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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7일 (금) 23:5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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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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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총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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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태연합 정상회의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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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제10대 총통 리따이헝 Lý Thái Hùng | |
출생 | 1960년 8월 30일 |
꽝빈성 후에시 | |
국적 | 남베트남 |
직업 | 정치인 |
임기 | 베트남 공화국 내무총장 |
2007년 4월 ~ 2008년 9월 | |
사이공직할시 시장 | |
2010년 7월 ~ 2014년 7월 | |
베트남 공화국 총통 | |
2019년 4월 17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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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남베트남의 중도좌파 정치인. 현재 남베트남 총통이다.
생애
리따이헝은 1960년 8월 남베트남 꽝빈성 후에에서 태어났다. 좋은 성적 덕에 남베트남의 국기대인 사이공대 철학과에 진학했으나 가난했던 집안 사정 때문에 등록금 문제로 대학 시절 내내 고생했다.
학생운동과 정계입문
리따이헝이 막 대학에 진학했던 시기는 대학에서 일명 "운동권"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마침 사이공대에서 저명한 민주화운동가이자 훗날 총통이 되는 응웬쑤언오아인의 강연이 있었는데 그의 연설에 큰 감명을 받은 리따이헝은 곧바로 오아인이 이끄는 헌치정우회에 가입하였고 얼마 후 헌치정우회 사이공대 지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리따이헝은 사이공대 총학생회 사무총장,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권위주의적 공화혁명당 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이 시기 리따이헝은 사이공대로부터 제적 협박까지 받았었다.
통합야당인 베트남 민주당이 출범하자 학생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85년 남베트남 국회의원 선거에 자신의 고향인 후에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정치경력
1980년대 후반, 민주당이 응웬쑤언오아인의 레임덕과 당의 분열로 인해 민주당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자 민주당은 비대위 체제를 구성했고 리따이헝은 28세의 나이로 비대위원에 임명되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리따이헝을 통해 쇄신 이미지를 강화하려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리따이헝은 비대위원으로서 특별한 공적을 세우지 못한 채로 비대위가 해산되면서 일반당원이 되었다.
1989년 후에에서 재선에 성공한 리따이헝은 1993년 총선에서 험지에 전략공천되어 공화당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1997년 총선에서 3선에 성공한 리따이헝은 1998년 민주당 대표 경선에 참여, 민주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가 이끈 1999 대선에서 민주당 까오반비엔 후보가 당선되면서 리따이헝은 차기 대권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가 싶었으나 2001총선에서 패배하면서 그 책임을 지고 당대표에서 사퇴했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응웬바껀 정부 내무총장을 맡았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 사이공시장에 당선되어 2014년까지 재임했다. 이후 다시 민주당 대표로 선출되었고 2019년 대선에 출마해 당선되어 베트남 공화국의 제10대 총통이 되었다.
남베트남 총통
취임 당시 의회는 여전히 공화당이 장악하고있었기에 공화당과의 타협을 통해 총리에는 재정보수주의 성향을 가지고있는 경제관료[1]인 응웬낭기후옹을 임명했다.
취임하자마자 서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바람에 그의 임기는 코로나와의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리따이헝은 코로나가 서중국에서 급속히 확산하는것을 보고 서둘러 대책을 세웠다. 서중국 입국자 제한했고 마스크 등 방역물자의 생산량, 비축량을 점검하는 동시에 지역별로 거점병원을 지정, 방역 메뉴얼을 하달해 체계적 방역정책을 준비했다. 덕분에 남베트남은 초기 확신을 저지할 수 있었고 리따이헝의 지지율도 크게 올랐다.
하지만 안정적인 수준에서 관리되던 확진자의 수가 갑자기 폭증하여 방역시스템이 붕괴했고, 일일 확진자 10만 명에 사망자 일일 150명을 찍으면서 리따이헝의 지지율은 30%대까지 하락했다. 2021년 총선에서 야당인 공화당의 과반의석 확보가 유력했으나 민주당이 의외로 선전하고 군소정당들이 약진하면서 민주당측이 우려하던 최악의 시나리오보다는 양호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원하는 이를 총리에 임명하기에는 실패했다는 건 함정.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러시아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우크라이나에 500만 달러 어치의 인도적 지원 물자와 탄약, 철모 등의 군수품을 지원하는 총통령에 서명했다.
2022년 9월, '코로나와의 공존'를 선언하였으며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추진하지 못했던 공약들을 이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코로나로 인해 그동안 사실상 동결되었었던 최저임금을 15% 인상하면서[2] 그의 대표 공약 중 일부였던 경제정책 '임금주도성장'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전망. 다음 해인 2023년에 총통 선거가 있어 재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공약을 이행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성향
아주 전형적인 온건 사회민주주의자다. 적극적인 부의 재분배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환경규제에는 찬성하지만 사회적 자유 면에서는 다소 소극적이다. 동시에 국제주의자이며 민주주의가 가능한 널리 퍼져야 한다고 믿는다. 대러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에도 상당히 적극적이다.
여담
-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 시위대를 격려하기 위해 남베트남을 찾았던 김대중을 만난 적이 있다
선거 이력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85 총선 | 후에 | (53.8%) | 당선 | 초선 | |
1989 총선 | 후에 | (57.0%) | 당선 | 재선 | |
1993 총선 | 사이공2 | (44.7%) | 낙선 | ||
1997 총선 | 후에 | (49.6%) | 당선 | 3선 | |
2001 총선 | 후에 | (51.1%) | 당선 | 4선 | |
2005 총선 | 후에 | (50.2%) | 당선 | 5선 | |
2015 총선 | 후에 | (58.6%) | 당선 | 6선 | |
2019 대선 | - | (49.0%) | 당선 | 초선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헌치정우회 | 1981 - 1982 | 정계입문 |
1982 - 2021 | 신설합당 | |
2021 - | 당명 변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