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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그레고어 슈트라서]] 서기장의 사망 이후, 최고지도자 직위에 오른 [[파울 요제프 괴벨스 (맑스)|괴벨스]]는 대대적인 국가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을 중단하고 [[대테러]]를 공식적으로 종결했으며, 정치범들을 대거 석방했다. "오인된" 숙청의 책임자들은 대부분 권력에서 밀려났는데, 이는 슈트라서 정권 시기 정권의 핵심으로 부상한 [[비밀국가경찰]]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1952년, 괴벨스는 비밀국가경찰이 2차 세계대전과 전후 처리과정을 통해 "역사적 소임"을 다했으며, 이에 따라 비밀국가경찰을 해체하고 새로운 방첩기구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1952년 2월 8일 게슈타포를 계승하여 설치된 방첩기관이 '''슈타지'''이다. | 1949년 [[그레고어 슈트라서]] 서기장의 사망 이후, 최고지도자 직위에 오른 [[파울 요제프 괴벨스 (맑스)|괴벨스]]는 대대적인 국가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을 중단하고 [[대테러]]를 공식적으로 종결했으며, 정치범들을 대거 석방했다. "오인된" 숙청의 책임자들은 대부분 권력에서 밀려났는데, 이는 슈트라서 정권 시기 정권의 핵심으로 부상한 [[비밀국가경찰]]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1952년, 괴벨스는 비밀국가경찰이 2차 세계대전과 전후 처리과정을 통해 "역사적 소임"을 다했으며, 이에 따라 비밀국가경찰을 해체하고 새로운 방첩기구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1952년 2월 8일 게슈타포를 계승하여 설치된 방첩기관이 '''슈타지'''이다. | ||
1952년 초대 국장으로 [[에리히 밀케]](Erich Mielke)가 지명되었다. 기존 비밀경찰국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잠깐 체코의 서기장으로 발령받았다가, 이후 내무장관(1965~1968)으로 등용되었다. 밀케는 기존 하이드리히와 힘러의 인사들을 배제하고자 노력했는데, 이는 경쟁자였던 하이드리히, 제르진스키, 힘러의 권한을 줄이고 싶었던 괴벨스의 의중이었다. | |||
1950년대에는 전세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는 뒷공작을 주도했다면, 1950년대 후반부터는 점차 체제가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국외 혁명 수출보다도 국내 방첩에 신경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8년 이전에는 국민 175명 당 협력자 1명이라는, '''175:1''' 수준의 높은 감시망을 갖추고 세계 최대의 방첩기구로서의 위용을 드러냈다. 그러나 1968년 [[문화대혁명]]을 통해 국가보안부의 [[관료주의]]가 비판받기 시작했고, 일부 국가보안부 소속 관료들은 대학생들에 의해 [[자아비판]]을 하기도 해야했다. [[헤르베르트 프람]] 서기장에 의해 내무장관으로 지명된 [[한스 디트리히 겐셔]] 내무장관은 국가보안부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고, 기존에 존재했던 국가보안장관 직위를 철폐하고 내무부 산하로 국가보안부를 통합시키고 국가보안부 장관 직위를 내무장관이 당연직으로 겸하도록 하였다. | |||
그러나 겐셔의 개혁은 국가보안부의 역량을 저하시켰다는 비판을 야기했고, [[뮌헨 올림픽 참사]]의 주범을 제거하기 위한 "신의 분노" 작전에서 민간인을 테러범으로 헛지목해 살해하는 "[[릴레함메르의 참사]]"가 일어난 후로 국가보안부의 위상이 공산권 내에서도 크게 떨어져 한때는 북유럽 정보망이 붕괴 직전까지 간적도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에리히 호네커]]는 서기장의 직속 권한을 이용해 내무장관에 [[에리히 밀케]]를 임명해, 내무장관과 국가보안국장 직위를 일시적으로 통일시켰다. 다시 권력을 잡은 밀케는 1988년까지 국장 겸 장관 직무를 보면서 미국과 영국 등 제국주의 진영을 상대로 한 고강도의 정치공작을 주도해, [[서구권 혁명]]을 유도하였다. | |||
1991년 밀케가 무려 '''39년'''만에 국장 직위에서 퇴임한 후, 온건파 [[샤브타이 샤비트]]가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샤비트 국장은 [[니콜라스 네메트]] 서기장의 지지자였고, 그의 재임 기간 도중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다. 영장 없는 수색을 금지시켰고, 범죄 혐의자에 대한 고문을 폐지했으며, 내부 방첩국을 축소시켰다. 2002년 취임한 [[마이어 다간]] 국장은 국제적인 수준의 공작을 활성화시킴과 동시에 내부 개혁을 추구했다. | |||
2024년 [[브와디스와프 레빈슨]] 국장의 퇴임을 통해, 첫 여성 국장이자 밀케 이후 최초의 非유대인 국장인 [[이리나 슬레차크]]가 국장으로 지명되었다. | |||
== 산하 조직 == | == 산하 조직 == | ||
== 역대 국장 == | == 역대 국장 == |
2024년 10월 3일 (목) 19:41 판
라트 연방의 방첩 · 정보 기관 | |
비밀국가경찰 (1924~1952) |
국가보안부 (1952~ ) |
국가보안부 Ministerium für Staatssicherheit | |
표어 | 당의 방패와 검 (Schild und Schwert der Partei) |
---|---|
국가 | 라트 연방 |
소속 |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라트 연방 내무부 |
창설 | 1952년 2월 8일 (비밀국가경찰에서 조직 승계) |
주소 | 지도를 불러오는 중... |
프로이센 FSRR 베를린 10963 제르진스키거리 8 | |
장관 (내무장관 겸임) |
올라프 숄츠 (Olaf Scolz) |
국장 | 이리나 슬레차크 (Irina Slezák) |
부국장 | 아브라힘 베나비츠 (אבראהים בענאװיץ) |
소속 인원 | 약 650,000명[1] |
개요
Eine Armee ohne Anführer ist besiegt, aber eine Armee mit vielen guten Stäben gewinnt. (צבא ללא מנהיג מובס, אבל צבא עם הרבה סגלים טובים מנצח) 지휘자 없는 군대는 패하고 좋은 참모가 많으면 승리한다. 5대 국장 마이어 다간 |
국가보안부(독일어: Ministerium für Staatssicherheit 미니스테리움 퓌어 슈타츠지셔하이트[*]), 줄여서 슈타지(독일어: Stasi)는 라트 연방의 방첩 기관 겸 정보 기관이다. 슈타지는 국가(Staat)와 보안(Sicherheit)의 약자이다.
