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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위키]]의 대체역사 단편 세계관.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단편 세계관.


[[국공내전 (동남고행)|국공내전]]에서 [[중국국민당 (동남고행)|중국국민당]]이 타이완섬과 하이난섬을 보전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만든 세계관이다. 제목의 유래는 진운산(陳雲山)이 작곡하고 은정양(殷正洋)이 발매한 대만 가요 「東南苦行山」이다.
[[제2차 국공내전 (동남고행)|제2차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 (동남고행)|중화민국]]이 타이완섬과 하이난섬을 보전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만든 세계관이다. 제목의 유래는 진운산(陳雲山)이 작곡하고 은정양(殷正洋)이 발매한 대만 가요 「東南苦行山」이다.


== 설정 ==
== 설정 ==
현실과의 분기점은 북한이 [[한국전쟁 (동남고행)|한국전쟁]]을 조기에 개전하는데에서 발생한다. 그로인해 중국공산당이 하이난 점령을 차일로 미루게 되면서, 하이난은 중화민국의 영토로 남게된다.
현실과의 분기점은 북한이 한국전쟁을 조기에 개전하면서 발생한다. 이로 인해 중국공산당이 하이난 점령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고, 결국 하이난은 중화민국의 영토로 남게 된다.


하이난을 놓친 것을 만회하기 위해 [[마오쩌둥 (동남고행)|마오쩌둥]]은 이후 1953년, 1955년, 1956년에 걸쳐 재침공을 감행했으나 실패하였다. 마오쩌둥의 연이은 실패와 정치적 기반의 약화로 인해 공산당의 개혁파가 조기에 부상할 수 있었고, 1965년 [[덩샤오핑 (동남고행)|덩샤오핑]]이 중국 최고지도자 올랐다. 집권 직후 덩샤오핑은 경제개발과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중화민국과 지속적인 교섭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1970년 일국양표 합의와, 1979년 [[중화민주연방 (동남고행)|단계적 연방제 통일안]]을 관철시켰다.
전국의 통일을 완수하지 못한 [[마오쩌둥 (동남고행)|마오쩌둥]]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무리한 군사작전을 잇달아 감행했으나 [[중국국민당 (동남고행)|국민당]]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거듭 실패하였다. 군사적 실패의 연이은 실패와 민심의 이반으로, 마오쩌둥은 결국 실각하고 공산당내 개혁파가 조기에 부상하게 된다.


한편 장제스 사후 중화민국은 장징궈와 리덩후이 집권기에 점진적 민주화를 추진하였다. 계엄령은 해제되었고, 총통 직선제를 골자로 한 헌정 개혁이 단행되며 구 체제는 단계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정치 개방으로 인해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표면으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중화사상을 내세우는 극보수 세력과 하이난·타이완의 독립을 주장하는 분리주의 세력이 동시에 부상하면서 정국은 장기간 극단적 대립 속에 놓였다. 이러한 교착 상태는 미국과 중국간의 신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중국대륙 견제를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중화민국을 활용하려는 미국의 판단 아래, 미국이 중화민국 정치 위기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정세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였다.
한편, 국민당은 [[하이난성 (동남고행)|하이난]]과 [[타이완성 (동남고행)|타이완]]이 지닌 이점을 각기 활용하여 두 거점을 중심으로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했으며, 두 전선에서 대륙과의 국지전에 군사력을 집중하였다.


=== 국가 ===
양화관계()가 근본적인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1970년대 후반, 장징궈와 덩샤오핑이 각각 양방의 실권자로 부상하면서부터이다. 양방은 서로의 통치 영역을 존중하는 한편, 양국 정부가 모두 중국 통일을 향한 과도적 체제라는 점을 인정하였다. 나아가 통일 중국의 이상적 대안으로서 ‘[[중화민주연방 (동남고행)|중화민주연방]]’을 구상하고, 우선 느슨한 정치·경제적 공동체를 형성한 뒤 여러 분야에서 단계적으로 결속을 확대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 {{테두리|[[파일:남중국 국기.svg|27px|링크=중화민국 (동남고행)]]}} [[중화민국 (동남고행)|중화민국]]
** [[1911년]]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어 [[1925년]] 국민정부 수립를 수립했으며, [[1948년]] 헌법을 제정했다. [[1949년]] [[국공내전 (동남고행)|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국민당을 주축으로 [[타이완섬 (동남고행)|타이완섬]]과 [[하이난섬 (동남고행)|하이난섬]]으로 이주했다. [[1970년]] 양안의 상호 승인을 계기로 [[1979년]] [[중화민주연방 (동남고행)|중화민주연방]]을 수립했다.


* {{테두리|[[파일:중국 국기.svg|27px|링크=중화인민공화국 (동남고행)]]}} [[중화인민공화국 (동남고행)|중화인민공화국]]
이후 양방은 1990년대까지 밀착을 이어갔다. 홍콩과 마카오가 반환되자, 양측은 두 지역을 명목상 중화민주연방의 구성 단위의 독립 국가로 귀속시키는 데에도 합의하였다. (사실상의 통치 국가는 중화인민공화국.)
** [[1949년]] [[국공내전 (동남고행)|국민당과의 내전]]에 승리하여 공산당을 주축으로 건국했다. [[1970년]] 양안의 상호 승인을 계기로 [[1979년]] [[중화민주연방 (동남고행)|중화민주연방]]을 수립했다.
 
* {{테두리|[[파일:홍콩 국기.svg|27px|링크=중화 홍콩 (동남고행)]]}} [[중화 홍콩 (동남고행)|중화 홍콩]]
** [[199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같은 해에 [[중화민주연방 (동남고행)|중화민주연방]]에 가입했다.
 
