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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점령지들을 반환받으면서 국민정부의 수입이 크게 증대되었고 동시에 대대적인 군축의 시행으로 인해 군비 부담이 크게 줄면서 전시 국민정부의 숨통을 죄던 재정 문제가 상당부분 해소되었다.<ref>당초 1:2 수준이던 지출:수입 비율이 2:1로 역전된 것만 보더라도 전비 지출이 국민정부 재정에 끼친 악영향을 쉽게 체감 할 수 있다.</ref> 또한 각지의 유력 군벌들의 영향력이 퇴조되고 국민정부에 복종하게 되면서<ref>쓰촨과 광둥의 군벌은 이미 전전에 박살났지만 각각 국민정부의 쓰촨(충칭) 이전과 일본의 광둥 점령으로 인해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윈난의 룽윈은 장제스에 의해 기습적으로 숙청당했다.</ref><ref>광시의 리쭝런과 산시의 옌시산 같은 경우 장제스와의 협상을 통해 지역 영향력을 보전받으며 중앙정부에 복종하였고 신장의 공산당 역시 소련의 권유 및 중재와 장제스와의 협상을 통해 국민정부에 합류했다.</ref><ref>다만 공산당을 비롯한 각 군벌들이 권력의 원천인 사병을 일정 수준 반발하기도 하였으나 나름 순순히 중앙군에 편입시키고 군축에 동의한 이유는 모두 달랐는데 리쭝런은 근거지인 광시가 일본군에 의해 철처히 수탈당해 독자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고 중앙정부에 대항할 재정을 상실하였으며 옌시산은 시류를 읽고 기존의 봉건 영주와 같은 권한을 유지하기 어렵다 생각하여 타협하였다. 공산당의 경우 독자적으로 국민정부에 대항할 수 없다 판단하여 중앙정부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보장받는 길을 택하였다.</ref> 국민정부(→ 중화민국 정부)는 전국적 정책 집행권 및 조세권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는 향후 통일적 경제정책 수립의 밑바탕이 되었다. |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점령지들을 반환받으면서 국민정부의 수입이 크게 증대되었고 동시에 대대적인 군축의 시행으로 인해 군비 부담이 크게 줄면서 전시 국민정부의 숨통을 죄던 재정 문제가 상당부분 해소되었다.<ref>당초 1:2 수준이던 지출:수입 비율이 2:1로 역전된 것만 보더라도 전비 지출이 국민정부 재정에 끼친 악영향을 쉽게 체감 할 수 있다.</ref> 또한 각지의 유력 군벌들의 영향력이 퇴조되고 국민정부에 복종하게 되면서<ref>쓰촨과 광둥의 군벌은 이미 전전에 박살났지만 각각 국민정부의 쓰촨(충칭) 이전과 일본의 광둥 점령으로 인해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윈난의 룽윈은 장제스에 의해 기습적으로 숙청당했다.</ref><ref>광시의 리쭝런과 산시의 옌시산 같은 경우 장제스와의 협상을 통해 지역 영향력을 보전받으며 중앙정부에 복종하였고 신장의 공산당 역시 소련의 권유 및 중재와 장제스와의 협상을 통해 국민정부에 합류했다.</ref><ref>다만 공산당을 비롯한 각 군벌들이 권력의 원천인 사병을 일정 수준 반발하기도 하였으나 나름 순순히 중앙군에 편입시키고 군축에 동의한 이유는 모두 달랐는데 리쭝런은 근거지인 광시가 일본군에 의해 철처히 수탈당해 독자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고 중앙정부에 대항할 재정을 상실하였으며 옌시산은 시류를 읽고 기존의 봉건 영주와 같은 권한을 유지하기 어렵다 생각하여 타협하였다. 공산당의 경우 독자적으로 국민정부에 대항할 수 없다 판단하여 중앙정부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보장받는 길을 택하였다.</ref> 국민정부(→ 중화민국 정부)는 전국적 정책 집행권 및 조세권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는 향후 통일적 경제정책 수립의 밑바탕이 되었다. | ||
