원 무궁히 번영할 것이라네
ᠳᠠᠩᠳᠠ ᠡᠩᠬᠡᠵᠢᠨ ᠡᠭᠦᠷᠢᠳᠡ ᠮᠥᠩᠬᠡᠵᠢᠨ᠎ᠡ
세상의 모든 정의로운 국가들과
ᠬᠠᠮᠤᠭ ᠳᠡᠯᠡᠬᠡᠢ ᠶᠢᠨ ᠰᠢᠳᠤᠷᠭᠤ ᠤᠯᠤᠰ ᠲᠠᠢ
유대를 더욱 견고히 다지리니
ᠬᠠᠮᠲᠤᠷᠠᠨ ᠨᠢᠭᠡᠳᠦᠭᠰᠡᠨ ᠡᠪ ᠢᠶᠡᠨ ᠪᠡᠬᠢᠵᠢᠭᠦᠯᠵᠦ
굳센 의지로 온 힘을 다하여
ᠬᠠᠲᠠᠨ ᠵᠣᠷᠢᠭ᠂ ᠪᠦᠬᠦᠢ ᠯᠠ ᠴᠢᠳᠠᠯ ᠢᠶᠠᠷ ᠢᠶᠠᠨ
사랑하는 조국 몽골을 번영케 하리라!
ᠬᠠᠶᠢᠷᠠᠲᠠᠢ ᠮᠣᠩᠭᠣᠯ ᠣᠷᠣᠨ ᠢᠶᠠᠨ ᠮᠠᠨᠳᠤᠭᠤᠯᠤᠶ᠎ᠠ
드높은 나라의 영광이 우리를 보호하니
ᠥᠨᠳᠥᠷ ᠲᠥᠷᠥ ᠶᠢᠨ ᠮᠢᠨᠢ ᠰᠦᠯᠳᠡ ᠢᠪᠡᠭᠡᠵᠦ
우리 국민의 번영은 운명과 같으리
ᠥᠷᠭᠡᠨ ᠲᠦᠮᠡᠨ ᠦ ᠮᠢᠨᠢ ᠵᠠᠶᠠᠭ᠎ᠠ ᠲᠦᠰᠢᠵᠦ
우리들의 역사, 문화와 언어를
ᠦᠨᠳᠦᠰᠦ ᠢᠵᠠᠭᠤᠷ᠂ ᠬᠡᠯᠡ ᠰᠤᠶᠤᠯ ᠢᠶᠠᠨ
대를 이어 영원히 지켜 나가리
ᠦᠷ᠎ᠡ ᠶᠢᠨ ᠦᠷ᠎ᠡ ᠳᠦ ᠪᠡᠨ ᠥᠪᠯᠡᠨ ᠪᠠᠳᠠᠷᠠᠭᠠᠶ᠎ᠠ
몽골의 용맹스런 국민들은
ᠡᠷᠡᠯᠬᠡᠭ ᠮᠣᠩᠭᠣᠯ ᠤᠨ ᠵᠣᠯ ᠲᠠᠢ ᠠᠷᠠᠳ ᠤᠳ
자유와 권리를 기원하나니
ᠡᠷᠬᠡ ᠴᠢᠯᠦᠭᠡ ᠵᠢᠷᠭᠠᠯ ᠢ ᠡᠳ᠋ᠯᠡᠪᠡ
기쁨의 열쇠, 도약의 바탕이 되는
ᠵᠢᠷᠭᠠᠯ ᠤᠨ ᠲᠦᠯᠬᠢᠭᠦᠷ᠂ ᠬᠥᠭᠵᠢᠯ ᠦᠨ ᠲᠤᠯᠭᠠᠭᠤᠷᠢ
우리의 장엄한 조국이여, 번영하라!
ᠵᠢᠪᠬᠤᠯᠠᠩᠲᠤ ᠮᠠᠨ ᠤ ᠣᠷᠣᠨ ᠮᠠᠨᠳᠤᠲᠤᠭᠠᠢ

백냥의 노새의 걸음

백냥의 노새의 걸음
ᠵᠠᠭᠤᠨ ᠯᠠᠩ ᠤᠨ ᠵᠢᠷᠤᠭ᠎ᠠ ᠯᠠᠭᠤᠰᠠ
지위 몽골의 공동 국가
채택일 1915년 (복드 칸국)
1955년 n월 n일 (현행)
작사 불명[18]
작곡 안드레이 뱌체슬라보비치 카들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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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냥의 노새의 행렬이
ᠵᠠᠭᠤᠨ ᠯᠠᠩ ᠤᠨ ᠵᠢᠷᠤᠭ᠎ᠠ ᠯᠠᠤᠰ ᠢ
가마를 짊어지고
ᠵᠢᠤᠵᠠᠨ ᠳᠤᠮᠳᠠ ᠪᠠᠨ ᠬᠥᠯᠭᠡᠯᠡᠪᠡ ᠡ ᠬᠥ
고승은 수세기에 걸쳐
ᠵᠤᠤᠭ᠎ᠠ ᠠᠴᠠ ᠵᠠᠯᠠᠭᠰᠠᠨ ᠪᠣᠭᠳᠠ ᠯᠠᠮ᠎ᠠ ᠶᠢ ᠪᠠᠨ
총카파[19]의 옥좌에 앉는다.
ᠵᠣᠩᠬᠣᠪ ᠤᠨ ᠰᠢᠷᠡᠭᠡᠨ ᠳᠦ ᠵᠠᠯᠠᠪᠠ ᠠ ᠬᠥ
은으로 된 입을 가진 비쉬구르[20]
ᠮᠥᠩᠭᠥᠨ ᠠᠮᠠ ᠲᠠᠢ ᠪᠦᠷᠢᠶ᠎ᠡ ᠪᠢᠰᠬᠢᠭᠦᠷ ᠢ
대하(大河) 위에 울려 퍼지고
ᠮᠥᠷᠡᠨ ᠳᠤᠮᠳᠠ ᠪᠠᠨ ᠬᠠᠩᠭᠢᠨᠠᠭᠤᠯᠪᠠ ᠠ ᠬᠥ
고승은 오랜 세월에 걸쳐
ᠮᠥᠩᠬᠡ ᠨᠠᠰᠤ ᠲᠠᠢ ᠪᠣᠭᠳᠠ ᠯᠠᠮ᠎ᠠ ᠶᠢ ᠪᠠᠨ
부처의 옥좌에 앉는다.
ᠮᠥᠷᠭᠥᠯ ᠦᠨ ᠢᠶᠡᠨ ᠰᠢᠷᠡᠭᠡᠨ ᠳᠦ ᠵᠠᠯᠠᠪᠠ ᠠ ᠬᠥ
금색의 구금이[21]
ᠠᠯᠲᠠᠨ ᠠᠮᠠ ᠲᠠᠢ ᠪᠦᠷᠢᠶ᠎ᠡ ᠪᠢᠰᠬᠢᠭᠦᠷ ᠢᠶᠡᠨ
대하 구석구석에 울려 퍼지고
ᠠᠷᠤ ᠮᠥᠷᠦᠨ ᠳᠦ ᠪᠡᠨ ᠬᠠᠩᠭᠢᠨᠠᠭᠤᠯᠪᠠ ᠠ ᠬᠥ
존경받는 고승은
ᠠᠴᠢᠯᠠᠯ ᠪᠣᠯᠤᠭᠰᠠᠨ ᠪᠣᠭᠳᠠ ᠯᠠᠮ᠎ᠠ ᠶᠢ ᠪᠠᠨ
구원의 옥좌에 앉는다.
ᠠᠪᠤᠷᠠᠯ ᠤᠨ ᠰᠢᠷᠡᠭᠡᠨ ᠳᠦ ᠵᠠᠯᠠᠪᠠ ᠠ ᠬᠥ

몽골의 국가는 "백냥의 노새의 걸음"으로 노새를 신의 수레로 여기고 그 노새가 백냥의 가치가 있는 특별한 수레라는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이 노래가 국가로 채택된 것은 복드 칸국 시기로 당시 복드 칸국의 총리였던 퇴그스오치린 남난쉬렌(Tögs-Ochiryn Namnansüren)이 군사 문제에 대해 회담을 위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러시아 군악대의 기념 공연을 보고 러시아 대사에게 국가를 만들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안드레이 뱌체슬라보비치 카들렉(Andrey Vyacheslavovich Kadlec)라는 작곡가가 국가의 작곡을 의뢰받아 당시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동양학 연구소에서 선율을 작곡했고, 민요이자 종교 음악이던 "백냥의 노새의 걸음"이라는 가사를 붙여 1915년 복드 칸국의 국가로 제정되었다.

