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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1월 2일 만주국 헤이허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니어후루 투루시는 아편굴과 마작집을 운영하였고, 아편굴에서 일하던 매춘부와 생긴 사생아가 바로 니어후루 아이싱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싱가를 낳은 후 얼마 안되어 헤이허성을 떠났고, 니어후루 투루시는 아이싱가를 6살때부터 마작집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게 하였다. 11살까지 마작집에서 일하던 아이싱가는 숫자 계산과 언어 습득에 능했다. 하지만 투루시는 아이싱가를 자신의 친자식들에게 해를 끼칠 골칫덩이로 보아 쫒아냈다고 한다. 이후 헤이허성에 위치한 성 그리고리 성당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때 정교회를 받아들였고, 러시아어를 배우게 되었다.
1932년 11월 2일 만주국 헤이허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니어후루 투루시는 아편굴과 마작집을 운영하였고, 아편굴에서 일하던 매춘부와 생긴 사생아가 바로 니어후루 아이싱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싱가를 낳은 후 얼마 안되어 헤이허성을 떠났고, 니어후루 투루시는 아이싱가를 6살때부터 마작집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게 하였다. 11살까지 마작집에서 일하던 아이싱가는 숫자 계산과 언어 습득에 능했다. 하지만 투루시는 아이싱가를 자신의 친자식들에게 해를 끼칠 골칫덩이로 보아 쫒아냈다고 한다. 이후 헤이허성에 위치한 성 그리고리 성당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때 정교회를 받아들였고, 러시아어를 배우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온 그는 여러 일을 전전하다 숫자계산에 능한점을 인정받아 한 신문사에서 회계로 일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신문사가 《독립회보》를 간행하는 '''건평신문'''이었고, 순사에게 습격당해 잡혀갈뻔 한것을 반대성 운동을 하던 공산당원들에게 구원되면서 반대성 운동과의 인연이 닿게 되었다. 그는 독립회보를 지하신문화 하는것에 협조해 건평신문에 있어선 간부가 되었고, 지하언론을 효율적이고 특정 대성에 좋은 감정이 적은 연령대에 유포하여 성과를 거두는 등, 이를 통해 몇몇 민중들이 혁명가들을 숨겨주기도 하였으므로 그의 언론활동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온 그는 여러 일을 전전하다 숫자계산에 능한점을 인정받아 한 신문사에서 회계로 일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신문사가 《독립회보》를 간행하는 '''건평신문'''이었고, 순사에게 습격당해 잡혀갈뻔 한것을 반대성 운동을 하던 공산당원들에게 구원되면서 반대성 운동과의 인연이 닿게 되었다. 그는 독립회보를 지하신문화 하는것에 협조해 건평신문에 있어선 간부가 되었고, 지하언론을 효율적이고 특정 대성에 좋은 감정이 적은 연령대에 유포하여 성과를 거두는 등, 이를 통해 몇몇 민중들이 혁명가들을 숨겨주기도 하였으므로 그의 언론활동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요주의 인물이 되어 있었고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었다 판단한 그는 그렇게 만주공산당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면서 여러 혁명당원들을 지원하는 비밀거처를 마련하는 일을 맡게 된다.
 
이때,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이루어지는 좌익활동에 대해 소련에서 보냈던 '''사블리에코프 보이틴스키'''는 그를 높이 사 소련의 푸룬제 사관학교로 유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되었는데, 그를 포함하여 5인이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었었다. 하지만 짐칸에 겨우 몸을 사리며 가는 터였던지라,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동지는 가던중 동사해버렸고 한명은 유학을 도중에 포기하는 바람에 그를 포함, 3명만이 프룬제 사관학교의 유학길에 최종적으로 오르게 되었다. 당시 얼마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가는 길이 고되었는지 그의 저서 《고백록》에서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는게 아닌가 하며 그나마 남은 동지 세명과 서로 꼭 껴안고 담요를 서로 감싸 버티면서 갔다."'''라고 회고하였다.


==각주==
==각주==

2022년 6월 20일 (월) 01:41 판

만주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총통
니어후루 아이싱가

Ниохүрү Aисиңиа | 鈕祜祿 愛星阿
출생 1932년 11월 2일
만주국 헤이어성
사망 2010년 1월 11일 (향년 72세)
묵던 수도시 국립 묵던대학교병원

만주 민주 공화국 초대 대총통
재임기간
1994 - 1998
전임: 직책개설
후임: 남춘봉(제2대)
재임기간 만주 인민 공화국 제17대 국가주석
1991년 9월 3일 - 1993년 1월 5일
만주공산당 제20대 서기장
1991년 8월 21일 - 1993년 1월 5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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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1남 2녀 중 장자
배우자 니어후루 루드밀라
자녀 슬하 2남 1녀
학력 프룬체 사관학교(졸업 / 52회)
국립장춘대학교(졸업 / 3회)
종교 러시아 정교회 (세례명: 라도네주의 성 세르기)
정당
의원선수 1(건국의회)
의원대수 만주 건국회의 대표의원
경춘(慶春)[1], 로사(老舍)[2]
로사(老舍)[2]
서훈 틀:건국훈장 공화국장 틀:국가인민영웅장
공식 초상화

