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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50년 재정부장으로 발령되어 내전 이후 비대해진 국방비를 줄이는데 일조하였으며 회계연도 제도를 재정립하여 통일세금징수규정을 시행하고 재정금융정책을 개정하며 현대예산제도를 확립하였다. 1954년에는 잠시 타이완성 정부주석 겸 보안사령관으로 재임하였으며 이후 재정부장으로 복귀하여 19대 금융 개혁 조치를 통과시켰다. | 이후 1950년 재정부장으로 발령되어 내전 이후 비대해진 국방비를 줄이는데 일조하였으며 회계연도 제도를 재정립하여 통일세금징수규정을 시행하고 재정금융정책을 개정하며 현대예산제도를 확립하였다. 1954년에는 잠시 타이완성 정부주석 겸 보안사령관으로 재임하였으며 이후 재정부장으로 복귀하여 19대 금융 개혁 조치를 통과시켰다. | ||
=== 중앙 정계로의 발걸음 === | === 중앙 정계로의 발걸음 === | ||
1963년 12월, 천청 부총통 겸 행정원장이 급격한 건강 악화를 이유로 행정원장직을 사임하자 후임 행정원장에 지명되어 옌자간 내각이 출범하였으며 [[장제스 (민국 38)|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 (민국 38)|장징궈]]를 국방부 부부장으로 암명하여 그의 성장을 도왔다. 1964년에는 한국에 방문하여 장면 총리와 회담을 갖기도 하였으며 1965년 1월에는 장징궈를 국방부장에 임명하여 군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 |||
1966년 신임 부총통을 선출해야 할 시기가 왔을때 전임 부총통인 천청은 건강 악화를 사유로 재선을 포기하였다. 당시 장제스의 후계자로 낙점된 것은 명실상부 그의 아들인 장징궈였으나 이미 편법을 동원하여 3선 금지 규정을 깨부순 장제스에게 있어서 대놓고 본인의 아들인 장징궈를 부총통으로 임명하는 것은 당내 좌파와 민주파를 비롯하여 야권 전반에게 눈총을 사는 일이었기 때문에 관료로서는 유능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전무한 옌자간이 부총통으로 선출되게 되었다. | |||
1968년 68혁명의 영향을 받아 [[제1차 전민항쟁 (민국 38)|제1차 전민항쟁]]이 일어나자 옌자간은 장제스 총통의 명령을 받아 강경 진압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통제가 힘들 정도로 확대되자 사태의 책임을 물어 [[국민당 좌파 (민국 38)|국민당 좌파]]의 거두인 [[왕징웨이 (민국 38)|왕징웨이]]에게 행정원장 직을 넘기고 1968년 10월 내각총사퇴를 결의한 뒤 사임하였다. 그러나 시위를 강경진압 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는 장제스의 신임을 얻었으며 행정원장 사임 이후에도 승승장구 하였고 이후 1972년에도 부총통으로 재선되었다. | |||
=== 격변기의 허수아비 총통 === | === 격변기의 허수아비 총통 === | ||
2023년 8월 24일 (목) 13:01 판
중화민국 총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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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자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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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4·5대 부총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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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5대 총통 옌자간 | |||||||||||||||||
출생 | 1905년 10월 23일 | ||||||||||||||||
청 장쑤성 쑤저우부 오현 목도 (現 중국 장쑤성 쑤저우시 우중구 무두촌) | |||||||||||||||||
사망 | 1993년 12월 24일 (향년 88세) | ||||||||||||||||
중국 난징시 구러우구 난징시고루병원 | |||||||||||||||||
재임기간 | 제4대 부총통 | ||||||||||||||||
1966년 5월 20일 ~ 1972년 5월 20일 | |||||||||||||||||
제5대 부총통 | |||||||||||||||||
1972년 5월 20일 ~ 1975년 4월 5일 | |||||||||||||||||
제5대 총통(계임) | |||||||||||||||||
1975년 4월 5일 ~ 1978년 5월 20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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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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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중국의 정치가, 제5대 총통, 제4·5대 부총통, 제8대 행정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약력
생애
유년기와 관료 생활
1905년 10월 23일, 청나라 장쑤성 쑤저우부에서 태어나 무두소학(現 무두실험소학)을 졸업하고 상하이 세인트 존스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1년 난징-상하이-항저우-닝보[1] 철도 관리국 자재처장을 지냄으로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1938년 푸젠성 정부 건설청장으로 재직하면서 곡물 수입 항구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어 혼란스러워진 성내의 교통 혼란을 잡기위해 도로와 하천 정비에 힘썼다. 이듬해 재정청장을 맡아 전시재정을 조달하였고 70여종의 잡세를 폐지한 뒤 성내 재정을 개선하여 매년 예산균형을 맞춰 적자가 발생하지 않게하였고 푸젠의 식량공급문제의 해결과 법폐 팽창 문제 대응을 위해 세금을 내지 않고 농작물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감액하는 전부징실(田征实實) 제도를 처음 만들었으며 이듬해 재정부를 거쳐 전국적인 시행을 추진하였다. 1945년에는 전시생산국 조달청 장관이 되어 무기대여법(랜드리스)와 중국-영국, 중국-캐나다 간의 대출안을 처리했다.