역사

몽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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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흉노 동호
선비 · 오환
철륵 선비
유연 북위 서위 · 동위
돌궐 제국 북주 · 북제
동돌궐
당의 기미지배
돌궐 제2제국
위구르 카간국 실위 거란
중세 요나라
서요 나이만 케레이트 메르키트 타타르 카마그 몽골 금나라
몽골 제국
킵차크 칸국 | 오고타이 칸국 | 일 칸국 | 차가타이 칸국 원나라
오이라트 | 티무르 제국 | 모굴리스탄 칸국 | 잘라이르 왕조 | 추판 왕조 북원
준가르 칸국 | 크림 칸국 청나라 치하 몽골
청나라
청나라 치하 몽골
근현대 러시아 제국 복드 칸국 중화민국
중화민국 외몽골 점령
탄누투바 복드 칸국
투바 인민공화국 몽골 인민공화국 중화민국
투바 자치주
투바 ASSR 중화민국 몽강연합자치정부
내몽골 인민공화국
소련
러시아 SFSR
투바 ASSR | 부랴티아 ASSR
중화민국
몽골 자치구 | 내몽골성

전근대 몽골

몽골 제국의 최대 강역

칭기즈 칸 이전의 몽골은 여느 유목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명확하게 혈통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다수의 민족이 뒤섞여 있었다. 때문에 몽골 민족의 기원은 현재까지도 불명확한 상황이며 그나마 남아있는 정보라고 한다면 당나라 시기 이후 등장한 "몽올실위"라는 부족명 정도이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만주 일대의 농경 민족이 모종의 이유로 현재의 내몽골 일대로 흘러들어가 유목민 집단을 형성하였고 이 집단이 외몽골의 흉노족과 결합하여 현재 몽골 민족의 기원이 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흉노의 쇠퇴 이후 현재의 몽골 일대에는 선비족, 돌궐족이 번성하였으며 중세시대 이후부터는 요나라(거란)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요나라가 금나라(여진)에 의하여 멸망할 당시 몽골족은 요나라에게서 독립하여 금나라에 대항하였으나 타타르와 동맹을 맺은 금나라의 토벌로 인해 잠시동안 쇠퇴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칭기즈 칸이 등장하여 흩어져 있던 몽골 부족들을 통합하여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모스크바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며 몽골 역사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칭기즈 칸의 사망 이후 몽골 제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후 분열된 몽골 제국 중 원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칸국들은 점차 현지화 되어 이란, 중앙아시아, 캅카스, 러시아 등의 역사로 편입되었고 원나라 역시도 강경한 통치에 반발한 한족들의 반란과 내부 부패로 인해 점차 몰락해갔으며 결국 주원장이 이끄는 홍건적에 의해 만리장성 북방으로 밀려나게 되었는데 이시기의 원나라를 북원이라고 부른다.

북원 정권은 17세기, 후금에 복속되기까지 존속하였으며 17세기 이후에는 북원을 포함하여 준가르 등의 몽골계 민족들까지도 청나라에 복속되게 되었다. 청나라 통치기에 몽골 대칸의 작위는 청나라 황제가 세습하였으며 티베트 불교가 들어오며 젭춘담바 후툭투가 종교 지도자로 존경받기 시작하였다.

독립과 공산정권

중몽소협약(中蒙蘇協約)의 조인 현장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나라가 멸망하고 몽골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상실되자 몽골의 왕공족들은 복드 칸(젭춘담바 후툭투 8세)를 중심으로 복드 칸국을 건국해 독립을 선포하였다. 복드 칸국은 1915년 캬흐타 협정의 결과 자치권을 보장받았으나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뒷배이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자 1919년 중국 안휘군벌의 쉬수정이 외몽골 출병을 단행하여 몽골의 자치권을 취소하여 학정을 일삼있다. 1921년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휘하의 러시아 백군 세력이 몽골을 점령하고 이들의 지지로 잠시 복드 칸이 복위하였으나 소련의 지원을 받은 몽골 인민당의 혁명으로 인해 공산화되었다.

1924년 복드 칸이 서거한 이후 복드 칸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으며 몽골 인민 공화국이 건국되었으나 몽골 혁명의 주도자였던 담딘 수흐바타르는 이미 1년 전에 사망하였기에 그의 동료였던 허를러깅 처이발상이 정권을 잡았다. 그는 폭압적인 독재정치를 펼쳐 수많은 승려들과 지식인들을 숙청했으며 몽골의 국교였던 티베트 불교를 탄압했고 몽골 문자를 폐지하고 자신과 수흐바타르에 대한 우상숭배 역시도 실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권기 동안 몽골은 근대화되어 전국 곳곳에 포장도로가 깔리고 통신선이 개통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몽골을 먹여 살리는 광공업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또한 의무 교육 도입으로 문맹률도 낮아졌고 변발같은 구시대적 관습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처이발상의 가혹한 통치는 결과적으로 몽골 인민에게 인민공화국 체제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만들었으며 이는 처이발상 사후 몽골 인민 공화국이 붕괴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몽골은 소련을 지원하였으며 1945년 소련의 대일전 참전 당시에는 소련과 함께 만주와 내몽골 일대로 진격하였다. 몽골 민족주의자였던 처이발상은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영역과 만주의 싱안성 등 내몽골 지역을 몽골로 병합시키려고 하였고 소련 역시 잠정적으로 내외몽골을 통합하여 "몽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한 뒤 자국으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세웠었으나 미국과 중국의 극렬한 반대로 인하여 계획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1952년 소련 모스크바에 방문한 처이발상이 현지에서 병사하자 강경 친소파이자 몽골의 소련 편입에 적극적이던 욤자깅 체뎅발이 집권하였다. 이에 몽골 내에서는 말년에 반소 행보를 보이던 처이발상을 소련이 암살했다는 풍문이 돌며[22] 여론이 요동치기 시작했으며 1년 후인 1953년에는 스탈린이 사망한 뒤 몽골의 후원국이던 소련 내의 정치 투쟁이 시작되며 몽골을 둘러싼 정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전전 외몽골의 영유권을 주장하던[23] 중국은 몽골 독립의 근거가 된 중소 우호 동맹 조약이 동년 2월 24일에 파기 된 점과 몽골 독립투표의 적법성을 문제삼아 몽골의 독립 승인을 취소하였고 결국 1953년 7월 27일, "공산주의 폭정으로부터의 외몽골 인민 해방"을 구실로 몽골을 전면 침공하였다. 소련의 개입이 없는 상태에서 몽골군은 매우 쉽게 붕괴되었고 약 두 달 만에 수도인 울란바타르(現 후레)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친소 성향의 몽골 지도부는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부터 7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극동의 빈국인 몽골을 위해 중국과의 전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고 결국 소수 공군을 동원한 폭격 이외에는 사실상 중국의 몽골 침공을 묵인하였다. 그러자 자력으로 중국군을 방어할 역량이 없던 몽골 지도부는 절망에 빠졌으며 내부에서는 국가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기득권을 일부라도 보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중(對中)화친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고 결국 별다른 방도가 없던 몽골 정부는 1953년 10월 11일 공식적으로 전투 중단 및 항복을 선언하였다.

