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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에는 아버지 김현기의 정책보좌관이 되어 정계에 처음으로 입문하였고, 아버지 김현기가 당내 파벌경쟁에서 밀려 정계를 은퇴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84년 나진 제2선거구에 민정당 공천을 받고 출마하여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하였다. 세습정치인치고는 정계입문이 늦은 편이였는데, 이는 김이석 본인이 함경일보에서 일하는것을 꽤나 즐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퇴사 후에는 아버지 김현기의 정책보좌관이 되어 정계에 처음으로 입문하였고, 아버지 김현기가 당내 파벌경쟁에서 밀려 정계를 은퇴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84년 나진 제2선거구에 민정당 공천을 받고 출마하여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하였다. 세습정치인치고는 정계입문이 늦은 편이였는데, 이는 김이석 본인이 함경일보에서 일하는것을 꽤나 즐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
=== 민정당에서의 활동 === | |||
당선 직후 민정당 부대변인에 임명되어 얼굴마담으로 인지도를 쌓았으며, 김대중 내각 공격의 선봉에 섰다. 또한 동시에 김종필 총재의 비서실장을 맡아 실무적인 경험도 쌓았다. 특히 김종필은 김이석을 특히나 아껴서 김종필 내각이 출범하자 3선에 불과한 김이석을 관방대신에 임명하는것 역시 고려했다고 한다. 김이석이 민정당 소장파 10인과 함께 사회당으로 탈당할때는 김종필가 무척이나 아쉬워 했으며, 김이석 내각이 출범하면서 민정당이 전방위적으로 내각을 압박할때도 "자중하는것이 좋겠다"라며 원로로서 말리기도 했다. | 당선 직후 민정당 부대변인에 임명되어 얼굴마담으로 인지도를 쌓았으며, 김대중 내각 공격의 선봉에 섰다. 또한 동시에 김종필 총재의 비서실장을 맡아 실무적인 경험도 쌓았다. 특히 김종필은 김이석을 특히나 아껴서 김종필 내각이 출범하자 3선에 불과한 김이석을 관방대신에 임명하는것 역시 고려했다고 한다. 김이석이 민정당 소장파 10인과 함께 사회당으로 탈당할때는 김종필가 무척이나 아쉬워 했으며, 김이석 내각이 출범하면서 민정당이 전방위적으로 내각을 압박할때도 "자중하는것이 좋겠다"라며 원로로서 말리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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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종적에 대해 김이석은 본인의 자서전인 <그건 원래 김이석을 경험하신 분들의 기준이고요 : 김이석 자서전>에서 "조금 띄어주니 내가 막 나갔다."며 "지금은 저런 생각을 하고있지 않다. 어떻게 하면 선제 타격같은 생각을 했을까, 라는 후회를 할 뿐이다."라는 구절을 남기며 당시의 행적에 대해 후회하고 자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당시 종적에 대해 김이석은 본인의 자서전인 <그건 원래 김이석을 경험하신 분들의 기준이고요 : 김이석 자서전>에서 "조금 띄어주니 내가 막 나갔다."며 "지금은 저런 생각을 하고있지 않다. 어떻게 하면 선제 타격같은 생각을 했을까, 라는 후회를 할 뿐이다."라는 구절을 남기며 당시의 행적에 대해 후회하고 자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
=== | |||
하지만 정주영 내각 출범 이후에는 점차 성향이 온건해졌고, 권영길 내각이 출범할때 즈음에는 당내 소장파에 속할정도로 온건해졌다. 이로인해 자연스럽게 초기 정치활동을 도왔던 유신정우회 인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으며 이회창 총재가 일국회를 설립하자 합류하면서 유신정우회와는 완전히 결별했다. 하지만 일국회 내에서도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겉돌다가 노무현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자 여야협치를 주장하며 일국회에서 탈퇴하였다. | |||
=== 사민당 입당 === | |||
