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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2일 (수) 16:27 판

총리

고증 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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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무총리
대수 이름 임기 정당 총선
1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김옥균
(1851~1907)
1884년 12월 17일 ~ 1896년 9월 13일
(11년 274일)
개화당 1893
2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이완용
(1858~1931)
1896년 9월 14일 ~ 1899년 2월 22일
(2년 162일)
개화당 1896
3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황현
(1855~1920)
1899년 2월 23일 ~ 1901년 4월 9일
(2년 45일)
보국당 1899
4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김홍집
(1842~1910)
1901년 4월 10일 ~ 1906년 2월 9일
(4년 306일)
온건당 1902
5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박영효
(1861~1939)
1906년 2월 10일 ~ 1912년 5월 27일
(6년 109일)
개화당 1906
1910
6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유길준
(1856~1923)
1912년 5월 28일 ~ 1914년 6월 6일
(2년 10일)
개화당 1913
7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서재필
(1864~1951)
1914년 6월 7일 ~ 1918년 11월 18일
(4년 164일)
개화당 -[1]
8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이승만
(1875~1965)
1918년 11월 18일 ~ 1925년 12월 28일
(7년 41일)
대한국민회 1918
1919
1923
9 파일:손정도 4-3.png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손정도
(1881~1931)
1925년 12월 29일 ~ 1926년 3월 8일
(72일)
대한국민회 -
10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이상설
(1871~1933)
1926년 3월 9일 ~ 1930년 3월 8일
(4년)
자유당 1926
11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양기탁
(1871~1938)
1930년 3월 9일 ~ 1934년 1월 16일
(3년 311일)
한인사회당 1930
12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이동휘
(1873~1935)
1934년 1월 16일 ~ 1935년 1월 31일
(1년 16일)
한인사회당 1934
-[2]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신채호
(1880~1936)
1935년 2월 1일 ~ 1935년 4월 10일
(71일)
한인사회당 -
13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유동열
(1885~1950)
1935년 4월 11일 ~ 1935년 5월 26일
(46일)
한인사회당 -
14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안창호
(1878~1947)
1935년 5월 27일 ~ 1940년 7월 14일
(5년 49일)
대한민주당 1935
1938
15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김창암
(1876~1953)
1940년 7월 15일 ~ 1944년 11월 20일
(4년 128일)
대한국민회 -[3]
16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조만식
(1883~1954)
1944년 11월 21일 ~ 1945년 7월 8일[4]
(230일)
대한민주당 -
17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여운형
(1886~1979)
1945년 7월 9일 ~ 1951년 8월 10일
(6년 32일)
사회민주당 1945
1947
-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조용은
(1887~1958)
1951년 8월 11일 ~ 1951년 10월 9일
(60일)
사회민주당 -
18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조봉암
(1898~1975)
1951년 8월 11일 ~ 1957년 2월 10일
(5년 124일)
사회민주당 1951
1954
19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윤보선
(1897~1975)
1957년 2월 10일 ~ 1959년 6월 10일
(2년 123일)
신한국당 1957
20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장면
(1899~1981)
1959년 6월 11일 ~ 1969년 9월 10일
(10년 92일)
신한국당 1959
1962
1966
21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김성주
(1912~1994)
1969년 9월 11일 ~ 1969년 12월 28일
(109일)
신한국당 -
22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장준하
(1918~1987)
1969년 12월 29일 ~ 1972년 6월 16일
(2년 200일)
자유당 1969
23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김철
(1898~1975)
1972년 6월 17일 ~ 1977년 9월 4일
(5년 80일)
사회민주당 1972
1974
24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김영삼
(1897~1975)
1977년 9월 5일 ~ 1980년 9월 20일
(3년 16일)
신한국당 1977
.. 대한국 총리대신

ha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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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사회당
한문명 韓人社會黨
영문명 Korean Socialist Party (KSP)
창당일 1917년 5월 11일
전신 노동자협회
분리된 정당 / 1935년 분당
해산일 1938년 9월 5일
후신 틀:대한공산당 (개화) (주류)
틀:국민사회당 (개화)
역대 총리 양기탁 / 제13대 • 1930~1934
이동휘 / 제14대 • 1934~1935
유동열 / 제15대 • 1935
의장 이동휘 / 초대
박헌영 / 말대
이념 • 1917-1935
사회주의
베른슈타인주의, 구조개혁주의 (사회당 우파)
혁명적 사회주의, 좌익민족주의 (사회당 좌파)

