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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이화에서)|대한제국]]의 제4대 [[대한제국 황제 (이화에서)|황제]]. 휘는 유(堬)이며, 연호는 문성(文成), 묘호는 현조(顯祖), 시호는 인황제(仁皇帝)이다. | [[대한제국 (이화에서)|대한제국]]의 제4대 [[대한제국 황제 (이화에서)|황제]]. 휘는 유(堬)이며, 연호는 문성(文成), 묘호는 현조(顯祖), 시호는 인황제(仁皇帝)이다. | ||
[[성조 태황제 이엽|성조 태황제]]의 차남으로 1912년 환친왕에 책봉되었다. | [[성조 태황제 이엽|성조 태황제]]의 차남으로 1912년 환친왕에 책봉되었다. 유년기 아버지 성조를 빼닮아 문무에 출중하였고, 제왕학에도 능하였으나 군주로서의 소양이 필요한 교육은 모두 후계자였던 형 [[선종 효황제 이청|선종 효황제]]의 몫이었고, 현조는 자기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는 까맣게 모른 채 적성을 찾아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다. 해군의 일원으로 복무하던 현조는 해군의 수장인 통제부 총장에 올랐고, 한소전쟁에서 소련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키고 압록강 방어선을 진두지휘하며 대한제국을 수호하고 일약 전쟁영웅의 자리에 오른다. | ||
1939년 12월 [[사종 순황제 이준|사종 순황제]]가 한소전쟁의 | 1939년 12월 한소전쟁 직후 [[사종 순황제 이준|사종 순황제]]가 한소전쟁의 패전으로 인한 충격으로 급사하였고 계승서열 1위이자 전쟁영웅인 환친왕은 연호를 문성으로 하여 즉위했다. 즉위 이후 한소전쟁의 패배에도 사임하지 않던 김좌진을 내란죄로 사형시키고 소련의 혹시 모를 침공에 대비하여 1945년까지 황제 중심의 총력전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친왕 시절부터 기존의 대한국 국제를 통한 전제황권의 유지는 군주제 자체를 위협할 것이라 생각했던 현조는 2차대전 이후 소련의 침공 가능성이 사라지자 계엄령을 거두고 정치적 담론을 개방, 신헌법을 제정하여 전제군주와 다름 없었던 황권을 축소하여 <ref>단, 황제의 권한이 약하다는것은 절대 아니다. 한국 황제의 권한은 공화제를 포함하여 현존하는 모든 상징적 국가원수들을 모아보아도 상징적 직위치고는 권한이 가장 많다.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한국 황제의 권한을 프랑스 대통령과 비견하였다.</ref> 대한제국을 입헌군주제 국가로 탈바꿈 시켰다. | ||
신헌법 제정 이후 현조는 현실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으나, 일촉즉발의 정치적 위기의 순간마다 중재자 역할을 맡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해 흔들리지 않는 막후 역할을 충실히 해내었다. 이를 통해 사종 시대 섭정인 명친왕과 5.16 사건으로 훼손된 황권을 회복되어, 입헌군주제 국가임에도 프랑스의 대통령과도 비견될 수 있는 외견적 입헌군주제로 거듭나게 했다. | |||
2차 대전 이후 냉전 체제의 형성을 예견한 현조는 소련의 침략을 막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고 베를린 봉쇄가 해소되던 1949년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채결하여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을 기초를 다졌다. 또한 독자적 핵개발에 착수, "오얏꽃이 피었습니다" 계획으로 1960년 대한제국은 5번째 핵보유국이 된다. 이외에도 현조는 나토를 모티브로 동북아시아의 친미국가들의 군사동맹기구인 NEATO<ref>공식명칭은 동북아시아 조약기구, (Nor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로 영어발음명은 네아토가 된다. </ref>를 창설하고, ECSC와 코메콘을 모방한 아세아경제발전공동체(AEDC)를 창설하여 대한제국을 동아시아의 안보와 경제의 중심으로 성장시켰다. 현조의 재임기인 1969년 대한제국은 서독을 추월해서 2위 경제대국이 되었고 미국, 소련 다음 가는 선진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 |||
== 생애 == | == 생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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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망받는 해군 장교 === | === 촉망받는 해군 장교 === | ||