민정당이 사민당 공빈정책연구회와 손잡고 노무현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발의하자 "정도가 있는데 그걸 넘었다"라고 이회창 총재를 비판하며 민정당을 탈당한뒤 김부겸, 이부영, 이우재, 안영근, 김영춘, 산영군 등과 함께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이들은 [[슬립낫]]으로 불리며 열린정치연구원 인사들의 격한 환영을 받았다. | |||
2004년 노무현 총리 내각불신임안이 가결될 당시, 야당의 탄핵안을 저지하기 위해 11일 밤샘농성을 벌인데 이어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도 탄핵안을 통과시키려는 민정당, 신한사회당 의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등 탄핵안 가결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끝내 탄핵안이 통과되자 김 의원은 본회의 산회 직후 연단에 올라 "나는 오늘부터 이 더러운 민의원 배지를 떼겠다. 당장 의원직 총 사퇴를 하자."고 말한 후 제일 먼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 |||
결국 노무현 내각이 내각총사퇴를 선언하고 의회가 해산되며 열린 47대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압승을 거두고, 보수정당의 우위지역으로 분리되었던 나진에서 고전하는것이 아니냐는 김이석 본인 또한 가문의 힘, 탄핵풍을 타고 선거구를 나진 제3선거구로 옮겨 당선되었다. 이후 사회민주당 제4정책조사회장, 수석최고위원을 역임했다. 같은해 열린 지방선거에서 함경북도지사 출마를 고려했으나 단 반년만에 바뀐 민심으로 당선 가능성이 낮을것이라 판단하고 불출마하였다. | |||
2006년 당내 노동자그룹, 진보연구회 인사들이 노무현 내각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고 야당을 비롯한 각지에서 조기총선 여론이 쇄도할때 가장 적극적으로 노무현 총리를 옹호하였다. | |||
=== 총리 시절 === | === 총리 시절 === | ||
=== 퇴임 이후 === | === 퇴임 이후 === | ||
== 어록 == | |||
== 노무현 == | == 노무현 == |
2023년 9월 27일 (수) 23:33 판
대충 설정
왕 먹은 익평군, 근대화 성공한 대한제국이라는 뻔한 스토리
신미양요로 개항
개항하니까 나라 개판됨
개판인 상태에서 익평군 사망
이재성이가 서자꼬리표 때려고 개화파 지원
척사파 반란->당연히 실패
외지의 메이지 유신
청"점마 뭐하노" 조"알빠노", 한청전쟁->지겠노?
1차대전-신나는 독일 땅 뜯기(feat 다이닛혼제고쿠)
적백내전 연해주 압수
대공황과 신나는 개판5분 전
2차대전과 일본의 발광
리틀보이 2대와 승전(+ 신나는 대마도 압수)
국공내전이 공산당 북경 먹은채로 내전 끗
타임라인
쿠리오 황제시대
대한제국 제6대 황제 양평제 | 良平帝 | |
---|---|
출생 | 틀:출생일과 나이 (오도루프) |
한성부 서대문구 제중원로 제중원 | |
즉위식 | 2021년 11월 15일 |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 |
재위기간 | 대한제국 황태자 |
1994년 1월 30일 ~ 2021년 11월 14일 (28년) | |
대한제국 제6대 황제 | |
2021년 11월 15일 ~ 현직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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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제국의 제6대 황제.
2021년 11월 10일 아버지인 공빈제가 췌장암 투병 중 사망하면서 2021년 11월 15일에 35세의 나이로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 당일인 11월 15일, 김무성 의정부가 임시 각료회의를 열어 새로운 연호를 양평(良平)로 결정했다. 양평 시대는 2022년 1월 1일 0시부터 시작되었으며, 전례에 따라 양평제로 불릴 예정이다.
여담
- 동생인 경환공주와 동일하게 태어날때부터 유전자 변형으로 인해 금발머리와 벽안을 가지고있다. 이로인해 국내외적으로 어머니인 수경귀황후가 서양인과 불륜을 통해 나은 자식이라는(...)루머가 돌았으나 수십차례의 검사를 통해 완벽한 루머로 밝혀졌다. 오히려 본인은 이로 인해 이득을 보고있는데, 상당한 동안에 훈남인데다가 황제라는 타이틀에 금발벽안을 가지고 있어 서양권에서의 인기가 꽤나 높은편이다.
황태자 시절 황태자비 안씨[1]와 데이트를 즐기는 양평제 |
---|
- 황태자 시절부터 소탈한 모습으로 상당히 화제가 되었었다. 작성 할수도 있고 안할수도 있다.
