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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극동전쟁 발발 당시 한국군은 오랜 군축으로 매우 허약해져 있었다. [[안창호 내각 (개화)|안창호 내각]]에서 제한적으로나마 군비 재건이 이루어졌지만 경제적 상황과 [[대한민국 중추원 (개화)|중추원]]의 압박으로 인해 그 수준이 충분치 못했고, 이는 국군 역량의 불충분한 재건으로 이어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1940년 말까지 국군은 80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어야 했지만, 그 시점에 한국군이 운용하고 있던 전차는 고작 330여 량이 전부였다. 이외에도 공군기지 건설 계획이나 함정 방공 성능 개량, 전투기 추가 도입 등의 각종 방위사업이 축소되거나 취소되었고 국군은 절대적인 물량과 질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제3차 극동전쟁 개전 당시 한국군은 소련군과 일본군의 동시다발적인 전면 공격을 방어해낼 충분힌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 제3차 극동전쟁 발발 당시 한국군은 오랜 군축으로 매우 허약해져 있었다. [[안창호 내각 (개화)|안창호 내각]]에서 제한적으로나마 군비 재건이 이루어졌지만 경제적 상황과 [[대한민국 중추원 (개화)|중추원]]의 압박으로 인해 그 수준이 충분치 못했고, 이는 국군 역량의 불충분한 재건으로 이어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1940년 말까지 국군은 80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어야 했지만, 그 시점에 한국군이 운용하고 있던 전차는 고작 330여 량이 전부였다. 이외에도 공군기지 건설 계획이나 함정 방공 성능 개량, 전투기 추가 도입 등의 각종 방위사업이 축소되거나 취소되었고 국군은 절대적인 물량과 질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제3차 극동전쟁 개전 당시 한국군은 소련군과 일본군의 동시다발적인 전면 공격을 방어해낼 충분힌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 ||
1940년 @월 @일, 일본군과 소련군은 어떠한 선전포고도 없이<ref>일본은 공격 개시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선전포고문을 발송하고는 타자수의 실수로 발송이 지연됐다고 변명했다.</ref> 한국과 그 동맹국인 [[만주 (개화)|만주]]와 [[녹오 (개화)|녹오]]를 향해 기습 침공을 개시하였다. 한국과 동맹 국가들은 소련과 일본의 기습 공격의 징후를 미리 감지하였으나 시간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하였다. 한국군은 일본군의 [[동래부 (개화)|동래]] 상륙을 저지하지 못하였고 만주와 녹오는 전쟁 개시와 함께 주력군이 소련군의 기갑부대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 바다에서는 함대결전을 주장하던 해군도총관 [[심선무 (개화)|심선무]]의 오판으로 인해 | 1940년 @월 @일, 일본군과 소련군은 어떠한 선전포고도 없이<ref>일본은 공격 개시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선전포고문을 발송하고는 타자수의 실수로 발송이 지연됐다고 변명했다.</ref> 한국과 그 동맹국인 [[만주 (개화)|만주]]와 [[녹오 (개화)|녹오]]를 향해 기습 침공을 개시하였다. 한국과 동맹 국가들은 소련과 일본의 기습 공격의 징후를 미리 감지하였으나 시간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하였다. 한국군은 일본군의 [[동래부 (개화)|동래]] 상륙을 저지하지 못하였고 만주와 녹오는 전쟁 개시와 함께 주력군이 소련군의 기갑부대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 바다에서는 함대결전을 주장하던 해군도총관 [[심선무 (개화)|심선무]]의 오판으로 인해 [[흑산도 해전 (개화)|흑산도 해전]]에서 [[한국 해군 (개화)|한국 함대]]가 일본 연합함대에 의해 궤멸당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한국 상공의 제공권은 일본 육군항공대와 소련 공군이 장악했다. | ||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350px; width: 100%; border: 2px solid #000; text-align: center; line-height: 145%; font-size: 10pt; float:left " |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350px; width: 100%; border: 2px solid #000; text-align: center; line-height: 145%; font-size: 10pt; float:left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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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군민의 엄청난 희생 끝에 소련군과 일본군의 공세는 각각 압록강-마천령 방어선과 한강 방어선에서 돈좌되었으나 절대적인 전세는 여전히 한국에 매우 불리하였다. 한강부터 압록강까지의 영토밖에 남지 않는 한국은 인력도 물자도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 해군이 해상봉쇄를 펼치면서 바다를 통해 각종 무기와 물자를 수입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 비록 군민의 엄청난 희생 끝에 소련군과 일본군의 공세는 각각 압록강-마천령 방어선과 한강 방어선에서 돈좌되었으나 절대적인 전세는 여전히 한국에 매우 불리하였다. 한강부터 압록강까지의 영토밖에 남지 않는 한국은 인력도 물자도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 해군이 해상봉쇄를 펼치면서 바다를 통해 각종 무기와 물자를 수입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 ||
이러한 상황에 결정적인 반전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독소전 발발이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 우방국이었던 소련을 전격적으로 침공하면서 소련군은 동서 두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 처했다.<ref>이 소식을 들은 주미대사 [[이승만 (개화)|이승만]]은 "대한은 이제 살았다!" 라며 환호했다. 평소 나치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던 사민당 영임이자 전시내각원이었던 [[여운형 (개화)|여운형]]도 "이번 만큼은 백림(베를린)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싶다" 라고 말했다.</ref> 이에 반추축국 공동전선을 만들려던 미국의 중재 하에 한국과 소련 사이에서 [[앵커리지 조약 (개화)|앵커리지 조약]]이 체결되었고, 전쟁을 벌이던 두 나라가 동시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합류하는 아이러니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비록 앵커리지 조약은 한국이 | 이러한 상황에 결정적인 반전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독소전 발발이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 우방국이었던 소련을 전격적으로 침공하면서 소련군은 동서 두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 처했다.<ref>이 소식을 들은 주미대사 [[이승만 (개화)|이승만]]은 "대한은 이제 살았다!" 라며 환호했다. 평소 나치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던 사민당 영임이자 전시내각원이었던 [[여운형 (개화)|여운형]]도 "이번 만큼은 백림(베를린)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싶다" 라고 말했다.</ref> 이에 반추축국 공동전선을 만들려던 미국의 중재 하에 한국과 소련 사이에서 [[앵커리지 조약 (개화)|앵커리지 조약]]이 체결되었고, 전쟁을 벌이던 두 나라가 동시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합류하는 아이러니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비록 앵커리지 조약은 부동항 확보를 외치던 소련이 녹오를 완전 합병하면서 한국이 녹오를 상실하게 되는, 한국에게는 상당히 굴욕적인 조약이었지만 덕분에 국군은 대소전선을 끝내고 대일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 ||
