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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st 1968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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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키파 -> 에다파와 연대 (1970년대 실제로 일어남) -> 사회주의 협회를 소외시켜 현실 역사의 에다처럼 쫓아내야
* 사사키파 -> 에다파와 연대 (1970년대 실제로 일어남) -> 사회주의 협회를 소외시켜 현실 역사의 에다처럼 쫓아내야
* <길> 강령 XXX
* <길> 강령 XXX
== 발췌문들 ==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물론 우파도 당세를 확대해 갔지만 좌파에 미치지 못했다. 냉전구조는 동아시아로 파급되었고, 요시다 시게루 내각·하토야마 내각 등에서는 역 코스 정책이 취해졌다. 50년대에 있어서, 좌파가 주창한 호헌 평화주의는 국민적 지지를 얻는 상황에 있었다. 재군비 반대를 명확히 호소했던 것은 평화사원칙을 주창하고 있던 사회당 좌파뿐이었다. 이에 따라 재군비 반대파의 지지를 일신에 모을 수 있었다(14) 것이다. 또한 총평에서 강력한 사회당으로의 백업이 컸다(15). 총평은 1952년 제3회 당대회로 사회당 좌파를 전면적으로 지지해 총평·사회당 블록의 형성을 목표로 했다(16). 조직표로서의 자원뿐만 아니라 후보자로서 노조 출신의 젊은이를 보내는 등 총평은 사회당에 강력한 지원을 했다. 사회당 좌파와 우파가 통일강령으로 통일한 뒤에도 이 상황은 변함없이 사회당 내 좌경화가 진행되게 됐다.
 이상의 역사적 문맥을 고려해도 50년대에 한해서 말하면 사회당이 사회민주주의화하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니시오파와 같은 사회민주주의 노선은 사회당의 우경화로 국민으로부터 이해되어 자민당 좌파와 차별화를 도모할 수 없는 우려가 있었다. 당연히 당세를 확대하고 있던 사회당에게는 합리적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원래 사회당 통일을 추진한 것이 우파·중간파에 속하는 하상파와 좌파의 스즈키파이다. 사회민주주의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니시오파 자체도 정책면에서 공통점이 있으면 손을 잡는 현실주의적 입장에 서 있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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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오파와 가와카미파의 일부가 이탈한 것으로, 사회당의 당세는 크게 깎여졌다. 1960년 아사누마가 히비야 공회당에서 자살되어 위원장 대행으로서 에다가 취임했다. 니시오파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인기가 있었던 에다를 당의 얼굴로 선거를 싸웠기 때문에 사회당은 145의석까지 회복했다. 이 선거 결과를 받아 에다는 구조개혁이론을 사회당 방침으로 세웠다. 동시에 당조직의 확충도 진행됐다. 그러나 구조 개혁 이론은 큰 벽에 부딪친다. 하나는 개인 수준에서의 권력투쟁으로 서기장 취임을 둘러싸고 스즈키파가 에다파와 사사키파로 분열했다. 파벌의 이치로서는 에다 서기장의 뒤를 이은 것은 스즈키파의 선배인 사사키였다. 그러나 에다의 국민적 인기가 높아짐에 사사키 스즈키파는 에다에 대한 대항심을 모은다. 사사키파는 사회주의 협회에 접근했다. 이렇게 하여 구조개혁이론을 지지하는 세력이 깎아졌다. 사회주의협회는 무카사카를 중심으로 구조개혁이론을 수정주의적으로 정면으로 비판했다. 또 하나는 사회당의 권력자원인 총평을 적에게 돌리게 된 것이다. 계급투쟁주의의 총평도 구조개혁론을 수정주의로 비판했다. 총평지도부(이와이=오타라인)도 사회주의협회에 소속되어 있었기도 했고, 비판은 어느 정도 당연했다.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결이라 불리는 미이케 투쟁에 대해 구조개혁파가 비판적 총괄을 한 것도 이유로 된다. 1962년의 서기장 선거에 있어서 에다가 재임되었지만, 운동 방침으로서는 구조 개혁 이론에 멈춤이 걸렸다. 구조개혁을 둘러싼 논쟁은 에다파, 사사키파, 와다파의 파벌항쟁으로 전화해 버린다. 당 집행부의 인사포스트를 둘러싸고 파벌이 싸우는 가운데 사회주의협회는 꾸준히 활동가층에 기반을 걸어간다. 구래에다의 구조개혁 이론을 지지하고 있던 활동가층을 사회주의협회가 도입한 것이 이유다. 사회주의협회가 사회당 좌파와 손을 잡음으로써 사회당은 좌경화(교조주의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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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사회민주주의화의 가능성
