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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장:솔피/1]]<br>
{{역대 대한국 대황제 (플레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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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8CB2D 20%, #E8CB2D 80%, #c19c22); color: #BF1400" | <big>[[대한국 대황제 (플레이백)|{{color|#BF1400|대한 초대 황제}}]]</big><br><big><big>고조 순황제 <nowiki>|</nowiki> 高祖 純皇帝</big></big>
[[연습장:솔피/4]]<br>
[[연습장:솔피/5]]<br>
{{다른 뜻 설명|상위 문서: [[선종 태황제 (플레이백)|선종 태황제]]}}
{{선종 태황제 관련 문서}}
== 생애 ==
=== 유년기 ===
1891년 6월 13일 새벽 3시 경 내의원에서 은언군의 후손인 안종<ref>훗날의 진양공, [[안종 원황제 (플레이백)|안종]] 당시에는 임금의 4세까지만 왕족으로 인정받았기에 작호가 없었다.</ref>과 백정의 딸이자 소실인 유씨 사이에서 서장자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운현궁의 사손인 이선<ref>훗날의 완화군, 당시에는 임금의 4세까지만 왕족으로 인정받았기에 작호가 없었다.</ref>의 양자로 출계하였으며, 1897년(건원 3년) 열조부인 장헌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며 양부 이선이 '완화군(完和君)' 군호를 받게 된다. 1899년 완화군이 병으로 훙서하자 본래라면 은언군가의 6세손으로써 황족이 될 수 없던 선종은 운현궁의 사손으로써 현풍군의 작호를 받았으며, 1910년 황족 작위가 개편되자 현풍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선종은 총명하고 뻬어난 외모를 지녔으며, 생부 진양군의 사후에는 경은군과 함께 삼종지맥의 유이한 후손이란 타이틀을 가졌지만, 백정의 손자라는 혈통 탓에 은근히 황족들과 대신들에게 무시를 당했다. 이러한 선종의 외로운 유년기는 선종이 장차 양면적인 사상을 갖게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 아무도 가지 않는 길 ===
결국 수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가던 선종은 고심끝에 자진하여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한다. 이 당시 조선의 무관 무시 풍조가 뿌리깊게 남아있던 한국에서 육군무관학교에 진학한 황족은 선종이 최초였다. 선종은 유년학교에서는 무난하게 생활하였으나 무관학교를 진학한 뒤에는 계속되는 무관후보생 생활에 질려 공부 대신 규정을 자주 위반하고, 패싸움을 주도하고 다녀 황실 어른들에게 빈번하게 질책당하였다. 당시 선종은 진보주의 서적을 탐독하다 점호 때 적발되어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기도 했다. 결국 태자였던 목종에게 여러번 갈굼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선종은 여러 금서를 탐독하고 자유주의자들과 서신으로 교류할 정도로 반항적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공부에 전념하여 우등생으로 졸업해 1912년 육군 보병 참위로 임관하여 제1연대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1913년 부위로 진급하였고, 1914년 [[전쟁참모 (플레이백)|전쟁참모]] 과정인 전쟁대학교에 입학해 1915년 정위로 진급하였고 1917년 황족으로써 명목상 수석 졸업하였다.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 450px; width: 100%; float: left; border: 2px solid #FCC405; text-align: center; font-size: 10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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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선종 참위 시절.png]]</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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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고조 (플레이백).png]]</div>
! style="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59A02, #FCC405 20%, #FCC405 80%, #C59A02); color: #B20602" | 참위 시절의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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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휘
| 재록(載錄) → 재면(載冕) → 희(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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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style="width: 100px; 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출생
| 1845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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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 한성부 (플레이백)|한성부]] 정선방 구름재동 흥선군저<br>(現 [[황성 한성부 (플레이백)|황성 한성부]] 종로구 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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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style="width: 100px; 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붕어
| 1912년 9월 9일 (향년 6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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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 한성부 (플레이백)|황성 한성부]] 중구 경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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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재위기간
| style="background: #bf1400; color: #ffd400" | '''조선 제25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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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2년 7월 28일 ~ 1895년 1월 12일 <small>(22년)</small>
|-
|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대한국 초대 황제'''
|-
| 1895년 1월 12일 ~ 1912년 9월 9일 <small>(17년)</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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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 <div class="mw-customtoggle-Yigyo_2"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10.5pt"><div style="margin-left:2.5px; margin-top:-2.0px">'''[ 펼치기  ·  접기 ]'''</div></div>
<div id="mw-customcollapsible-Yigyo_2" class="mw-collapsible mw-collapsed">
<div class="mw-collapsible-content" style="margin:0px -10.0px 0px; background:none">
{| style="margin:4.0px 0px -6.0px 0.0px; width:100%; text-align:left; font-size:10.5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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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 100px; 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본관
| 전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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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부모
| 생부 흥선헌의대원왕<br>생모 여흥순목대원비{{구분선}}양부 [[헌조 성황제 (플레이백)|헌조 성황제]]<br>양모 효정왕후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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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형제자매
| 3남 3녀 중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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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왕후
| 문성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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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자녀
| 장남 [[목종 헌황제 (플레이백)|목종 헌황제]]<br>차남 [[완친왕 (플레이백)|완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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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종교
| 유교 <small>(성리학)</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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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자
| 무경(武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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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호
| 우석(又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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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묘호
| '''고조'''(高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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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봉호
| '''익성군'''(翼成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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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존호
|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br>(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br>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br>(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br>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br>(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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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시호
| 문헌무장인익정효'''순황제<br>'''(文憲武章仁翼貞孝'''純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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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연호
| '''[[건원 시대 (플레이백)|건원]]'''(建元, 1895 ~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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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계급
| [[대한제국군 (플레이백)|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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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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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고조 순황제 이희(高祖 純皇帝 李𤏴)는 [[대한국 (플레이백)|대한국]]의 초대 [[대한국 대황제 (플레이백)|황제]]이다. 1849년 헌조 사후 왕족 가운데 유일한 헌조의 아래 향렬로써 보위에 올랐다.


고조의 등극은 대한 후기 300년을 통치해온 인조의 혈통의 단절과 덕흥대원군의 직계로의 왕통교체를 상징하며 실질적인 대한 제3왕조의 창건 및 대한 왕조의 중시조로 평가된다.
전쟁대학교 졸업 후 원수부 참모본부로 전속된 선종은 전쟁참모 업무를 시작했다. 본래 선종 또한 [[전쟁참모 (플레이백)|전쟁참모]] 처럼 야전 지휘관은 스처가고 최상위 제대 참모로 주로 복무해야 했다. 그러나 선종은 '''차나 달이려고 무관이 된게 아니라며''' 인사규정에 반기를 들었다. 선종은 무관후보생때부터 수 없이 벌인 사고를 유일무이한 현역 황족이라는 빽으로 무마시키며 잘 알고 있었다. 선종은 이번에도 황족이라는 위상을 이용하여 참모본부에서 깽판을 벌여 서백리 출병에 자신을 중대장으로써 포함시키는데 성공했다. 선종은 창끝부대 지휘관으로써 만주 횡단철도와 연해주 동해안, 심지어 바이칼 호의 이르쿠츠크 내륙 깊숙히까지 점령하며 전쟁영웅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와 교전 과정에서 학살이 포함된 대규모 초토화 작전으로 자유시 학살이라는 흑역사를 남겼다. 서백리 원정 직전까지만 해도 선종은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모습을 여럿 보여왔으나, 서백리 출병 당시 붉은 군대에 혐오감을 느끼며 사회주의와 손절하게 된다.
 
서백리 출병 당시 선종과 함께 참전했던 육군무관학교의 선후배들은 붉은 군대와 교전하며 붉은 군대의 전투력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백군과의 협력을 통해 1차대전의 전훈과 서백리의 광활한 환경에서 영향을 받아 핵심 전력을 기동화, 장갑화하여 장차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작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후진적인 당시의 제국군에서 이러한 제한은 받아들여질 턱이 없었다. 결국 선종은 지휘계통 따위는 생까고 [[목종 헌황제 (플레이백)|목종]]에게 직접 기동부대 창설을 제안했다. 이는 명백한 월권이었으나, 선종의 황족이라는 신분으로 유야무야되었다. 결국 선종은 [[기사혁명 (플레이백)|기사혁명]] 직전까지 수많은 월권과 파천황적 행보를 보였음에도 군문을 떠나지 않았으며, 선종의 이런 막가파식 행보는 역설적으로 대한제국에서 총력전과 기동전에 대한 연구의 방패로 작용하였다. 이리하여 선종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장차 대한제국 기갑군의 모체가 될 제1전차대가 창설된다.
 