앵커리지 조약의 체결과 미국의 대한(對韓) 랜드리스에 항의하던 일본은 1941년 12월 미국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습하면서<s>자폭</s>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한국 인근에 포진하여 있던 일본 함정 상당수가 미국 방면으로 이동함에 따라 한국 해군 역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해군은 손원일 제독의 지휘 하에 바닷빛 작전을 개시, 잠수함을 동원해 동중국해의 일본 상선과 수송선을 끊임없이 공격하여 일본군의 출혈을 강요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은 남방에서 일본 본토로 수송되는 자원과 일본에서 중국으로 수송되는 물자의 공급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도 해군은 일본 점령지의 특전대 및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소함정으로 연안의 일본군 보급선들에게 타격을 입혔다. | 앵커리지 조약의 체결과 미국의 대한(對韓) 랜드리스에 항의하던 일본은 1941년 12월 미국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습하면서<s>자폭</s>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한국 인근에 포진하여 있던 일본 함정 상당수가 미국 방면으로 이동함에 따라 한국 해군 역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해군은 손원일 제독의 지휘 하에 바닷빛 작전을 개시, 잠수함을 동원해 동중국해의 일본 상선과 수송선을 끊임없이 공격하여 일본군의 출혈을 강요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은 남방에서 일본 본토로 수송되는 자원과 일본에서 중국으로 수송되는 물자의 공급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도 해군은 일본 점령지의 특전대 및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소함정으로 연안의 일본군 보급선들에게 타격을 입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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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리지 조약으로 숨통이 트인 한국군은 차근차근 반격을 준비하였다. 한국군은 소련군이 물러나면서 수복한 압록강 이북 | 앵커리지 조약으로 숨통이 트인 한국군은 차근차근 반격을 준비하였다. 한국군은 소련군이 물러나면서 수복한 압록강 이북 양강 지역의 인력을 동원하였고 이들을 미국으로부터 원조받은 무기와 상당량 복구된 산업시설을 통해 생산된 무기로 단단히 무장시켰다. 한편 북부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던 60개 사단 규모의 부대들도 대부분 남부전선으로 재배치되면서 1942년 봄 남부전선에 배치된 한국군의 전투력은 6개월 전에 비해 세 배 이상 강화되어 있었다. | ||
1942년 봄, 한국군은 드디어 일본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였다. 폭풍 작전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공세에서 | 1942년 봄, 한국군은 드디어 일본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였다. 폭풍 작전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공세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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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군단 (개화)|1군단]] (<small>★★★</small>) | ** [[제1군단 (개화)|1군단]] (<small>★★★</smal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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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동조약기구연락본부 (<small>★★</small>) | ** 극동조약기구연락본부 (<small>★★</smal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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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30일 (토) 16:56 기준 최신판
대한민국 국군 大韓民國國軍 Korea National Armed Forces | |
국가 | 대한민국 |
소속 | 대한민국 국방성 |
창건 | 1896년 |
통수권자[1] | 반기문 (대한민국 국무집정)[명목적] |
유승민 (대한민국 국무총리)[실질적] | |
지휘·감독권자[4] | 신원식 (대한민국 국방성총판) |
군령권자 | 육군 상장 김상장 (대한민국 국군도총제사) |
상비군 | 35만여 명 (2022년 국방백서) |
예비군 | 78만여 명 (2022년 국방백서) |
병역제도 | 모병제 |
육상전력 | |
병력 | 21만 여 명 |
전차 | 1,700여 대 |
장갑차 | 9.300여 대 |
야포/다련장 | 2,800여 문 |
유도탄 | 280기 |
차량 | 24,300여 량 |
해양전력 | |
해군 함정 총합 | 168척 |
주력 전투함정 | 63척 |
보조 전투함정 | 49척 |
항공모함·상륙함정 | 41척[5] |
소해정 | 5척 |
지원함정 | 10척 |
잠수함정 | 27척 |
항공전력 | |
항공기 총합 | 1140여 기 |
전투임무기 | 560여 기 |
감시통제기 | 90여 기 |
지원기 | 30여 기 |
훈련기 | 240여 기 |
헬기 | 220여 기 |
예산 | |
국방비 | $1,479억 (GDP의 약 2.5%) |
개요
대한민국 국군(大韓民國國軍, Korean Armed Forces)은 대한민국의 정규군이다. 휘하에 육군, 해군, 공군을 두고 있다. 보통 한국군 혹은 국군이라고 불린다.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라는 별칭도 쓰인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존재하였던 대한제국의 정규군인 대한제국군이 전신이다.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국군으로 전환되었으며, 세 차례의 극동전쟁과 기타 수많은 전쟁·전투를 거치며 성장해왔다. 현재는 세계 군사력 순위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강군이며, 군사강국들이 밀집해있는 극동에서도 타국에 꿇리지 않는 수준의 군대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명목상으로는 대한민국 국무집정이 통수권을 행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무총리가 그 권한을 행사한다.
