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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의 기원은 19세기 중후반 고종이 실시한 개화정책과 함께하였다고 평가받는다. 개화 정책에 찬성하는 이들 중 급진적인 개파를 급진개화파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서양의 기술 뿐만 아니라 사상과 사회제도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명개화론을 지지하며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되 조선 고유의 제도와 사상을 유지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지지하는 온건개화파와 대립했다. 이들의 리더는 김옥균이었으며,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이완용, 서재필, 윤치호 등이 핵심멤버였다.
고종의 개화가 지나치게 느리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한 급진개화파는 장변을 통해 훨씬 더 급진적인 개화를 이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 공사관이 공사관 경비대를 동원해 정변을 지원하겠다는 의향을 밝혔으나 급진개화파는 민심 이반을 우려하여 이를 거부했다.
1884년 12월 4일, 급진개화파는 갑신혁명을 일으켰다. 정변은 성공적이었다. 급진개화파는 인명 피해를 최소화함과 동시에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고 한성의 국가 주요 기관들을 모조리 장악했다. 속전속결이었다.
한성에 주둔하던 청군은 지일 성향의 급진개화파를 견제하고 있었으나, 워낙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급진개화파는 조련국 사관장[10]서재필 등이 이끄는 조련국 생도부대를 동원해 군권까지 장악하였고 지방조직을 통해 지방행정까지 통제하면서 청군은 개입일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든 급진개화파는 고종의 입을 빌려 새 인사와 개혁정강을 발표를 단행하였다. 이 인사로 급진개화파 리더였던 김옥균은 총리서리에 임명되었으며 급진개화파 주요 인사들과 급진개화파에 협조적이었던 일부온건개화파인사들도 요직에 배치되었다. 주요 멤버들도 동시에 청군 철수도 요구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한성에서의 외국 세력 간 균형 유지를 위해[11] 보류되었다.
다당제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했던 급진개화파는 갑신혁명의 성공 이후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할 정당이 필요하다 판단하였고 이로 인해 만들어진 정당이 바로 개화당이다. 총재에는 급진개화파의 리더인 [[김옥균 (개화)|김옥균]이 추대되었다.
집권과 실권
개화당 집회 (1897)
친서방 지식인과 상공인 등 주로 신흥 계층의 지지를 받던 김옥균 내각은 보통선거에 앞서 국민을 계몽하여 기반을 다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게혁을 통해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할 때까지 총선을 연기하기로 결정하였다.
갑심혁명 이후 9년만인 1893년, 역사적인 첫 총선이 치러졌다. 총선에서 개화당은 온건개화파의 보수당과 위정척사파의 보국당을 누르고 중추원 내 단독 과반을 확보, 내각을 구성했다. 총리대신에는 기존 총리이자 개화당 총재였던 김옥균이 취임했다.
1895년, 실권 없는 얼굴마담이던 고종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러시아와 모의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한 아관파천을 감행하였다. 비록 고종 아관파천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일국의 군주가 국민의 지지로 구성된 정부를 외세의 힘을 빌려 전복하려 했던 쿠데타였기에 이 사태는 일대의 정치격변을 몰고 왔다. 이 사태를 계기로 개화당은 헌군주의 지지에서 공화주의 지지로 전향하였고 보수당과 함께 군주정을 폐지, 민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1896년, 김옥균이 아관파천 사태에 대한책임을 지는 모양새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재무부장관이었던 이완용이 당 총재로 추대되어 총리직에 취임했다. 허나 1898년, 영국의 추가적인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김옥균 내각이 부산 절영도를 영국의 석탄 공급기지로 넘기려 하자 대규모의 만심 이반이 발생하였고[12] 개화당은 집권 14년만에 정권을 온건개화파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20세기 초부터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개화당의 전통적 라이벌이었던 보수당과 보국당은 몰락했다. 보수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보국당은 아예 원외로 퇴출되었다. 그 저리를 채운 것은 1차 세계대전 중이 외무성 장관을 역임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이승만이 창당한 대한국민회였다.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후 치러진 8회 총선에서 개화당이 패배하며 실권하였다. 이에 개화라는 당명이 이미 시대에 맞지 않다는 지적과 패배로 인한 분위기 전환을 위해 당명을 전격적으로 자유당으로 변경하였다.
당 강령
개혁개화선언 (改革開放宣言)현재 조선은 크나큰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세계 열강들은 호시탐탐 이 조선을 종속하려 하고 있으며 내부로는 탐관오리의 부패와 오랜 쇄국정책으로 썩어들어가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조선의 4천년 독립의 불꽃이 결국 꺼져버릴 것이 자명하다.
이에 우리 급진개화파는 조국의 독립과 개혁, 개화의 선봉에 서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출하고자 바야흐로 대한 전국의 개혁•개방 세력의 총연합체이자 총본산인 개화당을 창당한다. 우리 개화당은 헌법의 지배 아래 만민의 권리가 보호받는 대한을 건설할 것을 맹세하며, 이를 위해 개혁, 개방의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개화당은 자유로운 선거를 통한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하며, 이를 통한 국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보장되고 장려되는 국가를 만들 것이다. 또한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와 평등의 원칙 하에 만민이 공평한 권리와 기회를 보장받는 국가를 만들 것이다.