신해혁명 이래 사실상 처음으로 전국에 대한 통일적 정책 집행 역량을 가지게 된 중국 정부는 [[웡원하오 (민국 38)|웡원하오]] | 신해혁명 이래 사실상 처음으로 전국에 대한 통일적 정책 집행 역량을 가지게 된 중국 정부는 [[웡원하오 (민국 38)|웡원하오]], [[왕원우 (민국 38)|왕원우]], [[위훙쥔 (민국 38)|위훙쥔]] 삼인의 주도로 [[쑹쯔원 (민국 38)|쑹쯔원]] 등의 조언을 얻어 전후 초기 경제 정책을 수립하였다. 전면적인 화폐개혁과 가격통제 완화로 대표되는 [[국가재정경제기본계획 (민국 38)|국가재정경제기본계획]]은 전후 회복기에 접어들던 당시 중국과 세계의 추세와 맞물려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화폐개혁을 통해 당시 심각하게 전개되던 위조지폐의 범람과 인플레이션 문제가 상당히 해결되었으며 가격통제가 완화되면서<ref>다만 비상시를 제외한 평상시의 전면적인 가격통제 해제는 1950년대에 들어서야 실시되었다.</ref> 원할해진 물자 공급량이 인플레이션 해결과 맞물려 물가 안정으로 이어졌다. | ||
전후 초기 경제 정책의 성공은 국가 전체 그리고 정권 안정의 토대가 되었으며 국가 권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강화된 국가 권력을 통해 1948년 정식으로 수립된 중화민국 정부는 전국적인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삼칠오감조 (민국 38)|삼칠오감조]](375감조, 三七五減租)<ref>소작농의 토지 임대료를 경작지 총 생산량의 37.5%로 제한하는 정책. 본래 국민정부 시기 이오감조(25감조, 二五減租, 임대료를 총 생산의 25%로 제한)로 시작되어 삼칠오감조로 전환되었으나 지방 유지들의 간섭으로 온전히 실행되지 못하였다.</ref>, [[공지방령 (민국 38)|공지방령]](公地放領)<ref>농지 불하를 신청한 농민에게 대금을 받고 공유지를 불하하는 제도.</ref> 등의 제도가 선행적으로 실시되었으며 1949년에는 [[경자유기전 (민국 38)|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 =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른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전면적인 토지 수용 및 재분배 조치가 감행되었다. 토지개혁 역시 종전의 경제기본계획과 유사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당대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어 농산물의 물가가 안정되었으며 중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어 이들의 지지가 국민당을 향하게 만들었다. 또한 사정이 안정된 농민들의 구매력이 증가하고 지주 권력이 약화되어 향후 중국 산업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 |||
1946년 종전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 중국 경제는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물가는 안정되었고 공업과 농업 생산량은 전전을 추월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몽골과 티베트가 병합되는 등 - 집권 세력 입장에서의 - 호재가 겹치며 장제스 정권이 공고화 되었다. 이렇듯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추진할 경제적 역량 및 권력을 확보한 장제스 정부는 1953년 [[국가경제건설 5년 계획 (민국 38)|제1기 국가경제건설 5년 계획]]을 입안하여 대대적인 경제건설에 돌입하였다.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소련식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관료들의 주도로 수립된 5년 계획은 초기에는 그 실효성을 의심받았으나 막상 계획 종료 시점인 1957년 집계 결과 모든 목표가 달성 내지는 초과 달성 상태로 종료되어 대성공을 알렸고 이를 시작으로 하여 중국 경제의 폭발적인 성장 - 대약진이 시작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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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국가경제건설 5년 계획 (민국 38)|삼민주의신농촌 (민국 38)|당국자본주의 (민국 38)}} | {{관련 문서|국가경제건설 5년 계획 (민국 38)|삼민주의신농촌 (민국 38)|당국자본주의 (민국 3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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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이라는 어휘에서 보이듯이 대약진시대에 중국의 경제는 거대한 양적 · 질적 성장을 이루었다. | 대약진이라는 어휘에서 보이듯이 대약진시대에 중국의 경제는 거대한 양적 · 질적 성장을 이루었다. | ||
