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 (민국 38):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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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점령지들을 반환받으면서 국민정부의 수입이 크게 증대되었고 동시에 대대적인 군축의 시행으로 인해 군비 부담이 크게 줄면서 전시 국민정부의 숨통을 죄던 재정 문제가 상당부분 해소되었다.<ref>당초 1:2 수준이던 지출:수입 비율이 2:1로 역전된 것만 보더라도 전비 지출이 국민정부 재정에 끼친 악영향을 쉽게 체감 할 수 있다.</ref> 또한 각지의 유력 군벌들의 영향력이 퇴조되고 국민정부에 복종하게 되면서<ref>쓰촨과 광둥의 군벌은 이미 전전에 박살났지만 각각 국민정부의 쓰촨(충칭) 이전과 일본의 광둥 점령으로 인해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윈난의 룽윈은 장제스에 의해 기습적으로 숙청당했다.</ref><ref>광시의 리쭝런과 산시의 옌시산 같은 경우 장제스와의 협상을 통해 지역 영향력을 보전받으며 중앙정부에 복종하였고 신장의 공산당 역시 소련의 권유 및 중재와 장제스와의 협상을 통해 국민정부에 합류했다.</ref><ref>다만 공산당을 비롯한 각 군벌들이 권력의 원천인 사병을 일정 수준 반발하기도 하였으나 나름 순순히 중앙군에 편입시키고 군축에 동의한 이유는 모두 달랐는데 리쭝런은 근거지인 광시가 일본군에 의해 철처히 수탈당해 독자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고 중앙정부에 대항할 재정을 상실하였으며 옌시산은 시류를 읽고 기존의 봉건 영주와 같은 권한을 유지하기 어렵다 생각하여 타협하였다. 공산당의 경우 독자적으로 국민정부에 대항할 수 없다 판단하여 중앙정부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보장받는 길을 택하였다.</ref> 국민정부(→ 중화민국 정부)는 전국적 정책 집행권 및 조세권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는 향후 통일적 경제정책 수립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점령지들을 반환받으면서 국민정부의 수입이 크게 증대되었고 동시에 대대적인 군축의 시행으로 인해 군비 부담이 크게 줄면서 전시 국민정부의 숨통을 죄던 재정 문제가 상당부분 해소되었다.<ref>당초 1:2 수준이던 지출:수입 비율이 2:1로 역전된 것만 보더라도 전비 지출이 국민정부 재정에 끼친 악영향을 쉽게 체감 할 수 있다.</ref> 또한 각지의 유력 군벌들의 영향력이 퇴조되고 국민정부에 복종하게 되면서<ref>쓰촨과 광둥의 군벌은 이미 전전에 박살났지만 각각 국민정부의 쓰촨(충칭) 이전과 일본의 광둥 점령으로 인해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윈난의 룽윈은 장제스에 의해 기습적으로 숙청당했다.</ref><ref>광시의 리쭝런과 산시의 옌시산 같은 경우 장제스와의 협상을 통해 지역 영향력을 보전받으며 중앙정부에 복종하였고 신장의 공산당 역시 소련의 권유 및 중재와 장제스와의 협상을 통해 국민정부에 합류했다.</ref><ref>다만 공산당을 비롯한 각 군벌들이 권력의 원천인 사병을 일정 수준 반발하기도 하였으나 나름 순순히 중앙군에 편입시키고 군축에 동의한 이유는 모두 달랐는데 리쭝런은 근거지인 광시가 일본군에 의해 철처히 수탈당해 독자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고 중앙정부에 대항할 재정을 상실하였으며 옌시산은 시류를 읽고 기존의 봉건 영주와 같은 권한을 유지하기 어렵다 생각하여 타협하였다. 공산당의 경우 독자적으로 국민정부에 대항할 수 없다 판단하여 중앙정부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보장받는 길을 택하였다.</ref> 국민정부(→ 중화민국 정부)는 전국적 정책 집행권 및 조세권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는 향후 통일적 경제정책 수립의 밑바탕이 되었다.
신해혁명 이래 사실상 처음으로 전국에 대한 통일적 정책 집행 역량을 가지게 된 중국 정부는 [[웡원하오 (민국 38)|웡원하오]]와 [[위훙쥔 (민국 38)|위훙쥔]]의 주도로 전후 초기 경제 정책을 수립하였다. 전면적인 화폐개혁과 물가통제 완화로 대표되는 [[ㅇㅇ계획 (민국 38)|ㅇㅇ계획]]은
== 상세 ==
== 상세 ==
=== 경제 ===
=== 경제 ===

2026년 7월 27일 (월) 18:58 판

[ 문서 보기 ]
[ 세계관 설명 ]
[ 세계관 설명 ]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틀:중국 관련 문서 (민국 38) 틀:경제 기적 (민국 38)

대약진
大躍進
Ta Yueh-chin(Great Leap Forward)
중국실질 GDP 성장률

1965년 난징의 모습
기간 1953년 - 1973년
별칭 황금 20년(黃金二十年, Golden Twenty Years)

개요

대약진(大躍進, Ta Yueh-chin[1])은 1953년부터 1973년까지 중국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한 것을 일컽는 말이다. 이 시기를 중국에서는 대약진 시대(大躍進時代, Ta Yueh-chin era) 혹은 황금 20년(黃金二十年, Golden Twenty Years)이라고 부른다.