 ①, ②를 근거로 했을 때 60년대에 사회당이 사회민주주의화할 가능성은 있었을까. 결론을 말한다면,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조개혁이론의 패배는 역사적 문맥에 크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조개혁이론이 힘을 가진 1960년부터 1964년은 니시오파들이 이탈한 직후이다. 원래 사회당 좌파는 사회민주주의를 개량주의로 하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니시오파들의 이탈에 의해 사회당 내에는 민사당(사회민주주의) 알레르기가 더욱 뿌리 내려 버렸다. 구조개혁이론은 사회민주주의와 정책적으로 유사하며 니시오파 등의 사회민주주의와의 차이를 명확히 내세우지 못했다. 그 이론적 취약성을 사회주의 협회 등에 의해 비판되었다. 활동가층 자체는 구조개혁이론이 사회민주주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지지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신분 보장이라는 목적과 노농 마르크스주의를 대신하는 이론이라는 인식을 위해 조개혁 이론을 지지했다. 그 때문에 이데올로기로서 매력이 있는 사회주의협회 지지로 활동가층은 바뀌었을 것이다. 원래 에다 사부로 자체가 60년대에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커녕, 이것을 명확하게 부정하고 있다(25). 에다 사부로가 사 공민 노선과 사회 민주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다. 즉 60년대에 사회당이 사회민주주의화할 가능성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논자가 지적한 대로 구조개혁이론은 사회민주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26). 구조개개혁파가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면 사회당은 쇠퇴하지 않고 스스로의 손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탈리아 공산당은 70년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포기하고 있다. 그럼 구조 개혁파를 감속시킨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역사적 맥락 이상으로 구조적 요인으로 여겨진다.
ⅱ 사회민주주의화를 저해한 요인
 이 구조적인 요인으로 ①당의 체질, ②자원동원의 2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밀접하게 얽혀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것이 큰 요인이었다. ①의 체질로서는 이하의 점을 들 수 있다.
  ①. 자전의 하부조직이 존재하지 않는
  ②. 의원정당이었던 것이 59년 이후의 당개혁에 의해 기관 중심주의로 변화했다(의원 이상으로 활동가가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①은 사회당 결당 이후의 문제였다. 사회당이 정권을 담당한 40년대는 아직 일본 정당 자체가 명망가 정당으로서의 역을 나오지 않았다. 도시 유권자를 주요 표전으로 삼았던 사회당 의원은 조직적 선거를 하지 않고도 지명도·이데올로기라는 심볼로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심볼만으로 싸우는 것은 지지 기반으로 취약했고 한계가 있었다(27). 더불어 사회당은 재원 부족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당시 보수진영이 전전 정당의 흐름을 끌어 자산을 계승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무산정당이 대동단결한 사회당은 그런 자산을 가지지 않았다(28). 따라서 하부조직(지역지부 등)이 매우 빈약했다(29). 그 사회당의 하부조직을 남다른 형태로 대체한 것이 총평이었다. 사회당 좌파의 약진을 봐도, 총평의 동원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것이다. 통일 후 우파의 존재와 정권탈취의 의욕으로부터 사회당 좌파도 현실적 감각을 갖게 된다. 사회당 좌파도 정책에서 현실적 감각을 갖지 않으면 우파와 통일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59년에 우파가 이탈해 총평의 전면 지지를 얻고 있던 좌파만이 남는다. 결과적으로 총평의 영향력을 크게 받게 된다. 하지만 국회의원은 자민당과 국대정치를 전개하는 이상 정치에 대한 현실적 감각을 남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②의 요소가 저해하게 된다. 의원정당이었던 사회당기에는 사회당도 극단적으로 교조주의화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당기구 개혁을 계기로 국회의원이 당대회 대의원이 되는 특권이 폐지되어 활동가층을 중심으로 하는 서기국이 국회의원보다 강한 힘을 갖게 된다. 사사키파는 구 스즈키파가 손을 잡지 않았던 사회주의 협회와 손을 잡고, 사사키파·사회주의 협회에 의한 좌파 연합을 맺었다. 한편 구조개혁파는 당내 정치에 새해, 점차 활동가층의 지지를 잃는다. 최종적으로는 에다파로서 일파벌로 전락했다.
 이상의 경위로부터 사회당 의원은 총평과 교조주의화한 활동가층의 의향에 반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워지게 된다. 국정선거에서의 자원동원으로서의 총평, 그리고 사회당대회에서의 자원동원으로서의 사회주의협회에 좌파(사사키파)는 의존하게 된다. 이것은 현실적 정책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것이 교조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한 당강령 '길'에 나타나 있다. 사사키파에 대항한 에다파는 타파벌과 통일 행동을 취하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권력투쟁에 항상 패배한 것이었다.