1950년 체결된 [[중소우호동맹조약 (민국 38)|중소우호동맹조약]]에 의거하여 소련은 과거 만주에서의 대대적인 약탈에 대한 배상을 겸하여 중국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이행하였다. 1953년 [[국가경제건설 5년 계획 (민국 38)|제1기 국가경제건설 5년 계획]] 당시 소련은 [[156항 중점공정 (민국 38)|156항 중점공정]]의<ref>소련 및 동구권의 지원을 받아 추진된 석탄, 금속, 전기, 석유 등 핵심 산업에 대한 대규모 인프라 건설 계획.</ref> 설계와 실행에 싶숙이 개입하였다. 또한 다수의 소련 기술자와 전문가들이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역으로 많은 중국 기술자들과 관료들이 소련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와 실무에 배치되어 소련식 중공업 성장의 역군이 되었다. 또한 156항 중점 공정 이외에도 694개의 중대규모 인프라 건설 계획이 입안되었는데<ref>실제로는 목표를 초과달성하여 '''921개'''의 시설이 건설되었다.</ref> 이 역시도 소련의 영향력과 지원 하에 입안되어 실행되었다. | |||
소련의 지원이 제철소, 탄광, 발전소 등 중공업 건설에 치중되었다면 미국의 지원은 경공업과 상업에 기울어져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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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29일 (수) 11:05 기준 최신판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
틀:중국 관련 문서 (민국 38) 틀:경제 기적 (민국 38)
| 대약진 大躍進 Ta Yueh-chin(Great Leap Forward) | |
|---|---|
| 중국의 실질 GDP 성장률 | |
| 1965년 난징의 모습 | |
| 기간 | 1953년 - 1973년 |
| 별칭 | 황금 20년(黃金二十年, Golden Twenty Years) |
개요
대약진(大躍進, Ta Yueh-chin[1])은 1953년부터 1973년까지 중국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한 것을 일컽는 말이다. 이 시기를 중국에서는 대약진 시대(大躍進時代, Ta Yueh-chin era) 혹은 황금 20년(黃金二十年, Golden Twenty Years)이라고 부른다.
배경
1946년 승전 직후 중국은 오랜 전쟁과 일본의 침탈로 인해 참승(慘承)이라는 표현이 사용될 정도로 처참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대부분의 공업 시설들은 전쟁의 여파로 인해 파괴되었으며 전전 중국 최대의 중공업지대가 위치해있던 동북 지역은 주둔 소련군의 대대적 약탈로 인해 석탄, 철강 등 대부분의 분야에 있어 90% 이상의 생산 능력이 상실되었다. 농업 역시 농촌 청년들에 대한 대대적 징병 및 국민정부와 군벌, 일본의 수탈로 인해 빈사 상태에 놓여있었으며 공급 · 유통망 파괴와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상업 및 금융업 역시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를 해결해야 할 중앙정부의 재정이 오랜 전쟁과 군벌의 난립으로 인하여 파산 직전에 몰린 상태였기에 종전 직후 중국 경제의 미래는 매우 암담해보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점령지들을 반환받으면서 국민정부의 수입이 크게 증대되었고 동시에 대대적인 군축의 시행으로 인해 군비 부담이 크게 줄면서 전시 국민정부의 숨통을 죄던 재정 문제가 상당부분 해소되었다.[2] 또한 각지의 유력 군벌들의 영향력이 퇴조되고 국민정부에 복종하게 되면서[3][4][5] 국민정부(→ 중화민국 정부)는 전국적 정책 집행권 및 조세권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는 향후 통일적 경제정책 수립의 밑바탕이 되었다.