이 시기 선종과 함께 서백리 출병에 참전했던 김석원 지청천, 김홍일등의 소장파 무관들은 점차 선종을 우두머리로 하여 사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백리 출병으로 대한제국군의 전략적 무지와, 대전쟁의 군사교리도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구식 군대의 추태를 온몸으로 느꼈고, 서백리 출병과정에서 일본군과의 마찰을 빚으며 일본과 소련에 대한 공포와 이에 대한 대한제국의 전략적 대응이 부재하다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다. 선종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국군의 현대화와 기동전을 주장하였고, 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주먹구구식 경제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때부터 선종은 대전쟁의 총력전 체제에 매료되었고, 총력전 체제를 통해 중공업입국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여야만 대한제국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소장파 무관들과 함께 총력전 체제를 수립하고 현대화된 미래적 군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독서회를 창설하였다. 이 독서회는 장차 비밀결사에서 점점 군내의 거대 사조직화 되어 [[민족유일당 (플레이백)|극명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선종은 1920년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귀환 직후 선종이 창설에 기여한 제1전차대장을 맡아 대한제국 전차병과의 초석을 다졌다. 1921년에는 서백리 출병으로 미루었던 우등 전쟁참모에게 주어진 특전인 해외 유학을 떠났다. 선종은 베를린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최초의 현대적 총력전을 선보인 독일군의 전술을 공부하였는데, 초인플레이션과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던 독일의 혼란기를 몸소 체감한 선종은 아직까지 가지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점차 무너졌으며, 귀국 직전에는 민주주의에 혐오감과 정치적 냉소주의,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기도 했다.
 
1922년 선종은 독일에서 참령으로, 1924년 귀국 후 부령에 진급했으며 귀국 직후 제1전차대를 증편한 제1전차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시기 독서회는 영관급과 위관급에서 세를 넓혔고 이름을 극명회로 바꾸었다. 선종은 김홍일의 국방론을 바탕으로 총력국방국가 건설이라는 목표하에 극명회를 키워가기 시작했으며 극명회의 영수로써 군에 영향력을 떨치기 시작한다. 1925년에는 참모본부 군무부장이라는 요직에 보직된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 호전에 따른 군축이 대두되자, 민병석 의정이 일본의 야마나시 군축을 본따 사남군축을 발표한다. 이에 열 받은 선종은 극명회와 군부 내의 소장파를 대표하여 군축의 부당함, 민병석 내각에 대한 경질, 문민 출신이 역임하는 육해군 대신을 현역 무관의 자리로 하고, 원수부를 폐지하고 육해군부를 의정부 산하에서 이관하여 프로이센 군사내각처럼 황제 직속으로 두자는 통수권일원화를 담은 상소를 목종에게 상주하며 '''지휘계통과 문민통제를 모조리 무시하는 초대형 사고'''를 친다. 그간 선종은 이러한 월권을 수 없이 자행하였으나, 이런 초대형 사고를 치자 결국 군무부장에서 보직해임되었다. 이에 격분한 선종은 이딴놈들을 위해 복무할 수 없다며 사직을 청하고 헌정당 입당을 타진한다. 그러자 목종은 황족 중 최선임자 겸 전직 좌파이자 황제인 자신도 못말리는 반골 현풍군과 반 정부 야당인 헌정당과 결합 시도에 기겁해 '''호적에서 파여서 평민이 되고 싶냐'''는 협박과 곧 바로 정령 진급을 시켜준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선종의 예편과 헌정당 입당을 막았다. 결국 현풍군은 사직을 철회하고 다시 제1전차대대장으로 보직되었다. 이때 선종은 문민관료와 목종의 한심한 추태에 노골적으로 경멸을 표했으며, 제도적으로 문민정부를 설득하여 총력전 국가를 건설한다는 기존 노선을 철회하고 대전쟁 시기 독일군처럼 군이 직접 주도하는 총력전 체제를 본받아 자신과 극명회, 군이 주도하는 총력전 체제를 구축하기로 결심하고, 정변을 계획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이후 사남군축의 내용대로 제1전차대대가 독립기갑연대로 승격하자 연대장 대리를 지내다가 1926년 정령으로 보직되며 정식 연대장이 되었고, 다시 참모본부 군무부장에 복직하였다. 이후 1929년 참장에 진급해 시위혼성사단장이 되었다.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라 59세의 나이에 붕어하기까지 부국강병과 동시에 제도와 문화의 동도서기화를 이루는등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으며 대한의 고토인 간도를 수복하여 영토를 확장시켰다. 고조가 즉위할 당시 미지의 나라였던 대한은 고조의 치세를 거치면서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을 지닌 '''대한국'''으로 변모했고, 고조의 치세는 천통성세라고 불리며 성군(聖君)으로 평가받는다.
=== [[기사혁명 (플레이백)|기사혁명]]과 황태자 책봉 ===
호시탐탐 군의 주도하에 총력전을 구현하고자 한 선종에게 기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오게 된다. 1930년 원래부터 콩팥과 심장이 좋지 않았던 목종은 대공황과 헌정당의 총선 승리로 인한 충격, 연달은 정치적 혼란으로 원래도 엉망이었던 건강이 크게 악화된다. 이에  [[폐태자 이건 (플레이백)|황태자 이건]]이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으나, 태자 또한 목종이 벌여놓은 문제들을 수습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 생애 ==
결국 태자는 부황의 지지를 얻어 의정원을 해산하고, 언론 검열을 강화해 강제로 혼란을 수습한다. 이와 더불어 군비 삭감을 비롯한 대규모 긴축정책을 시행하나 군부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 유년기 ===
1845년(헌종 11) 음력 7월 20일 한성부 중부 정선방 돈녕부상계 니동(現 황성 한성부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에서 흥선군(훗날의 흥선대원왕)과 현부인 여흥 민씨(훗날의 여흥대원비) 사이의 적장남으로 태어났다. 흥선군은 안동 김씨 김병기의 의심을 피해 바보인 척하면서 고의로 장남인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잠깐 둘째 큰아버지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로 출계했다가 동생 고종이 즉위한 뒤 다시 본가로 돌아갔다.[3] 흥선대원군은 나이가 찬 이재면 대신[4] 아직 어려 당분간 섭정할 수 있는 차남 이명복을 왕으로 추대했다.


어릴때부터 외모가 아름다우며 영특하고 기개가 있었고, 유교 경전을 보는 것을 좋아하였으나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왕족으로써 이하전의 재능은 아까운 재능이었다. 그러나 1849년 평범한 왕족이었던 이하전의 인생은 역변하게 되었다.
이 당시 군부의 불만은 극에 달했는데, 3.1 폭동 당시 목종이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내각의 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군권을 장악하며 육해군의 참모본부와 총제영이 허울로 전락하고, 원수부의 주도하에 시행된 서백리 원정의 부진으로 군부 내의 불만은 가속화 되었으며 군 내부의 진급 적체를 해결하지 못하여 불만이 고조되었다.


당시 국왕이었던 헌조가 후사없이 일찍 죽고 삼종의 혈맥이 거의 단절된 상황에서 이하전은 풍양조씨와 효유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 조씨)의 후원(뒷받침)으로 헌종과 효정왕후의 양자(장남)으로 정식 입적되어 '완녕군(完寧君)'으로 봉해지고 이하전에서 이희(李𤏴)로 개명하였고, 곧바로 대한 제25대 임금으로 정식 즉위하였다.
이렇게 군부의 불만이 고조되던 와중, 군비 삭감 및 대규모 군축이 확정되자 군부의 불만은 폭팔하게 되고, 선종과 극명회는 이때를 노려 정변을 기획하였다. 1930년 11월 10일 자정 독립기갑연대 병력 일부를 시작으로 황성 일대 육군의 일부가 선종의 지휘 하에 조정 및 국가중요시설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기사혁명 (플레이백)|기사혁명]]이 시작되었다. 황성 동부의 경성위수사령부, 황성 서부의 제30사단, 황성 남부의 제7사단 그리고 서경, 개성, 대구, 광주, 부산에 주둔 중이던 군대들이 궐기하여 황궁과 황성방송국, 원수부, 육군부, 경무청, 파출소, 중앙전화국, 시청, 도청, 발전소 등이 표적이 되었다. 의정 윤덕영이 머물렀던 의정관은 사태 초기 시위혼성사단에게 점거되었으며 황태자였던 [[폐태자 이건 (플레이백)|이건]]은 사살되었다. 이후 선종은 오전 9시 경, 체포당한 윤덕영과 육군대신 박중양을 데리고 해군총제사 신순성 대장과 함께 경복궁에 있던 목종을 운현궁에 유폐시키며 강제로 혁명 지지와 계엄령 선포를 추인받는다.


{{인용문|대왕 대비가 이하전을 종사의 부탁으로 삼는다고 하교하다|
이후 선종은 목종의 명의로 여러 포고문을 쏟아내는데, 전국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하고 조정 대신들을 모조리 체포하며, 오후 8시를 기해 의정원, 중추원, 지방의원 등 의회는 모조리 해산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종사(宗社)의 부탁이 시급한데 금상(今上)을 이을 사람은 이하전(李夏銓)뿐이므로, 이를 종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시인(時仁)의 첫째 아들이다." 하였다.}}


=== 즉위 배경 ===
이로써 선종은 내각 총사퇴를 결의하며 마침내 목종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조정, 의정원, 재판소의 역할을 포함한 국가의 전권을 손에 쥐게 된다. 다음날인 11월 10일 육군 부장에 진급하는 한편 경성위수사령관을 겸하여 황성의 모든 군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하루 아침에 실권을 빼앗긴 목종은 나름대로의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죄다 극명회로 채우고 군대를 동원하여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서 현풍군은 목종의 친위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모든 권력을 찬탈하는 데 성공했다.
고조는 선왕 헌조와 즉위 전까지는 법적(양자제도)으로 '''27촌''', 혈통상으로는 '''25촌''' 차이가 나는 머나먼 친척이었다.고조와 헌조는 혈통상 덕흥대원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고 법적으로는 중종의 아들 대에 갈라졌다. , 선말에 들어 왕실 자손이 거의 씨가 마르기 직전까지 가 1819년(순조 19년) 순조가 일종의 보험 개념으로 10대 사손 진안군 이언식 대부터 대원군가 종손에 한해서 군 작위 수여 및 왕족 대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13대 사손인 이하전은 종친부에서 관리하는 엄연한 왕족이었으므로 언급할 수 있는 대상이긴 했지만 헌조 즉위 당시만 해도 별로 주목 받지 못하는 왕족이었다.


