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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스펙트럼 상으로는 중도좌파 내지 좌익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진보 성향의 더 네이션 등은 중도좌파로, 보수 성향의 이브닝 스탠다드 등은 좌익으로 분류했다. | | 정치적 스펙트럼 상으로는 중도좌파 내지 좌익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진보 성향의 더 네이션 등은 중도좌파로, 보수 성향의 이브닝 스탠다드 등은 좌익으로 분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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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문제가 경제 문제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계급 환원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노동과 민주주의는 경제 문제를 제외한 다른 녹우크라이나 국내 이슈에는 관심이 거의 없으며, 되려 사회적으로는 보수주의 성향을 띄는 면모도 가지고 있다. | | 모든 문제가 경제 문제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계급 환원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노동과 민주주의는 경제 문제를 제외한 다른 녹우크라이나 국내 이슈에는 관심이 거의 없으며, 되려 사회적으로는 보수주의 성향을 띠는 면모도 가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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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 대통령으로는 [[세르히 다르킨 (개화)|세르히 다르킨]]이 있다. | | 소속 대통령으로는 [[세르히 다르킨 (개화)|세르히 다르킨]]이 있다. |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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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만주 총리
사민
개요
대한민국의 제1야당.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정당 중 가장 역사가 긴 정당이다. 신한국당-국민의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과 함께 한국의 양대 수권정당 중 하나이며, 동아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온건좌파 정당으로 일컬어진다.
1930년대 사회당 내부의 노선 투쟁의 결과로 탄생하였으며, 사회민주주의 국민정당을 표방한다. 궁극적으로는 민주적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고 있다.
역사
성향
지도부
내부 계파
역대 선거 결과
K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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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18년부터 19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정당.
역사
1910년대 당시 외무성장관이자 개화당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이승만은 그의 스승이자 같은 개화당 소속이며 당시 총리였던 서재필과 여러 분야에서 의견 충돌을 벌였다. 이로 인해 개화당은 현직 총재인 서재필을 따르는 파벌과 신흥 중진인 이승만을 따르는 파벌로 분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친서재필 성향의 당 지도부를 향해 '바보같은 지도부'라고 공개 비난하는 이른바 바보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당 지도부가 이승만에 대한 징계안을 회부하자 이승만은 자기 파벌 인사들과 함께 탈당했다.
이승만은 바보 사건 이전부터 신당 창당 준비를 꾸준히 해왔다. 여기에다가 신속한 탈당과 신당 창당은 이승만이 '지도부로부터 탄압받는 정직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탈당 명분을 얻기 위해 일부러 바보 사건을 일으키고 자신에 대한 지도부의 징계를 유도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념 및 성향
대한국민회는 보수주의 빅텐트 정당이었다. 좌로는 보수자유주의자부터 우로는 국민보수주의자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정치인들이 분포해 있었으며 자유보수주의 성향의 대한민주당과 함께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을 대표했다.
국민회는 애국심 강조, 사회 체제의 안정 추구, 겅경한 반공정책 실시 등 사회보수주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나 여성 인권 신장과 취업훈련 지원 등을 주장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들도 일부 지지했다.
일민주의
대한국민회는 일민주의(一民主義/Ilminism)라는 이념을 당 강령에 명시해두었다. 일민주의는 1918년 이승만이 8회 총선 직전에 창시한 이념으로, 대한국민회가 대한민주당과 합당해 신한국당을 창당할 때까지 당의 공식 이념이었다.
일민주의는 (시민)민족주의에 사회자본주의를 결합시킨 이념으로, 하나의 국민(一民)은 모두가 인간적인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사상이었다. 주로 이승만의 기독교 민주주의적 사상에서 기원했다고 평가받는다. 일민주의는 1920년대까지는 경제적으로 중도좌파적인 사상이었으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의 등장으로 다소 우경화되어 1930년대부터는 중도적인 이념이 되었다.
역대 지도부
틀:역대 대한국민회 총재 (개화)
역대 선거 결과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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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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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만주 입법원의 원내 구성 (개화)ㄴ
개요
협화회는 만주의 보수주의 우익 정당이다. 만주에서 민건회 다음으로 역사가 길다. 현재 제1야당으로, 민건회와 대립하고 있다.