개요

니어후루 아이싱가 (만주어:Ниохүрү Aисиңиа, 1932년 2월 3일 ~ 2010년 8월 24일)은 만주 민주 공화국의 정치인·언론인·문학가·사회운동가·교육자로, 만주 인민 공화국의 마지막 국가주석이자 만주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총통을 역임한 인물이다. 1995년에 건국훈장 공화국장을 서훈받았고, 2003년에 국가인민영웅장을 서훈받았다.

대성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헤이어성의 아편굴과 마작을 운영하던 가정에서 태어나 이후 집에서 쫓겨나고 러시아 정교회의 고아원에서 나와 사회에 나온 청년시절 반대성운동에 지식인으로서 서리로 등용되어 지하신문인 《독립회보》를 발행하는 책임자로 활동하였었고, 만주공산당에 가입한 후 지식인을 소련에서 양성하여 향후 이용하려 하였던 사블리에코프 보이틴스키에 의해 발탁되어 모스크바의 프룬제 사관학교에서 교육과정을 수료하였고, 1945년 8월의 소련이 만주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하자 만주를 점령한 소련이 만주 인민 공화국을 건국시키었고, 이때 공산당원으로서 교육기관의 감시겸 교육을 수료하고자 국립장춘대학교에 입학하여 인문대학을 나와 졸업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주 인민 공화국에선 만주공산당의 상임간부회의의 상임간부직을 역임하였으며, 여러 직책을 거쳤다. 그가 주도한 대표적인 정책이 만주어 문자개혁등이 있다. 이는 현재까지도 2번의 수정을 거쳐서 지금까지 해당 표기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후 말기의 정국이 고르바쵸프식 개혁파가 잡고있던 권력을 니어후루 아이싱가가 당수이던 민국개혁파가 이어받자 기습적으로 1992 민공천명사건 등을 일으키며 결국 1993년 건국회의를 수립하며 만주 인민 공화국을 계승하여 만주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는 국부가 되었다.

일생

1932년 11월 2일 만주국 헤이허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니어후루 투루시는 아편굴과 마작집을 운영하였고, 아편굴에서 일하던 매춘부와 생긴 사생아가 바로 니어후루 아이싱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싱가를 낳은 후 얼마 안되어 헤이허성을 떠났고, 니어후루 투루시는 아이싱가를 6살때부터 마작집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게 하였다. 11살까지 마작집에서 일하던 아이싱가는 숫자 계산과 언어 습득에 능했다. 하지만 투루시는 아이싱가를 자신의 친자식들에게 해를 끼칠 골칫덩이로 보아 쫒아냈다고 한다. 이후 헤이허성에 위치한 성 그리고리 성당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때 정교회를 받아들였고, 러시아어를 배우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온 그는 여러 일을 전전하다 숫자계산에 능한점을 인정받아 한 신문사에서 회계로 일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신문사가 《독립회보》를 간행하는 건평신문이었고, 순사에게 습격당해 잡혀갈뻔 한것을 반대성 운동을 하던 공산당원들에게 구원되면서 반대성 운동과의 인연이 닿게 되었다. 그는 독립회보를 지하신문화 하는것에 협조해 건평신문에 있어선 간부가 되었고, 지하언론을 효율적이고 특정 대성에 좋은 감정이 적은 연령대에 유포하여 성과를 거두는 등, 이를 통해 몇몇 민중들이 혁명가들을 숨겨주기도 하였으므로 그의 언론활동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요주의 인물이 되어 있었고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었다 판단한 그는 그렇게 만주공산당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면서 여러 혁명당원들을 지원하는 비밀거처를 마련하는 일을 맡게 된다.

이때,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이루어지는 좌익활동에 대해 소련에서 보냈던 사블리에코프 보이틴스키는 그를 높이 사 소련의 푸룬제 사관학교로 유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되었는데, 그를 포함하여 5인이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었었다. 하지만 짐칸에 겨우 몸을 사리며 가는 터였던지라,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동지는 가던중 동사해버렸고 한명은 유학을 도중에 포기하는 바람에 그를 포함, 3명만이 프룬제 사관학교의 유학길에 최종적으로 오르게 되었다. 당시 얼마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가는 길이 고되었는지 그의 저서 《고백록》에서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는게 아닌가 하며 그나마 남은 동지 세명과 서로 꼭 껴안고 담요를 서로 감싸 버티면서 갔다."라고 회고하였다.

각주

  1. 그를 거두어준 신부가 그를 가르키며 "경사스러운 봄이다."라고 한것에서 착안한 것이라 한다.
  2. 2.0 2.1 자와 호를 겸하여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