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문서: {{아름다운 나라 배너}} {{쿠리오 나무위키 인물 정보 | 틀 너비 = 420px | 테두리 색 = #133984 | 상배경 색 = #133984 | 배경 색 = #133984 | 글씨 색 = #FFF | 글씨 크기 = | 펼접 아이디 = wasans | 직책1 = | 직책1 배경 색 = | 직책1 글씨 색 = | 직책2 = | 직책2 배경 색 = | 직책2 글씨 색 = | 직책3 = | 직책3 배경 색 = | 직책3 글씨 색 = | 이름 = 제7대 애국자당 당수<br><big>무솔리니</big><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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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는 한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한국에서 유일무이하게 비 [[국가사회주의대한노동자당|한국나치당]]계열 파시스트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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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평북의 의주군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가난한 집안에 제대로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독학으로 어찌저찌 고등학교 수준의 공부까지 마쳤고, 육군사관학교에 24기로 입학해 1969년에 졸업한 뒤 소위로 임관했다. | |||
이후 무난하게 군 생활을 했다. 인기도 나름 괜찮아 동료 장교들과 잘 어울렸다고 하며, 특유의 편안한 느낌으로 인해 사적으로도 친구가 많았다고 한다. 머리도 좋아 심심할때면 여러가지 퀴즈 같은걸 내면서 재밌게 해줬다고 한다. 한가지 단점이라면 상당히 심하게 거만했다고. 아무튼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그는 무난히 대령까지 진급했고, 60세의 나이로 보병 여단장을 끝으로 군대에서 전역했다. | |||
그의 본격적인 행보는 전역 이후에 시작되는데, 그는 전역 이후 약 1년간은 책을 읽는 활동을 하거나 여가 생활에 집중했지만 자신이 하고있는 이것이 맞는가 하는 자괴감에 제대로 놀지 못했다고 한다. 민주국민당과 전진하는 대한민국에서 전국구 출마를 제안했지만 고사했다고. 그러던 중 과거 동료였던 장교가 애국자당에 입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도 애국자당에 입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대령이라는 직책 덕분에 애국자당 내에서 대접받으며 지명직 최고위원, 함경북도당 위원장을 거쳐 애국노련 내에서 당수 직을 놓고 내분이 심화되자 당내에서 입지가 있는 유일한 외부인사였던 그를 당수로 앉히자는 의견이 대두되며 얼떨결에 애국자당 제7대 당수로 등극한다. | |||
그리고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성향을 들어내기 시작했는데, 자신 특유의 군국주의적 성향을 강화하고 제2차 동아시아 전쟁, 민족주의적 성향을 꺼리낌 없이 애국자당에 넣기 시작한다. 일부 애국노련계 지도부의 제재가 있었으나 애국노련의 일반 노동자들이 대체로 그의 행보를 지지하는 움직임을 보였기에 그는 이러한 성향을 강령에 새기는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칠수 있었다. 이를 마친 이후 그는 당수직을 사임하고 평범한 당직자로 활동하길 희망했지만 훗날 서울진군의 지도부가 되는 당원들의 부탁으로 당수직에 남게된다. | |||
이후 그는 친분이 있는 장교들을 이용하여 본래 전진당, 민국당을 지지하던 재향군인회의 일부를 애국자당으로 끌어들이며 단순 노동자표에서 그치지 않고 군인들에게 까지 영향을 끼치려고 시도하였다. 허나 이 과정에서 애국노련의 일부가 이탈하는 등의 일이 있었지만 무솔리니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 |||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했으니, 무솔리니 취임 이전에 조금씩 상승하던 민간인의 표가 정체되거나 감소했던것이다. 군인표 덕분에 애국자당의 득표는 20만표 내외로 상당히 증가했으나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애국노련 조직력을 이용한 15만표와 재향군인회의 5만표 가량을 제외하면 민간인 표는 거의 없던것이다. 거기에 말이 좋아 20만표지 원내입성을 위한 2%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득표율인지라 점점 애국노련계의 온건파들과 대립이 심화 되었다. 이 상황에서 무솔리니가 비슷한 성향의 파시스트 당원들을 이끌고 서울진군을 창단하니 애국노련계의 반무솔리니 감정은 더욱 격화되었다. | |||
이는 현재진행형으로서 당내 갈등이 점점 당 밖으로도 표출되고 있어, 애국노련 자체가 이 싸움에 개입해 중재하는 등 애국자당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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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에 아버지가 주유소를 했었다고 한다. | |||
*물구나무 서기를 잘한다. | |||
*패션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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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30일 (금) 11:59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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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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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애국자당 당수 무솔리니 武率二你 | Mu Sol Lee Ni | ||||||||||||||||||||||||||||||