노회찬
대한제국 제36대 의정총리대신 노회찬 魯會燦 | Roh Hoe-ch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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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틀:출생일과 나이 (오도루프) |
경상남도 동래시 초량동 (現 경상남도 동래시 동구 초량동) | |
사저 | 한성부 노원방 상계동 |
현직 | 제36대 의정총리대신 사회민주당 의장 제53대 민의원 의원 사회민주당 노원방 제3선거구 지역위원장 |
재임기간 | 제36대 의정총리대신 |
2021년 12월 3일 ~ | |
서명 | |
링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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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무성
대한제국 제35대 의정총리대신 김무성 金武星 | Kim Moo-su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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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틀:출생일과 나이 (오도루프) |
경상남도 동래시 용당동 (現 경상남도 동래시 남구 용당동) | |
사저 | 한성부 영등포방 여의도동 대우트럼프월드1차아파트 |
현직 | 민정당 상임고문 제53대 민의원 의원 민정당 동래시 제7선거구 지역위원장 김영삼민주센터 이사 |
재임기간 | 제35대 의정총리대신 |
2017년 9월 19일 ~ 2021년 12월 2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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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석
대한제국 제33대 의정총리대신 김이석 金二席 | Kim Yi-Seo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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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틀:출생일과 나이 (오도루프) |
함경북도 나진시 남산읍 빈말리 (현 함경북도 나선시 남산동 빈말리 27) | |
사저 | 함경북도 나진시 김씨고택 |
현직 | 사회민주당 상임고문 제53대 민의원 의원 사회민주당 나진시 제3선거구 지역위원장 |
재임기간 | 제33대 의정총리대신 |
2011년 4월 29일 ~ 2012년 5월 8일 | |
서명 | |
링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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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노무현의 아픈 손가락 길동성 |
대한제국의 33대 의정총리대신. 제n대 부총리 겸 내무대신을 지냈고 유시민 총리의 후임으로 의정총리대신을 지냈다. 현재는 14선 민의원으로 중앙정치와 멀어져 본인의 지역구인 나진 제3선거구 관리에 전념하고있다.
생애
금수저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는 나진시의 오랜 토후이며 민정당 소속으로 6선 의원을 지낸 김현기, 어머니는 민정당 부총재를 지낸 고 이기붕 의원을 딸인 이강희였다.
서경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졸업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함북지역 신문사인 함경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가문의 힘으로 1976년에는 취재1팀 팀장으로 고속승진하였으며, 32살이 되는 1980년에는 취재부 부장으로 최연소 부장이 되었다. 32세에 산업통상대신을 지내던 박봉환의 주선으로 함북지사를 지내던 유석기의 딸인 유기옥과 결혼하였다. 취재부 부장이 된지 1년이 되지않아 부편집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81년 편집장으로 승진한뒤 함경일보에서 퇴사했다.
퇴사 후에는 아버지 김현기의 정책보좌관이 되어 정계에 처음으로 입문하였고, 아버지 김현기가 당내 파벌경쟁에서 밀려 정계를 은퇴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84년 나진 제2선거구에 민정당 공천을 받고 출마하여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하였다. 세습정치인치고는 정계입문이 늦은 편이였는데, 이는 김이석 본인이 함경일보에서 일하는것을 꽤나 즐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민정당에서의 활동
당선 직후 민정당 부대변인에 임명되어 얼굴마담으로 인지도를 쌓았으며, 김대중 내각 공격의 선봉에 섰다. 또한 동시에 김종필 총재의 비서실장을 맡아 실무적인 경험도 쌓았다. 특히 김종필은 김이석을 특히나 아껴서 김종필 내각이 출범하자 3선에 불과한 김이석을 관방대신에 임명하는것 역시 고려했다고 한다. 김이석이 민정당 소장파 10인과 함께 사회당으로 탈당할때는 김종필가 무척이나 아쉬워 했으며, 김이석 내각이 출범하면서 민정당이 전방위적으로 내각을 압박할때도 "자중하는것이 좋겠다"라며 원로로서 말리기도 했다.
연달아 3선에 성공하고 김종필 내각이 출범하면서 신임 관방대신으로 고려되었으나 너무 선수가 적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대신 당내 보수파의 추천으로 관방부대신이 되었으며, 김종필 내각의 강경한 대중정책을 알리며 말을 쎄게하는 보수정치인으로 인기를 얻었다. 민정당 내에서도 반일, 반중성향의 강경 민족주의자로 주목받았고 북중국의 유엔가입 절대엄금, 남중국에 대한 경제재제를 통한 핵개발 중단, 최악의 경우에는 선제 타격까지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종적에 대해 김이석은 본인의 자서전인 <그건 원래 김이석을 경험하신 분들의 기준이고요 : 김이석 자서전>에서 "조금 띄어주니 내가 막 나갔다."며 "지금은 저런 생각을 하고있지 않다. 어떻게 하면 선제 타격같은 생각을 했을까, 라는 후회를 할 뿐이다."라는 구절을 남기며 당시의 행적에 대해 후회하고 자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주영 내각 출범 이후에는 점차 성향이 온건해졌고, 권영길 내각이 출범할때 즈음에는 당내 소장파에 속할정도로 온건해졌다. 이로인해 자연스럽게 초기 정치활동을 도왔던 유신정우회 인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으며 이회창 총재가 일국회를 설립하자 합류하면서 유신정우회와는 완전히 결별했다. 하지만 일국회 내에서도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겉돌다가 노무현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자 여야협치를 주장하며 일국회에서 탈퇴하였다.