역사
1949년 그레고어 슈트라서 서기장의 사망 이후, 최고지도자 직위에 오른 괴벨스는 대대적인 국가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을 중단하고 대테러를 공식적으로 종결했으며, 정치범들을 대거 석방했다. "오인된" 숙청의 책임자들은 대부분 권력에서 밀려났는데, 이는 슈트라서 정권 시기 정권의 핵심으로 부상한 비밀국가경찰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1952년, 괴벨스는 비밀국가경찰이 2차 세계대전과 전후 처리과정을 통해 "역사적 소임"을 다했으며, 이에 따라 비밀국가경찰을 해체하고 새로운 방첩기구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1952년 2월 8일 게슈타포를 계승하여 설치된 방첩기관이 슈타지이다.
1952년 초대 국장으로 에리히 밀케(Erich Mielke)가 지명되었다. 기존 비밀경찰국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잠깐 체코의 서기장으로 발령받았다가, 이후 내무장관(1965~1968)으로 등용되었다. 밀케는 기존 하이드리히와 힘러의 인사들을 배제하고자 노력했는데, 이는 경쟁자였던 하이드리히, 제르진스키, 힘러의 권한을 줄이고 싶었던 괴벨스의 의중이었다.
1950년대에는 전세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는 뒷공작을 주도했다면, 1950년대 후반부터는 점차 체제가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국외 혁명 수출보다도 국내 방첩에 신경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8년 이전에는 국민 175명 당 협력자 1명이라는, 175:1 수준의 높은 감시망을 갖추고 세계 최대의 방첩기구로서의 위용을 드러냈다. 그러나 1968년 문화대혁명을 통해 국가보안부의 관료주의가 비판받기 시작했고, 일부 국가보안부 소속 관료들은 대학생들에 의해 자아비판을 하기도 해야했다. 헤르베르트 프람 서기장에 의해 내무장관으로 지명된 한스 디트리히 겐셔 내무장관은 국가보안부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고, 기존에 존재했던 국가보안장관 직위를 철폐하고 내무부 산하로 국가보안부를 통합시키고 국가보안부 장관 직위를 내무장관이 당연직으로 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겐셔의 개혁은 국가보안부의 역량을 저하시켰다는 비판을 야기했고, 뮌헨 올림픽 참사의 주범을 제거하기 위한 "신의 분노" 작전에서 민간인을 테러범으로 헛지목해 살해하는 "릴레함메르의 참사"가 일어난 후로 국가보안부의 위상이 공산권 내에서도 크게 떨어져 한때는 북유럽 정보망이 붕괴 직전까지 간적도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에리히 호네커는 서기장의 직속 권한을 이용해 내무장관에 에리히 밀케를 임명해, 내무장관과 국가보안국장 직위를 일시적으로 통일시켰다. 다시 권력을 잡은 밀케는 1988년까지 국장 겸 장관 직무를 보면서 미국과 영국 등 제국주의 진영을 상대로 한 고강도의 정치공작을 주도해, 서구권 혁명을 유도하였다.
1991년 밀케가 무려 39년만에 국장 직위에서 퇴임한 후, 온건파 샤브타이 샤비트가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샤비트 국장은 니콜라스 네메트 서기장의 지지자였고, 그의 재임 기간 도중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다. 영장 없는 수색을 금지시켰고, 범죄 혐의자에 대한 고문을 폐지했으며, 내부 방첩국을 축소시켰다. 2002년 취임한 마이어 다간 국장은 국제적인 수준의 공작을 활성화시킴과 동시에 내부 개혁을 추구했다.
2024년 브와디스와프 레빈슨 국장의 퇴임을 통해, 첫 여성 국장이자 밀케 이후 최초의 非유대인 국장인 이리나 슬레차크가 국장으로 지명되었다.
산하 조직
역대 국장
여담
같이 보기
- ↑ 정확한 숫자는 법적으로 기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