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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7일 (토) 00:2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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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투쟁회의 三民鬪爭會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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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민족해방민주쟁취민중혁명투쟁회의 民族解放民主爭取民衆革命鬪爭會議 | ||
영문 명칭 | National Congress for Struggle | ||
슬로건 | 백배하라 삼민투 | ||
약칭 | 삼민회의, 삼민투, NCS | ||
설립일 | 1981년 2월 24일 | ||
정당 등록일 | 1987년 7월 1일 | ||
주석 | 이낙연 / 4선 (3-5·7대) | ||
의장 | |||
사무총장 | 홍영표 / 4선 (5-8대) | ||
이념 | 사회민주주의 반제국주의 좌익 민족주의 제3의길 | ||
스펙트럼 | 중도 ~ 중도좌파 | ||
중의원 의석 | 143석[1] / 400석 (35.8%) | ||
도부지사 | 13석 / 17석 (76.7%) | ||
당색 | 노란색 (#FADA5E) | ||
초록색 (#006241) | |||
국제 조직 |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 ||
가입 정당 | 신민당 근로인민당 조선공산당 | ||
청년 조직 | 삼민투쟁회의 청년연맹 | ||
여성 조직 | 삼민투쟁회의 여성연맹 | ||
노동조합 |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평) | ||
당원 수 | 3,572,639명 (2024년 1월) | ||
당가 | 애국가 | ||
공식 사이트 | |||
웹사이트 | | | | |
개요
삼민투쟁회의(
1989년 민족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한번도 빠짐 없이 장기집권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조선 최대의 정당이며, 과거에 비해 영향력이 줄었다 한들 노동계, 언론, 시민단체와의 끈끈한 공조를 통해 여전히 조선 사회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당명
당명에 삼민이 들어가기 때문에 손중산이 주창한 삼민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오해받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삼민주의와 연관이 없다. 다만, 김대중은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투쟁을 회통한 손중산 선생을 기리는 면에서 삼민이라는 약칭을 사용했음을 자신의 저서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삼민투쟁회의의 공식명칭은 민족해방, 민주쟁취, 민중혁명 투쟁회의이다. 이는 좌파와 중도의 이념을 넓게 포괄한다는 의미에서 공산당 등 독립운동 계열이 강조한 민족해방, 반투위 등 민주계열이 강조한 민주쟁취, 그리고 전평 등 노조 계열이 강조한 민중혁명을 포함시킨 것이다.
영어로는 번역하기 곤란한 명칭이기에, National Congress for Struggle이라는 명칭(약칭 NCS)이 사용되고 있다.
당가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보전하세 |
삼민투찬가
보아라 저기 물결 쳐오는 해방된 조국반도를 팔천만 민족과 몰아치는 백만의 당찬 파도를 일제의 총칼이 드리워도 항일투쟁의 심장으로 고난의 행군은 승리의 약속 민족해방 깃발되어 아아아 솟구쳐오는 자주독립조국의 영광 승리의 백만 당원이여 백배하여라 삼민회의여 |
역사
성립
1948년 조선자치령의 성립으로 조선의 정치 역시 자유화되었고, 민주당과 자유당, 근로인민당 등 여러 정당이 설립되어 활동하였다. 조선계 정치인의 경우 정치 활동이 일부 제한되긴 하였으나 주로 근로인민당, 일부는 중도진보 계열인 민주당에 입당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2년 다카기 군정의 성립과 뒤이은 1974년 기타주의 정권 성립으로 야권의 정치활동이 탄압되었고 특히 1974년 이후 조선계의 정계 활동이 전면 금지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계 야권 세력과 일부 일본계 좌익 세력은 지하화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민주당에서 활동하던 중도 성향의 조선계 정치인들은 신민당을 창립했으며, 근로인민당은 지하조직화되어 활동하였다. 1978년, 근로인민당의 백철과 신민당의 김영삼이 비밀리에 회동해 좌우 합작 노선을 천명하였고, 이에 따라 신민당과 근로인민당, 일본계 좌익 지하조직을 포괄하는 반독재투쟁위원회(반투위)가 창립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기타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또다른 주요 조직으로는 하바롭스크에 본부를 두고 있던 이재유, 김일성의 조선공산당과 그 산하 지하노조인 전평이 있었다. 반투위와 조공은 거의 세력이 대등하였는데, 독립운동의 경력으로 보자면 조공이 반투위에 비해 더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합작의 수준을 놓고 반투위 내에서는 조공과 전평을 포함시키자는 PF[Popular Front; 인민전선]파와 극좌 배제를 천명한 DF[Democratic Front; 민주전선]파가 나뉘었다. 이중 김대중, 김영삼을 포괄한 PF파가 승리해 1980년 12월 27일 반투위와 조공 합작노선이 결정되었다.
조공 내에서는 별다른 반대 없이 김일성의 통일전선 노선에 따라 반투위와의 합작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81년 2월 24일 하바롭스크에서 반투위의 대표자였던 김대중과 조공의 서기장 김일성이 합의하여 조선공산당, 전평, 반투위를 아우르는 통일전선 기구인 삼민투쟁회의를 발족시켰다.