• 1935-1938
혁명적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박헌영계)
좌익민족주의 (유동열계)
스펙트럼 • 1917~1935
좌익 빅텐트 (중도~극좌)

• 1935~1938
좌익 ~ 극좌
국민의원 35석 / 300석 (11.7%)[5]
당색
적색 (#B80000)
국제조직 (1919~1935)
(1935~1938)

개요

1917년부터 1938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정당.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역사

창당

20세기 초, 사회주의 성향의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민원에서 노동자협회라는 이름의 교섭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노동자의 처우 개선, 근로기준법 제정, 노조 활동 방해 금지 등을 요구하였다. 노동자협회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운동을 벌였으나 별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에 노동자협회 지도부와 회원들은 조직화된 정당의 필요성을 느꼈고 1917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초대 의장으로는 노동자협회 회원 중 대중인지도가 가장 높은 이동휘가 추대되었다.

성장과 집권

급속도로 진행되는 산업화에 도시 노동자들의 수 역시 급속도로 늘었고, 사회당은 이들을 기반으로 계속 성장했다. 1927년, 공장 관리진 측의 부당한 대우에 원산 노동자연합회가 전면적 파업을 일으킨 원산 총파업 당시 당 지도부가 총출동하여 파업을 지원하며 그 세력이 급속도로 불었다.

1929년 이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한국의 경제가 깊은 침체에 빠지자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후 1930년 총선에서 과반의 집권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제3당으로 굴어떨어지고 한인사회당이 대한국민회를 제치고 국민원 과반을 차지하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민주적으로 집권한 첫 사례였다.[6]

총리로 선출된 이는 사회당 온건파의 거두 양기탁이었다. 양기탁 내각은 최저임금제도를 도입하고 노조의 대표성을 강화하는 등 여러 정책으로 노동자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하지만 양기탁 내각은 농촌 문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7] 경제 정책 역시 이전 수권 정당들에 비해 상당히 투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동열, 김안산[8], 박헌영 등 사회당 급진파는 더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요구했고 대한국민회대한민주당, 그리고 자유당은 한인사화당이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집권 축하 편지를 받은 것을 문제삼아 사회당을 소련의 프락치 정당이라고 비난했다.

안팎의 압박에 결국 양기탁은 총리직에서 사퇴했고 온건파와 급진파의 대립을 중재하던 이동휘가 당 의장에 추대되어 총리직에 취임했다.

분열과 쇠퇴

이동휘와 한인사회당 9기 지도부[9]

이동휘는 당내외의 걱정을 뒤엎고 상당히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였고 1934년에 치루어진 13회 총선에서 한인사회당은 원내 1당 지위를 유지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과반에 조금 못 미치는 의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극우 민족단결연맹의 약진으로 국민회, 민주당, 자유당이 연립하여도 한인사회당의 의석수보다 적었기에 한인사회당은 내각구성권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당만의 단독 소수내각을 꾸리기에는 국정운영의 차질이 불가피해 보였기에 이동휘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자유당과의 연정을 시도하였고 교섭 끝에 연정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35년 이동휘가 급사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급진파와 온건파 양측의 인정을 받던 이동휘가 사라지면서 한인사회당은 극심한 내분에 휩싸였다. 총리 대행을 맡았던 신채호와 당 부의장 김립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었지만,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로 급진파와 온건파 양쪽 모두로부터 불호를 받았기에, 김립은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인해 당 내에서 큰 힘을 쓸 수 없었고 결국 온건파와 급진파를 중재하는 데에 실패했다.