1911년 현조는 해군무관학교 예과 41기로 입학하여 해군 장교의 길을 걷게 된다. 1914년 칭다오 전투에서는 4호생도로써 참전하여 대한제국에서 화제가 | 1911년 현조는 해군무관학교 예과 41기로 입학하여 해군 장교의 길을 걷게 된다. 1914년 칭다오 전투에서는 4호생도로써 참전하여 대한제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1915년에는 해군무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써의 삶을 걷게 된다. 현조는 임관 초기 경순양함 낙동함과 한탄함에서 근무하면서 황족과 다른 생활방식을 몸에 익혔다. 1918년에는 해군육전대를 이끌고 연해주 동안을 점령하는 공을 세워 선종으로부터 훈2등 자응장을 수여받고 부위로 특진하기도 했다. 이렇듯 전간기 현조는 해군의 촉망받는 엘리트이자, 유력한 황족으로써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귀족원의 황족의원으로 임명되며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 ||
1920년대와 1930년대 현조는 해군의 요직을 두루두루 거치며 초고속 승진가도를 거친다. 1929년에는 최연소 부령으로 승진했고 1931년에는 최연소 정령으로 1934년에는 참장으로 승진하며 제국 해군의 최연소 진급 기록을 연이어 갱신하였고, 진해 진수부 사령관을 거쳐 해군대학교장과 제2전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7년에는 부장으로 승진하여 제2함대 사령장관을 역임하였다. | 1920년대와 1930년대 현조는 해군의 요직을 두루두루 거치며 초고속 승진가도를 거친다. 1929년에는 최연소 부령으로 승진했고 1931년에는 최연소 정령으로 1934년에는 참장으로 승진하며 제국 해군의 최연소 진급 기록을 연이어 갱신하였고, 진해 진수부 사령관을 거쳐 해군대학교장과 제2전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7년에는 부장으로 승진하여 제2함대 사령장관을 역임하였다. | ||
=== 전쟁영웅 === | === 전쟁영웅 === | ||
1939년 1월, 육군참모총장(陸軍参謀総長)에 황족이자 제2대 명친왕인 [[은정군 (이화에서)|은정군]]이 취임하자 1932년 2월 해군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현조를 해군 최고의 군령권자인 통제부총장에 취임시켰고, 대장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1939년 5월 한소전쟁이 발발하자 현조는 대장으로 승진, 해군의 수장인 통제부총장에 임명되어 소련 태평양함대의 모항인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비밀도시 빌류친스크를 포격하고, 육군과 해군육전대의 | 1939년 1월, 육군참모총장(陸軍参謀総長)에 황족이자 제2대 명친왕인 [[은정군 (이화에서)|은정군]]이 취임하자 1932년 2월 해군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현조를 해군 최고의 군령권자인 통제부총장에 취임시켰고, 대장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1939년 5월 한소전쟁이 발발하자 현조는 대장으로 승진, 해군의 수장인 통제부총장에 임명되어 소련 태평양함대의 모항인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비밀도시 빌류친스크를 포격하고, 육군과 해군육전대의 혼성 부대로 이들 도시를 점령하여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수여받았다. | ||
그러나 한소전쟁의 전황은 현조의 맹활약과 달리 대한제국에 굉장히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소련은 압도적인 육군력을 바탕으로 요동에서 한국 육군에 괴멸적 타격을 | 그러나 한소전쟁의 전황은 현조의 맹활약과 달리 대한제국에 굉장히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소련은 압도적인 육군력을 바탕으로 요동에서 한국 육군에 괴멸적 타격을 주었다. 결국 개전 이후 승승장구 하는것 처럼 보였던 한국군은 순식간에 패퇴하여 10월 말에는 압록강변으로 도주하였고, 소련의 위협으로 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 이때 황제인 [[사종 순황제 이준|사종 순황제]]는 패전으로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자신을 끌어내릴거라 생각하여 주색잡기에 빠져있었고, 당시 총리대신인 김좌진과 육군 수뇌부는 소련의 압도적인 힘에 패닉에 빠졌다. 이에 현조는 원수부회의에서 이들과 멱살잡이를 벌인 끝에 조카인 사종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원수부장에 취임, 친척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은정군의 적극적인 협력하에 본토 주둔 대한제국군과 패잔병, 경찰과 후비군, 청소년과 노약자까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압록강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 ||
