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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의 정치 제도부터 민중의 생활 양식까지<br>메이지 유신은 일본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br>덕분에 일본은 강대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br>태양의 제국은 영원할 것만 같았습니다.<br><br>그러나 일본은 민주주의 대신 전체주의의 길을<br>문민통제 대신 군국주의의 길을 걸었습니다.<br>결국 제국은 스스로의 힘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고<br>그 힘에 의해 자멸을 맞이하였습니다.<br><br>그러나 만약에 말입니다.<br><br>일본 제국이 민주주의를 수용했다면<br>그리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면<br><br>'''역사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통해 보여준<br>일본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열망은<br>군홧발에 짓밟힌 채 실패로 끝났습니다.<br><br>그렇게 스스로 전체주의의 길을 선택한 일본은<br>스스로의 폭주하는 힘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고<br>결국 그 힘에 의해 자멸을 맞이하였습니다.<br><br>그러나 만약에 말입니다.<br><br>일본이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성공했다면<br>그리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면<br><br>'''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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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쇼와 2년) 3월 14일, 재무대신 카타오카 나오하루가 모종의 이유로 중의원 예산위원회 참여가 늦어지며 '쇼와금융공황'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본래라면 무너져야 할 와카쓰기 레이지로 내각이 유지되고, 국내적으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국외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온건한 외교 정책이 지속되게 된다. 한편, 중국에서는 국민당의 제1차 북벌이 일본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순조롭게 성공하게 된다.<br><br>그러나 정부의 온건한 정책에 불만이 많았던 군부, 특히 관동군은 국민당의 부상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결국 1928년(쇼와 3년) 6월 4일, 관동군은 정부의 허가 없이 국민당을 피해 만주로 가던 장쭤린을 암살하며, 만주를 손에 얻고자 시도한다. (황고둔 사건) 그러나 장쭤린의 아들인 장쉐량이 오히려 국민당에 가담하면서 관동군은 만주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 이에 정부는 '황고둔사건 해결문서'를 발표, 사건의 모든 책임을 군부에게 돌리며 군부의 힘을 크게 축소하는데 성공한다.<br><br>이후, 1930년대에 일련의 군부의 불미스러운 시도들이 전부 실패로 돌아가며 군부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결국 1947년(쇼와 22년) 5월 3일,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은 '군부혁신법'을 통과하며 군부의 정치 개입 시도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냉전 시기 동안 핵개발과 경제발전으로 세계적인 강대국이 된 일본은 1989년(헤이세이 원년) 10월 29일, '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영국식 입헌군주제로 전환,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국가=
=국가=
==일본==
==대일본국==
{{본문|일본 (민본)}}
{{본문|일본 (민본)}}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 600px; width: 100%; border: 2px solid #b0313f; text-align: center; margin: auto; font-size:10pt"
{{인용문|'''임의 시대는 천 대에 팔천 대에'''}}
|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Flag_of_Japan_(1870–1999).svg]]</div>
==조선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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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big>대일본국</big>'''<br><br>진무 천황의 탄생 이래로 고요하게 살아가던 일본은 세상이 바뀌자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여정은 고단하였습니다. 모든 유신의 순간에 반대파는 존재하였고, 항상 눈물과 피로서 유신을 이뤄내야만 했습니다. 더군다나 필요하다면 전쟁도 마다하지 않고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 끝에 일본은 어느 순간 동아의 유일무이한 강대국이 되어 있었고, 많은 아시아인들은 일본을 동경하였습니다.<br><br>요시히토 천황 즉위 이후, 일본에서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요구하는 사회적 운동이 생겼습니다. 바로 '다이쇼 데모크라시'였습니다. 이 시기 동안 일본은 구시대적인 번벌 정치를 끝맺고 서구의 의회민주주의를 수용하였고, 사회적으로는 많은 권리가 보장되기 시작하며 한 층 더 성숙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군부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항상 의회를 무너뜨리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여러 차례의 쿠데타 시도와 군부의 단독 행동은 여러 번 의회민주주의를 위협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군부가 날뛰어도 변화를 원하는 민중의 의지를 꺽을 수는 없었고, 결국 군부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나며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br><br>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이 되며 국제적 지위가 한 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비록 과거 제국주의의 잔재인 식민지들은 포기해야만 했지만, 핵개발과 고도성장은 일본을 세계적인 주요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한편 1989년, 아키히토 천황이 즉위하자 일본은 마지막 민주주의 개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신헌법을 제정함으로서 주권재민의 원칙에 따라 천황은 상징적 존재로 남고,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 돌아간 것입니다.<br><br>오늘날 일본은 확장을 시도하는 중국을 막아야 할 최전선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거나, 앞서며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br>그러나 천황 폐하 아래에 단결한 일본의 국민들은 이 시련도 우리의 승리로 끝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br><br>'''" 임의 시대는 천 대에 팔천 대에 "'''}}
 