유일한 중재자가 사라지면서, 급진파와 온건파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맞붙게 되었다. 양측은 차기 의장을 뽑을 전당대회에 사활을 걸었는데, 1935년 3월에서 4월에 걸쳐 치루어진 임시 전당대회에서 급진파의 지지를 받은 유동열이 온건파의 지지를 받은 조용은을 아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의장에 선출되면서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취임 직후 유동열이 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선언하자 이에 자유당이 반발해 연정 탈퇴를 선언하였다.

총리 선출 직후 민족단결연맹에 의해 발의된 내각불신임안이 민단련, 국민회, 민주당, 자유당에 의해 통과되었다. 이에 사회당 온건파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총리 유동열에게 타 정당들을 안심시키고 설득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시에는 탈당하겠다고 급진파를 압박했으나 사회당 급진파는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조용은, 안공근 등 온건파 인사들을 해당행위를 이유로 제명했고 이에 반발한 온건파는 집단 탈당 후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몰락

그동안 대한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은 지나치게 온건하고 현실안주적이었다. 이제 대한 인민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박헌영, 제11대 의장 취임사 중

유동열은 국무총리 사퇴를 거부하고 의회를 해산,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렇게 하여 치러진 선거가 1935년 제14회 총선이다. 14회 총선에서 국민회민주당은 선거연대를 꾸려 집권에 성공한 반면 사회주의 진영은 지지율도 낮아진 상황에서 한인사회당과 사회민주당으로 분열된 상태였던지라 표가 분산되어 한인사회당은 의석을 절반 이상 잃으며 실권했다.

14회 총선에서의 참패 이후 의장 유동열의 리더십이 흔들렸다. 이미 온건파는 탈당해 다른 살림을 꾸린 상태였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의 박헌영계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성향인 유동열계에 도전해왔다. 결국 유동열은 박헌영계의 압박에 총선 패배와 분열의 책임을 지고 1935년 11월 의장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또다시 열린 임시전당대회에서 박헌영이 의장에 당선되면서 당은 더욱 좌경화되었다. 박헌영은 당명을 대한공산당으로 바꾸고 더욱 좌경화된 당 강령과 노선을 제정하였다.

성향

초기 한인사회당은 극좌 레닌주의자부터 중도에 가까운 개혁주의자까지 아주 넓은 스펙트럼의 인사들이 모인 정당이었다.

당가

한인사회당 당가
인터내셔널가
The Internationale

깨어라, 노동자의 연대 굴레를 벗어 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온다
대지의 저주받은 땅에 새 세계를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 해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한인사회당 당가 <인터내셔널가>

창당과 함께 채택된 당가. 인터내셔널가를 한국어로 개사해 사용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인 김안산이 개사하였다. 사회당 온건파는 가사가 너무 급진적이라고 불만이었다고 하는데, 이동휘, 신채호 등 당 내 중립적인 인사들이 그냥 쓰자(...)고 해서[10] 채택되었다고 한다.

인터내셔널가는 한인사회당의 후신인 대한공산당, 국민사회당, 자주인연맹 등에서 사용되었으나 인터내셔널가를 불호하던 사회당 온건파가 창당한 사회민주당은 독자적인 당가를 작곡해 쓴다.

역대 지도부


역대 한인사회당 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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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거 결과

연도 지도자 의석수 (의석율) 의석증감 지위
1918 이동휘
9 / 200 (5%)
증가 2석
증가 1%
제2야당
1919
17 / 250 (7%)
증가 8석
증가 2.3%
제2야당
1923 이동녕
39 / 250 (16%)
증가 22석
증가 8.8%
제2야당
1926 홍범도
37 / 250 (15%)
감소 2석
감소 0.8%
제2야당
1930 양기탁
124 / 250 (50%)
증가 81석
증가 32.4%
여당
1934 이동휘
115 / 250 (46%)
감소 9석
감소 3.6%
여당
1935 유동열
43 / 300 (14%)
감소 72석
감소 31.7%
제1야당
1935 박헌영
35 / 300 (12%)
감소 9석
감소 3%
제2야당