광복군
우리 대한은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군과 발해군의 계승자이다. (…중략…) 고로 국군의 사명은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을 보호하며 옛 선조들의 빛나는 역사를 영광스럽게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민국의 군대요 광복의 군대인 것이다. 국무총리 김옥균, 1896년 |
대한민국 국군은 광복군(光復軍)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국부라고 일컬어지는 김옥균이 민국창건 얼마 후 한성교련소에서 병사들에게 한 훈사에서 비롯된 용어다. 광복이 “빛을 되찾다”라는 의미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이는 틀린 해석이며[6], 상기된 김옥균의 연설문에서 알 수 있듯이 “영광스럽게 되찾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르다.
상징
국군 심볼 (1897~1946) | 국군 심볼 (1946~현재) |
역사
대한제국군
대한민국 국군의 직접적인 전신은 대한제국의 정규군인 대한제국군이다. 1884년 갑신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개화당 정권은 1894년 일본과 손을 잡고 청을 공격해 제1차 극동전쟁을 일으켰고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이와 동시에 조선군의 명칭도 대한제국군으로 변경되었다. 제1차 극동전쟁에서 대한제국군은 윤웅렬, 이용익 등의 명장들의 활약으로 승리하였고, 육군 중심의 대담한 군비확장을 거듭하며 강군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국군의 성립과 발전
국군 보병무관 (1898)[7] |
1896년 고종이 러시아의 힘을 빌려 개화파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발생하자 제국중추원은 고종을 반역자로 선포, 국제(헌법) 개정을 통해 민국을 수립하였으며, 이와 함께 대한제국군의 명칭이 대한민국 국군으로 변경되었다. 국군은 러시아 공사관을 포위하고 근왕파 세력을 제압하여 아관파천 사건애서 민국 정부가 승리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의화단)
1904년 한일동맹과 러시아 사이에서 벌어진 제2차 극동전쟁에서 러시아 육군을 상대로 맹활약을 보였다. 대한민국 육군은 국군과 근대적 군대 사이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인 압록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한 것에 이어 러시아 극동함대의 모항인 여순을 함락하고 봉천에서 러시아군과 회전을 벌여 완승하는 등 한일동맹의 승전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와 같이 만주벌판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연승하며 훨훨 날아다닌 육군과는 달리 예산 부족과 정부의 무관심으로 방치되다싶이 한 해군은 주력함이 단 한 척도 없어 일본 연합한대를 졸졸 따라다니며 보조함대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대한민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협상국의 편에 서서 참전하였으나 주 전선인 유럽과 멀리 떨어진 덕에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그다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평온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국군은 독일제국의 조계지였던 칭다오를 공격하였고, 전투 끝에 점령에 성공했으나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한 달 동안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전쟁 특수 덕에 한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호황을 누렸고, 부유해진 한국 정부는 군대에 막대한 투자를 하였다. 이 덕에 당시 한국군은 장비를 개선하고 전력을 크게 강화할 수 있었다. 또 해군의 부재로 인해 독일령 남태평양 공략을 일본에게 양보할 수 밖에 없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해군이 대한 투자가 크게 늘었고, 한국 해군 최초의 순양함인 충무함이 취역하였다.
전간기
북방원정군 제1사단 보병부대 (블라디보스토크, 1918년) |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발생하고 이듬해 러시아가 내전 상태에 돌입하자 이승만 내각은 동시베리아 지역에서의 한국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북방 출병을 단행, 육군정장 홍범도를 도정으로 하는 원정군을 편성해 러시아 내전에 개입한다. 1918년 초, 한국군은 4개 보병연대를 동원해 연해주 지방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한 것에 이어서 연해주 지방에서 한국군에 저항하는 적군과 백군을 소탕하였으며 지역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군대 건설을 지원하였다. 연해주에서 성공적인 작전을 펼친 한국군은 북상하여 바이칼호 이북을 공략하기 위해 자바이칼 공세를 진행하였으나 러시아 노농적군의 저항으로 공세가 돈좌되었다. 이후 적군의 역공세를 저지한 한국군은 적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고, 양측은 더이상의 전쟁 지속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과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서 하바리우스크 조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은 바이칼호 이남에서의 영향력을 공고화하였다.
1920년대 한국은 중국의 정치적 혼란과 군벌의 발호를 틈타 만주 지역에 대한 공작을 시작했다. 공작의 내용인즉슨 남만주를 한국령으로 완전히 공고화하고 만주 중북부에는 한국의 괴뢰국 내지 위성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에 청 복벽파와 일부 연성주의자들이 만주에 전만연합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친중국 군벌인 봉천군벌과의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에 한국은 전만연합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만주 출병을 단행, 대규모 군대를 만주로 보내 봉천군벌과 교전하였다. 한국군과 만주군은 대륙에서도 다른 군벌들이 의해 밀리던 봉천군벌의 저항을 성공적으로 분쇄하였고, 192X년 봉천군벌의 만주 지역 마지막 본거지였던 진저우까지 함락하였다.