항복 이후 몽골에는 중국군이 주둔하며 군정이 실시되었고 몽장위원회 위원장 톈중진(田炯錦)이 "외몽고 임시정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였으나 몽골 내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몽골 정부와 군이 중국군에 의해 완전히 패배하여 무너진 것이 아니라 여력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항복"한 것이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군정이 들어섰다 한들 몽골 인민혁명당의 중앙 및 지방 정부에 대한 통제는 여전하였고 몽골군 역시 무장해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인민혁명당의 통제 하에 남아있었으며 인민혁명당 소속의 공무원들 역시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지지기반 없이 외몽골을 자신들의 관리하에 둔 중국 정부는 몽골 편입 과정에 있어서 마찰과 저항을 최소화하고 이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결국 장제스 총통의 강한 직접 통치 의사에도 불구하고 현지를 장악하고 있던 인민혁명당과 협력하고 양보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아무리 인민혁명당과 협력을 해야하는 상황이라 한들 인민혁명당 측에 완전히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되었듯 아무런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몽골 내의 주도권을 쥘수는 없었고 중국 정부는 몽골내에서 지지기반을 만들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게 되었다.

중국 점령 당국은 통일 협상이 진행되던 와중 인민혁명당 측에 1924년 폐지되었던 군주정의 복구를 요구하였다.

중국 편입과 불편한 동거

신시대의 개막과 정치 혼란, 그리고 현재

자연환경

몽골 초원의 풍경

대표적인 내륙국이자 고지대 국가로 몽골의 자연환경은 "서늘한 초원"이라는 말 하나로 대변된다. 내륙국 특성상 대부분의 계절이 건조하며 대체로 남부로 갈수록 더 건조해지는 경향이 있다. 또한 고지대 국가이기에 서늘하면서도 연교차가 매우 심한데 여름철에는 평균기온 20℃ 정도의 따뜻한 날시가 이어지다가도 겨울이 되면 조드(ᠵᠤᠳ) 라고 하는 혹한이 찾아와 -20℃에서 -30℃까지 기온이 떨어지며 심한경우 -50℃ 밑으로 떨어져 수많은 가축들이 동사하기도 한다.

지형의 경우 동고서저인 대한민국과는 달리 서고동저, 정확히는 서북고동저의 고도가 나타난다. 이는 몽골 서북부 지역에 알타이 산맥이 위치해 있고 남부 지역에는 황사의 발원지로 알려진 고비 사막이 위치한 까닭이다. 또한 국토 곳곳에 큰 호수가 위치해있는데 몽골 북부에 위치한 훕스굴 호(ᠬᠥᠪᠰᠦᠭᠦᠯ ᠨᠠᠭᠤᠷ)가 유명하다. 여담으로 구 몽골 해군은 몽골이 바다가 없는 내륙국인 까닭에 훕스굴 호에 주둔했으나 1993년 해산되었다.

인문환경

전통의상을 입은 몽골인 가족

영토면에서는 세계 19위의 크기를 자랑하는 대국이지만 정작 인구는 한국의 절반도 되지않는, 1km2당 인구밀도가 2.13명이라는 다른 의미로 극악의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국가이다. 출산율은 3명에 가까운 2.78명이라는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으나 정작 대부분의 인구가 도시, 특히 수도인 니슬렐 후레에 모여사는 덕분에[24] 시골에서 체감되는 인구는 훨신 낮다. 때문에 최근 몽골 정부는 한국의 세종시, 단군시와 마찬가지로 행정복합도시 건설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국민의 대부분은 몽골인(몽골족)이며 그중에서도 할하인[25]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외에도 카자흐인, 오이라트인 및 기타 튀르크계 민족들과 소수의 러시아인이나 중국인(주로 한족이나 만주족)이 존재하나 이들을 다 합쳐도 10% 미만이기에 실질적으로 단일민족 국가로 분류된다. 근대에는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는 할하 몽골인들과 카자흐, 오이라트, 칼미크, 부랴트 등의 기타 튀르크계 민족 및 내몽골의 주류를 차지하는 차하르인들과의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었고 종종 소요사태도 발생하였으나 현재는 미미한 수준이다.

민족 구성 자체는 복잡한 편이지만 대부분의 몽골 인구는 국어인 몽골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데 2020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 인구의 97.3% 가량이 모국어 혹은 모국어 수준으로 유창하게 몽골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답변하였다. 몽골어는 몽골 문자로 표기되는데 세로쓰기가 원칙이나 온라인 환경에서의 불편함으로 인해 가로쓰기 역시 대중화 되어 있다. 몽골 문자의 복잡함과 불편함으로 인해 공산정권 시절에는 키릴 문자 표기로 몽골어를 표기하였으나 왕정복고 이후 폐지되었다. 현재 몽골어는 몽골 문자와 라틴 문자 표기를 병기하며 몽골어 이외의 소수민족의 언어는 주로 라틴 문자로 표기한다.

몽골의 주류 종교이자 국교는 티베트 불교이다. 몽골에서 인구 대비 티베트 불교도의 비율은 티베트 자치성을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이며(85.7%) 중국 내의 성급행정구역 중에서는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티베트 불교 다음으로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종교는 이슬람교 (3.2%)로 대부분은 카자흐인이다. 젊은층 사이에서는 기존 티베트 불교의 보수성으로 인하여 무종교인이 늘어나는 추세였으나 뱌쿠렌 칸의 즉위 이후에는 그녀의 개인기와 개혁정책의 영향을 받아 무종교인의 증가세는 정체되어 있다.

행정구역

몽골 자치구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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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급행정구
없음
현급행정구
현급시 1, 현 20, 자치현 1
자치구직관
현급행정구
후레시
성도 庫倫市
트브현
中央縣
헨티현
肯特縣
더르너드현
東方縣
더르너고비현
東戈壁縣
고비알타이현
戈壁阿爾泰縣
오브스현
烏布蘇縣
볼간현
布爾干縣
동드고비현
中戈壁縣
아르항가이현
後杭愛縣
다르항올현
達爾汗烏拉縣
바잉헝거르현
巴彥洪戈爾縣
으브르항가이현
前杭愛縣
오르홍현
鄂爾渾縣
셀렝게이현
色楞格縣
자브항현
扎布汗縣
오므느고비현
南戈壁縣
흐브스글현
庫蘇古爾縣
허브드현
科布多縣
바론오르트현
西烏爾特縣
고비숨베르현
戈壁蘇木貝爾縣
바잉을기 카자흐족 자치현
巴彥烏列蓋哈薩克族自治縣
부지급행정구 부지급시

몽골의 행정구역은 2개의 단계로 나뉘어진다. 상급행정구은 총 22개로 수도 후레[26]와 21개의 아이막(ᠠᠶᠢᠮᠠᠭ, aimag)[27]으로 구성된다. 상급행정구 산하에는 하급행정구가 설치되어 있으며 총 315개의 솜(ᠰᠤᠮᠤ, soum)[28]으로 구성되어 있다. 솜 하위에는 하위엔 박(ᠪᠠᠭ, bag)이 있으나 이는 정식 행정구역이 아니며 한국으로 따지면 마을과 같은[29] 개념이다.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때 행정구역이 많이 간소한데 그 이유는 몽골의 총 인구가 현재도 천만명은 고사하고 오백만도 안되는 수준이며 행정구역이 구체화 되던 공산정권 시절에는 지금보다도 적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기에 복잡한 행정구역을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

높은 자율성

대칸과 젭춘담바 후툭투


몽골 대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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젭춘담바 후툭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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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대칸이자 제10대 젭춘담바 후툭투인 뱌쿠렌 칸

대칸(ᠬᠠᠭᠠᠨ, Khagan) 혹은 카간은 몽골의 군주이자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몽골의 상징적 국가원수이다.

일반적으로 혈통으로 세습되는 다른 군주들과는 달리 종교지도자인 젭춘담바 후툭투로 확인된 인물이 대칸으로 임명되는 구조이며 때문에 아래 설명될 젭춘담바 후툭투와 혼동되기도 하나 법적으로 몽골의 국가원수는 젭춘담바 후툭투가 아닌 대칸이다.