각주

gaew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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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
한문명 開化黨
영문명 Reform Party (RP)
창당일 1884년 12월 4일
전신 급진개화파
분리된 정당 / 1918년 분당
해산일 1920년 7월 10일
후신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역대 총리 김옥균 / 제1대 • 1884~1896
이완용 / 제2대 • 1896~1899
박영효 / 제5대 • 1906~1912
유길준 / 제6대 • 1912~1914
서재필 / 제7대 • 1914~1918
총재 김옥균 / 초대
서재필 / 말대
이념 자유민주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급진개화
입헌주의
스펙트럼 중도 ~ 중도좌파
국민의원 n석 / n석 (n%)[11]
당색
하늘색 (#00C5FF)

개요

1884년부터 1920년까지 존재했던 조선, 대한국, 그리고 대한민국자유주의 정당.

당 강령

개혁개화선언 (改革開放宣言) 현재 대한은 크나큰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세계 열강들은 호시탐탐 이 대한을 종속하려 하고 있으며 내부로는 탐관오리의 부패와 오랜 쇄국정책으로 썩어들어가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대한의 4천년 독립의 불꽃이 결국 꺼져버릴 것이 자명하다.

이에 우리 급진개화파는 조국의 독립과 개혁, 개화의 선봉에 서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출하고자 바야흐로 대한 전국의 개혁•개방 세력의 총연합체이자 총본산인 개화당을 창당한다. 우리 개화당은 헌법의 지배 아래 만민의 권리가 보호받는 대한을 건설할 것을 맹세하며, 이를 위해 개혁, 개방의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개화당은 자유로운 선거를 통한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하며, 이를 통한 국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보장되고 장려되는 국가를 만들 것이다. 또한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와 평등의 원칙 하에 만민이 공평한 권리와 기회를 보장받는 국가를 만들 것이다.

개화당은 외국의 문물을 빠르게 흡수하여 조국의 현대화를 위해 노력할 곳이며, 옛시대에는 천시받았던 상공업과 신학문을 장려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산업과 학문 역시 소외받지 않도록 할 것이다.

개화당은 침략적 제국주의와 배타적 국수주의를 거부하며, 만국공법의 준수와 상호호혜의 실현으로 이루어질 세계 평화를 절대 지지한다. 개화당은 각 민족이 각자의 운명을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믿으며, 민족의 자결이 보장되는 동시에 이웃 민족간의 화합 역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일천만 국민이여! 지금 대한은 중대한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과거로의 퇴보냐, 미래로의 진보냐의 문제에서 오직 개화당만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개화당은 신시대를 열 준비가 되어있다!

모여라, 개화당의 깃발 아래!

역사

역사

성향

역대 지도부

역대 선거 결과

연도 지도자 의석수 (의석율) 의석증감 지위
1893 김옥균
56 / 100 (56%)
- 여당
1896 이완용
58 / 100 (58%)
증가 2석
증가 2%
여당
1899
53 / 120 (44%)
감소 5석
감소 13.8%
제1야당
1902 서광범
58 / 120 (48%)
증가 5석
증가 4.2%
제1야당
1906 박영효
77 / 120 (64%)
증가 19석
증가 15.1%
여당
1902
65 / 120 (54%)
감소 12석
감소 10%
여당

각주

juk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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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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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김홍집 권동진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유길준 서재필 이승만 김가진 안창호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양기탁 이동휘 유동열 김규식 김창암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조만식 여운형 조봉암 윤보선 장면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김성주 장준하 김철 김영삼 김대중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이기택 홍숙자 이회창 노무현 김문수
제31대 제32대
정병국 유승민

고구려 국상 · 고구려 대막리지 · 신라 상대등 · 고려 문하시중 · 조선 영의정 · 대한국 총리

대한민국 제18대 국무총리
조봉암
曺奉岩 | Cho Bong-am
출생 1898년 9월 25일
경기도 강화군
사망 1975년 3월 18일 (향년 76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임기 제18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1951년 8월 11일 ~ 1957년 2월 10일
[ 펼치기 · 접기 ]
배우자 김금옥 (사별)
김조이 (재혼)
자녀 1남 3녀
본관 창녕 조씨
죽산 (竹山)
학력 주오대학 (정치학 / 중퇴)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소속 정당
의원 선수 9
의원 대수 12, 13, 15, 16, 17, 18, 19, 21, 22
소속 위원회 농림위원회
성향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자유사회주의, 민족주의, 반공주의

개요

대한민국의 제18대 국무총리.