역사
성향
사회적으로는 강력한 보수주의 성향을 띈다. 낙태와 동성결혼 합법화에 반대하며 전통적 가족 가치관을 지지한다. 다만 계파에 따라 온도차가 있다. 또한 만주어의 제2국어화를 통해 만주 국민주의를 부흥시켜 민족적 가치관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 성향을 띄어 친기업, 친시장적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법인세, 소득세 감세와 작은 정부, 공기업 민영화, 민간 부문의 일자리 창출을 지지한다. 다만 온정적 보수주의 계파인 연합파는 복지에 상당히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다.
외교적으로는 강력한 친서방주의, 태평양주의를 표방한다. 한만오 동맹 강화를 주장하고 미국 등 서방 세계와의 협력 증진을 지지하지만 중국과 러시아에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역대 선거 결과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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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균's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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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역대 대한민국 국무원 내각 (개화)
개요
1918년 11월부터 1925년 12월까지 약 7년 1개월간 이어진,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한 내각. 대한국민회의 첫 내각이었다.
상세
정치
외교·국방
내정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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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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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현장파는 사회민주당의 내부 계파이다. 보수적 사회민주주의 및 구좌파 성격을 띄고 있으며, 온건 세력인 화요파와 사민당 내 양대 계파를 이루고 있었으나 화요파의 분열 이후로는 사민당 내 최대 계파가 되었다.
역사
성향
주요 인사
원내
- 김기현 (현 중의원, 전 경상남도의원, 전 울산시지사, 전 법무성장관, 전 상공성장관, 전 울산부판윤, 전 당정책위 의정, 전 당사무총관, 전 당원무영임, 전 당비변위 의정 권한대행)
- 김문수 (현 중의원, 현 한국노동연구재단 제학, 현 당참의, 전 한성부참윤, 전 노동성장관, 전 경기도판윤, 전 경사노위 의정, 전 당원무영임, 전 당영임, 전 총리)
- 홍성열 (현 중추원 참정, 현 중의원, 현 당참의, 전 증평군지사, 전 충북도판윤, 전 건설성장관, 전 당원무부영임 전 당정책위 의정, 전 당원무영임, 전 당비변위 의정)
- 추미애 (현 중의원, 현 당참의, 전 달성군지사, 전 경상북도참윤, 전 사회민주연구원 제학, 전 당공보관, 전 농림성장관, 전 법무성장관, 전 환경성장관, 전 당전국위 의정, 전 부총리, 전 당영임)
- 권성동 (현 중의원, 현 당정책위 의정, 전 강원도의원, 전 강원도의회 의정, 전 과학기술성장관, 전 내각성장관, 전 당조직위 의정, 전 강원도판윤, 전 당원무영임)
- 김재원 (현 중의원, 전 내무성차관, 전 건설성장관, 전 내무성장관, 전 당정책위 의정, 전 당사무총관)
- 김병민 (현 당정책위 참정, 현 중의원, 전 한성부 중랑구지사, 전 당공보관, 전 당정책위 참정)
원외
- 이재오 (현 당참의, 전 명주군차사, 전 강원도참윤, 전 중의원, 전 당정책위 의정, 전 당사무참관, 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의정, 전 농림성장관, 전 상공성장관, 전 당전국위 참정)
- 송영길 (현 한월우호증진협회 공동의정, 현 시사연구소 '망치와 돈봉투' 제학, 전 인천부의원, 전 인천부참윤, 전 중의원, 전 외무성장관, 전 당원무부영임, 전 인천부판윤)
- 장예찬 (전 동래부의원, 현 당공보관)
- 왕성택 (전 비사부의원, 전 비사부 남구지사, 현 한국노동연구재단 부제학)
지자체장
- 장제원 (현 동래부판윤, 전 동래부의원, 동래부 사상구지사, 전 중의원, 전 당공보관, 전 사회민주연구원 부제학, 전 문화성장관, 전 내각성장관, 전 당전국위 의정)
- 이진교 (현 함경남도판윤, 현 당참의, 전 함경남도의원, 전 함경남도의회 의정, 전 중의원, 전 사회민주연구원 부제학, 전 노동성장관, 전 상공성장관, 전 당전국위 의정)
역대 수장
현장파 역대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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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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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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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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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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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 박용만 예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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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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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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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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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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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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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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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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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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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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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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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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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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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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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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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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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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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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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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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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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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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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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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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글씨는 국무총리를 역임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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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계파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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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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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파SDPK Tuesdayists | 중추원 새로운진보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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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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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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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N년[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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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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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산파[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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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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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당다운 사민당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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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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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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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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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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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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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숙자 / 제23대 • 1972~1973[20] 김문수 / 제30대 • 2007~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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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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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 제3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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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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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사회민주주의 시장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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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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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내셔널리즘 사회자유주의[21] 사회보수주의[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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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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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주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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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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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 - 중도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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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석 / 284석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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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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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진 이인제 천호선 한창민 원유철 조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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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곽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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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네트워크 《새로운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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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화요파 혹은 새로운진보는 사회민주당의 내부 계파이다. 사회민주주의 우파 및 중도개혁주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사회민주당 내에서 현장파 다음으로 세력이 크다. 현 의정은 정호진이다.