그리고리 쿨리크와 주코프가 통제하는 소련군은 압록강 방어선을 뚫어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한러전쟁때나 쓰일 구식 대포와 해군의 전함들과 항모, 순양함의 포격까지 총동원한 대한제국군은 간신히 압록강 방어선을 사수한다. 때마침 소련은 폴란드 침공 계획으로 병력을 서부전선에 집중시키고 있어, 한국 전선에서의 추가적인 희생을 원치 않았고, 한국은 국체의 사수를 위해 종전을 바라고 있었다. 결국 독일의 중재하에 양국은 요동과 연해주, 화태를 소련에 할양하는 종전 협상을 채결한다. | 그리고리 쿨리크와 주코프가 통제하는 소련군은 압록강 방어선을 뚫어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한러전쟁때나 쓰일 구식 대포와 해군의 전함들과 항모, 순양함의 포격까지 총동원한 대한제국군은 간신히 압록강 방어선을 사수한다. 때마침 소련은 폴란드 침공 계획으로 병력을 서부전선에 집중시키고 있어, 한국 전선에서의 추가적인 희생을 원치 않았고, 한국은 국체의 사수를 위해 종전을 바라고 있었다. 결국 독일의 중재하에 양국은 요동과 연해주, 화태를 소련에 할양하는 종전 협상을 채결한다. | ||
=== 즉위 === | === 즉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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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 대한제국/정치 | 대한제국/역사 |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셩슈무강(聖壽無疆)ᄒᆞ샤 ᄒᆡ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ᄊᆞ으소셔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떨치샤 오 쳔만셰(於千萬歲)에 무궁(無窮)케 ᄒᆞ소셔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이화에서"는 "현대까지 대한제국이 존속한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
대한제국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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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4대 황제 현조 인황제 | 顯祖 仁皇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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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9년 5월 7일 | ||||||||||||||||||||||||||||||||||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 |||||||||||||||||||||||||||||||||||
즉위 | 1939년 12월 13일 | ||||||||||||||||||||||||||||||||||
황성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 |||||||||||||||||||||||||||||||||||
천붕 | 1975년 12월 9일 (향년 76세) | ||||||||||||||||||||||||||||||||||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 |||||||||||||||||||||||||||||||||||
능묘 | 성릉(成陵) | ||||||||||||||||||||||||||||||||||
재위기간 | 대한제국 환친왕 | ||||||||||||||||||||||||||||||||||
1912년 3월 1일 ~ 1939년 12월 13일 | |||||||||||||||||||||||||||||||||||
대한제국 제4대 황제 | |||||||||||||||||||||||||||||||||||
1939년 12월 13일 ~ 1975년 12월 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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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제국의 제4대 황제. 휘는 유(堬)이며, 연호는 문성(文成), 묘호는 현조(顯祖), 시호는 인황제(仁皇帝)이다.
성조 태황제의 차남으로 1912년 환친왕에 책봉되었다. 유년기 아버지 성조를 빼닮아 문무에 출중하였고, 제왕학에도 능하였으나 군주로서의 소양이 필요한 교육은 모두 후계자였던 형 선종 효황제의 몫이었고, 현조는 자기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는 까맣게 모른 채 적성을 찾아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다. 해군의 일원으로 복무하던 현조는 해군의 수장인 통제부 총장에 올랐고, 한소전쟁에서 소련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키고 압록강 방어선을 진두지휘하며 대한제국을 수호하고 일약 전쟁영웅의 자리에 오른다.