출생 | 1945년 4월 28일 (76세) | |||||||||||||||||||||||||||||
일본령 조선총독부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現 평안북도 의주시 향교동) | ||||||||||||||||||||||||||||||
국적 | 대한민국 | |||||||||||||||||||||||||||||
현직 | 애국자당 당수 애국자당 애국인재영입위원장 | |||||||||||||||||||||||||||||
임기 | 제7대 애국자당 당수 | |||||||||||||||||||||||||||||
2007년 2월 4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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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무솔리니는 한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한국에서 유일무이하게 비 한국나치당계열 파시스트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상세
1945년 4월 평북의 의주군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가난한 집안에 제대로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독학으로 어찌저찌 고등학교 수준의 공부까지 마쳤고, 육군사관학교에 24기로 입학해 1969년에 졸업한 뒤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무난하게 군 생활을 했다. 인기도 나름 괜찮아 동료 장교들과 잘 어울렸다고 하며, 특유의 편안한 느낌으로 인해 사적으로도 친구가 많았다고 한다. 머리도 좋아 심심할때면 여러가지 퀴즈 같은걸 내면서 재밌게 해줬다고 한다. 한가지 단점이라면 상당히 심하게 거만했다고. 아무튼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그는 무난히 대령까지 진급했고, 60세의 나이로 보병 여단장을 끝으로 군대에서 전역했다.
그의 본격적인 행보는 전역 이후에 시작되는데, 그는 전역 이후 약 1년간은 책을 읽는 활동을 하거나 여가 생활에 집중했지만 자신이 하고있는 이것이 맞는가 하는 자괴감에 제대로 놀지 못했다고 한다. 민주국민당과 전진하는 대한민국에서 전국구 출마를 제안했지만 고사했다고. 그러던 중 과거 동료였던 장교가 애국자당에 입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도 애국자당에 입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대령이라는 직책 덕분에 애국자당 내에서 대접받으며 지명직 최고위원, 함경북도당 위원장을 거쳐 애국노련 내에서 당수 직을 놓고 내분이 심화되자 당내에서 입지가 있는 유일한 외부인사였던 그를 당수로 앉히자는 의견이 대두되며 얼떨결에 애국자당 제7대 당수로 등극한다.
그리고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성향을 들어내기 시작했는데, 자신 특유의 군국주의적 성향을 강화하고 제2차 동아시아 전쟁, 민족주의적 성향을 꺼리낌 없이 애국자당에 넣기 시작한다. 일부 애국노련계 지도부의 제재가 있었으나 애국노련의 일반 노동자들이 대체로 그의 행보를 지지하는 움직임을 보였기에 그는 이러한 성향을 강령에 새기는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칠수 있었다. 이를 마친 이후 그는 당수직을 사임하고 평범한 당직자로 활동하길 희망했지만 훗날 서울진군의 지도부가 되는 당원들의 부탁으로 당수직에 남게된다.
이후 그는 친분이 있는 장교들을 이용하여 본래 전진당, 민국당을 지지하던 재향군인회의 일부를 애국자당으로 끌어들이며 단순 노동자표에서 그치지 않고 군인들에게 까지 영향을 끼치려고 시도하였다. 허나 이 과정에서 애국노련의 일부가 이탈하는 등의 일이 있었지만 무솔리니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했으니, 무솔리니 취임 이전에 조금씩 상승하던 민간인의 표가 정체되거나 감소했던것이다. 군인표 덕분에 애국자당의 득표는 20만표 내외로 상당히 증가했으나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애국노련 조직력을 이용한 15만표와 재향군인회의 5만표 가량을 제외하면 민간인 표는 거의 없던것이다. 거기에 말이 좋아 20만표지 원내입성을 위한 2%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득표율인지라 점점 애국노련계의 온건파들과 대립이 심화 되었다. 이 상황에서 무솔리니가 비슷한 성향의 파시스트 당원들을 이끌고 서울진군을 창단하니 애국노련계의 반무솔리니 감정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는 현재진행형으로서 당내 갈등이 점점 당 밖으로도 표출되고 있어, 애국노련 자체가 이 싸움에 개입해 중재하는 등 애국자당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여담
- 70년대에 아버지가 주유소를 했었다고 한다.
- 물구나무 서기를 잘한다.
- 패션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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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무신론자였으나 애국자당 입당 이후 이승만의 길을 따르겠다며 감리회로 개신교에 입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