역사
성향
주요 인사
원내
- 김기현 (현 중의원, 전 당원무영임, 전 당비변위 의정 권한대행, 전 법무성장관, 전 상공성장관, 전 울산부판윤, 전 당정책위 의정, 전 당사무총관)
- 김문수 (현 중의원, 현 한국노동연구재단 제학, 현 당참의, 전 노동성장관, 전 경기도판윤, 전 경사노위 의정, 전 당원무영임, 전 당영임, 전 총리)
- 홍성열 (현 중추원 참정, 현 중의원, 현 당참의, 전 증평군지사, 전 충북도판윤, 전 건설성장관, 전 당원무부영임 전 당정책위 의정, 전 당원무영임, 전 당비변위 의정)
- 추미애 (현 중의원, 현 당참의, 전 사회민주연구원 제학, 전 당공보관, 전 농림성장관, 전 법무성장관, 전 환경성장관, 전 당전국위 의정, 전 부총리, 전 당영임)
- 권성동 (현 중의원, 현 당정책위 의정, 전 과학기술성장관, 전 내각성장관, 전 당조직위 의정, 전 강원도판윤, 전 당원무영임)
- 김재원 (현 중의원, 전 건설성장관, 전 내무성장관, 전 당정책위 의정, 전 당사무총관)
- 김병민 (현 비변위 위원, 현 중의원, 전 당공보관, 전 당정책위 참정)
원외
- 이재오 (현 당참의, 전 중의원, 전 당정책위 의정, 전 당사무참관, 전 국민권익위 의정, 전 농림성장관, 전 상공성장관, 전 당전국위 참정)
- 송영길 (현 한월우호증진협회 공동의정, 현 시사연구소 '망치와 돈봉투' 제학, 전 중의원, 전 외무성장관, 전 당원무부영임, 전 인천부판윤)
- 장예찬 (현 당공보관)
- 왕성택 (현 한국노동연구재단 부제학)
지자체장
- 장제원 (현 동래부판윤, 전 중의원, 전 당공보관, 전 사회민주연구원 부제학, 전 문화성장관, 전 내각성장관, 전 당전국위 의정)
- 홍준표 (현 대구부판윤, 현 당참의, 전 중의원, 전 법무성장관, 전 국방성장관, 전 당사무참관, 전 법무성장관, 전 당원무영임)
역대 수장
현장파 역대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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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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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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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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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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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 박용만 예춘호
|
1990년대[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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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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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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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00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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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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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002
|
대행
|
김문수
|
2002-2002
|
3
|
홍준표
|
2002-2004
|
4
|
이재오
|
2004-2006
|
5
|
김문수
|
2006-2018
|
6
|
추미애
|
2018-2022
|
7
|
김기현
|
2022-2023
|
굵은 글씨는 국무총리를 역임한 인물
|
비판 및 논란
타 계파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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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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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길파SDPK Frontierists | 정치유니온 세 번째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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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성일
|
2023년 2월 8일
|
전신
|
화요파
|
별칭
|
세 번째 권력, 3rd P
|
표어
|
대립을 넘는 실용정치
|
의정
|
조성주
|
좌장
|
김한길
|
이념
|
사회자유주의
|
경제 이념
|
시장자유주의 중도주의
|
사회 이념
|
문화적 자유주의 시민 내셔널리즘
|
외교 노선
|
태평양주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
스펙트럼
|
중도 - 중도좌파
|
|
110석 / 284석 (38.7%)
|
주요 인물
|
김기현 김문수 추미애 홍준표 장제원 권성동 홍성열
|
외곽조직
|
평등사회연대
|
개요
현장파는 사회민주당의 내부 계파이다. 보수적 사회민주주의 및 구좌파 성격을 띄고 있으며, 비교적 서구식 리버럴 성향에 가까운 화요파와 사민당 내 양대 계파를 이루고 있다. 현 수장은 김기현이다.