한편 DF파는 반투위에서 이탈해 독자적으로 자유민주당을 구성했다가, 1983년 관북 지역의 민족 기독교 단체와 연합해 관북인민위원회라는 독자적 민주투쟁 기구를 형성한다.
태동
조선계 다수와 일본계 내 좌익의 통일된 민주기구를 자처한 삼민투쟁회의는 조선인 사회에서 급속하게 지지를 받았다. 국제적으로는 1982년 UN 상임이사회는 만장일치로 삼민투쟁회의의 투쟁을 정당한 것으로 규정하고 지지를 결정하였으며, 조선 기타주의 정권을 불법 정권으로 규정했다. 반면 조선공화국 정부는 1981년 3월 삼민투를 테러 조직으로 규정, 지하 조직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1981년 12월 기준으로 약 105만명이었던 삼민투의 회원은 1985년 5월 기준으로 300만명에 이르렀으며, 비공식 집계까지 합하면 추정치는 750만 이상이었다. 300만의 확인되는 회원 중 절반 이상인 170만명 가량이 전평의 조합원이었다. 전평은 당국의 탄압으로 인해 수가 줄긴 하였으나 여전히 조선의 제1노조 지위를 굳건히 하였다. 조선공산당의 회원수는 30만명이었고 20만명은 반투위 출신이었다. 그 외 80만명은 여러 경로를 통해 입회한 사람들이었다.
1986년 조선공화국 당국의 비밀 여론조사에서 공화국을 지지하는 여론은 13.6%에 지나지 않았으며 66.8%가 삼민투를 지지하고 있었다. 조선계에서 그 수치는 80% 이상이었고 일본계 내에서도 최소한 35% 이상이 삼민투를 어떤 형식으로든 지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삼민투의 압도적인 활동적 우세는 조선공화국 당국을 크게 압박하였다.
1986년 건국대학교 항쟁을 계기로 삼민투는 더욱 적극적인 투쟁 노선을 내세우게 되었으며, 이러한 투쟁 노선은 1987년 1월부터 6월까지 이어지는 광범위한 전민항쟁으로 이어졌다. 1987년 경성제국대학교 재학생 박종철의 고문치사로 일어난 전민항쟁 과정에서 삼민투 지도부가 전평을 동원하여 시위를 주도적으로 전개하였으며, 이러한 항쟁은 1987년 6월 조선 정부가 결국 개헌안을 수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87년 12월 제헌의회 선거에서 삼민투가 선거에 참여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국민투표를 거쳐 의회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공화국으로 체제가 전환되었다.
김대중 정부
김영삼 정부
김정일 정부
손학규 정부
이낙연 정부
구조
삼민투쟁회의는 공식적으로 정당으로 등록되어있지만, 이중당적제가 허용되는 조선의 정치제도상, 삼민회의 내에 여러 정당이 참여하고 있어, 정당연합으로서의 성격도 띄고 있다. 삼민회의 내에 속한 정당은 신민당, 근로인민당, 조선공산당이 있다. 세 정당은 삼민회의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노동조합 중에서는 여전히 조선의 제1노조인 전평이 참여하고 있다.
삼민회의의 당수는 의장이며, 의장은 5년에 한번 대의원단의 투표를 통해 선출된다. 1989년 이래 삼민회의가 줄곧 집권하였기에 삼민회의 의장 투표는 사실상 주석 선출과 동일하게 여겨진다.
의장 밑에 10명의 중앙당 정치국위원이 있으며, 의장과 정치국위원을 합친 11명이 하나의 의결기루를 이루어 11명 중 6명 이상의 동의를 통하여 당의 방침을 수립, 수정한다.
이념
삼민투쟁회의의 공식적인 투쟁 노선은 민족민주혁명론(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NDR)이다. 초창기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주장한 시민민주혁명론(CDR)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주장한 인민민주혁명론(PDR), 남아메리카 사회주의를 본뜬 급진적 반제혁명론(AIR)도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NDR 노선이 승리해서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를 표방하는 민족해방 노선을 추구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조선 내셔널리즘과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집권한지 35년이 되어가는 현재로서는 초창기의 급진성이 누그러졌고, 도리어 1990년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며 제3의길로 선회, 사실상 좌파로 부르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제1노조 전평의 온건화와 더불어, 조선계 부르주아의 성장으로 인하여 삼민회의가 이들을 대변하며 투쟁적 사회주의를 내세우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외교적으로도 항일을 더이상 내세우지 않고 도리어 일본과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 경향도 관찰된다.
정파
역대 선거 결과
여담
- 1980년대 존재했던 학생 민주화 조직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약칭 삼민투)에서 이름을 따왔다. 허인회, 김민석, 함운경 등이 핵심 간부로 활동했던 조직이었으며 이후 자민투(AIPDR을 거쳐 NLPDR을 형성)와 민민투(CNP에서 CA를 거쳐 PD를 형성)로 분열되었다.
- ↑ 권역별 107석, 전국구 36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