생애

국무총리

1951년, 여운형이 본인의 개인비서가 소련의 스파이로 체포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사민당에서는 차기 대표, 즉 국무총리가 누가 될 것인지를 결정할 임시 전당대회가 치루어졌다.

전당대회에 참가한 조봉암에게 도전장을 내민 이는 현직 수석부총리인 조용은이었다. 64세의 조용은은 민족주의적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한 반면 53세의 조봉암은 비교적 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두 사람 다 조씨였기에 언론에서는 그 전당대회를 '양조대전'이라고 불렀다. 당시 전당대회는 여운형의 개인비서가 소련의 스파이로 체포된 것의 여파로 치러진 전당대회였기 때문에 당원들은 조용은보다 반공주의 성향이 짙은 조봉암을 더 선호했고 결선투표에서 57%를 득표한 조봉암이 사민당 대표에 선출되어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어록

…또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공산당은 조국을 완전히 쏘련의 괴뢰화하여 민족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칭 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며 쏘련의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등 맹동을 하고 있습니다.[12]
1941년, 태평양전쟁 중 라디오 연설
'국가에 의한 자유'란 무엇인가. 각 개인이 자신의 정당한 꿈을 펼치는 데에 있어 국가가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어주는 것이 진정한 '국가에 의한 자유'입니다.
1950년, 국민원 원내총무 기조 연설
우리들 자신이 더욱 민주주의 이념에 철저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함으로써 공산주의가 스며들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1953년, 전승절 8주년 기념 연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을 가리켜서 한국의 사민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1957년, 퇴임 연설

각주

run and r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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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을 내실 제, 아무 데에도 쓸모 없도록 내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나는 사회주의와 연이 없을 뿐더러 도리어 그것을 혐오하오. 내 정책은 철저히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계획된 것이니 날더러 사회주의자니 뭐니 하지 마시오.
1920년, 국민원 국무총리 질의 중

각주

김구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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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암 피살 사건
金昌巖被殺事件
Assassination of Kim Chang-am
▲ 당시 조선일보 기사[13]
발생일시 1944년 11월 20일 시 분 경
유형 살인, 적색테러
발생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피의자 김천호 (金天浩, 26세)
동기 대한공산당 잔여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기도
피해자 김창암 (제15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개요

1944년 11웡 20일, 태평양전쟁 도중 대한민국의 제18대 국무총리김창암대한청년적위대 단원 김천호에게 살해된 사건.

전개

배후

영향

각주

유신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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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역사

  1. 전시 (제1차 세계대전)
  2. 전임 국무총리 이동휘의 임기 중 사망으로 인한 국무총리 대행
  3. 전시 (제2차 세계대전 - 태평양전쟁)
  4. 국무총리대행: 1944년 11월 20일 ~ 1945 1월 21일
  5. 해산 당시 기준
  6.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집권정당은 1924년 집권한 몽골 인민혁명당. 다만 민주적인 방법으로 집권하지 않았다.
  7. 한인사회당의 주 지지기반이 도시 노동자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인사회당 인사들은 농촌문제에는 무지했다.
  8. 러시아 이름은 김알렉산드라.
  9. 검은바지 콧수염이 이동휘. 앞줄 맨 오른쪽이 부의장 김립
  10. 실제로는 가사가 뭐 어때서 그러냐고 했다고 한다.
  11. 해산 당시 기준
  12. 출처
  13. 기사 제목은 '김총리 급서에 각계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