역사
성향
주요 인사
원내
- 장한휘 (현 중의원, 현 당원무부영임, 전 요동북도의원, 전 건안군지사, 전 요동북도참윤, 전 외무성장관, 전 요동성부판윤)
- 김문수 (현 중의원, 현 한국노동연구재단 제학, 현 당참의, 전 노동성장관, 전 경기도판윤, 전 경사노위 의정, 전 당원무영임, 전 당영임, 전 총리)
- 홍성열 (현 중추원 참정, 현 중의원, 현 당참의, 전 증평군지사, 전 충북도판윤, 전 건설성장관, 전 당원무부영임 전 당정책위 의정, 전 당원무영임, 전 당비변위 의정)
- 추미애 (현 중의원, 현 당참의, 전 사회민주연구원 제학, 전 당공보관, 전 농림성장관, 전 법무성장관, 전 환경성장관, 전 당전국위 의정, 전 부총리, 전 당영임)
- 권성동 (현 중의원, 현 당정책위 의정, 전 과학기술성장관, 전 내각성장관, 전 당조직위 의정, 전 강원도판윤, 전 당원무영임)
- 김재원 (현 중의원, 전 건설성장관, 전 내무성장관, 전 당정책위 의정, 전 당사무총관)
- 김병민 (현 비변위 위원, 현 중의원, 전 당공보관, 전 당정책위 참정)
원외
- 이재오 (현 당참의, 전 중의원, 전 당정책위 의정, 전 당사무참관, 전 국민권익위 의정, 전 농림성장관, 전 상공성장관, 전 당전국위 참정)
- 송영길 (현 한월우호증진협회 공동의정, 현 시사연구소 '망치와 돈봉투' 제학, 전 중의원, 전 외무성장관, 전 당원무부영임, 전 인천부판윤)
- 장예찬 (현 당공보관)
- 왕성택 (현 한국노동연구재단 부제학)
지자체장
- 장제원 (현 동래부판윤, 전 중의원, 전 당공보관, 전 사회민주연구원 부제학, 전 문화성장관, 전 내각성장관, 전 당전국위 의정)
- 홍준표 (현 대구부판윤, 현 당참의, 전 중의원, 전 법무성장관, 전 국방성장관, 전 당사무참관, 전 법무성장관, 전 당원무영임)
역대 수장
세 번째 권력 역대 수장
|
대수
|
이름
|
임기
|
1
|
조성주
|
2023-
|
굵은 글씨는 국무총리를 역임한 인물
|
타 계파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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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신기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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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신기오로 가문 爱新觉罗氏 |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ᡥᠠᠯᠠ House of Aisin-Gioro
|
|
성립일
|
1618년 4월[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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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청 태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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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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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황실
청나라 황실 후금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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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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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아이신기오로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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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
여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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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아이신기오로 가문은 만주국의 황실이다.
역사
역대 수장
|
금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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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 배너}}
<<<<공사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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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중앙은행
|
한문명
|
滿洲中央銀行, 滿銀
|
만문명
|
ᠮᠠᠨᠵᡠ ᡩᡠᠯᡳᠮᠪᠠ ᠪ᠊᠊ᠠ᠊᠊ᠩ᠊᠊ᡴ᠋[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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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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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al Bank of Manchuria, C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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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일
|
1927년 모월 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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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종
|
중앙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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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조직
|
만주국 정부 (독립기관)[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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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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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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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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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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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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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거야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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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크라이나의 행정구역 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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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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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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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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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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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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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시
|
자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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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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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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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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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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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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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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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놈들의 지도는 망했어!
국민노동당
개요
녹우크라이나의 정당. 녹우크라이나 최고의회 원내 3당이자 제1야당으로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역사
성향
전반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친노동, 태평양주의 성격을 띈다. 다만 중도부터 좌익까지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어 계파마다 지지하는 정책이 다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자세한 내용은 계파 항목을 참고하라.
계파
새로운 길
국민노동당의 전통적 온건파로, 당내 우파로 분류된다. 우크라이나 국민당 출신의 사민주의 성향 탈당파에 뿌리를 둔다.[27] 창당 초기에서부터 당내 좌파인 노동과 민주주의와 함께 당을 주도하였으며 현재는 국민노동당 내에서 가장 큰 계파다.