==조선==
{{본문|조선 (민본)}}
{{본문|조선 (민본)}}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 600px; width: 100%; border: 2px solid #29166F; text-align: center; margin: auto; font-size:10pt"
{{인용문|'''조선 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
|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People's_Republic_of_Korea's_Flag.svg.png]]</div>
1932년 사쿠라다몬 의거 이후,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던 중국은 상하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압박을 가하게 된다. 결국 임시정부는 금방 힘을 잃으며 유명무실해졌고, 독립 운동의 주도권은 좌익 세력의 연합체인 조선건국동맹에게 넘어오게 된다.<br><br>조선건국동맹은 1950년에 조선 독립 전쟁을 일으키는 등 무력 투쟁을 통해 일본에 대항하였고, 일본은 이에 조선의 독립에 대해 논의하게 된다. 이는 1960년에 발생한 4.19 혁명을 일본이 진압을 실패하며, 끝내 독립을 인정받고 50년만에 독립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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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29166F; color:#FFF; font-size:10pt" | {{color|#FFF|'''<big>조선인민공화국</big>'''<br>'''朝鮮人民共和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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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big>조선인민공화국</big>'''<br><br>500년 사직의 전통을 지키던 조선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의해 주권을 잃고 식민지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 반도를 빼앗을 수는 있어도, 조선 민족의 혼을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로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때로는 일본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1919년 3월 1일에 행해진 조선 민족 최대 규모의 독립 운동은 일본의 통치 정책마저도 바꿀 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br><br>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익 독립운동가들이 연합하였습니다. 그들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하고, 대규모 무력 투쟁을 결의하였습니다. 그렇게 1950년 6월 25일, 전국적으로 독립군들이 들고 일어나 독립전쟁을 시작하였습디다. 비록 전쟁은 패배했지만, 일본에게는 다시 한 번 큰 충격을 주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1960년 4월 19일, 과거 3.1운동을 연상케 하는 민중의 대규모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10년 전 독립전쟁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일본은 결국 1960년 8월 15일, 조선을 독립시키게 됩니다.<br><br>독립 이후 건국 된 조선인민공화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질서로 조선을 개편하였고, 일련의 개혁과 노력으로 독립한지 30년만에 동아시아에서 나름의 경제 강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늘날에는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이 격화되는 가운데 조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두고 크게 엇갈리고 있습니다.<br>허나 그 길이 무엇이 되었든, 조선은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br><br>'''" 조선 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 "'''}}


==중국==
==중화민국==
{{본문|중국 (민본)}}
{{본문|중국 (민본)}}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 600px; width: 100%; border: 2px solid #000095; text-align: center; margin: auto; font-size:10pt"
{{인용문|'''삼민주의는 우리가 따를 길'''}}
|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중화민국 국기.svg]]</div>
1928년, 국민당의 북벌이 성공하며 중국 대륙 여러 곳에서 나눠져 있던 군벌들이 모두 국민정부 휘하로 들어오면서 통일하게 된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여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게 되며, 폐쇠적인 국가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1972년, 서방과의 화해 이후, 중국은 서방 세계에 다시 문호를 개방하며 역사상 유례 없는 성장을 이루게 된다.<br><br>1975년, 장제스 사후에도 국민당의 일당독재는 지속되었다. 결국 1989년, 소위 '천안문 혁명'이라 불리는 대규모 민주화 운동으로 옌자간 총통이 사임하며 중국은 끝내 민주화를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2013년에 취임한 시진핑 총통이 다시금 과거 일당독재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며 중국의 민주주의에는 다시 무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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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000095; color:#FFF; font-size:10pt" | {{color|#FFF|'''<big>중화민국</big>'''<br>'''中華民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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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big>중화민국</big>'''<br><br>오랫동안 동방의 황제국으로 군림하던 중국은 제국주의로 무너지고, 무능과 부패로 몰락하였습니다. 그렇게 안팎으로 억눌린 민중의 분노는 쑨 원 선생의 지도 하에 신해년 혁명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워진 중화민국은 여전히 제국주의가 옥죄고 있고, 내부로는 군벌들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다행히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은 북벌을 단행하며 군벌들을 제압하고, 비로소 중국을 안정케 만들었습니다.<br><br>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국은 과거 도움을 준 독일에게 은혜를 갚았다는 이유로 서방으로부터 고립되었습니다. 비록 소련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유지되었지만, 이마저도 스탈린 사후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세계를 버릴 수 있을지언정, 세계가 중국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1972년, 미국과 일본을 시작으로 서방과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서방 자본의 유입으로 중국은 역사상 유례 없는 고속 성장을 이루었습니다.<br><br>1975년, 장제스가 사망했지만 국민당 독재 정권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의 사후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왕좌는 없는 법, 1989년, 민중의 분노 가득 찬 목소리가 천안문 광장에 울려퍼졌고, 비로소 독재 정권은 종결되었습니다.<br><br>오늘날 중국은 다시 한 번 중국의 세계 패권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비록 시진핑 주석이 독재를 시도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그의 행동을 지지할 뿐입니다.<br>중국은 이제 신중국이 주도하는 신세계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혁명을 시작한 것입니다.<br><br>'''" 삼민주의는 우리가 따를 길 "'''}}