그러나 1844년(헌조 10년) 민진용 역모 사건에 엮여서 1844년(헌종 10년)에 전계군의 세 자식들이 사사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영조 - 사도세자의 직계 후손이 단절된 것이다.''' 이렇듯 삼종의 혈맥이 거의 단절된 상황에서<ref>익평군이 있었지만, 익평군은 숙부 은전군의 사후 양자가 되어 제사를 이어야 했고, 몸이 좋지 않아 일찍이 후보군에서 탈락했다. 물론 장남이 입적하여 즉위하는 경우도 아주 가끔 있었지만 매우 드문일이라 기각되었다. 야사에서는 익평군이 풍계군과 그의 첩 전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난 동성동본이라 즉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ref> 혈통보다는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른 택군이 대두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극명회의 주도로 선종은 목종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하루라도 대통을 비울 수 없다며 혁명에 공이 큰 현풍군을 입적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1930년 11월 29일 현풍군은 정식으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이렇듯 모든 저항이 무위에 돌아가자 군부는 본격적인 선위 여론을 조성하였다. 이에 목종은 마지못하여 대리청정의 명을 내렸지만, 이후 퇴위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그렇게 1930년 12월 12일, 목종은 군부의 압박과 대신들의 끈질긴 퇴위 강요에 끝내 못이겨 강제로 퇴위하고, 삼종지맥의 후손이자 백정의 외손자인 선종은 황위에 등극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하전이 다른 종친들보다 유리한 조건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바로 항렬. 원래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르면, 선왕의 다음 항렬 대에서 새 왕이 나와야 하는데 그럴 왕족이 없기는 했다. 헌조는 덕흥대원군의 13세손(12대손)이고 그 아랫대가 14세손(13대손)인데, 왕과 가까운 친척들 중 14세손은 단 1명도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해당했던 왕족이 도정궁 종손 이하전이었던 것. 어찌 보면 당연하다. 비록 왕통을 계승한 건 덕흥대원군의 셋째인 선조 계열이었지만, 덕흥대원군의 장남 계열로만 계속 이어지는 종가가 바로 도정궁이기 때문에 왕실 직계보다 세대 교체가 빨랐기 때문이다.
=== 재위 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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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선종 재위 초기.png]]</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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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59A02, #FCC405 20%, #FCC405 80%, #C59A02); color: #B20602" | 재위 초기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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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종을 끌어낸 선종은 연호를 백선(白宣)으로 정하고 황제가 되었다. 선종은 기사혁명을 통해 국가를 장악하였지만 군의 상층부를 차지하던 수구파는 여전히 선종에게 불안 요소였다. 또한 극명회와 이들 수구파는 목종 시기부터 치열한 세력 다툼을 이어가 불구대천의 원수로 굳어진지 오래였다. 결국 선종은 즉위 3일차에 전군회의를 개최, 이 자리에서 육군 부장급 이상의 60%를 경질하며 군을 일거에 장악했다. 이후 전통을 이용하여 미래를 개척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강조하며 헌법을 정지시켜 현재까지 이어지는 전제정치의 서막을 알렸다.  


이렇듯 왕실의 직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라 이하전이 차기 왕으로 옹립되는 것은 보다 당연했고, 풍양 조씨와 뜻을 같이 했던 권돈인이 직접 이하전을 후계자로 세우기를 호명하며 공식화 되었다. 풍양 조씨 뿐만 아니라 안동 김씨 또한 어린 이하전이 보다 다루기 수월할 것이라 여기어 옹립에 찬성하였다.
이후 강상죄를 부활시키는 한편, 상무영과 경무청의 인원들로 [[민족보위부 (플레이백)|민족보위부]]를 창설하여 반정부 조직을 철저히 탄압한 것은 물론 전국 각지에 강제 수용소들을 운영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감금, 고문하여 반정부세력과 미래의 반란 분자들을 절멸시킨다. 또한 [[극명회 (플레이백)|극명회]]를 중심으로 잔존 정당 세력을 모두 통합하여 [[민족유일당 (플레이백)|민족유일당]]을 창당하고 유일한 합법정당으로 지정하여 일당제를 시작했다. 국정을 장악한 선종은, 어일신 당시부터 내려오던 뿌리깊은 기득권을 청산하기 위해 기술관료와 군부를 적극 등용하였다. 더불어 부패한 문관들을 견제하고 군의 진급 적체를 해소하기 위해 혁명주임관제를 실시했다. 무관학교 출신 정위, 참령급 무관들은 이 제도를 통해 문관으로 전환하였고, 선종의 철저한 지지세력이 되어 총력전 체제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 친정(親政) ===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큰 견제가 없이 무럭무럭 커가는 시기 고조는 8살의 어린 나이었기에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1852년 고조가 10살이 되던 해 순조, 헌종과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일문인 김문근의 딸 문성왕후를 왕비로 삼았다. 안동 김씨 세력이자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 김씨조차도 또 다시 안동 김씨를 왕비로 들이는 일을 반대했지만, 다른 안동 김씨의 압력에 유야무야되었고, 국구(國舅, 왕의 장인어른)가 되어 권력을 휘두른다.


1855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고조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친정을 시작한 고조는 정치적 친위 세력이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남인, 소론은 물론, 북인과 반역향이라고 소외된 영남 유림, 서북인, 함경도인, 고려 왕씨 등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 왕가의 종친 등을 끌어들여 비주류를 등용하여 조정에 근왕파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때 왕족 가운데는 흥선군, 경평군, 익평군을, 그 외에는 이유원, 이최응, 김병국을 제수(除授)하였다.
선종은 사족 또한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선종은 개국작을 폐지하고, 조선 초 전례를 따라 백작-부원군의 이등작을 복원하고 이들의 수를 30명으로 제한하여 재정적 부담을 줄였다. 또한 황족 작위도 조선 초 작위를 본따 친왕-공-후로 바꾸며 황족들을 대거 정리하여 궐내의 여론을 장악하는 한편, 비변사를 본따 최고권력기구인 [[대한제국 국방위원회 (플레이백)|국방위원회]]를 설립하여 유례없는 황권을 확립한다. 이는 1932년 대한국 국제를 폐지하고 흠정헌법인 [[대한제국 국제 (플레이백)|대한제국 국제]]를 반포하며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시기 확립된 전제군주정은 외견적으로는 조선 후기 정체였으나, 실제로는 고도의 중공업화와 근대화, 대중동원체제를 행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의 형성을 위한 것이었다. 선종은 천제로부터 천명을 받아 천하를 소유하는 동양적 황제가 아닌, 전체주의 독재자들처럼 자신을 민족의 영도자로 부각했고, 자신을 '''수령'''으로 지칭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세력을 키우던 고조는 1857년부터 척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암행어사도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 등을 유배를 보내며, 안동 김씨의 조종을 받던 삼사를 모조리 파직하는등 반(反) 안동 김씨 행보를 걸었다. 또한 오군영의 훈련대장과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하고 헌조가 만들었다 해체된 훗날 [[시위대 (플레이백)|시위대]]가 되는 무위영을 설치하 군권을 장악하고 아주 활발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선종은 특히 총력전 국가 건설을 강조한 만큼 국방에 각별했다. 선종에게 국방이란 국가 생존을 넘어 국가를 발전시키는 핵심적인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즉위 3일차에 출척을 통해 군을 장악한 직후 극명회 인사들은 육군의 요직을 장악하였디. 선종은  독일군의 기동전 이론을 바탕으로 고도의 기계화 전력을 육성하고 1931년 세계에서 10번째로 공군을 창설하며 공지전의 개념을 확립시키며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매우 진일보한 군사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 진정한 왕이 되다 ===
그러던 1860년에 일이 터졌다. 고조가 친히 발탁하여 안동 김씨와 사사건건 대립하던 경평군의 친동생 이세익(李世翊)의 한림 임명을 세도가 안동 김씨들이 부당하다고 반대하였다. 이에 경평군이 크게 노여워해 고조에게 상소를 올리며 세도가와 경평군의 대립이 폭팔했다. 안동 김씨들은 경평군에게 벌을 주라 청했고, 화가 난 경평군은 김좌근, 김문근(金汶根) 등 안동 김씨의 세도를 대놓고 비난했는데, 이 때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인가! 이씨의 나라인가!" 라는 말을 하였다. 당연히 가만있을 리 없던 세도가들은 이를 오히려 역공의 기회로 삼았다. 아예 신하들에게 경평군을 사형시키라고 까지 권하라고 부추겼다.