만주 출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한국군이었지만 1929년 경제대공황이 세계를 덮치면서 한국 역시 대대적인 군축의 물결을 피해가지 못하였다. 양기탁 내각의 공격적인 군축으로 국방 예산이 30% 이상 삭감되었고, 곧 한국군은 군인들의 임금 지급도 버거워할 정도의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국군은 하는 수 없이 병력과 장비를 감축하고 여러 부대를 해체하였다. 또 한정된 자원을 가능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피복 도입비나 행사비 등 비필수적이라고 여겨진 예산을 크게 삭감하였다.[8]
(소련과의 교전)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적을 기다리는 국군 보병대 (추풍령, 1940년 여름) |
제3차 극동전쟁 발발 당시 한국군은 오랜 군축으로 매우 허약해져 있었다. 안창호 내각에서 제한적으로나마 군비 재건이 이루어졌지만 경제적 상황과 중추원의 압박으로 인해 그 수준이 충분치 못했고, 이는 국군 역량의 불충분한 재건으로 이어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1940년 말까지 국군은 80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어야 했지만, 그 시점에 한국군이 운용하고 있던 전차는 고작 330여 량이 전부였다. 이외에도 공군기지 건설 계획이나 함정 방공 성능 개량, 전투기 추가 도입 등의 각종 방위사업이 축소되거나 취소되었고 국군은 절대적인 물량과 질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제3차 극동전쟁 개전 당시 한국군은 소련군과 일본군의 동시다발적인 전면 공격을 방어해낼 충분힌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1940년 @월 @일, 일본군과 소련군은 어떠한 선전포고도 없이[9] 한국과 그 동맹국인 만주와 녹오를 향해 기습 침공을 개시하였다. 한국과 동맹 국가들은 소련과 일본의 기습 공격의 징후를 미리 감지하였으나 시간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하였다. 한국군은 일본군의 동래 상륙을 저지하지 못하였고 만주와 녹오는 전쟁 개시와 함께 주력군이 소련군의 기갑부대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 바다에서는 함대결전을 주장하던 해군도총관 심선무의 오판으로 인해 흑산도 해전에서 한국 함대가 일본 연합함대에 의해 궤멸당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한국 상공의 제공권은 일본 육군항공대와 소련 공군이 장악했다.
소련군에게 점령당한 회령 (1940년)[10] |
소련군은 4년 전 교전의 경험을 바탕 삼아 효율적인 기갑부대 운용법과 전술을 사용하였다. 소련군은 아무르강 유역의 평야에 전차부대로 충격을 가해 만주군 방어선 우말단과 녹오군 어선 좌말단 사이에 엄청난 크기의 균열을 냈다. 부드러운 배를 직격당한 만주군과 녹오군은 연결이 단절되었고, 더 커져버린 균열을 향해 소련군의 후속부대가 쏟아져 들어왔다. 측면을 공격당한 만주와 녹오의 주력군은 붕괴하였다. 이에 한국군은 총 15개 사단으로 구성된 손후성 상장의 제1야전군을 급파해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만주 헤이허에서 소련군의 기갑부대에 역으로 강타당하여 오히려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후 한국군과 그 동맹군은 아무르강-송화강 방어선을 구축해 저항하였다. 이 방어선은 소련군의 공세를 둔화시켰으나 결국 3주만에 돌파당해버렸다.
한편 한반도 남부에서는 동래에 상륙한 일본군이 거침 없이 북진을 계속했다. 임진왜란 당시의 교훈을 뼈에 새긴 일본군은 남쪽에서부터 지역을 차례차례 평정하며 북쪽으로 진격하였고, 왜관-군위 전투에서 한국군 남부 전선의 주력을 섬멸하였다. 모든 면에서 열세의 상황이었던 한국군은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일본군의 진격을 감속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개전 @@일만에 만주와 녹오는 소련군에 의해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한성에 망명정부를 꾸렸고 한국 역시 국토 남반부를 일본에게 점령당했다. 1940년 @월은 한국의 위기가 정쟁에 도달하였다. 수도인 한성 턱밑까지 일본군이 진격하자 김창암 전시내각은 평양으로 천도하였고 한강에는 한강 이남의 전투에서 쫓겨온 패잔병과 새로 징집한 신병들로 한강방어선이 구축되었다. 북방에서는 @월 @일 소련군이 두만강을 도하하였으며 @월 @일에는 압록-두만 이북의 마지막 한국군 요충지였던 비사까지 소련군에 의해 함락당했다. 한편 한국 내부에서는 친소련 성향의 공산당 국제파가 반정부 활동을 벌이며 한국 정부와 군부의 항전을 방해하였다.
중기
소련군을 향해 포격하는 11사단 부대 (마천령, 1941년 봄) |
1941년 봄이 되면서 서서히 전황 반전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춘천 전투에서 권준 참장이 지휘하는 한국군 제6보병사단이 춘천을 장악하려던 일본군 2개 보병사단을 성공적으로 저지, 격파하였으며 이범석 참장이 지휘하는 제11보병사단은 마천령에서 전차여단을 필두로 두만강을 넘어 진격해오던 소련군 2만 여 명을 격파하였다. 압록강 중강진 유역에서는 이응준 정장의 제2군단이 압록강을 도하해 잠시 중강진을 점령한 소련군을 다시 강 너머로 몰아냈고 한강에서는 지대형 상장의 제5야전군이 일본군의 매서운 공격을 방어해냈다. 한편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특전대 참장 김원봉이 지휘하는 유격대가 각종 사보타주와 게릴라전을 펼쳐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소련군에게 점령당한 만주와 녹오 지역에는 특전대 정령 염동진 등이 파견되어 현지 레지스탕스 세력과 연합, 소련군에 대한 저항 활동을 펼쳤다.
