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내각 (개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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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1차 내각은 30년 가까지 이어진 훈정을 끝내고, 헌정에 기반한 의회정치를 도입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임시중추원을 통해 헌법을 제정하여 기존의 임시헌법을 대체하였다. 새 헌법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중추원이 의원들의 투표를 통해 실권자이자 정부수반인 국무총리를 선출하는 전형적인 의원내각제의 핵심요소를 가졌다. 다만 보수적 농촌의 투표력을 우려한 내각은 선거법 제정으로 참정권을 개화정책을 지지하는 일부 계층에게만 한정하여 수구파가 정권을 차지할 가능성을 낮췄다. 서재필은 헌법 제정 직후 경성신문, 국민신보, 경향신문 등의 기자들이 모인 기자회견에서 취임 이듬해인 1914년에 중추원의원을 선출하는 첫 총선을 실시한다고 못박았으며, 이를 통해 과두정으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인 개화정부를 의회민주정으로 운영되는 의회정부로 대체하겠다고 선언했다.  
서재필 1차 내각은 30년 가까지 이어진 훈정을 끝내고, 헌정에 기반한 의회정치를 도입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임시중추원을 통해 헌법을 제정하여 기존의 임시헌법을 대체하였다. 새 헌법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중추원이 의원들의 투표를 통해 실권자이자 정부수반인 국무총리를 선출하는 전형적인 의원내각제의 핵심요소를 가졌다. 다만 보수적 농촌의 투표력을 우려한 내각은 선거법 제정으로 참정권을 개화정책을 지지하는 일부 계층에게만 한정하여 수구파가 정권을 차지할 가능성을 낮췄다. 서재필은 헌법 제정 직후 경성신문, 국민신보, 경향신문 등의 기자들이 모인 기자회견에서 취임 이듬해인 1914년에 중추원의원을 선출하는 첫 총선을 실시한다고 못박았으며, 이를 통해 과두정으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인 개화정부를 의회민주정으로 운영되는 의회정부로 대체하겠다고 선언했다.  


내각은 임시중추원과의 작업을 거쳐, 약속대로 이듬해인 1914년에 총선을 실시했다. 총선거가 실시됨에 따라 제1차 서재필 내각은 해소되었다.
내각은 임시중추원과의 작업을 거쳐, 약속대로 이듬해인 1914년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지도자를 선출하는 기념비적인 1회 총선을 실시했다. 총선거가 실시됨에 따라 제1차 서재필 내각은 해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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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6일 (목) 01:08 판


역대 대한민국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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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내각
徐載弼内閣 | Seo Jae'pil Cabinet
1913년 월 일 ~ 1919년 월 일
출범 이전 해소 이후
윤치호 내각 제1차 이승만 내각
국무집정 유혁로 / 제7대 · 개화당 (~1916)
신응희 / 제8대 · 개화당 (1916~)
국무총리 서재필 / 제7대
주요 선거 제1회 총선 (1914)
제2회 총선 (1917)
기간 1차 : 1913년 월 일 ~ 1914년 월 일
2차 : 1914년 월 일 ~ 1917년 월 일
3차 : 1917년 월 일 ~ 1919년 월 일
여당
서재필 국무총리

개요

서재필 국무총리 취임식[1]

1911년 NN월에 출밤하여 1919년 NN월에 해소된, 약 N년 N개월간 존속한, 서재필을 국무총리로 한 내각. 개화당의 마지막 내각이었다.

서재필 내각은 훈정 체제의 마지막 내각이자 헌정 체제의 첫 내각이었다. 또한 개화기의 마지막 내각이자 천금의 시대의 첫 내각이었다.

상세

제1차 내각

제1차 서재필 내각
第一次徐載弼内閣
First Seo Jae'pil Cabinet
1913년 월 일 ~ 1914년 월 일
출범 이전 해소 이후
제2차 서재필 내각
국무집정
국무총리 서재필 (제7대 / 개화당)
국무부총리
선거 -[2]
여당 개화정부

이전 국무총리인 윤치호는 국민이 의회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다른 개화지사들과 갈등을 빚었고, 이미 수 년 내로 새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심한 개화당 지도부는 윤치호에게 사임을 압박해 결국 윤치호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총리직에서 하야하였다. 이에 따라 대표적 개화지사이자 당시 국무원총서였던 서재필이 새 국무총리로 추대되었다. 일각에서는 서재필이 윤치호의 친한 친우인 점을 들어 윤치호가 서재필에세 친분을 무기로 총선 연기를 종용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으나 서재필은 자신은 사사로운 정에 얽메이지 않는다고 하며 논란을 일축, 제7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서재필 1차 내각은 30년 가까지 이어진 훈정을 끝내고, 헌정에 기반한 의회정치를 도입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임시중추원을 통해 헌법을 제정하여 기존의 임시헌법을 대체하였다. 새 헌법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중추원이 의원들의 투표를 통해 실권자이자 정부수반인 국무총리를 선출하는 전형적인 의원내각제의 핵심요소를 가졌다. 다만 보수적 농촌의 투표력을 우려한 내각은 선거법 제정으로 참정권을 개화정책을 지지하는 일부 계층에게만 한정하여 수구파가 정권을 차지할 가능성을 낮췄다. 서재필은 헌법 제정 직후 경성신문, 국민신보, 경향신문 등의 기자들이 모인 기자회견에서 취임 이듬해인 1914년에 중추원의원을 선출하는 첫 총선을 실시한다고 못박았으며, 이를 통해 과두정으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인 개화정부를 의회민주정으로 운영되는 의회정부로 대체하겠다고 선언했다.

내각은 임시중추원과의 작업을 거쳐, 약속대로 이듬해인 1914년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지도자를 선출하는 기념비적인 1회 총선을 실시했다. 총선거가 실시됨에 따라 제1차 서재필 내각은 해소되었다.

제2차 내각

제2차 서재필 내각
第二次徐載弼内閣
Second Seo Jae'pil Cabinet
1917년 월 일 ~ 1919년 월 일
출범 이전 해소 이후
제1차 서재필 내각 제3차 서재필 내각
국무집정
국무총리 서재필 (제7대 / 개화당)
국무부총리 이승만 (외무성총판 겸임 / 개화당)
선거 제1회 총선 (1914)
여당

제3차 내각

제3차 서재필 내각
第三次徐載弼内閣
Third Seo Jae'pil Cabinet
1917년 월 일 ~ 1919년 월 일
출범 이전 해소 이후
제2차 서재필 내각 제1차 이승만 내각
국무집정
국무총리 서재필 (제7대 / 개화당)
국무부총리
선거 제2회 총선 (1917)
여당

둘러보기

틀:서재필 관련 문서 (개화) 틀:개화당 관련 문서 (개화)

각주

  1.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서재필 총리. 그 오른쪽에 고개를 살짝 돌린 사람이 이승민 부총리
  2. 훈정 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