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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3일 (금) 13:5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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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고증 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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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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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1917년부터 1938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정당.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역사창당20세기 초, 사회주의 성향의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민원에서 노동자협회라는 이름의 교섭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노동자의 처우 개선, 근로기준법 제정, 노조 활동 방해 금지 등을 요구하였다. 노동자협회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운동을 벌였으나 별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에 노동자협회 지도부와 회원들은 조직화된 정당의 필요성을 느꼈고 1917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초대 의장으로는 노동자협회 회원 중 대중인지도가 가장 높은 이동휘가 추대되었다. 성장과 집권급속도로 진행되는 산업화에 도시 노동자들의 수 역시 급속도로 늘었고, 사회당은 이들을 기반으로 계속 성장했다. 1927년, 공장 관리진 측의 부당한 대우에 원산 노동자연합회가 전면적 파업을 일으킨 원산 총파업 당시 당 지도부가 총출동하여 파업을 지원하며 그 세력이 급속도로 불었다. 1929년 이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한국의 경제가 깊은 침체에 빠지자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후 1930년 총선에서 과반의 집권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제3당으로 굴어떨어지고 한인사회당이 대한국민회를 제치고 국민원 과반을 차지하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민주적으로 집권한 첫 사례였다.[6] 총리로 선출된 이는 사회당 온건파의 거두 양기탁이었다. 양기탁 내각은 최저임금제도를 도입하고 노조의 대표성을 강화하는 등 여러 정책으로 노동자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하지만 양기탁 내각은 농촌 문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7] 경제 정책 역시 이전 수권 정당들에 비해 상당히 투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동열, 김안산[8], 박헌영 등 사회당 급진파는 더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요구했고 대한국민회와 대한민주당, 그리고 자유당은 한인사화당이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집권 축하 편지를 받은 것을 문제삼아 사회당을 소련의 프락치 정당이라고 비난했다. 안팎의 압박에 결국 양기탁은 총리직에서 사퇴했고 온건파와 급진파의 대립을 중재하던 이동휘가 당 의장에 추대되어 총리직에 취임했다. 분열과 쇠퇴
이동휘는 당내외의 걱정을 뒤엎고 상당히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였고 1934년에 치루어진 13회 총선에서 한인사회당은 원내 1당 지위를 유지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과반에 조금 못 미치는 의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극우 민족단결연맹의 약진으로 국민회, 민주당, 자유당이 연립하여도 한인사회당의 의석수보다 적었기에 한인사회당은 내각구성권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당만의 단독 소수내각을 꾸리기에는 국정운영의 차질이 불가피해 보였기에 이동휘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자유당과의 연정을 시도하였고 교섭 끝에 연정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35년 이동휘가 급사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급진파와 온건파 양측의 인정을 받던 이동휘가 사라지면서 한인사회당은 극심한 내분에 휩싸였다. 총리 대행을 맡았던 신채호와 당 부의장 김립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었지만,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로 급진파와 온건파 양쪽 모두로부터 불호를 받았기에, 김립은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인해 당 내에서 큰 힘을 쓸 수 없었고 결국 온건파와 급진파를 중재하는 데에 실패했다. 유일한 중재자가 사라지면서, 급진파와 온건파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맞붙게 되었다. 양측은 차기 의장을 뽑을 전당대회에 사활을 걸었는데, 1935년 3월에서 4월에 걸쳐 치루어진 임시 전당대회에서 급진파의 지지를 받은 유동열이 온건파의 지지를 받은 조용은을 아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의장에 선출되면서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취임 직후 유동열이 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 추진을 선언하자 이에 자유당이 반발해 연정 탈퇴를 선언하였다. 총리 선출 직후 민족단결연맹에 의해 발의된 내각불신임안이 민단련, 국민회, 민주당, 자유당에 의해 통과되었다. 이에 사회당 온건파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총리 유동열에게 코민테른 가입 추진 선언을 철회해 타 정당들을 안심시킬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시에는 탈당하겠다고 급진파를 압박했으나 사회당 급진파는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조용은, 안공근 등 온건파 인사들을 해당행위를 이유로 제명했고 이에 반발한 온건파는 집단 탈당 후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몰락
유동열은 국무총리 사퇴를 거부하고 의회를 해산,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렇게 하여 치러진 선거가 1935년 제14회 총선이다. 14회 총선에서 국민회와 민주당은 선거연대를 꾸려 집권에 성공한 반면 사회주의 진영은 지지율도 낮아진 상황에서 한인사회당과 사회민주당으로 분열된 상태였던지라 표가 분산되어 한인사회당은 의석을 절반 이상 잃으며 실권했다. 14회 총선에서의 참패 이후 의장 유동열의 리더십이 흔들렸다. 이미 온건파는 탈당해 다른 살림을 꾸린 상태였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의 박헌영계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성향인 유동열계에 도전해왔다. 결국 유동열은 박헌영계의 압박에 총선 패배와 분열의 책임을 지고 1935년 11월 의장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또다시 열린 임시전당대회에서 박헌영이 의장에 당선되면서 당은 더욱 좌경화되었다. 박헌영은 당명을 대한공산당으로 바꾸고 더욱 좌경화된 당 강령과 노선을 제정하였다.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공산당 (개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성향초중기
초기에서 중기까지의 한인사회당은 극좌 레닌주의자부터 중도에 가까운 개혁주의자까지 아주 넓은 스펙트럼의 인사들이 모인 정당이었다.