사민당 입당
민정당이 사민당 공빈정책연구회와 손잡고 노무현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발의하자 "정도가 있는데 그걸 넘었다"라고 이회창 총재를 비판하며 민정당을 탈당한뒤 김부겸, 이부영, 이우재, 안영근, 김영춘, 산영군 등과 함께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이들은 슬립낫으로 불리며 열린정치연구원 인사들의 격한 환영을 받았다.
2004년 노무현 총리 내각불신임안이 가결될 당시, 야당의 탄핵안을 저지하기 위해 11일 밤샘농성을 벌인데 이어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도 탄핵안을 통과시키려는 민정당, 신한사회당 의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등 탄핵안 가결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끝내 탄핵안이 통과되자 김 의원은 본회의 산회 직후 연단에 올라 "나는 오늘부터 이 더러운 민의원 배지를 떼겠다. 당장 의원직 총 사퇴를 하자."고 말한 후 제일 먼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노무현 내각이 내각총사퇴를 선언하고 의회가 해산되며 열린 47대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압승을 거두고, 보수정당의 우위지역으로 분리되었던 나진에서 고전하는것이 아니냐는 김이석 본인 또한 가문의 힘, 탄핵풍을 타고 선거구를 나진 제3선거구로 옮겨 당선되었다. 이후 사회민주당 제4정책조사회장, 수석최고위원을 역임했다. 같은해 열린 지방선거에서 함경북도지사 출마를 고려했으나 단 반년만에 바뀐 민심으로 당선 가능성이 낮을것이라 판단하고 불출마하였다.
2006년 당내 노동자그룹, 진보연구회 인사들이 노무현 내각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고 야당을 비롯한 각지에서 조기총선 여론이 쇄도할때 가장 적극적으로 노무현 총리를 옹호하였다.
총리 시절
퇴임 이후
어록
노무현
대한제국 제29대 의정총리대신 노무현 盧武鉉 | Roh Moo-hyun | |
---|---|
출생 | 1946년 9월 1일 |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30 (現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봉하로 129) | |
사망 | 2009년 5월 23일 (향년 62세) |
경상남도 양산군 물금읍 금오로 20 경남동래대학교병원 | |
사저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35 (본산리) |
재임기간 | 제29대 의정총리대신 |
2002년 5월 9일 ~ 2006년 7월 9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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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한제국 제27대 의정총리대신 정주영 鄭周永|Chung Ju-yung | |
---|---|
출생 | 1915년 11월 25일 |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 (現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 |
사망 | 2001년 3월 21일 (향년 85세) |
한성부 송파방 풍납동 한성중앙병원 (現 한성부 송파방 풍납동 한성아산병원) | |
재임기간 | 제27대 의정총리대신 |
1995년 3월 30일 ~ 1996년 7월 8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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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섭
대한제국 제n대 법무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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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n대 자유당 대표 금태섭 琴泰燮 | Keum Tae-sup | |||||||||||||||||
출생 | 1967년 9월 29일 (57세) | ||||||||||||||||
한성부 서대문방 | |||||||||||||||||
현직 | 자유당 대표 제53대 민의원 의원 (비례대표) | ||||||||||||||||
재임기간 | 제n대 법무대신 | ||||||||||||||||
2021년 5월 6일 ~ 2021년 12월 2일 | |||||||||||||||||
서명 | |||||||||||||||||
본관 | 봉화 금씨[16] | ||||||||||||||||
링크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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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당
사회민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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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 | Social Democratic Party (SDP) |
등록 약칭 | 사민당, 사민 |
슬로건 | 노동의 희망, 시민의 꿈 |
힘이되는 평생친구 | |
창당일 | 1923년 9월 10일 |
주소 | |
한성부 용산방 두텁바위로 160 (후암동) | |
대표 | 노회찬 (9선 / 45-53대) |
원내대표 | 정청래 (6선 / 47·49-53대) |
사무총장 | 전해철 (5선 / 49-53대) |
정책위의장 | 척준경 (10선 / 44·46·48-53대) |