비록 군민의 엄청난 희생 끝에 소련군과 일본군의 공세는 각각 압록강-마천령 방어선과 한강 방어선에서 돈좌되었으나 절대적인 전세는 여전히 한국에 매우 불리하였다. 한강부터 압록강까지의 영토밖에 남지 않는 한국은 인력도 물자도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 해군이 해상봉쇄를 펼치면서 바다를 통해 각종 무기와 물자를 수입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결정적인 반전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독소전 발발이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 우방국이었던 소련을 전격적으로 침공하면서 소련군은 동서 두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 처했다.[11] 이에 반추축국 공동전선을 만들려던 미국의 중재 하에 한국과 소련 사이에서 앵커리지 조약이 체결되었고, 전쟁을 벌이던 두 나라가 동시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합류하는 아이러니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비록 앵커리지 조약은 부동항 확보를 외치던 소련이 녹오를 완전 합병하면서 한국이 녹오를 상실하게 되는, 한국에게는 상당히 굴욕적인 조약이었지만 덕분에 국군은 대소전선을 끝내고 대일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앵커리지 조약의 체결과 미국의 대한(對韓) 랜드리스에 항의하던 일본은 1941년 12월 미국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습하면서자폭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한국 인근에 포진하여 있던 일본 함정 상당수가 미국 방면으로 이동함에 따라 한국 해군 역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해군은 손원일 제독의 지휘 하에 바닷빛 작전을 개시, 잠수함을 동원해 동중국해의 일본 상선과 수송선을 끊임없이 공격하여 일본군의 출혈을 강요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은 남방에서 일본 본토로 수송되는 자원과 일본에서 중국으로 수송되는 물자의 공급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도 해군은 일본 점령지의 특전대 및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소함정으로 연안의 일본군 보급선들에게 타격을 입혔다.
일본은 상황 타개를 위해 1941년 가을에 전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벌였다. 하지만 한국군은 그동안 방어선을 강화하였고 소련과의 종전으로 열린 보급로를 통해 들어온 미국산 무기로 단단히 무장한 상태였다. 일본군의 공세는 보기 좋게 실패하였으며 강원도 소양호 방면에서는 일본군 1개 사단이 김홍일 참장의 제27사단이 놓은 덫에 걸려 사단 전체가 궤멸당하는 굴욕을 당했다.[12]
후기
제3기갑사단 전차부대 (평택, 1942년 봄)[13] |
앵커리지 조약으로 숨통이 트인 한국군은 차근차근 반격을 준비하였다. 한국군은 소련군이 물러나면서 수복한 압록강 이북 양강 지역의 인력을 동원하였고 이들을 미국으로부터 원조받은 무기와 상당량 복구된 산업시설을 통해 생산된 무기로 단단히 무장시켰다. 한편 북부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던 60개 사단 규모의 부대들도 대부분 남부전선으로 재배치되면서 1942년 봄 남부전선에 배치된 한국군의 전투력은 6개월 전에 비해 세 배 이상 강화되어 있었다.
1942년 봄, 한국군은 드디어 일본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였다. 폭풍 작전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공세에서
냉전기
월남전 당시의 한국군 특전대[14] |
냉전 종결 이후
수뇌부
대한민국 국군 수뇌부 | |||||||||||||||||||||||||||||||||||
반기문 대한민국 국무집정 |
유승민 대한민국 국무총리 |
신원식 대한민국 국방성총판 | |||||||||||||||||||||||||||||||||
|
편제
중앙
국방성 심볼 | 국군도총제부 심볼 |
- 국방성
- 국방대학교 (★★)
- 국군정보본부 (★★)
- 헌병본부 (★★)
- 전자전본부 (★★)
- 국군수송본부 (★)
- 국군의무본부 (★)
- 국군도총제부 (★★★★)
육군
육군도총부 심볼 |
육군의 단위 제대는 여단이며, 각 여단은 사단 혹은 기능본부의 지휘를 받는다. 육군에는 총 11개 사단과 XX개 여단이 있다.