이때 고조가 개입하였다. 고조는 “경평군의 말이 옳다.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가 아니라면 경평군을 사사할 필요가 없다“며 경평군을 공격한 대사헌 서대순을 파직하며 경평군을 보호했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는것 같았으나, 안동 김씨들은 정치적 탄핵이 실패하자 경평군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이것이 흥선군의 정보망에 걸려들었고 이를 고조에게 고했다. 격노한 고조는 즉시 무위영과 오군영을 동원하여 비변사와 고관대작의 가택을 습격하여 세도가를 체포하였고, 대규모 출척을 가했다. 이것이 바로 임술대출척이다.
대외적으로는 동양평화를 주장하면서도 초강경 팽창주의 외교를 전개했다. 선종은 일본과의 평화적 공존에 대해 회의감을 지녔고,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한편 대만과 유구를 강탈하여 경제블럭 확장하기를 원했다. 동시에 선종은 허울뿐인 독립을 유지하던 청나라를 병합하여 만주를 본격적으로 수탈하기로 결정했다. 1932년 청나라는 푸이가 옥새를 바치며 316년만에 사라지게 된다. 만주 병합 직후 소련의 5개년 계획을 모방해 “일체는 경제 복구발전을 위하여”라는 구호 아래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소련식 계획경제 지지자들을 중용해 경제복구발전 3개년계획을 실행하였다.  


이때 비변사를 혁파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복원하며 세도정치 60여년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내고 말았다.<ref>다만 신 안동 김씨 자체에 대한 숙청은 최소한으로 끝났다. 이는 안동 김씨와 일종의 정치적 거래를 한 것으로, 안동 김씨의 세력을 어느 정도 살려서 또 다른 세도 가문인 풍양 조씨 가문의 성장을 막고자 했고, 안동 김씨 내의 유능한 인재들을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안동 김씨 일파는 실권과 재산은 크게 잃었지만 명예 등은 거의 잃지 않았다. 김병기는 잠시 경기도 광주유수 등의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복귀하여 좌찬성 등의 요직을 맡았다. 김병학 / 병국 형제는 오히려 더욱 진급, 고조의 치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ref>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선종은 일본의 대륙 팽창이 결국 대한제국의 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과 즉각적인 전면전을 벌일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선종은 '대한민족지원군'이라는 명칭으로 의용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선종은 완편 군단 수준의 지상군을 전개하고 750대가 넘는 각종 항공기를 배치히여 대규모 공군 지원 및 전차, 전투기, 대공포 등의 무기 판매 및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국민정부를 지원했다.  


이때부터 고조는 왕권 강화와 더불어 각종 폐단에도 손을 대었다. 고조는 근왕파들을 통해 지방을 장악한 이후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은결을 색출해 내는 것으로 전정을 개혁했다. 또한 군정을 개혁하여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기준으로 하는 호포제를 실시, 세수를 증가시켰고, 장용영의 선례를 본받아 군제를 개혁하여 오군영을 무위영으로 통폐합하며 나름대로 군제 개혁을 진행하였다.
대한민족지원군은 상하이 전투, 난징 방면 전투, 우한 회전 등에 참가하면서 현대전 교리와 기갑·포병·항공 협동전술을 축적하였으며 국부군과 합동하여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였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압도적 교환비를 내며 일본군의 초기 패퇴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대한제국은 전쟁 기간 동안 국민정부에 대규모 차관과 무기를 지원하였으나, 장제스의 상하이 전투에서의 실책과 더불어 각종 실책과 함께 공산당의 확장을 방지하지 못하는 점에서 점차 장제스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장용영의 조세규모는 커져갔고, 정조말기에는 호조가 장용영에게서 재정을 대출받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화성건축의 경비가 모두 장용영에서 나왔다.
결국 선종은 왕징웨이 공작을 통해 장제스를 실각시키고 왕징웨이를 주석으로 하는 새로운 국민정부를 수립하며 항전의 기초를 다졌고, 대한제국은 이후에도 중국에 항공기, 전차, 화포, 군수물자를 지속적으로 수출하여 경제적 이득을 챙김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군사 교리 개발, 정보 수집, 장교단 육성, 신무기 운용 시험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이후 대한민족지원군의 실전 데이터는 이후 대동아전쟁 전투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서원 철폐도 이어졌다. 고조실록에서는 이때 유생들이 반발하여 몇 날 며칠을 울고 불며 집단으로 시위를 벌였으나, “진정 백성에 해가 된다면 문선왕이라도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함께 유생들을 한강 남쪽으로 밀어내 버렸다. 이와 더불어 환곡제(還穀制)를 폐지하고, 사창제(社倉制)를 실시, 검소한 생활을 권장하고 법제도 바로잡았다. 또한 길거리의 부랑배들을 몰아내 국가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이에 대한의 재정은 크게 확충되었고, 치안도 대단히 진정되어 고조 시절에는 민란이 격감되어 고조의 권위는 점차 증가해갔다.
=== 대동아전쟁 ===
=== 개항과 동도서기 ===
1939년 말, 중국 전선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고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은 급격히 변화하였다. 대한제국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국민정부를 지원하며 대규모 자원병 군단과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다. 한국군은 중국 각지에서 일본군과의 실전을 통해 현대전 교리를 축적했고, 동시에 항공·기갑·포병 운용에 관한 귀중한 데이터를 확보하였다.
고조 시기 들어 서구의 통상 강요는 더더욱 심해져가고 있었다. 조선의 쇄국은 정점에 달했으나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점차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현실처럼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하고 조선과 국경을 맞댄다. 1860년대 들어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된 조선과 러시아는 사소한 국경 충돌을 빚으며 곤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던 1863년 온성군의 포수들이 수렵 과정에서 러시아인을 살해하자, 러시아는 즉시 조선에 자문을 보내어 공동조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고, 결국 1864년 갑자양요가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름대로 군제를 개혁한 조선이었지만, 서구 열강과의 첫 충돌은 조선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러시아는 조선과의 접경지역을 점령하고 남진을 시도하였으나, 극동에서의 확장을 우려한 영국과 청의 만류로 조기 종전을 결정하였다. 결국 조선은 협상에 나섰고, 인천, 원산, 청진을 개항하고 러시아 고문단의 파견과 러시아에 매우 유리하게 작성된 함흥조약을 맺는 것으로써 갑자양요는 끝나게 된다.


함흥조약 이후 조선은 반강제적으로 여러 국가들과 수교를 시작하였고, 고조는 각각 수신사와 영선사, 보빙사를 파견하여 근대와 문명을 관찰하였다. 그 결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차르 알렉산드르 2세를 비롯해 드미트리 블루도프 등 러시아의 주요 인사를 만나고 러시아의 각종 시설을 시찰하였다. 귀국하자 이를 바탕으로 개화파를 형성, 근왕파는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로 갈라지게 된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이를 단순한 제한적 개입으로 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군의 전투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의 산업력과 병참 능력은 대본영의 예상했던 수준을 크게 웃돌았다. 1939년 당시 일본은 중국 대륙에서 계속되는 소모전, 북방에서 급속히 군비를 확장하는 대한제국, 영미의 제제로 인한 미국과 영국의 경제 제재 가능성이라는 3대 악재에 직면하였고, 만약 한국과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일본은 승패와 관계없이 제국의 국력을 소진시킬 것이라는 결론이 확산되었다.


고조는 스스로 척사윤음을 반포하며 공맹과 정주의 나라에서 사악한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서양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천명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동도서기'였다. 청의 양무운동을 모티브로 서양의 기술과 무기만을 수입하려 시작한 이 계획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작동하여 대한 육해군의 성공적인 근대화로 이어졌으나, 동도서기론은 시작 초기부터 고조와 조정의 예상과는 다른 역효과를 불러냈다.
선종 또한 이 시기 충분한 실전 데이터를 확보함에 따라 중국 전선에서의 추가적 손실을 내켜하지 않았다. 또한 선종은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한 친한 정부를 안정시키는 것이 중국 내 영향력을 확대하기에는 더 중요한 국가전략이라고 보았고, 일본과 즉시 충돌하기보다는 시간을 벌어 군사력을 더욱 증강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결론 내렸다.


무기와 기술의 국산화를 위해서는 공학을 배워야했고, 공학은 과학과 사상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으며 서양식 무기를 익히기 위해서는 서양의 언어와 군사교범을 들여와야 했다. 결국 이는 1875년부터 전면적인 근대적 학제의 확립과 산업 확충으로 귀결되었다. 게다가 1875년 이와쿠라 사절단을 모방하여 흥선군을 수장으로 하고 정부관료들로 편성한 조사시찰단은 서구를 탐방하며 구미 견문을 쌓으며 열성적인 근대화론자로 진화하였다. 흥선군은 조사시찰단 사이에서의 공통된 의견을 모아 고조에게 상주하는데, 이것이 바로 [[경장대강 (플레이백)|경장대강]]이다. 고조가 이를 바탕으로 하는 전면적인 근대화를 국시로 정함에 따라 경장대강은 조선의 개화 방침이 되었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1938년 여름부터 양국은 비밀 접촉이 시작되었고, 1939년 한일불가침조약이 반포되었다. 일본은 이를 통해 일본은 북방에서 대한제국의 위협이 일시적으로 제거되었다고 판단하였으며, 남방 진출과 중국 공략에 필요한 시간을 벌었고 남방작전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는 전략이 채택되었다. 이 시기 선종은 공식적으로 대한민족지원군을 완전 철수시키며 평화를 유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일본과의 결전을 대비한 국가총동원 체제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중국 내 영향력을 공고히 하면서 군사력 증강과 전쟁 준비를 계속할 시간을 확보했다.