배경

1946년 승전 직후 중국은 오랜 전쟁과 일본의 침탈로 인해 참승(慘承)이라는 표현이 사용될 정도로 처참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대부분의 공업 시설들은 전쟁의 여파로 인해 파괴되었으며 전전 중국 최대의 중공업지대가 위치해있던 동북 지역은 주둔 소련군의 대대적 약탈로 인해 석탄, 철강 등 대부분의 분야에 있어 90% 이상의 생산 능력이 상실되었다. 농업 역시 농촌 청년들에 대한 대대적 징병 및 국민정부와 군벌, 일본의 수탈로 인해 빈사 상태에 놓여있었으며 공급 · 유통망 파괴와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상업 및 금융업 역시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를 해결해야 할 중앙정부의 재정이 오랜 전쟁과 군벌의 난립으로 인하여 파산 직전에 몰린 상태였기에 종전 직후 중국 경제의 미래는 매우 암담해보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점령지들을 반환받으면서 국민정부의 수입이 크게 증대되었고 동시에 대대적인 군축의 시행으로 인해 군비 부담이 크게 줄면서 전시 국민정부의 숨통을 죄던 재정 문제가 상당부분 해소되었다.[2] 또한 각지의 유력 군벌들의 영향력이 퇴조되고 국민정부에 복종하게 되면서[3][4][5] 국민정부(→ 중화민국 정부)는 전국적 정책 집행권 및 조세권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는 향후 통일적 경제정책 수립의 밑바탕이 되었다.

신해혁명 이래 사실상 처음으로 전국에 대한 통일적 정책 집행 역량을 가지게 된 중국 정부는 웡원하오위훙쥔의 주도로 전후 초기 경제 정책을 수립하였다. 전면적인 화폐개혁과 물가통제 완화로 대표되는 ㅇㅇ계획

상세

경제

제n기 국가경제건설 5년 계획 당시 건설된 중산고속공로

대약진이라는 어휘에서 보이듯이 대약진시대에 중국의 경제는 거대한 양적 · 질적 성장을 이루었다.

사회

문화

정치

기타

연표

여담

  • 대약진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는 향수를 중국어로 "대약진회구(大躍進懷舊)[6]"라고 한다. 장제스 회구(蔣中正懷舊)[7]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전자는 고속성장기와 당시의 사회를 그리워하는 향수라면 후자는 장제스 개인에 대해(독재적 리더쉽, 카리스마 등) 좀 더 방점을 둔다. 시대와 정치인 개인에 대한 향수가 결합된 장징궈 회구(蔣經國懷舊)[8]와는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 신해단의 소설 1949 신중국에서는 마오쩌둥(작중 공산화 된 중국의 지도자)가 실시한 경제 개발 운동의 이름으로 등장하며 조악한 정책과 여러 헛발질이 겹처 중국사 최악의 대기근을 초래한다. 현실에서의 대약진이 중국의 고속성장을 일컽는 용어인 것을 생각하면 굉장한 아이러니를 불러오는 요소이다.

유사 사례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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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장제스 정부 (민국 38)


  1. 직역해서 "Great Leap Forward"라고 하기도 하지만 보통 대약진 시대 당시 통용되던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 기반한 표현인 "Ta Yueh-chin"으로 표기한다.
  2. 당초 1:2 수준이던 지출:수입 비율이 2:1로 역전된 것만 보더라도 전비 지출이 국민정부 재정에 끼친 악영향을 쉽게 체감 할 수 있다.
  3. 쓰촨과 광둥의 군벌은 이미 전전에 박살났지만 각각 국민정부의 쓰촨(충칭) 이전과 일본의 광둥 점령으로 인해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윈난의 룽윈은 장제스에 의해 기습적으로 숙청당했다.
  4. 광시의 리쭝런과 산시의 옌시산 같은 경우 장제스와의 협상을 통해 지역 영향력을 보전받으며 중앙정부에 복종하였고 신장의 공산당 역시 소련의 권유 및 중재와 장제스와의 협상을 통해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5. 다만 공산당을 비롯한 각 군벌들이 권력의 원천인 사병을 일정 수준 반발하기도 하였으나 나름 순순히 중앙군에 편입시키고 군축에 동의한 이유는 모두 달랐는데 리쭝런은 근거지인 광시가 일본군에 의해 철처히 수탈당해 독자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고 중앙정부에 대항할 재정을 상실하였으며 옌시산은 시류를 읽고 기존의 봉건 영주와 같은 권한을 유지하기 어렵다 생각하여 타협하였다. 공산당의 경우 독자적으로 국민정부에 대항할 수 없다 판단하여 중앙정부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보장받는 길을 택하였다.
  6. 한국어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 시절 등 과거에 대한 폭넓은 그리움인 노스탤지어(Nostalgia)를 모두 향수(鄕愁)라고 하지만 중국어로 향수(鄕愁)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을 의미하고 노스탤지어는 회구(懷舊)라고 표현한다.
  7. 중정(中正)은 장제스의 본명이다. 개석(介石, 제스)는 그의 자(子)이며 중국에서는 보통 장제스보다는 장중정이라고 부른다.
  8. 장제스의 아들이자 제6·7대 총통을 역임한 장징궈와 그의 집권기에 대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