해군
해군도총부 심볼 |
- 해군총관부 (★★★★)
공군
공군도총부 심볼 |
- 공군도총부 (★★★★)
- 공군항공전투본부 (★★★)
- 1비행단 (★★)
- 2비행단 (★★)
- 3비행단 (★★)
- 공군항공지원본부 (★★★)
- 수송비행단 (★★)
- 정찰비행단 (★★)
- 훈련비행단 (★★)
- 공군방공본부 (★★★)
- 1방공사단 (★★)
- 2방공사단 (★★)
- 3방공사단 (★★)
- 공군군수본부 (★★★)
- 공군우주본부 (★★)
- 공군교련본부 (★★)
- 공군기지본부 (★★)
- 공군무관학교 (★★)
- 공군항공전투본부 (★★★)
전력
병력 | |
상비군 | 35만여 명[20] (2023년 국방백서) |
예비군 | 78만여 명[21] (2023년 국방백서) |
병역제도 | 모병제 |
지상전력 | |
3.5세대 전차 | 1,277대 |
3세대 전차 | 951대 |
2세대 전차 | 0대 |
1세대 전차 | 0대 |
중형전차 | 226대 |
전차 총합 | 2,454대 |
병력수송장갑차 | 7,221대 |
보병전투차 | 2,749대 |
소형전술차 | 12,000대 |
견인포 | 1,500문 |
박격포 | 8,900문 |
자주포 | 2,150문 |
야포 총합 | 3,650 |
다연장로켓 | 286문 |
지대지 유도무기 | 60기 |
해양전력 | |
해군 함정 총합 | 258척 |
전투함정 총합 | 135척 |
상륙함정 총합 | 44척 |
지원함정 총합 | 27척 |
잠수함정 총합 | 52척 |
주력 수상함 | |
중구축함 | 12척 |
경구축함 | 19척 |
중해방함 | 25척 |
경해방함 | 14척 |
초계함 | 10척 |
고속정 | 55척 |
항공모함, 상륙함, 수송함, 소해함 | |
항공모함 | 2척 |
강습상륙함 | 3척 |
중군수함 | 3척 |
경군수함 | 4척 |
LPD, LSD | 11척 |
LST | 4척 |
기뢰부설함 | 4척 |
소해함 | 16척 |
공기부양정 | 24척 |
잠수함 | |
미사일 원자력 잠수함 | 6척 |
공격 원자력 잠수함 | 11척 |
재래식 중잠수함 | 17척 |
재래식 경잠수함 | 9척 |
잠수정 | 9척 |
항공전력 | |
5세대 전투기 | 225기(+100기) |
4.5세대 전투기 | 426기(+50기) |
4세대 전투기 | 351기 |
3세대 전투기 | 98기 |
조기경보통제기 (AEW&C) | 18기 |
해상초계기 | 26기 |
공중급유기 | 20기 |
고고도 무인 정찰기 | 6기 |
전투임무기 총합 | 1100기 |
공중기동기 총합 | 100기 |
감시통제기 총합 | 140기 |
훈련기 총합 | 400기 |
공군기 총합 | 1740기 |
헬리콥터 | 1400기 |
항공기 총합 | 3140기 |
장비 분류
틀:현대 한국군의 보병장비 (개화) 틀:현대 한국군의 차량장비 (개화) 틀:현대 한국군의 함정 (개화) 틀:현대 한국군의 항공장비 (개화)
장비 도입
전투식량에서부터 미사일까지 국군이 사용하는 모든 군수물지는 군기청을 통해서 조달된다. 원래는 국군의 각 기관에서 필요 장비를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는데 군기비리가 자주 발생한지라 군기 도입을 통합적으로 관리하여 비리를 막고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이기택 내각에서 군기청을 출범시켰다. 군기청이 담당하는 방위산업은 규모가 천문학적이고 민국의 군사력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조달청과 함께 감리부의 집중 감찰 대상이다.
계급
국군의 계급은 크게 무관과 교병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는 한국군의 이원화된 계급체계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전자는 장교이며 후자는 일반 직업병에 해당한다. 명목상으로는 최하급 무관인 준위가 최상급 교병인 특무상교보다 계급이 높지만, 짬이나 부대에서의 위치 등을 고려했을 때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실질적으로는 무관이 짬 있는 교병에게 가벼운 경어체를 사용하는 등 무관도 교병 측을 나름 존중해준다.
계급의 총 개수는 무관 12개와 교병 9개를 합해 총 21단계이다.
무관
武官 / Commissioned Officer
무관은 군사적 전문성을 갖춘 국군의 지휘관 계급이다. 총 12단계의 계급이 있으며, 원수급, 장관급, 영관급, 위관급으로 나뉜다. 가장 기본적인 임관법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는 것이지만 전시에는 교병급도 임관할 수 있다.
수관급
원수 |
元帥 / Marshall
수관급 무관에 해당하는 계급은 원수 단 하나뿐이다. 원수는 군대의 최고 계급으로, 계급장의 별이 다섯 개라 5성 장군이라고도 불린다.
현재까지 육군 무관 5명, 해군과 공군 무관 각 1명으로 하여 총 일곱 명의 국군 무관만이 원수 계급을 달았다. 한중전쟁 종전 직후 육군도총관이었던 김홍일 상장이 원수로 진급하여 예편한 이후로 현재까지 원수로 진급한 무관은 단 한 명도 없다. 3차 극동전 - 2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도총관과 전선군 총관이 원수 계급을 달았다.
계급장은 은색 별 다섯 개가 오각형 모양으로 배치된 형태이다.
장관급
참장 | 부장 | 정장 | 상장 |
將官 / General Officer
장관급 무관은 참장부터 상장에 이르기까지 총 네 계급을 묶어 부르는 말이다. 장관급은 국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계급으로, 장관 중 최상위 계급인 상장은 국군도총제사나 삼군의 도총관을 맡는, 현대 국군 전체의 최고 위치에 있는 장교이다. 장관급은 영관급에 비해 권한이나 연금 등이 확연히 늘어나기에 모든 무관이 진급하고 싶어 하는, 꿈과도 같은 계급이기도 하다. 물론 그만큼 진급심사도 까다롭고 TO도 적어 별을 달기는 아주 어렵다.
참장은 ‘보직의 꽃’이라고 불리는 상비여단 여단장을 비롯해 작전본부 총관, 군부 사무국 정랑, 지역방위사단 사단장, 동원사단 사단장, 상비사단 사단감, 육군특전본부 총관 등에 보임된다. 부장은 상비사단 사단장, 군부 사무총국 정랑, 3군 무관학교 교장, 함대 총관, 항공단장, 육군공정본부 총관, 해군육전본부 총관, 군단 참관, 극동협정군연락본부 총관, 수도본부 총관 등에 보임된다. 정장은 국군부총제사, 3군 부총관, 군단 총관, 3군 군수본부 총관 등에 보임된다. 상장은 정원이 총 4인으로, 국군도총제사와 3군 도총관에 보임된다.