* {{테두리|[[파일:마카오 국기.svg|27px|링크=중화 마카오 (동남고행)]]}} [[중화 마카오 (동남고행)|중화 마카오]]
** [[1999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했으며, 같은 해에 [[중화민주연방 (동남고행)|중화민주연방]]에 가입했다.


== 작가의 말 ==
== 작가의 말 ==
최근 들어 중국근대사에 깊이 매료되어 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있는 사료<ref>쑨원 <삼민주의>, <건국방략>, 레이 황 <장제스 일기를 읽다>, 요코야마 히로아키 <중화민국사>, 이건일 <군벌> 등</ref>를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쑨원과 공화혁명의 궤적에서 마음 속 울림을 느꼈고, 그 감각이 상상력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 중국근대사에 깊이 매료되어 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있는 사료<ref>쑨원 <삼민주의>, <건국방략>, 레이 황 <장제스 일기를 읽다>, 요코야마 히로아키 <중화민국사>, 이건일 <군벌> 등</ref>를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손중산 선생과 국민혁명의 궤적에서 큰 울림을 받았고, 그 감각이 상상력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단 하나의 시도로 끝나지 않을 예정입니다. ‘오늘날까지 국민당이 대륙에서 일당체제를 유지하는 세계관‘ <[[천추만세]]>(가칭), 그리고 ‘모든 기억을 지닌 채 스무 살로 되돌아간 쑨원’의 선택을 따라가는 <[[천하위공]]>까지 — 이른바 ‘민국 3부작’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중화민국 소재의 세계관은 이번 단 하나의 시도로 끝나지 않을 예정입니다. ‘오늘날까지 국민당이 대륙에서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세계관‘ <[[천추만세]]>(가칭), 그리고 ‘모든 기억을 지닌 채 스무 살로 회귀한 쑨원을 다룬 세계관’ <[[천하위공]]>까지 — 이른바 ‘민국 3부작’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갈림길(분기점)에서 다른 선택이 내려졌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는 어디까지 달라질 수 있었을지. 그 물음에 대한 제 나름의 대답을 천천히 풀어보고자 합니다.
역사의 갈림길에서 다른 선택이 내려졌다면, 현재는 어디까지 달라질 수 있었을지. 그 물음에 대한 제 나름의 대답을 천천히 풀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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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21일 (월) 01:53 기준 최신판

이 문서는 가상 세계관 동남고행을 다룹니다. 문서의 내용은 허구입니다.
동남고행
東南苦行 | SOUTHEAST ORDEAL
장르 대체역사
기획 아진
연재 시작일 2026년(민국 115년) 2월 19일
상징색 청록색 (#124E3E)
저작권

개요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단편 세계관.

제2차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이 타이완섬과 하이난섬을 보전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만든 세계관이다. 제목의 유래는 진운산(陳雲山)이 작곡하고 은정양(殷正洋)이 발매한 대만 가요 「東南苦行山」이다.

설정

현실과의 분기점은 북한이 한국전쟁을 조기에 개전하면서 발생한다. 이로 인해 중국공산당이 하이난 점령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고, 결국 하이난은 중화민국의 영토로 남게 된다.

전국의 통일을 완수하지 못한 마오쩌둥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무리한 군사작전을 잇달아 감행했으나 국민당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거듭 실패하였다. 군사적 실패의 연이은 실패와 민심의 이반으로, 마오쩌둥은 결국 실각하고 공산당내 개혁파가 조기에 부상하게 된다.

한편, 국민당은 하이난과 타이완이 지닌 이점을 각기 활용하여 두 거점을 중심으로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했으며, 두 전선에서 대륙과의 국지전에 군사력을 집중하였다.

양화관계()가 근본적인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1970년대 후반, 장징궈와 덩샤오핑이 각각 양방의 실권자로 부상하면서부터이다. 양방은 서로의 통치 영역을 존중하는 한편, 양국 정부가 모두 중국 통일을 향한 과도적 체제라는 점을 인정하였다. 나아가 통일 중국의 이상적 대안으로서 ‘중화민주연방’을 구상하고, 우선 느슨한 정치·경제적 공동체를 형성한 뒤 여러 분야에서 단계적으로 결속을 확대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양방은 1990년대까지 밀착을 이어갔다. 홍콩과 마카오가 반환되자, 양측은 두 지역을 명목상 중화민주연방의 구성 단위의 독립 국가로 귀속시키는 데에도 합의하였다. (사실상의 통치 국가는 중화인민공화국.)

작가의 말

최근 들어 중국근대사에 깊이 매료되어 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있는 사료[1]를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손중산 선생과 국민혁명의 궤적에서 큰 울림을 받았고, 그 감각이 상상력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중화민국 소재의 세계관은 이번 단 하나의 시도로 끝나지 않을 예정입니다. ‘오늘날까지 국민당이 대륙에서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세계관‘ <천추만세>(가칭), 그리고 ‘모든 기억을 지닌 채 스무 살로 회귀한 쑨원을 다룬 세계관’ <천하위공>까지 — 이른바 ‘민국 3부작’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갈림길에서 다른 선택이 내려졌다면, 현재는 어디까지 달라질 수 있었을지. 그 물음에 대한 제 나름의 대답을 천천히 풀어보고자 합니다.


  1. ↑ 쑨원 <삼민주의>, <건국방략>, 레이 황 <장제스 일기를 읽다>, 요코야마 히로아키 <중화민국사>, 이건일 <군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