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정부 (나오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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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19일 (토) 12:49 기준 최신판

[ 세계관 설명 ]
먼동이 터오고 헤어질 시간이면
다시괴로워서
남몰래 흘린눈물이
뺨을적시네
샬라
"나오미"은 "조선이 일본과 동시기에 개화했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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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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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
부여
고조선[1]
단군조선 · 위만조선
진국 탐라 우산
원삼국​시대
한사군[2]
마한
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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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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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삼국시대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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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고구려 신라
남북국​시대
발해 통일신라
후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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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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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려시대
고려
조선시대
조선
개화기
대한제국
공화국기
한성정부
현대
대한국
[1] 기자조선은 현대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
[2] 한사군은 조선사 포함 여부에 대해 논쟁이 있음
[3]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
주요 민족: 한민족 (예맥 · 삼한)
대한국
관련 문서
한성정부
漢城政府 | Goverment of Seoul

대조선공화국
大朝鮮共和國 | Republic of Korea
국기 국장
홍익인간
弘益人間
상징
국가 애국가
국화 무궁화
위치

1919년 4월 10일 ~ 1929년 6월 10일
제정 폐지 이전 6.10 궐기 이후
대한제국 대한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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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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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한반도 및 부속 도서
수도 한성부(漢城府)
면적 220,903㎢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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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8,657,626명 (1929년)
인구 밀도
84.7명/km² (1929년)
언어
한국어
종교
성리학, 천도교, 대종교, 개신교, 가톨릭
민족
한민족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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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대통령제, 단일국가, 단원제
입법부 의정원
국가원수 대통령
역대 대통령
이승만 (1919~1929)
정부수반 국무총리
역대 국무총리 이상재 (19nn~19nn)
이동녕 (19nn~19nn)
안창호 (19nn~19nn)
이승만 / 국무총리 서리 (19nn~1929)
경제
통화 대한은행 원 (1919~1920)
조선은행 환 (1920~1929)

개요

한성정부(漢城政府) 또는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은 1918년 미곡폭동에서 시작된 3.1 혁명을 통해 건국되어 1929년 6.10 궐기를 통해 멸망할 때까지, 전간기에 존재했던 대한국의 공화정기를 일컫는 명칭이다.

한성정부에서 대내외적으로 내세운 국호는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이었다. 한성정부라는 명칭은 기미 혁명선언 이후 신정부의 수립을 위해 한성부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유래한 것이며 국가의 정치 체제별 시대 구분을 위한 용어이지, 한성정부라는 공식적 국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

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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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
부여
고조선[1]
단군조선 · 위만조선
진국 탐라 우산
원삼국​시대
한사군[2]
마한
변한
진한
낙랑
동예
옥저
고구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3]
신라
고구려 신라
남북국​시대
발해 통일신라
후삼국​시대
태봉
후백제
신라
고려
고려시대
고려
조선시대
조선
개화기
대한제국
공화국기
한성정부
현대
대한국
[1] 기자조선은 현대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
[2] 한사군은 조선사 포함 여부에 대해 논쟁이 있음
[3]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
주요 민족: 한민족 (예맥 · 삼한)

틀:만주의 역사 (나오미)

3.1 혁명

한러일전쟁 이후 실권을 장악한 독립협회 계열은 무능한 고조를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특히 독립협회는 고조에 의해 이미 탄압을 받은 적이 있기에 더더욱 고조의 실권을 약화시키고 일본을 본받아 입헌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에 1906년 중추원을 중심으로 하는 입헌정치를 실행되며 대한제국에 최초의 근대적 입헌정체가 수립되었고 고조 말기를 광무헌정이라 칭한다.

광무헌정은 독립협회에서 이름을 바꾼 독립당이 주도하는 10년간의 기간이었고, 이 시기 한국에서 본격적인 식산흥업과 국민개병제를 통한 국민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권을 빼앗긴 고조와 보수파는 점점 의회와 정당 정치에 강한 불만을 갖게 된다. 특히 권력에 강한 집착을 보였던 고종은 독립당이 결국에는 프랑스 대혁명처럼 자신을 끌어내고 공화국을 선포할 것이라는 의심을 10년간 감추지 못했다.

이에 고조와 황족, 보수파들은 비밀리에 정변을 준비하였고, 1918년 1월 무오정사를 통해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 고조의 정변으로 의왕을 비롯해 대피하지 못한 독립당 계열 인사들은 처형당했고 다시금 전제군주의 시대가 찾아왔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훗날 미곡 폭동으로 알려지게 될 쌀의 가격 급등으로 인한 대폭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대두되었다. 1차대전을 거치며 협상국에 대한 수출이 폭등하자, 한중일 동양 삼국의 산업화가 빠르게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며 쌀에 대한 수요가 폭증한 이 시기, 고조는 일본의 쌀 폭등을 기회로 대일 쌀 수출을 증가시켰다. 결국 전국적으로 미곡 가격이 폭등하였고 특히 쌀의 수요가 급증한 한성의 싸전이 일제히 담합하여 미곡의 판매를 금해 미곡을 구입하지 못해 성난 군중들은 흥분하여 싸전 상인을 공격하며 미곡 폭동이 발생한다.