경장대강의 반포를 기점으로 사회, 군사, 중앙행정기관의 개편과 함께 여러 개혁이 급격하게 추진된다. 이러한 개혁의 주요 내용으로는 행정관제를 개편, 1부(府) 6조(曹)제에서 2부(府) 9아문(衙門)제로 정착시키는 행정개혁과, 러시아 군사고문단 대신 세계 최고의 육군 강국인 독일 군사고문단 초빙, 러시아식 전제군주정의 도입, '사농공상'을 폐지,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새롭게 성장한 보부상이나 조정 관료 등을 새롭게 사족이라는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승선부의 지배 하에 두어 전제 왕권을 강화한다. 동시에 학제(学制) 개혁, 지조(地租) 개정,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등이 있다.
한일 불가침조약은 약 3년간 유지되며 동아시아의 긴장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일본은 북방 전선의 부담을 덜고 남방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고, 대한제국은 중국 내 영향력을 공고히 하면서 군사력 증강과 전쟁 준비를 계속할 시간을 확보했다. 한일불가침조약과 유럽 전선에서의 연합국의 패배로 고무된 일본은 1941년 미국을 상대로 진주만 공습을 실시하면서 대동아전쟁을 시작하였다. 일본의 남방작전은 예상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으며, 남방 대부분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시기부터 동도서기론은 사실상 대한의 서구화를 뜻하는 의미로 변형되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개화정책의 추진은 대한을 험난한 국제정세속에서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었다. 이러한 고조의 근대화 정책을 현대 대한에서는 어일신(御一新)이라고 칭한다.
선종은 일본의 시선이 남방으로 이동한 당시를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1942년 6월 8일 새벽 대한제국 해군은 진주만 공습과 유사한 방식으로 일본 연합함대의 주요 거점인 구레항을 기습하였다. 대한제국 해군은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로 일본 해군에 큰 피해를 입혔고, 공식적으로 연합국에 가입하고 한중동맹을 채결하며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었다. 구레에서의 성공적 기습과는 달리 대한제국 해군은 이후 벌어진 동중국해 해전과 류큐 방면 해전에서 궤멸적 타격을 입으며 사실상 전쟁 수행 능력을 대부분 상실하고 동아시아의 제해권은 일본이 유지하게 된다. 이는 대한제국이 44년까지도 일본에 상륙작전을 전개하지 못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 건양북벌 ===
=== 칭제건원 ===
건양북벌의 승리 이후 전국적으로 칭제건원에 대한 열망이 조성되었다. 이에 고조는 원구단을 축조하고 연호를 태시(建武)로 정하고 원구단에서 황제의 자격으로 고유제를 거행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여 새로운 천자국 대한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한청전쟁의 승리 이후 전국적으로 자주 여론과 칭제건원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었다. 이에 고조는 1895년 4월 말엽, 원수부가 설치되었던 평양 풍경궁에서 경복궁으로 환궁하였다. 또한 고조는 환궁 후 5월 14일에 정식으로 국호를 황제의 국가를 뜻하는 대한국(大韓帝國),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정하고 원구단을 축조하여 그곳에서 황제로써 즉위식을 거행하여 독립된 자주국가임을 공식 선포하였다.
해군의 패배와 달리 육군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대한제국은 그동안 갈고 닦은 기동전을 적극 활용하여 중국전선에서 연전 연승을 거듭하였고, 1943년 말, 카보네이드 작전으로 일본군은 중국 전선에서 궤멸적 타격을 입고 중국 대륙에서 대부분의 거점을 상실하였으며 남방에서 연합국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944년 이후 태평양에서는 미국 해군이 일본 해군을 연속적으로 격파하였고, 레이테만 해전 이후 일본 연합함대는 사실상 전멸하였다.


이때 고조는 제국의 예법에 걸맞게 4대조를 추존하고 왕실을 황실로 격상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를 기점으로 기존의 제후국 예법을 황제국에 걸맞게 변경하고자 하였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조선이 선망했던 주명의 예법은 이미 200년 전에 명이 멸망했기에 고조와 대신들은 역대 중국 왕조의 예법과 한국사속 독자적 예법, 그리고 서구식 예법을 결합하여 정리하며 황실의 예법을 재정비한다.
일본 연합함대의 전멸 이후 연합국과 선종은 일본 본토에 대한 상륙 작전에 대해 협의하기 시작하였고, 작전 개시일은 1944년 11월 1일로 정해졌다. 일본상륙 75일 전부터 일본 본토 전역에 걸친 대규모 전략폭격, 항모 기동부대에 의한 전략 요충지 핀포인트 폭격과 기동함대의 대규모 연안 함포 사격이 개시되었다. 이는 간토 및 혼슈와의 연락선 차단, 잔존한 일본 해군 함정의 격멸, 철도와 도로의 수습점, 중요한 교각이나 터널 등 교통 요충 시설 파괴, 상륙 지점의 일본군의 손실 도모가 목적이었다.또한 10월 31일 항공 폭격 및 주력 전함 최소 20척을 동원한 전함의 대지상 함포 사격을 상륙 지점의 포대와 발화점에 집중하여, 상륙 지역 인근 해상과 육상의 모든 장애물을 배제하고 11월 1일 오전 6시에 지상 주력본대에 의한 대규모 상륙을 개시되며 일본 본토로 전쟁이 확산되었다.
=== 말년 ===
고조의 치세는 태평성대였지만, 그 치세를 유지하기 위해 고조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격무를 일삼았다. 여타 선왕들 또한 격무로 시름하기는 다반사였지만 수십년간 세도가, 서구, 청나라를 비롯한 여러 숙적들과 국가를 담보로 경쟁해온 대한의 수장인 고조의 부담은 여느 군왕들과도 비견할 수 없었으며 이는 고조의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고조는 어극 50주년인 1899년 3월 29일, 대신들과 태자가 보는 앞에서 붕어하였다. 향년 57세였고 8살의 나이에 등극한 이래 한치도 쉬지 않고 서세동점의 난세속 대한이라는 작은 배를 선장의 위치에서 살아남게 한 임금은 조용하게 영면에 들었다.  
대한제국 육군을 위시한 연합국은 무자비하게 일본 본토를 타격하였고, 일본의 모든 국내외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공업 생산력 등 전쟁 수행 능력을 철저히 파괴하며, 도쿄를 향한 죽음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대한제국군 총사령부는 최대 6개월 정도로 낙관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억 총옥쇄', '본토결전'이라는 광기어린 항전 의지를 꺾지 않았다. 결국 선종은 일본을 '확실하게' 굴복시키기 위해선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대규모 물량을 투입하는 한편, 점령지에서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일본 정화 계획 (플레이백)|일본 정화 계획]]을 실행하여 일본 본토에 대한 황폐화와 절멸을 자행하였고, 일본인들을 게토에 수용했다. 게토에 갇힌 수많은 일본인들은 극심한 인구 과밀과 그로 인한 영양실조, 위생 악화에 시달려 아사하거나 병사했다. 이듬해인 1945년 2월 무렵부터는 기계화보병, 전차, 항공기를 이용한 대규모 토벌 작전이 벌어졌다. 민간인 학살은 일상적으로 일어났으며 가축, 곡물, 재산을 모조리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렸다. 노동 적령기의 인구는한국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됐으며 수많은 민간인들이 의도된 기아로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무수히 많은 건물들이 타 버렸고 광대한 면적의 지역이 황폐화되었으나, 여전히 일본군의 저항은 지속되었다.  


사후 기강을 만들고 표준을 세운 업적을 인정받아 고조(高祖)의 묘호를 받았으며 성릉(聖陵)의 능호를 받아 서삼릉에 안치되었다.
이렇듯 일본의 광기 어린 저항은 니가타와 센다이에 핵폭탄이 투하되면서 종료되었다. 일본은 이 시점부터 일본 제국의 모든 군부는 더 이상 연합군을 상대로 어떠한 형태의 흥정과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것과 1억 총옥쇄를 해봐야 저 폭탄 한 방이면 무력화된다는 사실을 드디어 인정했다. 원폭이 니가타의 1회성 단발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 졌으며, 지금까지 폭격이 없었던 도시들은 운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저 핵폭탄을 떨구기 위한 후보지로 남겨 두었던 것임이 너무나도 명백해졌다.
== 여담 ==
* 미남이었다. 실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에서 피부가 밝으며 매우 준수한 외모를 가졌다는 기록이 여러차례 등장한다.
* 부인 문성왕후와의 금실이 매우 좋았다. 본래 그녀가 왕비가 된 것은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한것이지만,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부를 축적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정작 왕후 본인은 한 번도 정사에 나서거나 가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고 성격이 과감한 고조와 조용한 왕후는 서로에게 많은 의지가 되었다고 한다.