전후에는 타이완성 행정장관공서 교통처장으로 부임되어 천이(陳義) 대만성 행정장관 겸 대만경비총사령관과 함께 주 타이완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 2.28 사건 당시에는 재정처장으로 부임되어 있었는데 민정처장 주얼리(周一鶚), 광공업처장 바오커융(包可永)등 천이의 푸젠성 시절 인맥들과 함께 4흉으로 몰리기도 했다. 이후 타이완성 정무위원으로 임명되어 타이완성과 본토의 재정을 분리한 뒤 신타이완화를 발행하는 재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이후 1950년 재정부장으로 발령되어 내전 이후 비대해진 국방비를 줄이는데 일조하였으며 회계연도 제도를 재정립하여 통일세금징수규정을 시행하고 재정금융정책을 개정하며 현대예산제도를 확립하였다. 1954년에는 잠시 타이완성 정부주석 겸 보안사령관으로 재임하였으며 이후 재정부장으로 복귀하여 19대 금융 개혁 조치를 통과시켰다.
중앙 정계로의 발걸음
1963년 12월, 천청 부총통 겸 행정원장이 급격한 건강 악화를 이유로 행정원장직을 사임하자 후임 행정원장에 지명되어 옌자간 내각이 출범하였으며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를 국방부 부부장으로 암명하여 그의 성장을 도왔다. 1964년에는 한국에 방문하여 장면 총리와 회담을 갖기도 하였으며 1965년 1월에는 장징궈를 국방부장에 임명하여 군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1966년 신임 부총통을 선출해야 할 시기가 왔을때 전임 부총통인 천청은 건강 악화를 사유로 재선을 포기하였다. 당시 장제스의 후계자로 낙점된 것은 명실상부 그의 아들인 장징궈였으나 이미 편법을 동원하여 3선 금지 규정을 깨부순 장제스에게 있어서 대놓고 본인의 아들인 장징궈를 부총통으로 임명하는 것은 당내 좌파와 민주파를 비롯하여 야권 전반에게 눈총을 사는 일이었기 때문에 관료로서는 유능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전무한 옌자간이 부총통으로 선출되게 되었다.
1968년 68혁명의 영향을 받아 제1차 전민항쟁이 일어나자 옌자간은 장제스 총통의 명령을 받아 강경 진압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통제가 힘들 정도로 확대되자 사태의 책임을 물어 국민당 좌파의 거두인 왕징웨이에게 행정원장 직을 넘기고 1968년 10월 내각총사퇴를 결의한 뒤 사임하였다. 그러나 시위를 강경진압 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는 장제스의 신임을 얻었으며 행정원장 사임 이후에도 승승장구 하였고 이후 1972년에도 부총통으로 재선되었다.
격변기의 허수아비 총통
말년
평가
여담
대중매체에서
어록
선거 이력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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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칭 징후항융(京滬杭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