개화당은 외국의 문물을 빠르게 흡수하여 조국의 현대화를 위해 진력할 것이며, 옛시대에는 천시받았던 상공업과 신학문을 장려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산업과 학문 역시 소외받지 않도록 할 것이다.
개화당은 침략적 제국주의와 배타적 국수주의를 거부하며, 만국공법의 준수와 상호호혜의 실현으로 이루어질 세계 평화를 절대 지지한다. 개화당은 각 민족이 각자의 운명을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믿으며, 민족의 자결이 보장되는 동시에 이웃 민족간의 화합 역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일천만 국민이여! 지금 조선은 중대한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과거로의 퇴보냐, 미래로의 진보냐의 문제에서 오직 개화당만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개화당은 신시대를 열 준비가 되어있다!
모여라, 개화당의 깃발 아래!
당가
개화당 당가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Do You Hear The People Sing?
노래가 들리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심장 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모두 함께 싸우자 누가 나와 함께 하나
저 너머 장벽 지나서 오래 누릴 세상
자 우리와 싸우자 자유가 기다린다
노래가 들리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심장 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때
만주의 중도 정당. 1927년 창당된 만주의 최고(最古) 정당이다. 현지에서는 주로 민건회(民建会)라 줄여부른다.
역사
1927년,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만주의 첫 수상이 된 정샤오쉬는 총선을 치르고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가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세운 정당이 바로 민주건국회다.
민건회는 초대 총선에서 승리하며 전샤오쉬를 내각총리대신으로 하여 집권하였고, 정샤오쉬가 죽은 후에도 1940년까지 집권한다. 1940년, 제2차 극동전쟁이 발발하자 전시거국내각이 구성되었다. 이와 동시에 대소 유화론을 펼치던 민건회 소속 수상인 시치아는 사임하였고 군인 출신의 협화회 소속 장징후이가 수상에 취임하면서 민건련은 13년만에 수상직을 상실했다.
성향
중도 - 중도좌파 정당으로, 만주 정치에서 개혁파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다. 보통 사회적으로는 중도, 경제적으로는 중도좌파라고 평가받는다.
사회적으로는 보수 성향의 사회보수주의자와 진보 성향의 사회자유주의자가 당내에 혼재되어있어 정확한 성향을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로 인해 만주의 급진좌파 진영은 민건련을 사이비 진보정당, 혹은 심지어는 보수정당이라고까지 부른다.
경제적으로는 당원과 지도부 대부분이 수정자본주의를 지지한다. 복지 확대와 부자 증세, 국가 주도의 일자리 창출 등에 긍정적이다. 다만 사회주의(내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지는 않는다.
만주군은 스스로의 전신을 청나라군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질적인 전신은 장징후이 등의 군벌 부대이다. 만주국이 건국된지 일주일 후인 1927년 모월모일에 강덕제를 통수권자로, 마진산을 총참모장으로 하여 창건되었다.
이후 만주가 국방을 사실상 한국에 의존하여 만주군은 소규모 부대를 중심으로만 편제되었었지만 1936년 이웃한 녹우크라이나에서 치올코우스키 전투로 안보 위협이 가중되자 징병제를 급히 도입하고 군비를 대폭 증강하였다. 1940년 기준 민주군은 23만 명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전차, 야포 등 중장비가 충분하지 않았다. 특히 대전차포 등 대전차 무기가 부족하였다.
결국 제3차 극동전쟁 당시 소련군에게 탈탈 털렸고 모든 영토를 상실하여 1차 대전 당시의 벨기에 꼴이 되고 말았다. 이후 압록강에서 한국군과 함께 최후의 저항을 하다가 독소전쟁 발발로 소련이 곤경에 처해 미국의 중재로 평화협정이 체결되자 국토를 수복하였다.
냉전 당시 만주는 명목상으로는 중립국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상태였기에, 3차 극동전의 트라우마로 인해 만주는 아주 비대한 규모의 군대를 운용했다. 1970년에는 상비군이 10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후 데탕트를 거치며 군비 지출 등가속도가 감소하기 시작되었고 시작했고, 1980년대 중반 잠시 상승하였가다 소련의 붕괴 후 다시 감소했다. 이 추세는 200년대까지 이어져 2000년대의 연 군비증가율은 1% 내외였으며 병력은 40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군축과 동시에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수천 명 규모의 평화유지군을 파병하기도 했다.
2010년댜에 들어서면서, 강력해진 중국이 과거 중국 영토였던 국가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대만, 티베트, 몽골은 물론 만주 역시 그 대상에 포함됐다. 이는 만주인들이 70년 전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트라우마가 재발한 만주는 GDP 대비 국방비를 3.5%까지 늘리는 것을 목표로 빠른 속도로 군비 증강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