기본적으로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주의를 표방하지만 그와 동시에 신자유주의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제3의 길 성향이다. 실제로도 실용주의적 신노동주의를 표방한다.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면서도 시장 친화적이며 기업에도 나름 우호적이다. 새로운 길 소속 대통령인 볼로디미르 댜첸코가 이끌던 댜첸코 정부 시절에는 일부 공기업을 민영화하기도 했다.
외교적으로는 태평양주의를 넘어 강한 매파적 친서방주의 노선을 고수한다. 태평양 민주 국가들의 경제적, 정치적 통합을 지지하며 특히 극동조약기구 소속 국가들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한다.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세계에 우호적이며, 외교정책에서 서방세계와 발을 맞추려 한다. 또 서구의 영향으로 당내 주요 계파 중에서는 문화적 자유주의에 그나마 동의하는 편으로, 사회적으로 아주 약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 스펙트럼 상으로는 중도 ~ 중도좌파라는 평가를 받는다.
노동과 민주주의
국민노동당의 전통적 강경파로, 당내 좌파 세력이다. 극동공산당 탈당파에 뿌리를 두지만 스스로는 안드루셴코의 후계자임을 자처한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길과 함께 국민노동당의 양대 계파였으며 현재는 당에서 두 번째로 세력이 큰 계파이다.
사회민주주의의 우경화와 제3의 길 노선에 반대하며 따라서 신자유주의에도 부정적이다. 노동주의를 표방하며 고전적 노동주의와 신노동주의가 혼재된 모습을 보인다. 부분적으로 다만 반자본주의 성향은 아니다. 노동운동에 매우 우호적이며 노동자 권리 신장에 적극적이다. 또한 경기 부양과 복지 확대를 위한 확장재정 정책을 옹호하며 국영기업, 공영기업의 민영화에 격렬하게 반대한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라면 외국 자본의 유입도 용인한다.
외교적으로는 온건한 태평양주의 성향을 띤다. 한국과 만주 및 태평양 연안의 자유 세계 국가들과의 연합을 지지하지만 그 협력이 녹우크라이나 내정에 간섭할 가능성은 우려하며 경계한다. 서방 국가들에 우호적이기는 하지만 적극적이지는 않다. 또한 반소 성향이 없는 것은 아니나 국민노동당 내의 계파들 중에서는 그 성향이 가장 옅다. 기본적으로 소련을 자극하지 말고 충돌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치적 스펙트럼 상으로는 중도좌파 내지 좌익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진보 성향의 더 네이션 등은 중도좌파로, 보수 성향의 이브닝 스탠다드 등은 좌익으로 분류했다.
모든 문제가 경제 문제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계급 환원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노동과 민주주의는 경제 문제를 제외한 다른 녹우크라이나 국내 이슈에는 관심이 거의 없으며, 되려 사회적으로는 보수주의 성향을 띠는 면모도 가지고 있다.
소속 대통령으로는 세르히 다르킨이 있다.
애국좌파
국민노동당의 강경 민족주의 계파. 급진적이고 강경한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사회민주주의 좌파 계열을 자처하면서도 반공주의적 색채가 짙다. 원래는 당내 군소 계파였지만 2022년 총선을 기점으로 세력이 크게 확장되어 상기한 두 계파와 함께 노동당의 3대 계파로 불릴 정도로 세력이 확장되었다.
외교적으로는 반공, 반소, 반미, 태평양주의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적 관점에 따라, 녹우크라이나와 관계가 험악한 소련에 극도로 적대적이다. 또 미국에도 비우호적인데, 이는 미국이 앵커리지 조약에서 구소련의 녹우크라이나 병합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내셔널리즘 성향이 강해서 외국 자본의 녹우크라이나 유입을 곱게 보지 않는다. 또한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주요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특한 점은 자국 기업에게 한해 친기업 성향을 띤다는 것이다. 물론 동시에 노동운동에도 우호적이라 자국 기업과 자국 노동자 간의 갈등이 발생하면 적극적으로 중재하려고 한다. 반면 자국 노동자와 해외 기업 사이의 갈등에서는 거의 항상 자국 노동자 편을 지지한다. 정리하자면 친시장은 아니며 친노동이면서도 친기업인, 굉장히 특이한 입장을 내세운다.