위에 나온 3대 정파 외에도 수많은 군소정파들이 사회당 내에 존재했다. 이렇게 지나치게 넓은 스펙트럼은 사회당 분당과 쇠퇴의 단초가 되었다. 말기유동열이 의장으로 선출된 이후, 구조개혁주의를 주장하던 당내 온건파가 사회민주당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만 남은 한인사회당은 급격히 좌경화되었다. 그 상황에서 사회당 내에는 다시 두 거지 정파가 대두되었다. 하나는 유동열로 대표되는 좌익민족주의 계열이었도 또다른 하나는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친소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이었다. 유동열이 의장이었던 시기에는 좌익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하고 레닌주의 계열이 그들을 견제하는 모양새였지만 박헌영이 당권을 잡은 후에는 레닌주의 계열이 당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당가
창당과 함께 채택된 당가. 인터내셔널가를 한국어로 개사해 사용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인 김안산이 개사하였다. 사회당 온건파는 가사가 너무 급진적이라고 불만이었다고 하는데, 이동휘, 신채호 등 당 내 중립적인 인사들이 그냥 쓰자(...)고 해서[10] 채택되었다고 한다. 인터내셔널가는 한인사회당의 후신인 대한공산당, 국민사회당, 자주인연맹 등에서 사용되었으나 인터내셔널가를 불호하던 사회당 온건파가 창당한 사회민주당은 독자적인 당가를 작곡해 쓴다. 역대 지도부
한인사회당은 의장이 당의 대표였다. 의장의 임기는 2년으로, 중임이 가능했다. 의장은 2년에 한 번 치러지는 전당대회에서 선출되었는데,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상위 후보 4명을 뽑아 2차 투표를, 2차 투표에서도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그중애서 상위 후보 2명을 뽑아 3차 투표를 치러 선출하였다.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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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ew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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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1884년부터 1920년까지 존재했던 조선, 대한국,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정당. 역사태동개화당의 기원은 19세기 중후반 고종이 실시한 개화정책과 함께하였다고 평가받는다. 개화 정책에 찬성하는 이들 중 급진적인 개파를 급진개화파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서양의 기술 뿐만 아니라 사상과 사회제도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명개화론을 지지하며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되 조선 고유의 제도와 사상을 유지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지지하는 온건개화파와 대립했다. 이들의 리더는 김옥균이었으며,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이완용, 서재필, 윤치호등이 핵심멤버였다. 갑신혁명과 창당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갑신혁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종의 개화가 지나치게 느리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한 급진개화파는 장변을 통해 훨씬 더 급진적인 개화를 이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집권과 실권재집권과 1차 세계대전자유당으로당 강령개혁개화선언 (改革開放宣言)
현재 조선은 크나큰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세계 열강들은 호시탐탐 이 조선을 종속하려 하고 있으며 내부로는 탐관오리의 부패와 오랜 쇄국정책으로 썩어들어가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조선의 4천년 독립의 불꽃이 결국 꺼져버릴 것이 자명하다. 당가
성향역대 지도부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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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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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1918년부터 19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정당. 역사성향역대 지도부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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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k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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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대한민국의 제18대 국무총리. 생애국무총리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조봉암 내각 (개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51년, 여운형이 본인의 개인비서가 소련의 스파이로 체포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사민당에서는 차기 대표, 즉 국무총리가 누가 될 것인지를 결정할 임시 전당대회가 치루어졌다. 전당대회에 참가한 조봉암에게 도전장을 내민 이는 현직 수석부총리인 조용은이었다. 64세의 조용은은 민족주의적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한 반면 53세의 조봉암은 비교적 자유주의적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두 사람 다 조씨였기에 언론에서는 그 전당대회를 '양조대전'이라고 불렀다. 당시 전당대회는 여운형의 개인비서가 소련의 스파이로 체포된 것의 여파로 치러진 전당대회였기 때문에 당원들은 조용은보다 반공주의 성향이 짙은 조봉암을 더 선호했고 결선투표에서 57%를 득표한 조봉암이 사민당 대표에 선출되어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어록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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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 and r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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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대한민국의 제8대 국무총리.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총리를 역임하며 1차 세계대전 전후 동아시아 질서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생애초기이승만은 1875년 조선 황해도 평산도호부 마산방에서 태어났다. 배제학당에서 수학하며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이승만은 서구 신학문에 큰 관심을 보였고 개화당 인사들과도 자주 접촉하였다. 이후 윤치호로부터 미국 유학을 권유받고 18세의 나이에 미국 선교사들의 추천장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교, 히버드 대학교에서 각각 정치학 석사 학위와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01년에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 8년만의 일이었다. 이렇게 이승만은 한국인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자가 되었고, 이는 그에게 큰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정계 입문국무총리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대상 경로에 섬네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 내각 (개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장수만세어록