대칸은 몽골의 국가원수로서 여러 권한을 가지고 있다. 법률 및 헌법의 제개정 및 폐기에 대한 동의권 및 거부권, 면세권, 군경에 대한 통수권, 총리 이하 각료 및 공무원들에 대한 임면권, 의회 해산권, 사면권 등이 있다. 또한 칙령을 발표하여 헌법에 준하는 조치를 내릴수도 있으며 실정법 위에 군림하는 존재이기에 사법적 제재를 받지 않는다. 또한 모든 여권이 대칸의 신하인 외무대신의 허가를 받아 발급되기에 여권을 발급받지 않으며 비상대권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위의 권한중 상당부분은 형식적인 권한으로 실질적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아래 설명될 총리와 내각이다.


젭춘담바 후툭투(ᠵᠠᠪᠵᠠᠩᠳᠠᠮᠪᠠ ᠬᠤᠲᠤᠭᠲᠤ, Jebtsundamba Khutuktu)는 몽골 티베트 불교 겔룩파 활불이자 종교 지도자이다. 복드 게겐이나 복드 라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티베트 불교의 다른 활불들인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와 마찬가지로 혈통이 아닌 영혼으로 계승되는데 불교의 윤회설과 결합하여 선대 젭춘담바 후툭투가 사망하면 윤회에 의거하여 젭춘담바 후툭투의 의식이 다른 아이의 몸으로 환생한다고 믿는다.

때문에 젭춘담바 후툭투가 승하하면 그 뒤를 이을 계승자가 될 아이를 고승들과 섭정이 찾는다. 고위 라마들이 후대 젭춘담바 후툭투와 관련된 꿈을 꾸거나 화장된 시신의 연기의 방향 등을 후보자 선별의 지표로 삼는다고 한다. 계승자를 찾으면 적법한 심사를 거친다. 처음 후보자를 가려낼 경우, 환생 후보자의 집에 선대 젭춘담바 후툭투의 유물과 유물이 아닌 것들을 들고간다고 한다. 여기서, 환생 후보자는 선대 젭춘담바 후툭투의 유물에 유독 집착한다고 한다.

이후 세 가지 시험을 거쳐 통과한다면, 즉 환생자로 판명되면 즉시 달라이 라마에 의해 후대 젭춘담바 후툭투로 선출된다. 젭춘담바 후툭투는 티베트 불교 지도자인 따라나타의 화신으로 몽골의 모든 중생들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열반으로 이끌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금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출된 경우 보통 아주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젭춘담바 후툭투들의 치세는 대단히 길게 이어진다. 현재의 젭춘담바 후툭투도 어릴 적에 선출되어 현재까지 지위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6~20세에 정식으로 즉위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권한은 정부와 섭정에게 있다. 섭정은 고위 승려 1명, 속인(세속의 인간) 1명으로 이루어지며, 젭춘담바 후툭투가 정식 즉위하기 전까지 젭춘담바 후툭투의 공무 전반을 관리한다.[주의]

몽골 국가원수=젭춘담바 후툭투?

흔히들 몽골의 국가원수를 호칭 할 때 대칸과 젭춘담바 후툭투라는 용어가 혼용되어 사용되기에 몽골 국가원수의 정식 명칭을 젭춘담바 후툭투로 착각하거나 젭춘담바 후툭투를 대칸의 동의어로 아는 이들이 많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두 직위는 서로 분리된 존재로 각각 세속국가 몽골과 몽골의 종교(티베트 불교)를 대표하는 직책이다.

즉 이슬람권으로 비유하자면 대칸은 술탄 혹은 국왕, 젭춘담바 후툭투는 칼리프에 해당되는 직위로 법적으로는 마치 과거 오스만 제국에서 세속지도자인 술탄이 종교지도자인 칼리프를 겸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속지도자인 대칸이 종교지도자인 젭춘담바 후툭투를 겸하는 형태이며 이때 오스만의 국가원수가 칼리프가 아닌 술탄이듯 몽골의 국가원수도 젭춘담바 후툭투가 아닌 대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스만과는 달리 이 둘이 서로 혼동되는 이유는 권력의 승계과정에서 정통성의 주체의 차이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오스만의 술탄은 혈통으로 세습되지만 종교 지도자인 칼리프는 이슬람 부족장들과 이맘들이 명목상 선출하는 칭호였던지라 일단 세속지도자인 술탄 칭호를 "혈통"을 통하여 세습받은 뒤에 거수기인 이맘들의 지지를 통하여 종교지도자인 칼리프직에 선출되면 되는 일이었다. 즉 정치적 정통성인 혈통이 종교적인 정통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몽골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과거 몽골을 통치했던 칭기즈 칸의 보르지긴 가문은 씨가 마른 상황이었기에 정치 종교적 정통성을 위하여 종교지도자인 젭춘담바 후툭투를 국가원수인 대칸으로 추대했는데 문제는 젭춘담바 후툭투는 혈통에 따라 세습되는 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젭춘담바 후툭투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처럼 선대 젭춘담바 후툭투가 승하하면 그 영혼이 후대 젭춘담바 후툭투로 환생한다고 믿었기에 혈통이 아닌 젭춘담바 후툭투의 영혼, 즉 "젭춘담바 후툭투라는 직책 그 자체"가 정통성을 부여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과 같이 일단 술탄으로 추대한 뒤 칼리프로 선출한다는 것, 즉 혈통으로 세속적 정통성을 얻은 인물에게 종교적 정통성을 부여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대칸으로 선출된 이유(세속적 정통성을 부여받은 이유)가 환생으로 선출되는 젭춘담바 후툭투라는 직책 때문인데 "전대 젭춘담바 후툭투의 환생자가 아니한 인물"이 대칸이 된다는 것은 젭춘담바 후툭투라는 종교적 정통성을 부정함과 동시에 종교적 정통성에 기반을 둔 대칸의 세속적 정통성을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오스만의 경우는 세속적 정통성에 의해 종교적 정통성이 부여받는 구조였기에 권력의 주체는 "세속적 정통성인 술탄"에 있으며 "종교적 정통성인 칼리프"에 대해 세속적 정통성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오스만 헌법에도 국가원수가 술탄이라고 명시되었기에 누가 국가원수인지에 대하여 혼동이 없지만 몽골의 경우는 종교적 정통성에 의해 세속적 정통성이 부여받는 구조였기에 권력의 주체는 "종교적 정통성인 젭춘담바 후툭투에"에 있으며 "세속적 정통성인 대칸"이기에 종교적 정통성을 받을 수 있는것이 아니라 종교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기에 세속적 정통성을 받는 구조, 즉 종교적 정통성에 세속적 정통성이 끌려오는 구조였기에 종교적 정통성이 세속적 정통성에 대해 우위에 있으나 헌법에 명시된 국가원수(세속 권력)은 대칸이기에 혼동이 생긴다는 것이다.

성장과 내각


대몽골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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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임 총리인 할트마깅 바트톨가

대몽골국 총리(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ᠤᠯᠤᠰ ᠤᠨ ᠶᠡᠷᠦᠩᠬᠡᠢ ᠰᠠᠶᠢᠳ, Prime Minister of Mongolia)는 몽골의 정부수반이자 정치적 실권을 지닌 실질적인 국가 지도자이다.

몽골이 입헌군주국인 만큼 법적으로 몽골 총리의 임명권은 국가원수, 즉 군주인 대칸에게 있다. 그러나 이는 형식적인 것으로 실질적으로는 국가대후랄 선거를 통해 새로운 국가대후랄 의원들이 선출되면 그 의원들중 대칸이 총리를 지명하는 방식이며 이때 다수당의 당수를 총리 후보로 지명하는 게 관례이다. 최종적으로 이렇게 지명된 총리 후보를 국가대후랄의 신임투표를 거쳐 총리로 선출하며, 전체 의석 중 과반의 신임을 얻으면 총리가 된다. 만약 과반을 얻지 못한다면 2차 투표에 들어가는데 이 때는 전체 의석의 중 1/3의 신임을 얻으면 총리가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2차 투표가 실행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몽골의 총리는 몽골 행정부(내각)의 수장으로 일반적으로 타국의 대통령, 주석, 의원내각제 총리 등과 동격으로 간주된다. 총리의 주요 권한으로는 법률에 대한 제출권, 각료들에 대한 임면권, 실질적인 의회해산권 및 군경에 대한 통수권[31] 등이 있다. 특이한 점은 다른 내각제 국가의 정부수반들에게는 없는 상급행정구역 수반[32]들에 대한 임면권이 몽골 총리에게는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는 위의 인문환경과 행정구역 문단에서 설명하였듯이 몽골의 인구가 영토에 대비하여 몹시 적기 때문에 지방자치제를 시행하여도 비용에 비해 실효성이 마이너스 수준이기 때문이다.