장관급 무관의 계급장은 은색 별로 표현된다. 한 단계씩 진급할 때마다 별이 하나씩 수평으로 추가된다.
영관급
참령 | 부령 | 정령 |
領官 / Senior Officer
위관급
참위 | 부위 | 정위 |
尉官 / Junior Officer
위관급 무관은 국군의 계급분류 중 하나로, 초급무관에 해당하는 준위에서 정위까지의 네 계급을 묶어 부르는 말이다. 소대, 중대의 장이나 대대의 종사관 등에 임명된다.
육해공군 무관학교에 진학하여 무관생도가 되면 준위라는 임시계급을 받고, 4년의 무관교육과정을 수료하면 참위로 정식 임관한다. 위로는 영관급 무관이 있으며, 아래로는 명목상으로는 하급자인 교관이 있다.
참위는 소대장, 중대감, 포병 관측반장, 함정 부서장, 항공교육생 등에 보임된다. 부위는 중대감, 일부 중대의 중대장, 대대 종사관, 항공교육생 등에 보임되며 사단장의 부관을 맡기도 한다. 정위는 중대장, 대대 종사장, 소형 함정 정장, 항공기 조종사[22] 등에 보임된다.
계급장은 은색 다이아몬드이며,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다이아몬드의 개수가 하나씩 늘어난다. 준위는 따로 계급장이 없다.
교병
校兵 / Enlisted Personnel
교병은 교관과 병을 아우르는 말로, 교(校)는 교관을, 병(兵)은 말 그대로 병을 의미한다. 이원화된 국군의 모병 시스템에서 하부조직을 담당한다. 계급은 훈련병에서 상교까지 총 여덟 단계로 나뉘어 있다. 교병으로 군생활을 시작하였다면 중간에 무관학교에 입학해 참위로 임관하거나 전쟁 등의 긴박한 상황에서 전시임관하지 않는 이상 전역할 때까지 교병으로 남는다.
교관
참교 | 부교 | 정교 | 상교 | 특교 |
校官 / Sergent
교관은 국군의 중추로, 참교에서 특교까지 총 다섯 단계의 계급을 의미한다. 이들은 병에 비교했을 때 오랜 기간 복무하며 각자의 분야에 숙련된 군인으로, 각 부대에서 숙련된 전문가나 베테랑의 역할을 맡는다. 특교나 주임특교[23]는 부대에서 영관급 무관에 맞먹을 정도로 영향력이 크며, 주임특교는 경우에 따라 고위 장관급의 대우를 받기도 한다. 일례로 국군도총제부 주임특교는 정장과 상응하는 대우를 받는다.
특별임관하지 않는 이상 입대하자마자 교관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병에서 진급해야만 한다. 다음 계급으로 쉽게 진급할 수 있는 병과는 달리 교관의 진급심사는 까다로운 편이다. 특히 교관, 더 나아가 교병 전체의 최상위 계급인 상교로 진급하기 어렵기로 정평이 나있는데, 능력과 주변 평판 등을 고루 갖추고 있어도 될까말까 한 수준이다. 교관의 연령정년은 교관에 속한 네 개의 계급 모두 60세이다.
계급장은 참교에서 상교까지는 아래로 꺾은선, 통칭 갈매기가 하나씩 늘어난다. 상교와 교관장은 이전 계급장 바로 위에 별이 하나씩 추가되는 형태의 계급장을 가지고 있다. 교관 계급장은 다른 계급들의 계급장과는 달리 주로 노란 색으로 표현된다.
병
이병 | 일병 | 상병 |
兵 / Private
국군의 가장 밑 주춧돌 역할을 하는 최하위 계급. 훈련병, 이병, 일병, 상병 총 네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급장은 이병부터 계급이 한 계단씩 올라갈수록 가로선이 하나씩 생겨나는 형태이며, 훈련병은 계급장이 따로 없다.
모병제인 한국군 특성 상 모든 병이 모병으로 충원되는데, 무관학교에 진학해 소위로 임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군인은 훈련소를 거쳐[24] 이병으로 입대하게 된다. 병에서 바로 윗단계의 또다른 병으로 진급하기는 쉬운 편으로, 사고만 안 친다면 2~3년의 복무로 진급이 사실상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훈련소 수료 후 길어도 5년이면 상병 계급장을 달 수 있다. 다만 병의 윗단계인 교관 진급심사부터는 과정이 비교적 까다로워진다.