2022년 12월 28일 (수) 02:36 판

포탈

신공 정치 설정 개편

우파사회당 대 좌파사회당 대결에서 우파사회당 승리

노동조합 문제

  • 총평 좌경화를 막아야

사회주의 협회 병신들 처리

  • 나리타 도모미가 좌익에게 포섭되지 않을 것

당 우경화

  • 니시오-에다가 이겨야함
  • 사사키파 -> 에다파와 연대 (1970년대 실제로 일어남) -> 사회주의 협회를 소외시켜 현실 역사의 에다처럼 쫓아내야
  • <길> 강령 XXX

발췌문들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물론 우파도 당세를 확대해 갔지만 좌파에 미치지 못했다. 냉전구조는 동아시아로 파급되었고, 요시다 시게루 내각·하토야마 내각 등에서는 역 코스 정책이 취해졌다. 50년대에 있어서, 좌파가 주창한 호헌 평화주의는 국민적 지지를 얻는 상황에 있었다. 재군비 반대를 명확히 호소했던 것은 평화사원칙을 주창하고 있던 사회당 좌파뿐이었다. 이에 따라 재군비 반대파의 지지를 일신에 모을 수 있었다(14) 것이다. 또한 총평에서 강력한 사회당으로의 백업이 컸다(15). 총평은 1952년 제3회 당대회로 사회당 좌파를 전면적으로 지지해 총평·사회당 블록의 형성을 목표로 했다(16). 조직표로서의 자원뿐만 아니라 후보자로서 노조 출신의 젊은이를 보내는 등 총평은 사회당에 강력한 지원을 했다. 사회당 좌파와 우파가 통일강령으로 통일한 뒤에도 이 상황은 변함없이 사회당 내 좌경화가 진행되게 됐다.

 이상의 역사적 문맥을 고려해도 50년대에 한해서 말하면 사회당이 사회민주주의화하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니시오파와 같은 사회민주주의 노선은 사회당의 우경화로 국민으로부터 이해되어 자민당 좌파와 차별화를 도모할 수 없는 우려가 있었다. 당연히 당세를 확대하고 있던 사회당에게는 합리적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원래 사회당 통일을 추진한 것이 우파·중간파에 속하는 하상파와 좌파의 스즈키파이다. 사회민주주의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니시오파 자체도 정책면에서 공통점이 있으면 손을 잡는 현실주의적 입장에 서 있었다(17).



니시오파와 가와카미파의 일부가 이탈한 것으로, 사회당의 당세는 크게 깎여졌다. 1960년 아사누마가 히비야 공회당에서 자살되어 위원장 대행으로서 에다가 취임했다. 니시오파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인기가 있었던 에다를 당의 얼굴로 선거를 싸웠기 때문에 사회당은 145의석까지 회복했다. 이 선거 결과를 받아 에다는 구조개혁이론을 사회당 방침으로 세웠다. 동시에 당조직의 확충도 진행됐다. 그러나 구조 개혁 이론은 큰 벽에 부딪친다. 하나는 개인 수준에서의 권력투쟁으로 서기장 취임을 둘러싸고 스즈키파가 에다파와 사사키파로 분열했다. 파벌의 이치로서는 에다 서기장의 뒤를 이은 것은 스즈키파의 선배인 사사키였다. 그러나 에다의 국민적 인기가 높아짐에 사사키 스즈키파는 에다에 대한 대항심을 모은다. 사사키파는 사회주의 협회에 접근했다. 이렇게 하여 구조개혁이론을 지지하는 세력이 깎아졌다. 사회주의협회는 무카사카를 중심으로 구조개혁이론을 수정주의적으로 정면으로 비판했다. 또 하나는 사회당의 권력자원인 총평을 적에게 돌리게 된 것이다. 계급투쟁주의의 총평도 구조개혁론을 수정주의로 비판했다. 총평지도부(이와이=오타라인)도 사회주의협회에 소속되어 있었기도 했고, 비판은 어느 정도 당연했다.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결이라 불리는 미이케 투쟁에 대해 구조개혁파가 비판적 총괄을 한 것도 이유로 된다. 1962년의 서기장 선거에 있어서 에다가 재임되었지만, 운동 방침으로서는 구조 개혁 이론에 멈춤이 걸렸다. 구조개혁을 둘러싼 논쟁은 에다파, 사사키파, 와다파의 파벌항쟁으로 전화해 버린다. 당 집행부의 인사포스트를 둘러싸고 파벌이 싸우는 가운데 사회주의협회는 꾸준히 활동가층에 기반을 걸어간다. 구래에다의 구조개혁 이론을 지지하고 있던 활동가층을 사회주의협회가 도입한 것이 이유다. 사회주의협회가 사회당 좌파와 손을 잡음으로써 사회당은 좌경화(교조주의화)했다.