여태 내각제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총리의 임기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불신임이나 자진 사퇴가 없다는 가정하에 의회의 임기가 총리의 임기와 동일시되는 내각제 국가의 특성상 실질적으로 의회인 국가대후랄의 임기가 총리의 임기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역대 총리 가운데 불신임을 당한 총리는 없으며 4년 미만의 임기를 지낸 총리는 신헌법이 재정되어 재총선을 진행해야 했던 잠빙 바트뭉흐 총리(2기), 암살당한 산자수레깅 조릭 총리, 린포체 칸 암살사건으로 인해 사임한 나차깅 바가반디 총리와 계임총리였던 차히아깅 엘벡도르지 총리(1기), 남바링 엥흐바야르 총리 외에는 없다. 때문에 몽골 총리들의 평균 임기는 타 내각제 국가들과 비교해서 긴편이다.

몽골 내각은 몽골의 행정권을 행사하는 최고기관으로 총리를 수반으로 한다. 총리 선거를 통해 총리가 선출되면 총리가 내각을 구성하는데 이때 총리가 내각 명단을 제청하면 그 명단에 따라 대칸이 각료를 암명하는 방식으로 내각이 구성된다. 내각이 구성 될 때 대부분의 각료들은 국가대후랄 의원들로 채워지며 1992년 개정 헌법에 의거하여 총리와 마찬가지로 각료들 또한 모두 문민이여야 한다. 특이점이라고 한다면 군사정권 시절의 영향으로 관료출신 각료, 즉 비의원 출신 각료가 타국에 비해 많다는 점이 있다.

역대 총리

대몽골국 총리
이름 임기 선거 정당
시작일 종료일
1

다르자빈 에르데네트
ᠳᠠᠷᠵᠠᠪᠢᠨ ᠡᠷᠳᠡᠨᠢᠲᠦ
(1886 ~ 1971)
1 1954년 3월 1일 1958년 2월 28일 1회 [33]
2 1958년 3월 1일 1962년 2월 28일 2회
3 1962년 3월 1일 1966년 2월 28일 3회
2

발링긴 졸타르갈
ᠪᠠᠯᠢᠩ ᠤᠨ ᠵᠣᠯᠲᠠᠷᠭᠠᠯ
(1904 ~ 1993)
4 1966년 3월 1일 1970년 2월 28일 4회 [34]
5 1970년 3월 1일 1974년 2월 28일 5회
6 1974년 3월 1일 1978년 2월 28일 6회
7 1978년 3월 1일 1982년 2월 28일 7회
3

곤치깅 을지바타르
ᠵᠠᠩᠪᠠ ᠶᠢᠨ ᠪᠠᠲᠤᠮᠥᠶᠢᠩᠬᠡ
(1909 ~ 1991)
8 1982년 3월 1일 1986년 2월 28일 8회 [35]
4

잠빙 바트뭉흐
ᠵᠠᠩᠪᠠ ᠶᠢᠨ ᠪᠠᠲᠤᠮᠥᠶᠢᠩᠬᠡ
(1926 ~ 1997)
9 1986년 3월 1일 1990년 2월 28일 9회 [36]
10 1990년 3월 1일 1992년 2월 12일 10회
5

푼살마깅 오치르바트
ᠫᠦᠩᠰᠠᠯᠮ᠎ᠠ ᠶᠢᠨ ᠸᠴᠢᠷᠪᠠᠲᠤ
(1942 ~ )
11 1992년 2월 12일 1996년 2월 11일 11회 [37]
6

산자수레깅 조릭
ᠰᠠᠩᠵᠢᠶᠠᠰᠦ᠋ᠷᠦᠩ ᠦᠨ ᠵᠣᠷᠢᠭ
(1962 ~ 1998)
12 1996년 2월 12일 1998년 10월 2일 12회 [38]
7

차히아깅 엘벡도르지
ᠴᠠᠬᠢᠭ᠎ᠠ ᠶᠢᠨ ᠡᠯᠪᠡᠭᠳᠣᠷᠵᠢ
(1963 ~ )
13 1998년 10월 4일 2000년 2월 11일 [39]
8

나차깅 바가반디
ᠨᠠᠴᠤᠭ ᠤᠨ ᠪᠠᠭᠠᠪᠠᠨᠳᠢ
(1950 ~ )
14 2000년 2월 12일 2001년 10월 28일 13회 [40]
9

남바링 엥흐바야르
ᠨᠠᠮᠪᠠᠷ ᠤᠨ ᠡᠩᠬᠡᠪᠠᠶᠠᠷ
(1958 ~ )
15 2001년 10월 28일 2004년 2월 11일 [41]
10

차히아깅 엘벡도르지
ᠴᠠᠬᠢᠭ᠎ᠠ ᠶᠢᠨ ᠡᠯᠪᠡᠭᠳᠣᠷᠵᠢ
(1963 ~ )
16 2004년 2월 12일 2008년 2월 11일 14회 [42]
17 2008년 2월 12일 2012년 2월 11일 15회
18 2012년 2월 12일 2016년 2월 11일 16회
11

미예곰빈 엔흐볼드
ᠮᠡᠶ᠎ᠡᠣᠮᠪᠣ ᠶᠢᠨ ᠡᠩᠬᠡᠪᠣᠯᠤᠳ
(1964 ~ )
19 2016년 2월 12일 2020년 2월 11일 17회 [43]
12

우흐나깅 후렐수흐
ᠤᠬᠤᠨᠠᠭ᠎ᠠ ᠶᠢᠨ ᠬᠦᠷᠦᠯᠰᠦ᠋ᠬᠡ
(1968 ~ )
20 2020년 2월 12일 2024년 2월 11일 18회 [44]
13

할트마깅 바트톨가
ᠬᠠᠯᠲᠠᠮ᠎ᠠ ᠶᠢᠨ ᠪᠠᠲᠤᠲᠤᠯᠭ᠎ᠠ
(1963 ~ )
21 2024년 2월 12일 2028년 2월 11일 14회 [45]
22 2028년 2월 12일 2032년 2월 11일
(예정)
15회

성의회(대후랄)

몽골 국가대후랄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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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트마긴 바트톨가 내각
(2024~)
여당
민주당
39석
야당
몽골 민족당
25석
통합몽골
6석
녹색시민당
3석
무소속 3석
재적 76석 | 공석 0석
국가궁 내부의 국가대후랄 회의장

국가대후랄(ᠤᠯᠤᠰ ᠤᠨ ᠶᠡᠬᠡ ᠬᠤᠷᠠᠯ, State Great Khural)은 몽골의 입법부로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국가대의회(國家大議會)로 번역되기도 한다.

의원의 임기는 대한민국 민의원과 마찬가지로 4년이나 민의원 해산이 비교적 빈번히 일어나서 대부분의 경우 4년간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는 민의원 의원들과는 달리 몽골에서는 의회 해산이나 내각불신임이 사실상 일어나지 않는 관계로 몽골 국가대후랄 의원들은 4년의 임기를 보장받는다. 따라서 국가대후랄 선거는 4년마다 치뤄지며 원래는 월드컵이 있는 해마다 치뤄졌으나 1992년 조기총선 이후부터는 하계올림픽이 있는 해와 동일한 해에 치른다.

국가대후랄의 정원은 76명이며 의원 선출방식은 복수형 다수대표제(Plurality-at-large voting)[46]를 채택하고 있다. 2004년까지는 일반적인 소선거구제를 택하였으나 민심의 변화로 인한 극단적인 수준의 의석 수 변동을 우려하여 2008년 총선부터 복수형 다수대표제를 채택하였다. 2012년에는 잠시 구속명부식 비례대표제와 병행하기도 했고 2016년에는 소선거구제로 복귀하기도 하였으나 2020년에 복수형 다수대표제로 복귀하였다.