==대만==
==대만국==
{{본문|대만 (민본)}}
{{본문|대만 (민본)}}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 600px; width: 100%; border: 2px solid #008000; text-align: center; margin: auto; font-size:10pt"
{{인용문|'''온갖 고생을 이겨내며 산림을 일군다'''}}
|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2560px-Flag_of_Taiwan_proposed_1996.svg.png]]</div>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곳곳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대만도 일본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일본의 강압적인 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 운동의 열기는 점점 커졌고, 결국 1972년에 중국과의 화해 분위기를 만들던 일본은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대만의 독립을 승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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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br>그러나 대만 독립 이후, 리덩후이는 경제 성장과 안보 위기를 내세우며 독재 정치를 하였다. 이에 대학생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매년 시위를 일으켰고, 1989년에 중국에서 천안문 혁명이 일어나자 그 영향으로 2000년에 끝내 민주화를 이룩하게 된다.
| style="background:#008000; color:#FFF; font-size:10pt" | {{color|#FFF|'''<big>대만국</big>'''<br>'''臺灣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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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국==
|}
{{본문|월남 (민본)}}
<br>
{{인용문|'''늘 푸른 역사는 대단히 빛나는 전공이라'''}}
{{인용문|'''<big>대만국</big>'''<br><br>아름답다는 뜻의 '포르모사'라고도 불리 대만 섬은 투쟁의 역사로 얼룩졌습니다. 마지막 침략자인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섬을 빼앗아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섬을 근대화 시키고 발전시켰지만, 동시에 억압하고 착취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재앙이 끝났을 무렵, 아세아의 혁명가들은 주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대만 섬도 독립을 위한 투쟁에 동참하며, 압제자를 몰아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br><br>1972년, 피로 얼룩진 우리의 투쟁은 끝내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외세의 압제자가 사라지자, 이제는 내부의 압제자가 다시 한 번 섬을 집어삼켰습니다. 리덩후이는 경제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며 대통령의 자리를 독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막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새천년의 시작을 알리는 2000년에, 국민의 분노 가득찬 항쟁에 압제자는 다시 한 번 무너지고, 진정한 자유를 되찾았습니다.<br><br>오늘날에는 과거에 섬을 지배하였던 중국이 다시 한 번 우리의 독립을 무너뜨릴려는 야망을 보이고 있습니다.<br>대만은, 다시 한 번 전 국민이 하나 되어 압제자에 저항할 투쟁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br><br>'''" 온갖 고생을 이겨내며 산림을 일군다 "'''}}


=연표=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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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9051197_00000 청천을 찔러라]
**NHK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9051197_00000 청천을 찔러라]
**NHK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9050861_00000 세고돈]
**NHK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9050861_00000 세고돈]
**NHK -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9010573_00000 언덕 위의 구름]


=여담=
=여담=
*본 세계관의 제목은 사실 임시 제목이다. 추후 변경할 계획이 있다.
*한동안은 [[일본 (민본)|일본]]만을 다룰 예정이다.
*한동안은 [[일본 (민본)|일본]]만을 다룰 예정이다.

2023년 12월 11일 (월) 21:54 기준 최신판

[ 문서 보기 ]
[ 세계관 설명 ]
민본
民本
장르 대체역사, 동아시아사, 일본사
연재자 제리코
시작일 2023년 9월 28일
(시작일로부터 +532일, 1주년)
상징 색 빨간색 (#b0313f)
저작권 CC-0

1.개요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
國民が選擧し, 國民を代表し, 國民的勢力を中心とし
국민이 선거하고, 국민을 대표하고, 국민적 세력을 중심으로

사이토 다카오, 1940년 2월 2일 제국의회에서 행한 연설 중

제리코의 장편 대체역사 세계관. 민주주의 국가가 된 일본 제국과 그로 인해 달라진 동아시아를 다루고 있다.