워낙 독특하고 애매한 포지션 탓에 진보적 언론으로부터는 우익 혹은 극우로, 보수적 언론한테는 좌익이나 보수좌파로 불린다. 떠넘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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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크라이나의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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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극동공화국 헌법 Конституція Далекосхідної Республіки України Constitution of the Far-Eastern Republic of Ukra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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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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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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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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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онституція Української Далекосхідної Республіки 1991 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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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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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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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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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2월 2일 (제5차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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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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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제 - 이원집정부제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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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녹우크라이나 헌법은 우크라이나 극동공화국의 국가구조와 국민의 권리 및 의무를 담은 녹우크라이나 최고법이다. 헌법에 위배되는 모든 녹우크라이나 법률은 위헌으로 무효화된다. 1918년에 녹우크라이나의 초대 최고의회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현재까지 총 네 차례의 개정을 거쳐 현재는 제5차 헌법인 1991년 헌법이 시행되고 있다.
헌법과 관련된 권력작용을 하는 곳으로는 헌법재판을 전담하는 녹우크라이나 헌법재판소와 헌법에 반하는 모든 녹우크라이나 국내 상황을 감시하는 녹우크라이나 헌법수호위원회가 있다.
역사
내용
1918년 헌법
하자만 헌법 혹은 우크라이나 민족문화자치헌법이라고도 불리는 1918년 헌법은 녹우크라이나의 첫 헌법으로, 본토 우크라이나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의 통일을 전제하였다. 헌법 제정에는 전문과 초안을 작성한 이반 하자만과 유리 흘루슈코-모바, 베네딕트 야코벤코, 페트로 트베르도우스키 등이 제헌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재헌위원회에서 작성한 헌법안을 최고의회가 승인하면서 1918년 헌법이 제정되었다.
헌법은 우크라이나 극동 공화국이 민주공화국임과 장차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일부로 편입될 것을 천명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극동 공화국은 통일이 될 때 까지만 유지될 임시적인 국가조직이었고 여타 타국의 헌법에 비해 간략한 편이었다. 헌법은 국민주권을 명시하였으며, 정치 체제로는 삼권분립, 단원제, 대통령 우위 이원집정부제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녹우크라이나 1918년 헌법 보러 가기
1923년 헌법
1922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모든 영토를 완전히 잃고 망명정부 신세로 전락하고 오히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일부가 되여고 했던 녹우크라이나가 존속함에 따라 양측의 상황이 변화했다. 이에 녹우크라이나 최고의회는 새로운 상황에 맞춰 헌법 개정에 착수하였고 이듬해인 1923년 신헌법을 공포했다.
헌법 전문에서 녹우크라이나가 본토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적극 지원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으며, 부실했던 1918 헌법 조항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추가 기술하였다. 이것 외에는 특별한 변경점은 없었다. 개헌 실무는 법무부장관이었던 하자만이 주도했다.
1942년 헌법
제3차 극동전쟁과 앵커리지 조약으로 인해 녹우크라이나 제1공화국 정부가 한성에 망명정부를 꾸리면서 신헌법의 도입이 필요해졌다. 이에 망명정부는 망명정부의 조직과 구성 등을 담은 1942년 헌법을 제정하였다.
흐레샤티츠키 대통령은 새 헌법이 국가위기를 이유로 대통령에게 막대한 권력을 집중시키도록 하였다. 총리 임명 절차에서 최고의회의 동의를 삭제해 대통령의 지명만으로 총리 임명이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대통령 선거는 전국민 직선에서 임시최고의회의 간선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대통령의 비상대권으로 헌법 일부를 정지시킬 수 있게 하였다.
1942년 헌법의 제정으로 녹우크라이나 제1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했다.
1952년 헌법
1공화국 시절에 선출된 흐레샤티츠키 대통령이 사망하자 총리였던 페디르 스테슈코가 간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망명정부 내의 몇몇 세력이 권력이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집중되어있다고 주장하였고, 이들의 이의를 받아들인 스테슈코는 헌법 개정 절차에 착수했다. 1952년, 개헌 착수 7개월만에 임시최고의회에서 헌법개정안이 통과되었다.
1952년 헌법은 권력의 분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우선 1942년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이 임시최고의회의 동의 없이도 임명할 수 있게 되었었던 총리직이 폐지되었다. 또 국정운영의 최고의결기관으로 대통령위원회를 구성하여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했다. 총 8인인 대통령위원회 위원은 대통령선거와는 별개의 투표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은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으며, 위원회에서 특정 안건에 대하여 찬반이 동수일 경우 대통령이 지지한 쪽의 의견이 통과되도록 하였다.