민의원 의원 | 412석[17] / 908석 (45.37%) |
광역자치단체장 | 18석 / 32석 (56.25%) |
당색 | 빨간색 (#C91818) |
빨간색 (#E61414) | |
정책연구소 | 사회민주연구소 |
청년조직 | 틀:청년사민당 (오도루프) |
국제조직 | 진보동맹 |
정당원 수 | |
권리당원 수 | |
당가 | 인터내셔널가 |
공식 사이트 | |
SNS | | | | | |
2023년 3월 발표 포스터 - 힘이되는 평생친구[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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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협회
제국헌정회 | 帝國憲政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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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일 | 1892년 1월 7일 |
당명변경 | 1905년 11월 20일 (신민당) |
후신 | 틀:민정당 (오도루프) 틀:신민당 (오도루프) |
주소 | 한성부 은평방 녹번로 40 |
총재 | 박정양 (초대) 김홍집 (제2대) 김가진 (제3대) |
민의원 의원 | 30석 / 342석 (8.77%) |
당색 | 파란색 (#0000FF) |
개요
상세
민정당
민정당 | |
---|---|
영문명 | Democratic Justice Party (DJP) |
등록 약칭 | 민정 |
슬로건 | 더욱 나은 선진대한제국의 완성 |
오직 대한! 역시 민정당! | |
창당일 | 1903년 11월 8일 |
주소 | |
한성부 영등포방 의사당대로70길 18 (여의도동) | |
대표 | 나경원 (6선 / 47·48·50-53대) |
원내대표 | 정병국 (9선 / 45-53대) |
사무총장 | 장제원 (4선 / 48·50·52·53대) |
정책위의장 | 김은혜 (초선 / 53대) |
민의원 의원 | 354석[19] / 908석 (38.98%) |
광역자치단체장 | 11석 / 32석 (34.38%) |
당색 | 하늘색 (#1E94E6) |
주황색 (#FB4B00) | |
정책연구소 | 여의도연구원 |
청년조직 | 틀:젊은민정당 (오도루프) |
국제조직 | 국제민주연합 |
정당원 수 | |
권리당원 수 | |
당가 | 민정당가 |
공식 사이트 | |
SNS | | | | | |
2023년 3월 발표 포스터 - 오직 대한! 오직 민정당![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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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현 장운황비
- ↑ 함남 정평문중(定平宗中) 74세 회(會) 항렬.
- ↑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은 무신론자라고 밝혔다.
- ↑ 삼현파(三賢派) 22세손, 수로 70세손 '坤'자 항렬이지만 남동생 김남곤씨와는 다르게 항렬자를 쓰지 않는다. 다만 족보명은 김무곤(金武坤)이다. 아버지인 김용주는 수로 69세손 '容'자 항렬이고 아들인 고윤(본명은 김종민)은 수로 71세손 '鍾'자 항렬이다.
- ↑ 前 전남방직 회장.
- ↑ 포항 가짜 수산업자 사기 사건의 피해자다.
- ↑ 누나와 형들은 아버지의 전처 소생이며, 김무성 본인과 동생은 아버지의 후처 소생이다.
- ↑ 崔陽玉. 1957년 12월 4일생. 전주 최씨로 최치환 전 공보실장의 딸이다. 직업은 피아니스트이며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피아노페다고지학과 부교수이자, 한국음악협회의 부이사장이다.
- ↑ 2020년에 잠깐 사랑제일교회에 출석하였으나, 개종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 대장군파(大將軍派) 22세손.
- ↑ 민정당의 부총재를 지냈던 이기붕의 딸이다.
- ↑ 광주군계 매죽와공파 31세 ○현(鉉) 항렬..
- ↑ 공식적으로 무종교지만, 종교 이력은 다소 특이하다. 사법시험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봉하마을 집 근처의 절 정토원에서 주로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이 때 불경도 틈틈이 외웠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인 문재인을 불교적 용어인 도반(道伴)으로 칭하기도 했고, 이후 변호사 시절에 정신적 지주라고 불리는 송기인 신부와의 인연으로 당시 송기인 신부가 주임 신부로 시무하였던 부산 당감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정 때문인지 신앙 생활은 커녕 성당에 몇 번 가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대통령 시절에는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프로필에도 '무교'라 적혔지만, 불심이 깊은 영부인을 따라 해인사를 방문하는 등 불교적인 활동을 몇 번 한 적은 있었다. 참고로, 사망하기 직전에도 사시를 공부했던 봉화산 정토원에서 위패에 예를 표하기도 했으며, 장례식 때 해인사의 스님들이 조문을 오기도 했다.
- ↑ 현 국민참여연구원
- ↑ 현재 기준으로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지만 애초에 그 시기는 무학도 많던 시기였다. 이후 고려대, 서강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 ↑ 동래공파-주부공파 30세 섭(燮) 항렬.
- ↑ 지역구 294석, 광역비례대표 118석
- ↑ 포스터 속 인물은 당대표이자 의정총리대신인 노회찬.
- ↑ 지역구 239석, 광역비례대표 115석
- ↑ 포스터 속 인물은 당대표인 나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