본 세계관 제목인 민본(民本)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일본에서 'Democracy'를 '민본주의'로 해석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2.상세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통해 보여준
일본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열망은
군홧발에 짓밟힌 채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전체주의의 길을 선택한 일본은
스스로의 폭주하는 힘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그 힘에 의해 자멸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말입니다.

일본이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성공했다면
그리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1927년(쇼와 2년) 3월 14일, 재무대신 카타오카 나오하루가 모종의 이유로 중의원 예산위원회 참여가 늦어지며 '쇼와금융공황'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본래라면 무너져야 할 와카쓰기 레이지로 내각이 유지되고, 국내적으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국외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온건한 외교 정책이 지속되게 된다. 한편, 중국에서는 국민당의 제1차 북벌이 일본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순조롭게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정부의 온건한 정책에 불만이 많았던 군부, 특히 관동군은 국민당의 부상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결국 1928년(쇼와 3년) 6월 4일, 관동군은 정부의 허가 없이 국민당을 피해 만주로 가던 장쭤린을 암살하며, 만주를 손에 얻고자 시도한다. (황고둔 사건) 그러나 장쭤린의 아들인 장쉐량이 오히려 국민당에 가담하면서 관동군은 만주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 이에 정부는 '황고둔사건 해결문서'를 발표, 사건의 모든 책임을 군부에게 돌리며 군부의 힘을 크게 축소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1930년대에 일련의 군부의 불미스러운 시도들이 전부 실패로 돌아가며 군부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결국 1947년(쇼와 22년) 5월 3일,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은 '군부혁신법'을 통과하며 군부의 정치 개입 시도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냉전 시기 동안 핵개발과 경제발전으로 세계적인 강대국이 된 일본은 1989년(헤이세이 원년) 10월 29일, '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영국식 입헌군주제로 전환,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3.국가

3.1.대일본국

임의 시대는 천 대에 팔천 대에

3.2.조선인민공화국

조선 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

1932년 사쿠라다몬 의거 이후,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던 중국은 상하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압박을 가하게 된다. 결국 임시정부는 금방 힘을 잃으며 유명무실해졌고, 독립 운동의 주도권은 좌익 세력의 연합체인 조선건국동맹에게 넘어오게 된다.

조선건국동맹은 1950년에 조선 독립 전쟁을 일으키는 등 무력 투쟁을 통해 일본에 대항하였고, 일본은 이에 조선의 독립에 대해 논의하게 된다. 이는 1960년에 발생한 4.19 혁명을 일본이 진압을 실패하며, 끝내 독립을 인정받고 50년만에 독립을 이루게 된다.

3.3.중화민국

삼민주의는 우리가 따를 길

1928년, 국민당의 북벌이 성공하며 중국 대륙 여러 곳에서 나눠져 있던 군벌들이 모두 국민정부 휘하로 들어오면서 통일하게 된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여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게 되며, 폐쇠적인 국가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1972년, 서방과의 화해 이후, 중국은 서방 세계에 다시 문호를 개방하며 역사상 유례 없는 성장을 이루게 된다.

1975년, 장제스 사후에도 국민당의 일당독재는 지속되었다. 결국 1989년, 소위 '천안문 혁명'이라 불리는 대규모 민주화 운동으로 옌자간 총통이 사임하며 중국은 끝내 민주화를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2013년에 취임한 시진핑 총통이 다시금 과거 일당독재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며 중국의 민주주의에는 다시 무너지고 있다.

3.4.대만국

온갖 고생을 이겨내며 산림을 일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곳곳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대만도 일본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일본의 강압적인 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 운동의 열기는 점점 커졌고, 결국 1972년에 중국과의 화해 분위기를 만들던 일본은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대만의 독립을 승인하게 된다.

그러나 대만 독립 이후, 리덩후이는 경제 성장과 안보 위기를 내세우며 독재 정치를 하였다. 이에 대학생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매년 시위를 일으켰고, 1989년에 중국에서 천안문 혁명이 일어나자 그 영향으로 2000년에 끝내 민주화를 이룩하게 된다.

3.5.월남국

늘 푸른 역사는 대단히 빛나는 전공이라

4.연표

5.영향을 받은 매체

6.여담

  • 한동안은 일본만을 다룰 예정이다.
Sindan
오랜만에 완성도 높은 일본 중심 세계관이네요
Sindan | 게시한 날짜 Oct 5, 2023 at 5:37 am

이런 세계관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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