1939년 12월 한소전쟁 직후 사종 순황제가 한소전쟁의 패전으로 인한 충격으로 급사하였고 계승서열 1위이자 전쟁영웅인 환친왕은 연호를 문성으로 하여 즉위했다. 즉위 이후 한소전쟁의 패배에도 사임하지 않던 김좌진을 내란죄로 사형시키고 소련의 혹시 모를 침공에 대비하여 1945년까지 황제 중심의 총력전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친왕 시절부터 기존의 대한국 국제를 통한 전제황권의 유지는 군주제 자체를 위협할 것이라 생각했던 현조는 2차대전 이후 소련의 침공 가능성이 사라지자 계엄령을 거두고 정치적 담론을 개방, 신헌법을 제정하여 전제군주와 다름 없었던 황권을 축소하여 [2] 대한제국을 입헌군주제 국가로 탈바꿈 시켰다.
신헌법 제정 이후 현조는 현실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으나, 일촉즉발의 정치적 위기의 순간마다 중재자 역할을 맡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해 흔들리지 않는 막후 역할을 충실히 해내었다. 이를 통해 사종 시대 섭정인 명친왕과 5.16 사건으로 훼손된 황권을 회복되어, 입헌군주제 국가임에도 프랑스의 대통령과도 비견될 수 있는 외견적 입헌군주제로 거듭나게 했다.
2차 대전 이후 냉전 체제의 형성을 예견한 현조는 소련의 침략을 막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고 베를린 봉쇄가 해소되던 1949년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채결하여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을 기초를 다졌다. 또한 독자적 핵개발에 착수, "오얏꽃이 피었습니다" 계획으로 1960년 대한제국은 5번째 핵보유국이 된다. 이외에도 현조는 나토를 모티브로 동북아시아의 친미국가들의 군사동맹기구인 NEATO[3]를 창설하고, ECSC와 코메콘을 모방한 아세아경제발전공동체(AEDC)를 창설하여 대한제국을 동아시아의 안보와 경제의 중심으로 성장시켰다. 현조의 재임기인 1969년 대한제국은 서독을 추월해서 2위 경제대국이 되었고 미국, 소련 다음 가는 선진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생애
출생과 유년기
1899년 성조 태황제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1912년 12세의 나이에 형 선종 효황제에 의해 환친왕(桓親王)에 봉해졌다. 형인 선종이 점잖고 선비의 기질이 강했다면, 현조는 아버지 성조를 빼어닮아 문(文)에 능할뿐더러 무인 기질이 강하고 탁월한 체력과 운동 신경, 자유분방한 성품을 지녔다.
유년기 강학원 재학 시절 현조는 부황 성조와 형 선종이 학문에 고루고루 탁월했던것과 달리 대부분의 과목에서 중상위권의 성적을 받았으나 역사와 정치학, 법학, 행정학, 지리학, 군사학에서는 부황 성조를 능가할 정도로 매우 출중한 성적을 받았고, 전통 무술과 기병술에 능했다. 이렇듯 현조 또한 제왕의 자격이 충분했으나, 당시 형이자 황태자인 선종이 건강했고, 현조 또한 형의 황태자로써의 의무와 빡빡한 생활을 지켜보며 자라왔기에 황태자 자리에 미련이 없었고, 혹시라도 생길 오해를 막기 위해 육군무관학교가 아닌 해군무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촉망받는 해군 장교
1911년 현조는 해군무관학교 예과 41기로 입학하여 해군 장교의 길을 걷게 된다. 1914년 칭다오 전투에서는 4호생도로써 참전하여 대한제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1915년에는 해군무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써의 삶을 걷게 된다. 현조는 임관 초기 경순양함 낙동함과 한탄함에서 근무하면서 황족과 다른 생활방식을 몸에 익혔다. 1918년에는 해군육전대를 이끌고 연해주 동안을 점령하는 공을 세워 선종으로부터 훈2등 자응장을 수여받고 부위로 특진하기도 했다. 이렇듯 전간기 현조는 해군의 촉망받는 엘리트이자, 유력한 황족으로써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귀족원의 황족의원으로 임명되며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1920년대와 1930년대 현조는 해군의 요직을 두루두루 거치며 초고속 승진가도를 거친다. 1929년에는 최연소 부령으로 승진했고 1931년에는 최연소 정령으로 1934년에는 참장으로 승진하며 제국 해군의 최연소 진급 기록을 연이어 갱신하였고, 진해 진수부 사령관을 거쳐 해군대학교장과 제2전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7년에는 부장으로 승진하여 제2함대 사령장관을 역임하였다.