== 가계 ==
항복 내용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이른바 옥음방송이라 하는 쇼와 덴노의 녹음된 목소리를 직접 방송하였고, 동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대동아전쟁은 이렇게 끝나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류큐(유구 번으로 개칭)와 대마도를 차지했고, 중국은 대만과 센카쿠열도를 차지하며 일본의 패권을 나누어 가졌으며, 일본 전역에서 군정을 시행하였다. 개항 이후 대한제국은 80년만에 동아시아의 진정한 패자로 부상하였고, 이 가슴 벅찬 승리에 전국민과 선종 본인도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 이렇게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쟁 이전부터 수령으로 칭해지며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던 선종은 이제 '위대한 승리자'라는 업적까지 더해지면서 대한제국에서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 증조부 : 진안군 언식(晋安君 彦植, 1752 ~ 1819)
* 증조모 : 덕수군부인 장씨(德水郡夫人 張氏, 1750 ~ 1770)
** 조부 : 완성군 희(完城君 爔, 1771 ~ 1830)
** 조모 : 남양군부인 홍씨(南陽郡夫人 洪氏, 1772 ~ 1808)
*** 부친 : 완창대원왕 시인(完昌大院王 時仁, 1805 ~ 1843)
*** 모친 : 경주대원비 김씨(慶州大院妃 金氏, 1816 ~ 1863)
* 왕후 : 문성왕후 김씨(文成王后 金氏, 1837 ~ 1888)
** 장남 : [[중조 열황제 (플레이백)|중조 열황제 훈]](中祖 烈皇帝 鑫, 1881 ~ 1948)
*** 며느리 : 원명무황후 홍씨(元明武皇后 洪氏, 1883 ~ 1932)
** 차남 : [[흥친왕 (플레이백)|흥친왕 주]](興親王 鑄), 1883 ~ 1943)
*** 며느리 : 흥친왕비 민씨(興親王妃 閔氏, 1883 ~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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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위 중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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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유년기

1891년 6월 13일 새벽 3시 경 내의원에서 은언군의 후손인 안종[1]과 백정의 딸이자 소실인 유씨 사이에서 서장자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운현궁의 사손인 이선[2]의 양자로 출계하였으며, 1897년(건원 3년) 열조부인 장헌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며 양부 이선이 '완화군(完和君)' 군호를 받게 된다. 1899년 완화군이 병으로 훙서하자 본래라면 은언군가의 6세손으로써 황족이 될 수 없던 선종은 운현궁의 사손으로써 현풍군의 작호를 받았으며, 1910년 황족 작위가 개편되자 현풍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선종은 총명하고 뻬어난 외모를 지녔으며, 생부 진양군의 사후에는 경은군과 함께 삼종지맥의 유이한 후손이란 타이틀을 가졌지만, 백정의 손자라는 혈통 탓에 은근히 황족들과 대신들에게 무시를 당했다. 이러한 선종의 외로운 유년기는 선종이 장차 양면적인 사상을 갖게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결국 수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가던 선종은 고심끝에 자진하여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한다. 이 당시 조선의 무관 무시 풍조가 뿌리깊게 남아있던 한국에서 육군무관학교에 진학한 황족은 선종이 최초였다. 선종은 유년학교에서는 무난하게 생활하였으나 무관학교를 진학한 뒤에는 계속되는 무관후보생 생활에 질려 공부 대신 규정을 자주 위반하고, 패싸움을 주도하고 다녀 황실 어른들에게 빈번하게 질책당하였다. 당시 선종은 진보주의 서적을 탐독하다 점호 때 적발되어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기도 했다. 결국 태자였던 목종에게 여러번 갈굼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선종은 여러 금서를 탐독하고 자유주의자들과 서신으로 교류할 정도로 반항적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공부에 전념하여 우등생으로 졸업해 1912년 육군 보병 참위로 임관하여 제1연대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1913년 부위로 진급하였고, 1914년 전쟁참모 과정인 전쟁대학교에 입학해 1915년 정위로 진급하였고 1917년 황족으로써 명목상 수석 졸업하였다.

참위 시절의 선종

전쟁대학교 졸업 후 원수부 참모본부로 전속된 선종은 전쟁참모 업무를 시작했다. 본래 선종 또한 전쟁참모 처럼 야전 지휘관은 스처가고 최상위 제대 참모로 주로 복무해야 했다. 그러나 선종은 차나 달이려고 무관이 된게 아니라며 인사규정에 반기를 들었다. 선종은 무관후보생때부터 수 없이 벌인 사고를 유일무이한 현역 황족이라는 빽으로 무마시키며 잘 알고 있었다. 선종은 이번에도 황족이라는 위상을 이용하여 참모본부에서 깽판을 벌여 서백리 출병에 자신을 중대장으로써 포함시키는데 성공했다. 선종은 창끝부대 지휘관으로써 만주 횡단철도와 연해주 동해안, 심지어 바이칼 호의 이르쿠츠크 내륙 깊숙히까지 점령하며 전쟁영웅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와 교전 과정에서 학살이 포함된 대규모 초토화 작전으로 자유시 학살이라는 흑역사를 남겼다. 서백리 원정 직전까지만 해도 선종은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모습을 여럿 보여왔으나, 서백리 출병 당시 붉은 군대에 혐오감을 느끼며 사회주의와 손절하게 된다.

서백리 출병 당시 선종과 함께 참전했던 육군무관학교의 선후배들은 붉은 군대와 교전하며 붉은 군대의 전투력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백군과의 협력을 통해 1차대전의 전훈과 서백리의 광활한 환경에서 영향을 받아 핵심 전력을 기동화, 장갑화하여 장차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작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후진적인 당시의 제국군에서 이러한 제한은 받아들여질 턱이 없었다. 결국 선종은 지휘계통 따위는 생까고 목종에게 직접 기동부대 창설을 제안했다. 이는 명백한 월권이었으나, 선종의 황족이라는 신분으로 유야무야되었다. 결국 선종은 기사혁명 직전까지 수많은 월권과 파천황적 행보를 보였음에도 군문을 떠나지 않았으며, 선종의 이런 막가파식 행보는 역설적으로 대한제국에서 총력전과 기동전에 대한 연구의 방패로 작용하였다. 이리하여 선종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장차 대한제국 기갑군의 모체가 될 제1전차대가 창설된다.

이 시기 선종과 함께 서백리 출병에 참전했던 김석원 지청천, 김홍일등의 소장파 무관들은 점차 선종을 우두머리로 하여 사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백리 출병으로 대한제국군의 전략적 무지와, 대전쟁의 군사교리도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구식 군대의 추태를 온몸으로 느꼈고, 서백리 출병과정에서 일본군과의 마찰을 빚으며 일본과 소련에 대한 공포와 이에 대한 대한제국의 전략적 대응이 부재하다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다. 선종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국군의 현대화와 기동전을 주장하였고, 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주먹구구식 경제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때부터 선종은 대전쟁의 총력전 체제에 매료되었고, 총력전 체제를 통해 중공업입국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여야만 대한제국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소장파 무관들과 함께 총력전 체제를 수립하고 현대화된 미래적 군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독서회를 창설하였다. 이 독서회는 장차 비밀결사에서 점점 군내의 거대 사조직화 되어 극명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선종은 1920년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귀환 직후 선종이 창설에 기여한 제1전차대장을 맡아 대한제국 전차병과의 초석을 다졌다. 1921년에는 서백리 출병으로 미루었던 우등 전쟁참모에게 주어진 특전인 해외 유학을 떠났다. 선종은 베를린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최초의 현대적 총력전을 선보인 독일군의 전술을 공부하였는데, 초인플레이션과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던 독일의 혼란기를 몸소 체감한 선종은 아직까지 가지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점차 무너졌으며, 귀국 직전에는 민주주의에 혐오감과 정치적 냉소주의,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기도 했다.