국가대후랄은 타국의 입법부와 마찬가지로 법률을 심사하고 제정하며 예산안과 결산을 심사한다. 또한 몽골 행정부의 수반인 총리를 선출하고 불신임하는 권한을 가짐으로써 행정부를 견제한다.

정당 구도

  • 민주당: 경제적 자유주의와 사회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우익정당이다. 1980년대 후반 몽골의 민주화를 이끌어냈던 민주화 운동가들의 주도로 창당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우익에 해당하지만 보혁구도에서는 진보를 맡고있다. 민족당에 비하면 집권경험이 부족하고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미숙함이 보이기에 수권정당으로서는 부족하다는 평이 있다.
  • 몽골 민족당: 사회민주주의와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좌익정당이다. 1954년 몽골내전 이후 몽골 구국정부를 주도했던 이들에 의해 창당되었다. 현존하는 정당들 가운데 동아시아에서 4번째로 오래된 정당으로[47] 1992년 민주화 이전까지 권위주의를 표방하는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내세우며 일당독재 체제로 몽골을 통치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를 당론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보혁구도에서는 보수를 맡고 있다. 튀르키예의 공화인민당과 자주 비교된다.
  • 통합몽골: 민족당의 온건화에 반대한 극단주의 성향의 당원들이 탈당해 창당하였다. 강경보수주의, 불교근본주의 성향을 보이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극단적인 할하 몽골인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몽골 사회의 분열을 야기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있다. 또한 현재 제위중인 뱌쿠렌 칸에 대하여 가장 적대적인 정당으로 현재 몽골 법무부의 사찰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
  • 녹색시민당: 환경주의와 녹색자유주의, 직접민주주의 성향을 보이는 진보정당이다. 동아시아 최초로 원내진출에 성공한 녹색당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현재 민족당과 민주당에 대한 젊은층의 반감을 양분삼아 빠르게 당세를 확장하고 있다.

외교

한몽관계

한동훈 법무부 차관과 롭상남스랭 어용에르덴 몽골 부총리

역사적으로 볼때 한국인들의 몽골에 대한 감정은 그다지 좋은편이 아니었다. 고려 말기의 원나라 침공(대몽항쟁기)와 원 간섭기를 거치며 몽골에 대한 감정이 1차적으로 악화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중국 이외의 민족들을 "오랑캐"로 보는 시선이 강했으며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몽골인 기병들이 조선 침공에 동참하면서 다시 한번 악화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의 격량기에 이르러서는 한국은 일본에 강제병합 되었고 몽골은 독립→멸망→백군의 점령→다시 독립→공산화라는 과정을 거치며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서로에게 관심을 쓸 틈이 없었고 이런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몽골에 대한 악감정이 누그러지게 되었다.

1954년 몽골에 반공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상호안보협력기구가 설립되자 한몽 양국은 창립국으로써 군사적인 동맹을 맺게되었다. 구냉전기에는 한국의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이 몽골에 파견되는 일이 일부 있었으나 대부분의 파견 노동자들은 서독이나 아랍 등의 부유한 지역으로 파견되었기에 당시에도 별 접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21세기에 이르러서는 몽골 출신의 노동자들 다수가 한국에서 취업 비자를 받고 취업을 한 상태이며 많은 한국 기업들이 몽골에 진출해 있기에 양국간의 관계는 점점 긴밀해지고 있다.

여담으로 2002년 경주 양동마을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원대 법전인 지정조격(至正條格)이 발견되자 2010년 남바링 엥흐바야르 전 총리를 필두로 한 방문단이 방한하여 지정조격을 관람하기도 하였다.[1]

중몽관계

우흐나깅 후렐수흐 몽골 총리와 왕이 중국 외교부장

역사적으로 중국의 입장에서 볼때 몽골은 자신들 보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유목민족이자 두려운 침략자 였으며 몽골의 입장에서 중국은 거만한 지배자였고 신해혁명 이후 독립한 몽골에 대하여 중화민국이 재병합 시도를 하는 등 양국관계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때문에 양국 국민의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다지 곱지는 않은 편으로 몽골 내에서는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가 다수 발생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몽골 유학생들이 차별을 받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국민감정과는 별개로 정부 간의 관계는 꽤나 좋은 편이며 양국의 경제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몽골 수입의 40%, 수출의 89% 가량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으며 국토가 척박한 몽골이 곡물 등의 식량 자원을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몽골 정부는 자국의 식량 및 경제 안보와 항구 및 철도 이용을 위하여 중국에 우호적인 정책을 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20년대 이후 시진핑 등 중국 내 강성 우파들을 필두로 몽골의 국민영웅 칭기즈 칸과 쿠빌라이 칸등의 혈통이 중국 내몽골의 차하르족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그들을 중국인이라고 억지를 부리자[48] 몽골인들의 대중 감정이 크게 악화되었으며 2022년 연말 중국과 연계된 대규모의 비리 사건인 일명 "석탄 게이트"가 드러나며 몽골 국민들의 반중 정서가 격화된 상태이다. 때문에 중국 정부는 몽골에 대한 관세를 크게 낮추고 경제 지원을 강화하거나 항구 이용료를 깎는 등의 방법으로 호감도를 늘리려는 시도를 지속하고 있다.

몽소관계

블라디미르 푸틴 소련 주석과 우흐나깅 후렐수흐 총리

1920년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성립된 공산정권인 몽골 인민 공화국이 존속하던 당시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몽골 내전 이후 현재 체제가 들어서면서 양국 관계는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몽골 군사정부의 수뇌부는 몽골 민족주의 성향과 더불어 강경한 반공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티베트 불교를 국교로 지정한 신생 정부에게 있어서 베리야 주석의 소련 정부가 벌이던 문화대혁명과 종교 탄압[49]은 가히 지옥도를 연상하게 만들 정도의 잔악한 행위였다.

때문에 구냉전기 내내 몽골은 소련과 대립하였으며 중국에 위치한 반소 망명 러시아인들의 단체인 자유 러시아 임시정부를 지원하여 소련 정부의 혈압을 올리는데에 일조하기도 하였다. 구냉전의 종식 이후에는 몽골의 대중 관계가 악화되며 오히려 러시아와 가까워 지려는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푸틴 주석의 취임 이후 소련내 불교 탄압이 다시금 거세지고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경제

몽골 최대의 구리 광산인 오유톨고이 광산

다수의 한국인들이 몽골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유목국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몽골 경제에 관련하여 축산업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는 오해를 하기도 하나 실제 몽골 경제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산업은 광산업이다. 비율상으로는 서비스업이 50% 이상을 차지하지만 주요 수출품의 82% 이상이 석탄, 구리 등의 광물이다. 몽골은 세계 10대 자원 부국에 속하는 국가로 세계 4위의 석탄 매장량과 12위의 구리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세계 3위 규모의 형석과 인, 5위 규모의 텅스텐, 14위 규모의 우라늄과 7위 규모의 몰리브데넘 또한 매장되어 있다.