전쟁영웅
1939년 1월, 육군참모총장(陸軍参謀総長)에 황족이자 제2대 명친왕인 은정군이 취임하자 1932년 2월 해군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현조를 해군 최고의 군령권자인 통제부총장에 취임시켰고, 대장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1939년 5월 한소전쟁이 발발하자 현조는 대장으로 승진, 해군의 수장인 통제부총장에 임명되어 소련 태평양함대의 모항인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비밀도시 빌류친스크를 포격하고, 육군과 해군육전대의 혼성 부대로 이들 도시를 점령하여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한소전쟁의 전황은 현조의 맹활약과 달리 대한제국에 굉장히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소련은 압도적인 육군력을 바탕으로 요동에서 한국 육군에 괴멸적 타격을 주었다. 결국 개전 이후 승승장구 하는것 처럼 보였던 한국군은 순식간에 패퇴하여 10월 말에는 압록강변으로 도주하였고, 소련의 위협으로 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 이때 황제인 사종 순황제는 패전으로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자신을 끌어내릴거라 생각하여 주색잡기에 빠져있었고, 당시 총리대신인 김좌진과 육군 수뇌부는 소련의 압도적인 힘에 패닉에 빠졌다. 이에 현조는 원수부회의에서 이들과 멱살잡이를 벌인 끝에 조카인 사종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원수부장에 취임, 친척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은정군의 적극적인 협력하에 본토 주둔 대한제국군과 패잔병, 경찰과 후비군, 청소년과 노약자까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압록강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그리고리 쿨리크와 주코프가 통제하는 소련군은 압록강 방어선을 뚫어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한러전쟁때나 쓰일 구식 대포와 해군의 전함들과 항모, 순양함의 포격까지 총동원한 대한제국군은 간신히 압록강 방어선을 사수한다. 때마침 소련은 폴란드 침공 계획으로 병력을 서부전선에 집중시키고 있어, 한국 전선에서의 추가적인 희생을 원치 않았고, 한국은 국체의 사수를 위해 종전을 바라고 있었다. 결국 독일의 중재하에 양국은 요동과 연해주, 화태를 소련에 할양하는 종전 협상을 채결한다.
즉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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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전한 시호는 현조선덕수공이민온은장우태고철용어위확렬정례열각도량무공양류예결성막흠절신목대녕통청소흥성현사덕기상광정인황제(顯祖宣德修恭夷敏溫隱莊友太高哲勇御魏確烈掉禮易恪掉良武共襄類譽潔成幕欽節神穆戴寧通淸昭興聖商思德祈商光定仁皇帝)이다.
- ↑ 단, 황제의 권한이 약하다는것은 절대 아니다. 한국 황제의 권한은 공화제를 포함하여 현존하는 모든 상징적 국가원수들을 모아보아도 상징적 직위치고는 권한이 가장 많다.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한국 황제의 권한을 프랑스 대통령과 비견하였다.
- ↑ 공식명칭은 동북아시아 조약기구, (Nor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로 영어발음명은 네아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