1922년 선종은 독일에서 참령으로, 1924년 귀국 후 부령에 진급했으며 귀국 직후 제1전차대를 증편한 제1전차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시기 독서회는 영관급과 위관급에서 세를 넓혔고 이름을 극명회로 바꾸었다. 선종은 김홍일의 국방론을 바탕으로 총력국방국가 건설이라는 목표하에 극명회를 키워가기 시작했으며 극명회의 영수로써 군에 영향력을 떨치기 시작한다. 1925년에는 참모본부 군무부장이라는 요직에 보직된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 호전에 따른 군축이 대두되자, 민병석 의정이 일본의 야마나시 군축을 본따 사남군축을 발표한다. 이에 열 받은 선종은 극명회와 군부 내의 소장파를 대표하여 군축의 부당함, 민병석 내각에 대한 경질, 문민 출신이 역임하는 육해군 대신을 현역 무관의 자리로 하고, 원수부를 폐지하고 육해군부를 의정부 산하에서 이관하여 프로이센 군사내각처럼 황제 직속으로 두자는 통수권일원화를 담은 상소를 목종에게 상주하며 지휘계통과 문민통제를 모조리 무시하는 초대형 사고를 친다. 그간 선종은 이러한 월권을 수 없이 자행하였으나, 이런 초대형 사고를 치자 결국 군무부장에서 보직해임되었다. 이에 격분한 선종은 이딴놈들을 위해 복무할 수 없다며 사직을 청하고 헌정당 입당을 타진한다. 그러자 목종은 황족 중 최선임자 겸 전직 좌파이자 황제인 자신도 못말리는 반골 현풍군과 반 정부 야당인 헌정당과 결합 시도에 기겁해 호적에서 파여서 평민이 되고 싶냐는 협박과 곧 바로 정령 진급을 시켜준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선종의 예편과 헌정당 입당을 막았다. 결국 현풍군은 사직을 철회하고 다시 제1전차대대장으로 보직되었다. 이때 선종은 문민관료와 목종의 한심한 추태에 노골적으로 경멸을 표했으며, 제도적으로 문민정부를 설득하여 총력전 국가를 건설한다는 기존 노선을 철회하고 대전쟁 시기 독일군처럼 군이 직접 주도하는 총력전 체제를 본받아 자신과 극명회, 군이 주도하는 총력전 체제를 구축하기로 결심하고, 정변을 계획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이후 사남군축의 내용대로 제1전차대대가 독립기갑연대로 승격하자 연대장 대리를 지내다가 1926년 정령으로 보직되며 정식 연대장이 되었고, 다시 참모본부 군무부장에 복직하였다. 이후 1929년 참장에 진급해 시위혼성사단장이 되었다.

기사혁명과 황태자 책봉

호시탐탐 군의 주도하에 총력전을 구현하고자 한 선종에게 기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오게 된다. 1930년 원래부터 콩팥과 심장이 좋지 않았던 목종은 대공황과 헌정당의 총선 승리로 인한 충격, 연달은 정치적 혼란으로 원래도 엉망이었던 건강이 크게 악화된다. 이에 황태자 이건이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으나, 태자 또한 목종이 벌여놓은 문제들을 수습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결국 태자는 부황의 지지를 얻어 의정원을 해산하고, 언론 검열을 강화해 강제로 혼란을 수습한다. 이와 더불어 군비 삭감을 비롯한 대규모 긴축정책을 시행하나 군부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이 당시 군부의 불만은 극에 달했는데, 3.1 폭동 당시 목종이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내각의 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군권을 장악하며 육해군의 참모본부와 총제영이 허울로 전락하고, 원수부의 주도하에 시행된 서백리 원정의 부진으로 군부 내의 불만은 가속화 되었으며 군 내부의 진급 적체를 해결하지 못하여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렇게 군부의 불만이 고조되던 와중, 군비 삭감 및 대규모 군축이 확정되자 군부의 불만은 폭팔하게 되고, 선종과 극명회는 이때를 노려 정변을 기획하였다. 1930년 11월 10일 자정 독립기갑연대 병력 일부를 시작으로 황성 일대 육군의 일부가 선종의 지휘 하에 조정 및 국가중요시설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기사혁명이 시작되었다. 황성 동부의 경성위수사령부, 황성 서부의 제30사단, 황성 남부의 제7사단 그리고 서경, 개성, 대구, 광주, 부산에 주둔 중이던 군대들이 궐기하여 황궁과 황성방송국, 원수부, 육군부, 경무청, 파출소, 중앙전화국, 시청, 도청, 발전소 등이 표적이 되었다. 의정 윤덕영이 머물렀던 의정관은 사태 초기 시위혼성사단에게 점거되었으며 황태자였던 이건은 사살되었다. 이후 선종은 오전 9시 경, 체포당한 윤덕영과 육군대신 박중양을 데리고 해군총제사 신순성 대장과 함께 경복궁에 있던 목종을 운현궁에 유폐시키며 강제로 혁명 지지와 계엄령 선포를 추인받는다.

이후 선종은 목종의 명의로 여러 포고문을 쏟아내는데, 전국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하고 조정 대신들을 모조리 체포하며, 오후 8시를 기해 의정원, 중추원, 지방의원 등 의회는 모조리 해산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로써 선종은 내각 총사퇴를 결의하며 마침내 목종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조정, 의정원, 재판소의 역할을 포함한 국가의 전권을 손에 쥐게 된다. 다음날인 11월 10일 육군 부장에 진급하는 한편 경성위수사령관을 겸하여 황성의 모든 군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하루 아침에 실권을 빼앗긴 목종은 나름대로의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죄다 극명회로 채우고 군대를 동원하여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서 현풍군은 목종의 친위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모든 권력을 찬탈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극명회의 주도로 선종은 목종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하루라도 대통을 비울 수 없다며 혁명에 공이 큰 현풍군을 입적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1930년 11월 29일 현풍군은 정식으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이렇듯 모든 저항이 무위에 돌아가자 군부는 본격적인 선위 여론을 조성하였다. 이에 목종은 마지못하여 대리청정의 명을 내렸지만, 이후 퇴위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그렇게 1930년 12월 12일, 목종은 군부의 압박과 대신들의 끈질긴 퇴위 강요에 끝내 못이겨 강제로 퇴위하고, 삼종지맥의 후손이자 백정의 외손자인 선종은 황위에 등극한다.

재위 초기

재위 초기 선종

목종을 끌어낸 선종은 연호를 백선(白宣)으로 정하고 황제가 되었다. 선종은 기사혁명을 통해 국가를 장악하였지만 군의 상층부를 차지하던 수구파는 여전히 선종에게 불안 요소였다. 또한 극명회와 이들 수구파는 목종 시기부터 치열한 세력 다툼을 이어가 불구대천의 원수로 굳어진지 오래였다. 결국 선종은 즉위 3일차에 전군회의를 개최, 이 자리에서 육군 부장급 이상의 60%를 경질하며 군을 일거에 장악했다. 이후 전통을 이용하여 미래를 개척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강조하며 헌법을 정지시켜 현재까지 이어지는 전제정치의 서막을 알렸다.

이후 강상죄를 부활시키는 한편, 상무영과 경무청의 인원들로 민족보위부를 창설하여 반정부 조직을 철저히 탄압한 것은 물론 전국 각지에 강제 수용소들을 운영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감금, 고문하여 반정부세력과 미래의 반란 분자들을 절멸시킨다. 또한 극명회를 중심으로 잔존 정당 세력을 모두 통합하여 민족유일당을 창당하고 유일한 합법정당으로 지정하여 일당제를 시작했다. 국정을 장악한 선종은, 어일신 당시부터 내려오던 뿌리깊은 기득권을 청산하기 위해 기술관료와 군부를 적극 등용하였다. 더불어 부패한 문관들을 견제하고 군의 진급 적체를 해소하기 위해 혁명주임관제를 실시했다. 무관학교 출신 정위, 참령급 무관들은 이 제도를 통해 문관으로 전환하였고, 선종의 철저한 지지세력이 되어 총력전 체제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선종은 사족 또한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선종은 개국작을 폐지하고, 조선 초 전례를 따라 백작-부원군의 이등작을 복원하고 이들의 수를 30명으로 제한하여 재정적 부담을 줄였다. 또한 황족 작위도 조선 초 작위를 본따 친왕-공-후로 바꾸며 황족들을 대거 정리하여 궐내의 여론을 장악하는 한편, 비변사를 본따 최고권력기구인 국방위원회를 설립하여 유례없는 황권을 확립한다. 이는 1932년 대한국 국제를 폐지하고 흠정헌법인 대한제국 국제를 반포하며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이 시기 확립된 전제군주정은 외견적으로는 조선 후기 정체였으나, 실제로는 고도의 중공업화와 근대화, 대중동원체제를 행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의 형성을 위한 것이었다. 선종은 천제로부터 천명을 받아 천하를 소유하는 동양적 황제가 아닌, 전체주의 독재자들처럼 자신을 민족의 영도자로 부각했고, 자신을 수령으로 지칭하였다.

선종은 특히 총력전 국가 건설을 강조한 만큼 국방에 각별했다. 선종에게 국방이란 국가 생존을 넘어 국가를 발전시키는 핵심적인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즉위 3일차에 출척을 통해 군을 장악한 직후 극명회 인사들은 육군의 요직을 장악하였디. 선종은 독일군의 기동전 이론을 바탕으로 고도의 기계화 전력을 육성하고 1931년 세계에서 10번째로 공군을 창설하며 공지전의 개념을 확립시키며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매우 진일보한 군사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동양평화를 주장하면서도 초강경 팽창주의 외교를 전개했다. 선종은 일본과의 평화적 공존에 대해 회의감을 지녔고,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한편 대만과 유구를 강탈하여 경제블럭 확장하기를 원했다. 동시에 선종은 허울뿐인 독립을 유지하던 청나라를 병합하여 만주를 본격적으로 수탈하기로 결정했다. 1932년 청나라는 푸이가 옥새를 바치며 316년만에 사라지게 된다. 만주 병합 직후 소련의 5개년 계획을 모방해 “일체는 경제 복구발전을 위하여”라는 구호 아래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소련식 계획경제 지지자들을 중용해 경제복구발전 3개년계획을 실행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선종은 일본의 대륙 팽창이 결국 대한제국의 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과 즉각적인 전면전을 벌일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선종은 '대한민족지원군'이라는 명칭으로 의용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선종은 완편 군단 수준의 지상군을 전개하고 750대가 넘는 각종 항공기를 배치히여 대규모 공군 지원 및 전차, 전투기, 대공포 등의 무기 판매 및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국민정부를 지원했다.