1991년 헌법
레몬탕
옥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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Український націоналізм / Ukrainian Nationalism
개요
우크라이나의 내셔널리즘 대해 다루는 문서이다.
역사
유럽
언어와 문화로 전래된 민족성은 코사크 시절부터 존재했으나, 근대적 의미의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이 떠오른 것은 19세기부터이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 동할리치나는 우크라이나인이 다수를 차지하였는데,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에 자극을 받은 우크라이나인 엘리트들이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의 부흥을 시작하였다.
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자 러시아 제국령이었던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기반한 우크라이나인 민족국가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동할리치나)의 민족주의자들 역시 우크라이나인 민족국가인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하지만 정치적 혼란 등으로 인해 두 민족국가는 구소련과 폴란드에 의해 멸망, 분할되었다. 이후 구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는 홀로도모르로 인해 우크라이나 민족 정체성이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 폴란드령 동할리치나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OUN)으로 대표되는 극우 민족주의가 발흥했다. OUN은 동할리치나에서 쿠반과 캅카스에 이르르는 거대한 우크라이나 민족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며 폴란드인, 유대인,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테러를 저질렀다.
2차 세계대전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구소련에 맞서기 위해 나치독일과 협력하고자 했으나, 나치독일 역시 우크라이나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민족주의자들은 나치독일과 구소련 양쪽 모두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구소련 등의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구소련군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면서 유럽에서의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 운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
1980년대 데탕트의 분위기 속에서 구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사회 자유화 정책을 시행하자 물밑에 잠겨있던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빅토르 유셴코 등의 일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 독립을 목표로 활동하였고 마침내 우크라이나 독립여뷰를 묻는 투표가 유크라이나에서 개최되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독립투표에서 독립안이 부결되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주권공화국이 되어 소비에트 주권공화국 연합, 일명 신소련에 합류하면서 또다시 독립은 좌절되었다.
극동
19세기 러시아 제국은 새로 획득한 시베리아와 극동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유럽 영토의 슬라브인을 극동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다. 이중에는 우크라이나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있었다. 극동으로 이주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주로 하바리우스크와 볼로디스히드(당시 명칭은 블라디보스토크) 등에 정착했다. 20세기 초 기준으로 연해주 인구의 40% 이상이 우크라이나인일 정도로 우크라이나인의 극동 이주는 활발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에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러시아 제국을 전복하면서 러시아 전역은 혼란에 빠졌다. 본토 우크라이나에서 민족주의 엘리트들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이에 자극받은 극동의 우크라이나인들 역시 우크라이나 민족국가인 우크라이나 극동 공화국을 건국했다. 이 신생 공화국에는 우크라이나 전통의 사방위 색상 전통에 따라 녹색 우크라이나 혹은 녹색 쐐기(젤레니 클린)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국의 지원을 밭은 녹우크라이나는 본토 우크라이나와의 정치적 통합을 원했지만 본토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외세의 침공과 내부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겪다가 결국 구소련에 완전히 병탄당하며 우크라이나 통합 계획은 무산되었다. 본토 우크라이나와 독자노선을 걸을 수 밖에 없게 된 녹우크라이나는 구소련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 부흥에 매진했다. 모든 학교에서 우크라이나와 수업이 의무화되었으며 모든 공문서는 우크라이나어로만 작성되었다. 또 좌우파에 상관 없이 녹우크라이나의 주요 정치 세력들은 모두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을 적극 지지하였다. 녹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럽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망명정부를 암암리에 지원하기도 하였다.
1940년, 구소련의 침공으로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하면서 극동에서의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은 위기에 처했다. 구소련군이 물밀듯이 쳐들어오며 녹우크라이나 전역을 점령하자 녹우크라이나 정부와 민족주의자들은 한국 본토로 피신하였고 녹우크라이나군도 계속해서 구소련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앵커리지 조약으로 녹우크라이나가 구소련에 병탄되면서 한국땅으로 피신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망명정부를 세웠다.