때문에 몽골 경제는 원자재 광물 수출 산업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외에는 귀금속 및 섬유 수출 산업이 그 뒤를 잇고 있으나 원자재 수출에 비하면 그 규모는 미약한 수준이며 2010년대 이후로 몽골 정부가 중점적으로 규모를 키우고 있는 건설 시장 역시 93% 가량을 몽골 국내 업체가 점유하고 있기에 몽골 국가 전체를 광산업이 먹여살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도 몽골 국민들의 소득은 많이 낮은 편이다. 일단 인구가 적어서 내수 시장이 빈약하고 대부분의 광물이 중국으로 수출되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매우 높아 중국 경제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또한 몽골 정부와 국민 모두가 해외 기업에 대하여 극도로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광산업 발전에 필수적인 외국 기업들의 투자를 얻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2012년 이후로 세계적인 불경기와 더불어 원자재 가격 하락까지 겹치면서 몽골의 경제성장률이 10%대에서 0.4%까지 폭락하였고 이런 와중에도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와 심각한 수준의 정관계 비리로 인해여 결국 IMF 구제금융과 더불어 타국의 경제 원조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2022년 연말에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더불어서 전현직 총리들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가진 2조 5천억원 규모의 대규모 석탄 비리사건이 일어나며 국민여론이 폭발하였고 여러 부패 정치인들이 구속되면서 경제체질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사회

수도 후레의 야경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 자체는 국교인 티베트 불교와 군사정권 시절의 영향을 받아 보수적인 편이다. 낙태는 극히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전면적으로 불법화 되어 있으며 간통 역시도 불법으로 간주된다. 또한 사회 전반에 군대식 위계질서와 성차별적인 풍조가 남아있다. 민주화 이후에는 사회적으로 개방주의적인 풍조가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티베트 불교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 14세와 젭춘담바 후툭투 9세의 주도로 비구니계를 받아들이고 불교 개혁에 착수하면서 몽골의 젊은 층들은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기성세대와의 충돌이 심해지며 세대 갈등이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복지 정책의 경우 대부분의 복지는 민간이 아닌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다. 이는 군사정권 시절의 영향으로 몽골의 군사정권은 불교 윤리와 장제스의 국가대가정론(國家大家庭論)에 영향을 받아 인민에 대한 사회 보장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몽골의 경제사정은 절대적으로 좋은 상황이 아니지만 기본적인 사회복지 정책은 잘 지켜지는 편이다. 그러나 2010년대 경제불황 이후부터는 국가 제정이 악화되면서 민간주도의 복지사업이 확대되는 추세이다.

넓은 국토와 적은 인구를 가지고 있으나 치안 자체는 양호한 편으로 소매치기 등의 경범죄를 제외한다면 특별한 강력범죄는 잘 일어나지 않는 편이다. 또한 인구가 적기 때문에 규모있는 폭력조직이 성장하기 어렵다는 점 또한 치안 안정에 플러스 요소로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주로 중국인들을 상대로한 혐오범죄가 일부 네오나치 조직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

국토의 크기에 걸맞지 않게 교통 인프라가 빈약한 편으로 국내 포장도로 비율은 전체의 7%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수도 후레와 지방을 잇는 도로는 포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교통표지판은 없는 수준에 국토 자체가 넓어서 길을 찾기도 쉽지 않고 고속도로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철도 역시도 몽골 종단철도가 전부인 수준이고 전 국민의 절반 가량이 거주하는 니슬렐 후레조차도 지하철이 존재하지 않는 등 교통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시급한 수준이다. 그나마 국내선 항공노선이 발달해 있으나 국제선은 칭기즈 칸 국제공항 외에는 없는 수준이다.

문화

몽골 전통축제 나담

나담(ᠨᠠᠭᠠᠳᠤᠮ)이라고 불리는 축제가 유명하다. 나담은 몽골어로 축제라는 뜻으로 몽골 현지에서는 국가 공휴일 축제(ᠦᠨᠳᠦᠰᠦᠨ ᠶᠡᠬᠡ ᠪᠠᠶᠠᠷ ᠨᠠᠭᠠᠳᠤᠮ)라고 불리며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본래는 가축들의 성장과 풍요를 기원하는 종교적 의미와, 힘과 기술을 겨루는 경기를 통해 병사를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군사적 의미를 지닌 행사였으나 오늘날에는 몽골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되새기고 스포츠 경기로 전 국민을 단결시킨다는 정치적 의미가 강조된 행사로 그 성격이 변했다.

몽골 민주기념일[50]인 6월 29일에 시작하여 며칠간 치뤄진다. 몽골 기마병과 전통 복식을 갖춰 입은 주민들의 행진으로 시작되며, 화려한 복장과 공연을 볼 수 있다. 스포츠 경기 이외에도 몽골 전통 음악 공연, 아이락이나 호쇼르 같은 몽골 요리와 공예품 판매 등이 함께 이루어져 몽골의 전통과 문화가 집약된 축제라고 할 수 있다. 경기는 승마, 활 쏘기, 부흐(몽골식 씨름) 대회 등이 열린다.

유목 전통의 유산

위에 설명된 나담과 마찬가지로 몽골의 문화는 천 년 이상 이어진 유목 전통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전통의상인 델의 경우 중국 만주족의 치파오와 마찬가지로 말을 타기 편하도록 옆트임이 길게 나있으며 초원의 매서운 추위를 막을 수 있도록 두꺼운 원단을 사용하여 좁은 소매 구조로 만들어졌다.

식문화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유목 국가이자 내륙 국가로 지내온 역사 탓으로 인해 육류와 유제품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어찌보면 기형적인 식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붉은 음식, 하얀 음식(ᠤᠯᠠᠭᠠᠨ ᠢᠳᠡᠭᠡ᠂ ᠴᠠᠭᠠᠨ ᠢᠳᠡᠭᠡ, 올랑 이떼, 차강 이떼)라는 표현이 이런 식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허르헉[51], 보즈[52], 골야쉬[53]등의 고기 요리와 야롤 등의 치즈, 타락과 허르먹 같은 요구르트, 즉 유제품이 주요 음식이며 이외에도 아이막으로 대표되는 음주문화 역시 발달되어 있다.

스포츠 역시도 세계구 급으로 인기가 있는 축구나 야구는 굉장히 마이너한 편이며 유목민 특유의 피지컬로 직접 승부를 보는 실내 스포츠인 농구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도, 스모, 레슬링등의 개인 격투종목에 엄청난 강세를 보이며 남일본의 스모 선수 상당수가 몽골 출신이다. 또한 몽골식 씨름으로 알려진 부흐(ᠪᠥᠬᠡ)가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위에서 언급된 나담에서 우승한 부흐 선수는 아와르가(ᠠᠪᠤᠷᠭᠤ)라고 불리우며 부와 명예를 누린다.

군사

소총을 든 몽골 육군 장병들

몽골군(ᠮᠣᠩᠭᠣᠯ ᠤᠯᠤᠰ ᠤᠨ ᠵᠡᠪᠰᠡᠭᠲᠦ ᠬᠦᠴᠦᠨ)은 몽골의 군대로 육군, 공군, 국경경비대, 내무보안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륙국 특성상 해군은 존재하지 않는데 1993년까지는 위의 자연환경 문단에서 언급되듯 훕스굴 호에 주둔하였으나 1993년 해산되었다. 인구가 적고 경제 사정도 좋지 않은 국가 특성상 군대의 질이 그다지 좋지는 않은편이며 북으로는 세계 2위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소련이, 남으로는 3위인 중국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별로 눈에 띄지는 않는다고 한다.

대부분의 개도국 군대와 마찬가지로 육군이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공군은 매우 빈약한 수준이다. 국경경비대의 경우 구냉전 시기에는 소련 내무군과의 무력 충돌이 일부 있어왔으나 예나 지금이나 주요 업무는 국경을 넘은 가축들을 되찾아오는 것이라고 한다. 내무보안군은 군사정권 시절 국가중앙근위대의 후신으로 본래는 민주화 이후에 폐지될 예정이었으나 정치혼란이 거세지면서 내무보안군으로 이름을 바꾸어 존속중에 있다.

최근 소련 시위의 영향으로 몽골과 인접한 투바와 부랴티아 일대에 무장단체가 준동하여 군이 준비태세에 돌입하였다.

단위

몽골은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SI 단위를 사용하며 이는 1920년대 중반 공산정권이 수립된 이후부터 적용되었다. 공산 정권 이전에는 몽골 단위계가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공산정권 이후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사용이 중단되었고 일상생활에서도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동아시아권의 왕정국가인 만큼 일본국과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로는[54] 서력이 아닌 연호를 사용한다. 연호는 몽골의 군주인 대칸이 새로 즉위 할 때 마다 바뀌며 현재까지 두 개의 연호가 사용되었다. 첫번째 연호는 해선(諧鮮, ᠡᠪᠯᠡᠷᠡᠭᠰᠡᠨ ᠦᠵᠡᠰᠬᠦᠯᠡᠩ ᠲᠡᠢ)으로 몽골식으로는 "엘레르센 우제스겔렌테이"이다. 초대 대칸인 린포체 칸의 치세인 1954년 3월 1일부터 사용되었으며 린포체 칸이 피살당한 이후에도 현임 대칸인 뱌쿠롄 칸이 즉위하기 전인 2019년 12월 17일까지 사용되었다. 현재 사용되는 연호는 백련(白蓮, ᠴᠠᠭᠠᠨ ᠪᠠᠳᠮᠠᠯᠢᠩᠬᠤ᠎ᠠ)으로 몽골식으로는 "자간 바담량화"이며 2019년 12월 18일, 뱌쿠렌 칸의 즉위 이후부터 사용되고 있다.