대한민족지원군은 상하이 전투, 난징 방면 전투, 우한 회전 등에 참가하면서 현대전 교리와 기갑·포병·항공 협동전술을 축적하였으며 국부군과 합동하여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였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압도적 교환비를 내며 일본군의 초기 패퇴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대한제국은 전쟁 기간 동안 국민정부에 대규모 차관과 무기를 지원하였으나, 장제스의 상하이 전투에서의 실책과 더불어 각종 실책과 함께 공산당의 확장을 방지하지 못하는 점에서 점차 장제스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결국 선종은 왕징웨이 공작을 통해 장제스를 실각시키고 왕징웨이를 주석으로 하는 새로운 국민정부를 수립하며 항전의 기초를 다졌고, 대한제국은 이후에도 중국에 항공기, 전차, 화포, 군수물자를 지속적으로 수출하여 경제적 이득을 챙김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군사 교리 개발, 정보 수집, 장교단 육성, 신무기 운용 시험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이후 대한민족지원군의 실전 데이터는 이후 대동아전쟁 전투의 기반이 되었다.

대동아전쟁

1939년 말, 중국 전선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고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은 급격히 변화하였다. 대한제국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국민정부를 지원하며 대규모 자원병 군단과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다. 한국군은 중국 각지에서 일본군과의 실전을 통해 현대전 교리를 축적했고, 동시에 항공·기갑·포병 운용에 관한 귀중한 데이터를 확보하였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이를 단순한 제한적 개입으로 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군의 전투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의 산업력과 병참 능력은 대본영의 예상했던 수준을 크게 웃돌았다. 1939년 당시 일본은 중국 대륙에서 계속되는 소모전, 북방에서 급속히 군비를 확장하는 대한제국, 영미의 제제로 인한 미국과 영국의 경제 제재 가능성이라는 3대 악재에 직면하였고, 만약 한국과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일본은 승패와 관계없이 제국의 국력을 소진시킬 것이라는 결론이 확산되었다.

선종 또한 이 시기 충분한 실전 데이터를 확보함에 따라 중국 전선에서의 추가적 손실을 내켜하지 않았다. 또한 선종은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한 친한 정부를 안정시키는 것이 중국 내 영향력을 확대하기에는 더 중요한 국가전략이라고 보았고, 일본과 즉시 충돌하기보다는 시간을 벌어 군사력을 더욱 증강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1938년 여름부터 양국은 비밀 접촉이 시작되었고, 1939년 한일불가침조약이 반포되었다. 일본은 이를 통해 일본은 북방에서 대한제국의 위협이 일시적으로 제거되었다고 판단하였으며, 남방 진출과 중국 공략에 필요한 시간을 벌었고 남방작전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는 전략이 채택되었다. 이 시기 선종은 공식적으로 대한민족지원군을 완전 철수시키며 평화를 유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일본과의 결전을 대비한 국가총동원 체제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중국 내 영향력을 공고히 하면서 군사력 증강과 전쟁 준비를 계속할 시간을 확보했다.

한일 불가침조약은 약 3년간 유지되며 동아시아의 긴장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일본은 북방 전선의 부담을 덜고 남방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고, 대한제국은 중국 내 영향력을 공고히 하면서 군사력 증강과 전쟁 준비를 계속할 시간을 확보했다. 한일불가침조약과 유럽 전선에서의 연합국의 패배로 고무된 일본은 1941년 미국을 상대로 진주만 공습을 실시하면서 대동아전쟁을 시작하였다. 일본의 남방작전은 예상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으며, 남방 대부분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선종은 일본의 시선이 남방으로 이동한 이 당시를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1942년 6월 8일 새벽 대한제국 해군은 진주만 공습과 유사한 방식으로 일본 연합함대의 주요 거점인 구레항을 기습하였다. 대한제국 해군은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로 일본 해군에 큰 피해를 입혔고, 공식적으로 연합국에 가입하고 한중동맹을 채결하며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었다. 구레에서의 성공적 기습과는 달리 대한제국 해군은 이후 벌어진 동중국해 해전과 류큐 방면 해전에서 궤멸적 타격을 입으며 사실상 전쟁 수행 능력을 대부분 상실하고 동아시아의 제해권은 일본이 유지하게 된다. 이는 대한제국이 44년까지도 일본에 상륙작전을 전개하지 못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해군의 패배와 달리 육군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대한제국은 그동안 갈고 닦은 기동전을 적극 활용하여 중국전선에서 연전 연승을 거듭하였고, 1943년 말, 카보네이드 작전으로 일본군은 중국 전선에서 궤멸적 타격을 입고 중국 대륙에서 대부분의 거점을 상실하였으며 남방에서 연합국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944년 이후 태평양에서는 미국 해군이 일본 해군을 연속적으로 격파하였고, 레이테만 해전 이후 일본 연합함대는 사실상 전멸하였다.

일본 연합함대의 전멸 이후 연합국과 선종은 일본 본토에 대한 상륙 작전에 대해 협의하기 시작하였고, 작전 개시일은 1944년 11월 1일로 정해졌다. 일본상륙 75일 전부터 일본 본토 전역에 걸친 대규모 전략폭격, 항모 기동부대에 의한 전략 요충지 핀포인트 폭격과 기동함대의 대규모 연안 함포 사격이 개시되었다. 이는 간토 및 혼슈와의 연락선 차단, 잔존한 일본 해군 함정의 격멸, 철도와 도로의 수습점, 중요한 교각이나 터널 등 교통 요충 시설 파괴, 상륙 지점의 일본군의 손실 도모가 목적이었다.또한 10월 31일 항공 폭격 및 주력 전함 최소 20척을 동원한 전함의 대지상 함포 사격을 상륙 지점의 포대와 발화점에 집중하여, 상륙 지역 인근 해상과 육상의 모든 장애물을 배제하고 11월 1일 오전 6시에 지상 주력본대에 의한 대규모 상륙을 개시되며 일본 본토로 전쟁이 확산되었다.

대한제국 육군을 위시한 연합국은 무자비하게 일본 본토를 타격하였고, 일본의 모든 국내외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공업 생산력 등 전쟁 수행 능력을 철저히 파괴하며, 도쿄를 향한 죽음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대한제국군 총사령부는 최대 6개월 정도로 낙관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억 총옥쇄', '본토결전'이라는 광기어린 항전 의지를 꺾지 않았다. 결국 선종은 일본을 '확실하게' 굴복시키기 위해선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대규모 물량을 투입하는 한편, 점령지에서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일본 정화 계획을 실행하여 일본 본토에 대한 황폐화와 절멸을 자행하였고, 일본인들을 게토에 수용했다. 게토에 갇힌 수많은 일본인들은 극심한 인구 과밀과 그로 인한 영양실조, 위생 악화에 시달려 아사하거나 병사했다. 이듬해인 1945년 2월 무렵부터는 기계화보병, 전차, 항공기를 이용한 대규모 토벌 작전이 벌어졌다. 민간인 학살은 일상적으로 일어났으며 가축, 곡물, 재산을 모조리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렸다. 노동 적령기의 인구는한국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됐으며 수많은 민간인들이 의도된 기아로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무수히 많은 건물들이 타 버렸고 광대한 면적의 지역이 황폐화되었으나, 여전히 일본군의 저항은 지속되었다.

이렇듯 일본의 광기 어린 저항은 니가타와 센다이에 핵폭탄이 투하되면서 종료되었다. 일본은 이 시점부터 일본 제국의 모든 군부는 더 이상 연합군을 상대로 어떠한 형태의 흥정과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것과 1억 총옥쇄를 해봐야 저 폭탄 한 방이면 무력화된다는 사실을 드디어 인정했다. 원폭이 니가타의 1회성 단발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 졌으며, 지금까지 폭격이 없었던 도시들은 운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저 핵폭탄을 떨구기 위한 후보지로 남겨 두었던 것임이 너무나도 명백해졌다.

항복 내용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이른바 옥음방송이라 하는 쇼와 덴노의 녹음된 목소리를 직접 방송하였고, 동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대동아전쟁은 이렇게 끝나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류큐(유구 번으로 개칭)와 대마도를 차지했고, 중국은 대만과 센카쿠열도를 차지하며 일본의 패권을 나누어 가졌으며, 일본 전역에서 군정을 시행하였다. 개항 이후 대한제국은 80년만에 동아시아의 진정한 패자로 부상하였고, 이 가슴 벅찬 승리에 전국민과 선종 본인도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 이렇게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쟁 이전부터 수령으로 칭해지며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던 선종은 이제 '위대한 승리자'라는 업적까지 더해지면서 대한제국에서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재위 중반기

붕어

노년의 선종

  1. 훗날의 진양공, 안종 당시에는 임금의 4세까지만 왕족으로 인정받았기에 작호가 없었다.
  2. 훗날의 완화군, 당시에는 임금의 4세까지만 왕족으로 인정받았기에 작호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