분노한 군중의 폭동은 점차 한성에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조정은 심각성을 인지하여 경무청의 주도하에 무자비한 진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강경 대응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들불처럼 확산되었고, 결국 경무청 뿐만 아니라 군이 동원되었으나, 군경의 잔혹한 진압끝에 어린 소녀인 유관순과 김일성이 사망하며 전국적으로 저항이 확대되었다.

이때부터 매점매석에서 시작된 미곡폭동은 점차 입헌정치를 복구하라는 정치적 요구로 진화하였다. 이때 조정의 체포령에도 불구하고 은신하고 있던 이승만이 저항에 참여하였다. 이승만은 잔존 독립당 세력을 규합하여 투쟁을 선포하였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개별적 저항인 미곡폭동은 3.1 혁명으로 진화하였다.

본래라면 충분히 초기에 진압이 가능했을 이 미곡폭동은 고조가 러시아와 협상국의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3만여명의 시위대를 포함한 최정예병력을 아라사원정군으로 파병하며 진압에 실패했다는 것이 현대의 정설이다. 3.1 혁명으로 인해 조정의 지방 통제력이 붕괴하였고, 3월 중순에는 한성까지 저항이 거세어지게 되었고, 고종과 유력 황족들은 경운궁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사태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게 된다. 3.11일 제2차 경운궁 화재사건으로 고조태자영왕등의 유력 황족들이 화재로 사망하며 반정부 시위로 시작된 3.1 혁명은 뜻밖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훗날 공화국 정부는 이 화재를 전기시설의 합선에 의한 화재라고 발표하였으나, 온갖 음모론이 확산되었다. 결국 황실의 계승 서열이 붕괴되기에 이르렀고, 머리를 잃은 조정은 일거에 마비되었으며, 근황파의 저항의지는 완전히 일소되게 된다. 결국 민병석 의정은 진압을 포기하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한다. 이후 이승만은 의정이 되었고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공화국 선포

임시정부는 헌법제정과 성인 남성에 대한 보통선거권을 주장하는 온건파의 주도로 시위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당 내 급진파에 의해 점차 공화국 수립에 대한 담론이 대두되었다. 본래 이승만 또한 헌정 실시를 목표로 하였으나, 황실이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황실을 경멸하던 독립당의 세력을 규합하고 1919년 4월 23일 24인의 13도 대표자들이 경운궁 석조전에서 기습적으로 공화정 선포를 선언하였다.

13도 대표들은 선포문에서 “3 •1 민주혁명을 바탕으로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본 대회는 민의에 기(基)하여 공화국을 조직, 약법(約法)을 제정하여 이를 선포한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 최대 통신사인 UP통신(UPI통신의 전신)은 한성정부 수립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이 시기 공화정을 선언하자 군부는 격앙되었다. 참모총장 한규설은 군을 동원하고자 하였으나, 한국의 혼란을 기회로 삼은 하라 내각은 이지용과의 교섭을 통해 공화국을 최초로 인정하였다. 또한 해군과 육전대를 인천 앞바다에 파견하여 제국군을 압박하였고, 결국 군부는 굴욕적으로 임시정부와 합의하게 된다. 참모차장 조동윤과 의정 이승만의 합의인 정동 각서가 공개된다.

정동각서에 따라 친위쿠데타 가담한 고위급 장교를 숙청하고 참모총장 한규설 대장이 강제예편되었으며, 군부는 공화국에 대해 굴욕적으로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리하여 장장 527년간 이어진 대한제국은 멸망하였으며 아시아 두번째 공화국인 한성정부가 선포되었다.

제2전선 음모론

공화국의 건국 직후 러시아에서 귀환한 아라사원정군은 공화국이라는 체제를 수용하지 못했다. 이들은 한규설 대장의 정변에 즉각 찬동하고 존왕양이를 외치며 귀환을 시도하였을 만큼 근황주의적 성향이 강하였으나, 일본의 무력시위로 조동윤 부장을 비롯한 군부의 수뇌부가 굴복하는 대 굴욕을 겪은 뒤 귀국하게 된다.

당시 아라사원정군은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으며, '우리가 러시아에서 피 흘리는 동안 본국에서 왕조가 무너졌다.'라며 역사적 죄책감을 가졌다. 또한 이들은 이러한 군부의 굴욕을 지켜보며 충격에 빠졌다. 이들의 이런 심리적 공황상태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극대화 되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제1전선(동부전선)에서 분전의 대가는 제2전선(국내정치적 혼란)에서의 내부의 적에 의해 훼손되었다며 군부 내에서 시작된 제2전선 음모론은, 점차 민간 사회로 퍼져 근황 세력에 의해 발전되어 "정치적 패전"이라는 수사로 탈바꿈되었다. 이들은 한성정부를 사실상 외세의 농간으로 성립된 허수아비 정부로 간주하였고 이들에 의해 제2전선 음모론은 정치적 패전 음모론으로 진화하였다.

결국 이 음모론들은 군부와 극우 세력의 핵심적인 주장으로 진화하였고, 6.10 궐기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군부에 의해 대한국의 공식적 역사관으로 진화했다.

정치적 혼란

공화국 멸망

정치

정당

대조선 헌법

정부 형태

행정구역

군사

정치

외교

조일관계

조중관계

조소관계

조미관계

대중매체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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