계급정년은 이병, 일병, 상병이 각각 5년, 5년, 10년으로, 대부분의 인원이 상병까지는 빠르게 진급하기 때문에 병 시절 계급정년에 걸려 전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복제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군복은 대한제국군 시절의 군복이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군복이었던 1889년식 군복은 동시대의 프랑스군 군복을 참고하여 제작되었으며 군모는 직사각형 형태의 케피 모를 채택하였다. 민국창건 이후에는 군모 등에 달려있던 황실 문양인 오얏꽃을 모두 제거하거나 무궁화 문양으로 대체하였다. 특징이라면 비용 절감을 위해 전투복, 작업복, 예복 등을 통합하여 한 가지 종류의 군복만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1911년식 군복[25] | 2022년식 군복 |
1911년에 들어서면서 대한민국 국군은 신형 군복을 채택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1911년식 군복이다. 1911년식 군복은 주색이 흑색이었던 1889년식 군복과는 달리 황록색을 주색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겨울에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한국 사정을 감안하여 케피 모 좌우에 수납형 귀가리개를 추가하고 각을 죽여 착용성과 실용성을 높인 오스트리아식 야전모를 채택하였다[26]. 이중 교병의 야전모와는 달리 무관의 야전모 정면 중앙에는 국군 모포가 부착되어 있었으며, 장성에 한해 멋은 개나 줘버린 야전모와는 달리 간지나는 정모가 지급되었다. 또한 가죽제 장구류가 면직물로 바뀌는 등의 변경점이 존재했다. 1889년식 군복과 마찬가지로 전투복, 예복, 작업복 등의 구별이 없이 단일종만 존재했다. 이로 인해 군복의 실용성만이 강조되다보니 멋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1911년식 군복은 1930년대 초에 교체될 예정이었지만, 세계대공황과 그로 인한 양기탁 내각의 대규모 군축으로 인해 예산이 반토막난 국방성이 군복 교체 사업을 후순위로 미뤄두었다. 이로 인해 철모 지급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할 때까지도 군복의 전면적인 교체는 이뤄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911년식 군복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모두에서 사용되며 자그마치 40년 넘게 국군의 정규 군복의 자리에 남아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칭다오 전투에서 한국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했던 한 일본육군 장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한국군을 보고 아직도 1차 대전 때 입던 군복을 쓰고 있다며 비웃었다고 한다.
마침내 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연합군 측으로 압도적으로 기울어진 후에야 군복 교체가 시작되었다. 1944년 군복 교체 작업에 착수한 국군은 1946년부터 신형 1946년식 군복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이후 1956년부터는 해병대를 시작으로 덕헌터 위장복을 도입하였으며, 1960년대에는 육군 부대에도 위장복이 지급되었다.
참전
현대 한국의 전쟁·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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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식량
훈장
위국장은 전공을 세운 군인에게 주어지는 훈장이다. 위국장은 일등부터 오등까지 총 다섯 단계로 구분되어 있으며 수훈자는 국가유공자로 분류되어 사망 후에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다. 보통은 대한민국 국군 소속 군인이 받지만 외국군에게 수여되기도 하며 군견에게도 수여된 적이 있다.
군인이라고 해서 받을 수 있는 훈장이 위국장 뿐인 것은 아니다. 위국장은 전공이 있는 군인에게 수여되는 것이기 때문에 전공이 아닌 공훈을 세운 군인은 그에 해당하는 다른 훈장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작업 특성상 군인이 훈장을 받으면 거진 위국장이다.
각주
- ↑ 국가원수의 권한으로서 군에 관한 모든 것을 통솔할 수 있다.
- ↑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상징적 국가원수로 군에 대한 통수권을 지닌다.
- ↑ 대한민국의 내각수반으로 실질적으로 군에 대한 통수권을 행사한다.
- ↑ 군령권과 군정권을 지휘한다.
- ↑ 항공모함: 꼴뚜기급 2척
상륙함: 독도급 3척 등 16척
상륙정: 23척 - ↑ “빛을 되찾다”라고 해석되려면 광복이 아니라 복광이어야 한다.
- ↑ 둘 다 부위 계급장을 달고 있다.
- ↑ 이로 인해 한국군의 1911년식 군복은 원래 1930년대에 교체될 예정이었지만 1940년대 말이 되어서야 교체된다.
- ↑ 일본은 공격 개시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선전포고문을 발송하고는 타자수의 실수로 발송이 지연됐다고 변명했다.
- ↑ 해당 지역의 공산당 국제파 세력이 소련군을 환영하는 플랭카드를 걸었다..
- ↑ 이 소식을 들은 주미대사 이승만은 "대한은 이제 살았다!" 라며 환호했다. 평소 나치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던 사민당 영임이자 전시내각원이었던 여운형도 "이번 만큼은 백림(베를린)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싶다" 라고 말했다.
- ↑ 김홍일 장군은 이 전투 이후 부장으로 진급했다.
- ↑ 미국에서 랜드리스로 받아온 M4 셔먼 전차로 구성된 전차부대다.
- ↑ 전투복 바지와 방탄모 덮개에서 당시 특전본부에서 국군 최초로 도입한 위장무늬를 확인할 수 있다. 어깨에 멘 소총은 미제 M16 소총으로, 월남에 파견된 일부 특전부대에서 미군과의 연합작전을 위해 사용했다.
- ↑ 극동조약기구군 총사령관 겸임
- ↑ 경남, 경북, 전남, 전북, 동래, 나주, 대구
- ↑ 경기, 강원, 충남, 충북, 인천, 대전
- ↑ 평남, 평북, 황해, 평양, 남포, 의주
- ↑ 함남, 함북, 용원, 함흥, 청진, 여옥
- ↑ 육군 28만 + 해군 7.6만 + 공군 6.4만
- ↑ 무관후보생, 전시근로소집, 전환/대체 복무 인원 등 포함.
- ↑ 공군 조종사의 경우 참위, 부위 시절에는 계속 항공교육생 신분으로 교육을 받다가 정위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정식 조종사가 된다.
- ↑ 각 부대의 으뜸이 되는 상교. 계급이 아닌 직급이다.
- ↑ 훈련소에서는 모두가 다 같은 훈련병 계급을 가진다.
- ↑ 육군 보병 참령의 사진이다.
참령쨩사진은 무관복이지만 교병복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 ↑ 이 때 채택된 야전모는 오스트리아군의 M1906식 야전모와 매우 흡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