신해혁명 이래 사실상 처음으로 전국에 대한 통일적 정책 집행 역량을 가지게 된 중국 정부는 웡원하오, 왕원우, 위훙쥔 삼인의 주도로 쑹쯔원 등의 조언을 얻어 전후 초기 경제 정책을 수립하였다. 전면적인 화폐개혁과 가격통제 완화로 대표되는 국가재정경제기본계획은 전후 회복기에 접어들던 당시 중국과 세계의 추세와 맞물려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화폐개혁을 통해 당시 심각하게 전개되던 위조지폐의 범람과 인플레이션 문제가 상당히 해결되었으며 가격통제가 완화되면서[6] 원할해진 물자 공급량이 인플레이션 해결과 맞물려 물가 안정으로 이어졌다.
전후 초기 경제 정책의 성공은 국가 전체 그리고 정권 안정의 토대가 되었으며 국가 권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강화된 국가 권력을 통해 1948년 정식으로 수립된 중화민국 정부는 전국적인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삼칠오감조(375감조, 三七五減租)[7], 공지방령(公地放領)[8] 등의 제도가 선행적으로 실시되었으며 1949년에는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 =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른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전면적인 토지 수용 및 재분배 조치가 감행되었다. 토지개혁 역시 종전의 경제기본계획과 유사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당대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어 농산물의 물가가 안정되었으며 중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어 이들의 지지가 국민당을 향하게 만들었다. 또한 사정이 안정된 농민들의 구매력이 증가하고 지주 권력이 약화되어 향후 중국 산업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1946년 종전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 중국 경제는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물가는 안정되었고 공업과 농업 생산량은 전전을 추월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몽골과 티베트가 병합되는 등 - 집권 세력 입장에서의 - 호재가 겹치며 장제스 정권이 공고화 되었다. 이렇듯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추진할 경제적 역량 및 권력을 확보한 장제스 정부는 1953년 제1기 국가경제건설 5년 계획을 입안하여 대대적인 경제건설에 돌입하였다.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소련식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관료들의 주도로 수립된 5년 계획은 초기에는 그 실효성을 의심받았으나 막상 계획 종료 시점인 1957년 집계 결과 모든 목표가 달성 내지는 초과 달성 상태로 종료되어 대성공을 알렸고 이를 시작으로 하여 중국 경제의 폭발적인 성장 - 대약진이 시작되었다.
상세
경제
| 제n기 국가경제건설 5년 계획 당시 건설된 중산고속공로 |
대약진이라는 어휘에서 보이듯이 대약진시대에 중국의 경제는 거대한 양적 · 질적 성장을 이루었다.
1950년 체결된 중소우호동맹조약에 의거하여 소련은 과거 만주에서의 대대적인 약탈에 대한 배상을 겸하여 중국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이행하였다. 1953년 제1기 국가경제건설 5년 계획 당시 소련은 156항 중점공정의[9] 설계와 실행에 싶숙이 개입하였다. 또한 다수의 소련 기술자와 전문가들이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역으로 많은 중국 기술자들과 관료들이 소련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와 실무에 배치되어 소련식 중공업 성장의 역군이 되었다. 또한 156항 중점 공정 이외에도 694개의 중대규모 인프라 건설 계획이 입안되었는데[10] 이 역시도 소련의 영향력과 지원 하에 입안되어 실행되었다.
소련의 지원이 제철소, 탄광, 발전소 등 중공업 건설에 치중되었다면 미국의 지원은 경공업과 상업에 기울어져 있었다.