ⅰ 사회민주주의화의 가능성

 ①, ②를 근거로 했을 때 60년대에 사회당이 사회민주주의화할 가능성은 있었을까. 결론을 말한다면,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조개혁이론의 패배는 역사적 문맥에 크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조개혁이론이 힘을 가진 1960년부터 1964년은 니시오파들이 이탈한 직후이다. 원래 사회당 좌파는 사회민주주의를 개량주의로 하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니시오파들의 이탈에 의해 사회당 내에는 민사당(사회민주주의) 알레르기가 더욱 뿌리 내려 버렸다. 구조개혁이론은 사회민주주의와 정책적으로 유사하며 니시오파 등의 사회민주주의와의 차이를 명확히 내세우지 못했다. 그 이론적 취약성을 사회주의 협회 등에 의해 비판되었다. 활동가층 자체는 구조개혁이론이 사회민주주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지지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신분 보장이라는 목적과 노농 마르크스주의를 대신하는 이론이라는 인식을 위해 조개혁 이론을 지지했다. 그 때문에 이데올로기로서 매력이 있는 사회주의협회 지지로 활동가층은 바뀌었을 것이다. 원래 에다 사부로 자체가 60년대에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커녕, 이것을 명확하게 부정하고 있다(25). 에다 사부로가 사 공민 노선과 사회 민주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다. 즉 60년대에 사회당이 사회민주주의화할 가능성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논자가 지적한 대로 구조개혁이론은 사회민주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26). 구조개개혁파가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면 사회당은 쇠퇴하지 않고 스스로의 손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탈리아 공산당은 70년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포기하고 있다. 그럼 구조 개혁파를 감속시킨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역사적 맥락 이상으로 구조적 요인으로 여겨진다.

ⅱ 사회민주주의화를 저해한 요인

 이 구조적인 요인으로 ①당의 체질, ②자원동원의 2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밀접하게 얽혀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것이 큰 요인이었다. ①의 체질로서는 이하의 점을 들 수 있다.

  ①. 자전의 하부조직이 존재하지 않는   ②. 의원정당이었던 것이 59년 이후의 당개혁에 의해 기관 중심주의로 변화했다(의원 이상으로 활동가가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①은 사회당 결당 이후의 문제였다. 사회당이 정권을 담당한 40년대는 아직 일본 정당 자체가 명망가 정당으로서의 역을 나오지 않았다. 도시 유권자를 주요 표전으로 삼았던 사회당 의원은 조직적 선거를 하지 않고도 지명도·이데올로기라는 심볼로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심볼만으로 싸우는 것은 지지 기반으로 취약했고 한계가 있었다(27). 더불어 사회당은 재원 부족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당시 보수진영이 전전 정당의 흐름을 끌어 자산을 계승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무산정당이 대동단결한 사회당은 그런 자산을 가지지 않았다(28). 따라서 하부조직(지역지부 등)이 매우 빈약했다(29). 그 사회당의 하부조직을 남다른 형태로 대체한 것이 총평이었다. 사회당 좌파의 약진을 봐도, 총평의 동원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것이다. 통일 후 우파의 존재와 정권탈취의 의욕으로부터 사회당 좌파도 현실적 감각을 갖게 된다. 사회당 좌파도 정책에서 현실적 감각을 갖지 않으면 우파와 통일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59년에 우파가 이탈해 총평의 전면 지지를 얻고 있던 좌파만이 남는다. 결과적으로 총평의 영향력을 크게 받게 된다. 하지만 국회의원은 자민당과 국대정치를 전개하는 이상 정치에 대한 현실적 감각을 남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②의 요소가 저해하게 된다. 의원정당이었던 사회당기에는 사회당도 극단적으로 교조주의화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당기구 개혁을 계기로 국회의원이 당대회 대의원이 되는 특권이 폐지되어 활동가층을 중심으로 하는 서기국이 국회의원보다 강한 힘을 갖게 된다. 사사키파는 구 스즈키파가 손을 잡지 않았던 사회주의 협회와 손을 잡고, 사사키파·사회주의 협회에 의한 좌파 연합을 맺었다. 한편 구조개혁파는 당내 정치에 새해, 점차 활동가층의 지지를 잃는다. 최종적으로는 에다파로서 일파벌로 전락했다.

 이상의 경위로부터 사회당 의원은 총평과 교조주의화한 활동가층의 의향에 반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워지게 된다. 국정선거에서의 자원동원으로서의 총평, 그리고 사회당대회에서의 자원동원으로서의 사회주의협회에 좌파(사사키파)는 의존하게 된다. 이것은 현실적 정책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것이 교조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한 당강령 '길'에 나타나 있다. 사사키파에 대항한 에다파는 타파벌과 통일 행동을 취하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권력투쟁에 항상 패배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