창작물

대부분의 창작물에서 다뤄지는 몽골의 모습은 원나라 이전, 즉 중국화 되기 이전의 유목제국으로서의 몽골의 모습이다. 이는 몽골 제국이 원나라 이후에는 마르코 폴로를 제외한다면 서방과 큰 교역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한족에 상당히 동화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이왕이면 더 잘 알려진 청나라를 묘사하길 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몽골을 묘사한 영화, 만화, 드라마 등은 칭기즈 칸을 필두로 한 몽골 제국을 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는 문명 시리즈 등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근현대의 몽골을 묘사한 게임은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나 슈퍼파워 시리즈가 있는데 몽골 자체가 원나라 이후 크게 쇠퇴한 관계로 약소국으로 등장하는 것이 전부이다.


  1. 2029년 12월 기준 내정부 통계월보
  2. 2029년 12월 기준 내정부 호정국 인구통계
  3. # 적용 환율.
  4. # 적용 환율.
  5. 중국식 독음은 뤄부상나무스라이 어윤녜얼덩(羅布桑那木斯來·奧雲額爾登, luóbùsāngnàmùsīlái·àoyúnéěrdēng)
  6. 지역구 38석, 비례대표 22석.
  7. 지역구 2석, 비례대표 2석.
  8. 지역구 34석, 비례대표 23석.
  9. 지역구 2석, 비례대표 2석.
  10. 지역구 2석, 비례대표 1석.
  11. 지역구 2석.
  12. 몽골 2구, 몽골 3구, 몽골 4구, 몽골 5구, 몽골 8구, 후레 1구, 후레 2구, 후레 3구, 후레 4구, 후레 5구, 후레 6구.
  13. 몽골 1구, 몽골 6구, 몽골 7구.
  14. 니슬렐 후레, 아르항가이, 바잉헝거르, 볼간, 다르항올, 더르너드, 동드고비, 고비숨베르, 헹티, 후브스굴, 우므느고비, 오르홍, 우부르항가이, 셀렝게, 바론오르트, 투브, 자브항.
  15. 바잉울기, 허브드, 더르너고비, 고비알타이, 오브스.
  16. 중국식으로는 [쿠룬]이라고 읽는다.
  17. 예를 들자면 군주의 칭호인 칸(ᠬᠠᠨ)의 음차어 汗(한)은 땀을 의미하는 한자이다.
  18. 원래는 민요로 구전되었던 곡이기에 작사가는 불명이다.
  19. 티베트의 고승이자 철학자,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창시자.
  20. 태평소와 비슷한 몽골 전통 악기.
  21. 口琴, 아시아∙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쓰이는, 소형의 원시적인 악기.(= 주프하프)
  22.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문 일 뿐 사실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공식적인 그의 사인은 소련 방문의 이유이기도 했던 지병인 신장암이다.
  23.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중국은 1945년 체결된 중소 우호 동맹 조약에 의거하여 동년에 열린 몽골 독립투표 당시 100%의 찬성률로 독립 여론이 승리하자 공식적으로는 외몽골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였었다. 다만 소련측이 중소 우호 동맹 조약에 명시된 국공내전 불개입 원칙을 준수하지 않은 점과 몽골 독립투표의 부정투표 논쟁으로 인하여 내부적으로는 해당 조약과 그에 의거한 몽골 독립이 무효화 되었다는 여론이 팽배했고 결국 1953년 2월 24일에 파기되었다.
  24. 니슬렐 후레의 인구는 약 150만 명으로 전체 몽골 인구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25. 내몽골 일대의 차하르인들과는 구분된다.
  26. 니슬렐 후레(ᠨᠡᠶᠢᠰᠯᠡᠯ ᠬᠦᠷᠢᠶ᠎ᠡ)의 니슬렐(ᠨᠡᠶᠢᠰᠯᠡᠯ)은 사실 고유명사가 아닌 수도라는 뜻의 일반명사로 몽골어를 직역하면 "수도 후레"이다. 즉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 연방직할구(Wilayah Persekutuan Kuala Lumpur)를 "윌라야 퍼세쿠투안 쿠알라룸푸르" 로 번역하는 격이다.
  27. 영어로는 Province로, 중국어로는 省(성)으로 번역된다.
  28. 영어로는 District로 번역되며 한국의 군에 해당된다.
  29. 예를 들어 문재인 전 총리의 출생지는 함흥 솔안마을이지만 법적으로는 솔안마을이 아닌 당시기준 함경남도 함흥군 흥남읍 운성리인 것 처럼 그냥 관습적으로 사용될 뿐 실제 행정구역은 아닌 것이다.
  30. 상단에 언급된 내용들 중 젭춘담바 후툭투의 정의와 "세 가지 시험"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달라이 라마의 환생을 사실상 복붙하여 서술되었다. 이는 필자가 젭춘담바 후툭투의 환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정보를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위에 나열된 정보는 현실과 무관하다.
  31. 여타 입헌군주제-내각제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의회해산권과 통수권은 명목상 국가원수인 대칸의 권한이다.
  32. 한국의 광역자치단체장에 해당한다.
  33. 몽골 민족당 (1954. 3. 1. ~ 1966. 2. 28.).
  34. 몽골 민족당 (1966. 3. 1. ~ 1982. 2. 28.).
  35. 몽골 민족당 (1982. 3. 1. ~ 1986. 2. 28.).
  36. 몽골 민족당 (1990. 3. 1. ~ 1992. 2. 12.).
  37. 몽골 민족당 (1992. 2. 12. ~ 1996. 2. 11.).
  38. 민주당 (1996. 2. 12. ~ 1998. 10. 2.).
  39. 민주당 (1998. 10. 2. ~ 2000. 2. 11.).
  40. 몽골 민족당 (2000. 2. 12. ~ 2001. 10. 28.).
  41. 몽골 민족당 (2001. 10. 28. ~ 2004. 2. 11.).
  42. 민주당 (2004. 2. 12. ~ 2016. 2. 11.).
  43. 몽골 민족당 (2016. 2. 12. ~ 2020. 2. 11.).
  44. 몽골 민족당 (2020. 2. 12. ~ 2024. 2. 11.).
  45. 민주당 (2024. 2. 12. ~ 현재).
  46. 예를 들면 정원이 3명인 선거구에 각 당이 최대 3명의 후보자를 내며 유권자들이 각각 3표를 다른 후보에게 행사 한 뒤 최다 득표자 3명이 의원으로 선출되는 방식이다.
  47. 1위는 중국국민당, 2위는 한국독립당, 3위는 일본 자유당으로 일본 민주당보다는 5달 먼저 창당되었다.
  48. 단 이러한 주장은 중국 주류 사학계와 민간 모두에게서 무시와 비판을 동시에 받는 주장이다.
  49. 소련 내에도 투바, 부랴티아, 칼미크 같은 지역에서는 티베트 불교가 주류 종교로 자리잡아 있다.
  50. 1990년 최초의 자유 총선거를 기념하는 날이다.
  51. 양을 통째로 잡아다가 뜨겁게 달군 차돌로 익혀 만드는 잔치용 음식.
  52. 양고기로 가득 찬 만두.
  53. 헝가리의 대표적인 스튜 굴라쉬의 몽골어식 표현으로 대부분 소가 아닌 양으로 만들어진다.
  54. 일상생활에서는 서력이 병기되나 아직까지는 연호의 사용 범위가 훨씬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