사회
문화
정치
기타
연표
여담
- 대약진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는 향수를 중국어로 "대약진회구(大躍進懷舊)[11]"라고 한다. 장제스 회구(蔣中正懷舊)[12]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전자는 고속성장기와 당시의 사회를 그리워하는 향수라면 후자는 장제스 개인에 대해(독재적 리더쉽, 카리스마 등) 좀 더 방점을 둔다. 시대와 정치인 개인에 대한 향수가 결합된 장징궈 회구(蔣經國懷舊)[13]와는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 신해단의 소설 1949 신중국에서는 마오쩌둥(작중 공산화 된 중국의 지도자)가 실시한 경제 개발 운동의 이름으로 등장하며 조악한 정책과 여러 헛발질이 겹처 중국사 최악의 대기근을 초래한다. 현실에서의 대약진이 중국의 고속성장을 일컽는 용어인 것을 생각하면 굉장한 아이러니를 불러오는 요소이다.
유사 사례
- 자본주의 황금기 -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범세계적 경제규모 확대와 성장 및 호황
- 한강의 기적 -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
- 고도경제성장 - 서일본의 경제 기적
- 라인강의 기적 - 서독의 경제 기적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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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역해서 "Great Leap Forward"라고 하기도 하지만 보통 대약진 시대 당시 통용되던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 기반한 표현인 "Ta Yueh-chin"으로 표기한다.
- ↑ 당초 1:2 수준이던 지출:수입 비율이 2:1로 역전된 것만 보더라도 전비 지출이 국민정부 재정에 끼친 악영향을 쉽게 체감 할 수 있다.
- ↑ 쓰촨과 광둥의 군벌은 이미 전전에 박살났지만 각각 국민정부의 쓰촨(충칭) 이전과 일본의 광둥 점령으로 인해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윈난의 룽윈은 장제스에 의해 기습적으로 숙청당했다.
- ↑ 광시의 리쭝런과 산시의 옌시산 같은 경우 장제스와의 협상을 통해 지역 영향력을 보전받으며 중앙정부에 복종하였고 신장의 공산당 역시 소련의 권유 및 중재와 장제스와의 협상을 통해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 ↑ 다만 공산당을 비롯한 각 군벌들이 권력의 원천인 사병을 일정 수준 반발하기도 하였으나 나름 순순히 중앙군에 편입시키고 군축에 동의한 이유는 모두 달랐는데 리쭝런은 근거지인 광시가 일본군에 의해 철처히 수탈당해 독자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고 중앙정부에 대항할 재정을 상실하였으며 옌시산은 시류를 읽고 기존의 봉건 영주와 같은 권한을 유지하기 어렵다 생각하여 타협하였다. 공산당의 경우 독자적으로 국민정부에 대항할 수 없다 판단하여 중앙정부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보장받는 길을 택하였다.
- ↑ 다만 비상시를 제외한 평상시의 전면적인 가격통제 해제는 1950년대에 들어서야 실시되었다.
- ↑ 소작농의 토지 임대료를 경작지 총 생산량의 37.5%로 제한하는 정책. 본래 국민정부 시기 이오감조(25감조, 二五減租, 임대료를 총 생산의 25%로 제한)로 시작되어 삼칠오감조로 전환되었으나 지방 유지들의 간섭으로 온전히 실행되지 못하였다.
- ↑ 농지 불하를 신청한 농민에게 대금을 받고 공유지를 불하하는 제도.
- ↑ 소련 및 동구권의 지원을 받아 추진된 석탄, 금속, 전기, 석유 등 핵심 산업에 대한 대규모 인프라 건설 계획.
- ↑ 실제로는 목표를 초과달성하여 921개의 시설이 건설되었다.
- ↑ 한국어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 시절 등 과거에 대한 폭넓은 그리움인 노스탤지어(Nostalgia)를 모두 향수(鄕愁)라고 하지만 중국어로 향수(鄕愁)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을 의미하고 노스탤지어는 회구(懷舊)라고 표현한다.
- ↑ 중정(中正)은 장제스의 본명이다. 개석(介石, 제스)는 그의 자(子)이며 중국에서는 보통 장제스보다는 장중정이라고 부른다.
- ↑ 장제스의 아들이자 제6·7대 총통을 역임한 장징궈와 그의 집권기에 대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