여담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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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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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동방의 오극란 배너 틀:역대 녹우크라이나 대통령 (동방의 오극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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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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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1944년 11월 20일, 태평양전쟁 도중 대한민국의 제18대 국무총리인 김창암이 대한청년적위대 단원 김천호에게 백주대낮에 살해된 사건. 전개1944년 11월 20일,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은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날 역시 김창암 총리는 관저에서 나와 기자들과 짧은 질의응답을 하고 총리부 청사로 출근하기 위해 집 앞에서 대기하던 관용차를 탔다. 차가 이동하던 중 다른 차 한 대가 김참암이 타고 있던 차를 들이박았다. 다행히도 김칭암 총리와 운전기사가 가벼운 부상을 입은 걸로 끝났고 사고 직후 두 명의 청년이 사고 현장에 모여든 인파 속에서 나와 차로 접근하더니 김창암 총리와 일행이 차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순간, 그 두 명의 청년은 품 속에서 기관단총을 꺼내 김창암과 김창암의 보좌관인 선우진[22], 운전기사에게 총을 난사했다. 특히 암살범들은 김창암에게만 최소 30여 발을 쏘았다. 사람들이 급작스러운 총격에 놀라 흩어지자 암살범들은 도망쳤다. 보좌관 선우진과 운전기사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으나 김창암 총리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김창암을 살해한 범인 2명은 도주하였으나 사건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장경찰들의 총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범인과 배후경찰은 사살된 남자들의 지문을 통해 그들이 과거 대한공산당 산하조직인 대한청년전위대에서 활동하다가 수감되었었던 이들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곧 대한공산당을 사건의 배후라고 판단하였다. 영향각주 | |||||||||||||||||||
재건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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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태평양전쟁기 일본이 대한민국에 세운 괴뢰국. 정식 국호는 대한국(재건정부)이었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주로 부산정권으로 불린다. 역사정치부산정권은 일본과의 동군연합을 기반으로 하는 입한군주제, 의원내각제 국가를 표방하였다. 주한일본군사령부는 대한민국 정부를 불법정부로 규정하고 대란민국 이전에 존재했던 입헌군주국인 대한국을 재건하였다는 의미에서 괴뢰정권의 이름을 '대한국 재건정부'라고 붙였다. 하지만 부산정권은 실제로는 일본의 완벽한 괴뢰국이었다. 일본은 총리와 각 부 장관을 한국인으로 두되 각 부의 실권 고문에 일본인을 임명해 한국인 장관은 사실상 권력이 전혀 없었다. 정부 운영 경비는 대부분 일본이 제공했으며 치안 역시 일본군이 담당하였다. 각료 임용사일본은 각부 장관에 한국인을 임명해 독입국의 구색을 맞추어 명목상으로나마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고 선전했으나 일본이 장관으로 점찍은 인물들은 한결같이 장관적을 거부했다. 총리의 경우 지역원로 윤치호를 임명하려 했으나 윤치호는 괴뢰정부의 총리직을 맡을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일본군의 협박에 마지못해 총리직을 받아들였다. 다른 장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기에 괴뢰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전후에도 괴뢰정부에서의 의도적인 태업이 인정되어 처벌받지는 않았다. 군사부산정권은 보안군이라는 이름으로 군대를 운용하였다. 총병력은 10만 명으로 계획되었으나 지원자가 없어 최대 병력은 4천 명에 불과했으며 훈련도도 낮아 실전 투입은 되지 못했다. 국군은 보통 괴뢰군이리고 불렀다.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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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올코우스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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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1936년 녹우크라이나 서북부 치올코우스키에서 벌어진 한국-녹우크라이나 동맹군 대 소련군의 전투. 한-녹오 동맹의 승리로 끝나면서 연해주 지방의 분쟁이 잠시동안 멈췄다. 배경
러시아는 해양 진출을 위해 대대로 부동항을 손애 넣고 싶어 해왔다. 극동에서 러시아가 보유하고있던 항구 중 그나마 가장 부동항의 가까운 항구도시는 연해주 프리모리예 지방의 볼로디보스토크[1]였는데, 러시아 내전 이후 한국과 일본이 연해주 지방에 완충지대를 두기 위해 극동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이 건국한 녹우크라이나를 지원하자 녹우크라이나 영토가 된 볼로디보스토크를 상실했다. 이에 소련은 부동항을 확보하고 극동에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녹우크라이나를 병합하려 하였다. 한국의 입장에서 녹우크라이나는 일종의 방파제였다.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한 한국 정부는 국민회, 자유당, 사회당, 민주당 내각을 가리지 않고 녹우크라이나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안창호 내각은 소련으로부터의 증대되는 위험에 맞서 녹우크라이나와 동맹을 맺고 4만 여 명의 병력을 녹우크라이나 영내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전개결과영향 | ||||||||||||||||||||||||||||||||||||||||||||||||||||||
틀.
녹우크라이나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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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명칭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