녹우크라이나 망명정부는 한국땅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을 규합하고 구소련령이 된 녹우크라이나에 대한 내셔널리즘 선전활동을 계속하였다.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망명정부의 유격대가 녹우크라이나로 침입하고 녹우크라이나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구소련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녹우크라이나에서의 내셔널리즘 운동은 구소련 당국의 극심한 탄압으로 큰 피해를 입고 완전히 지하화되었다. 한 편, 만주에서 만주 내전이 발발하자 만주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만주 정부군과 손을 잡고 구소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반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1980년대가 되며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따라 사회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워졌고 구소련령 녹우크라이나인 극동 SSR에서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녹우크라이나 망명정부의 지원을 받은 이들 내셔널리즘 세력은 녹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본토 우크라이나와 달리 훨씬 더 나중에 구소련에 병합된 녹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정체성이 본토 우크라이나보다 훨씬 짙었고, 덕분에 1991년에 치러진 독립 투표에서 독립 68%, 잔류 32%의 결과가 나오면서 녹우크라이나는 독립하였다.[28]
현황
녹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SSR
기타 지역
관련 단체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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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크라이나의 보수 진영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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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크라이나의 진보 진영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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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크라이나의 자유주의 진영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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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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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민노토
- 자유주의
- 국바세(보수자유주의): 이준석, 천하람, 허은아, 김용태
- 여시재(시장자유주의): 이광재, 김동연, 조정훈
- 보수본류
- 바른정치(공화주의): 유승민, 하태경, 유의동, 류성걸, 오신환
- 새보수(자유보수주의): 정병국, 원희룡, 남경필, 조응천
- 청류회(온건 보수주의): 나경원, 오세훈, 최재형
- 새미래(사회보수주의): 이낙연, 박광온, 이원욱
- 보수방류
- 자유한국(국민보수주의): 홍준표, 조경태, 김용판
- 처럼회(우익대중주의): 이재명, 정청래, 조정식
인구 최라
- 볼로 312 31
- 프리 326 32
- 모바 257 25
- 티흐 272 27
- 우수 211 21
- 하바 255 25
- 하카 225 22
- 스보 283 28
- 아무 189 19
- 이미 27 3
- 사할 85 9
- 비라 146 14
- 제이 123 12
- 우다 172 17
- 부레 106 11
- 추미 15 2
- 3,004 301
- ↑ 비변위의정 대행
- ↑ 민족주의+사회자본주의
- ↑ 해산 당시 기준
- ↑ 오른쪽 열 한 번째가 이승만.
- ↑ 5.0 5.1 5.2 5.3 5.4 5.5 대한민주당과 선거연대
- ↑ 발음 : 아이실란 타이핀 사타아
- ↑ 원내대표
- ↑ 사무총장
- ↑ 회파 형성
- ↑ 중추원 의원연구단체 등록
- ↑ 국무총리를 역임한 당산 김철이 이끌던 계파
- ↑ 사회민주당 부영임을 역임한 영암 박용만이 이끌던 계파
- ↑ 김영삼 내각 초기 당시 부총리 겸 국토건설성장관를 역임한 세명 제정구가 이끌던 계파
- ↑ 김철은 총리 재임 당시에는 양산파 소속이었다.
- ↑ 경제적으로는 중도좌파와 좌익에 걸쳐져있다는 평가를 받으나 사회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 ↑ 현장파가 정식 중추원 의원연구단체로 등록되기 전
- ↑ 회파 형성
- ↑ 중추원 의원연구단체 등록
- ↑ 국무총리를 역임한 거산 김영삼이 이끌던 계파
- ↑ 김철은 총리 재임 당시에는 양산파 소속이었다.
- ↑ 21.0 21.1 회파 내 구성원들의 의견에 편차가 있어 사회적 이념이 명확하지 않다.
- ↑ 현장파가 정식 중추원 의원연구단체로 등록되기 전
- ↑ 아이신기오로 성씨 사용 시작
- ↑ 발음 : 만주 투림파 방크
- ↑ 국무원 소속이 아니며 따라서 내각이나 수상의 지시를 받지 않는다.
- ↑ 발음 :
- ↑ 지금에야 국민당이 보수우익 정당이지만 망명정부 시절의 국민당은 중도좌파부터 우익을 아우르는 포괄정당이었다.
- ↑ 물론 독립이 압도적으로 가결된 게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 덕분만은 아니었다. 당시 구소련 경제는 극심한 침체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녹우크라이나가 독립하면 독립을 지지하는 한국의 경제적 지원을 받을 거란 기대감도 깔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