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대 민의원 의원 선거 (카게사가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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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2009년 10원 21일 치루어진 민의원 의원 선거. 이명은 '''노무현 총선'''으로 불리며 여러의미로 역대급 선거로 불린다. 투표율은 '''80.28%'''를 기록하여 2000년대 이후 최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그 정도로 전국민적 관심이 뜨거웠으며, 양당에 쏠린 관심으로 인해 아래 설명할 자유당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군소정당이 최저의 성적을 올린 선거이다.
== 선거 직전 상황 ==
{{다른 뜻 설명|자세한 설명은 [[노무현 전 총리 사망사건 (오도루프)]]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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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촛불집회로 지지율을 끌어올린 사회민주당과 야당은 본격적으로 이명박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연차 게이트와 이로 인해 여전히 당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던 노무현 전 총리의 최측근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결국 검찰이 노무현 총리를 직접 불러 조사하게 되면서 노무현 전 총리는 '''사상 최초로 검찰에 소환된 전직 총리'''가 되었다. 이에 언론들은 참여내각의 최대 장점으로 뽑혔던 도덕성의 우월성이 무너지는 순간이라며 연이은 비리소식과 구속, 사민당과 노건평의 이권개입 등을 연일 특종으로 보도하였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무능해도 도덕적 가치에는 하자가 없다고 하였던 참여내각과 사민당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실망감을 표출했다.


이렇게 참여내각의 인사들이 벼랑끝에 몰린상황에서도 검찰은 굉장히 신중했다. 당시 검찰 내 분위기도 노 전 총리의 구속수사에는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하였고, 이명박 당시 총리와 검찰 내 원로인사들도 이미 방향성을 불구속 수사로 잡고있었다. 하지만 이에 우병우 등 2기 검찰수사진은 구속수사를 강하게 주장하였고 "어짜피 재판으로 가면 실형을 선고받을테니 그냥 불구속 수사하는것이 좋겠다"라고 검찰수뇌부에 의견을 전달한것을 씹고 구속수사를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전국민의 75%가량이 노무현 전 총리의 구속에 반대했고 찬성하는 의견은 15%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민정당은 검찰수사와 발맞추어 노무현 전 총리와 사민당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으나 이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싸늘하였다. 그제서야 국민 여론이 본인들에게서 떠났음을 판단한 당과 내각, 검찰수뇌부는 불구속수사를 주장하였으나 2기 수사진이 이에 반대하면서 점차 미궁 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노 전 총리의 출석 3주 뒤...
=== 노무현 전 총리의 선거 ===
노무현 전 총리가 5월 23일 본인의 고향인 진영 봉하마을에서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하여 사망하고 만다.''' 노 전 총리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끝내 숨졌다.
자살 직후 김경한 법무대신과 검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하겠다 발표했고, 법무대신 김경한과 검찰총장이 사의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상황이 급하니 사임은 이르다'''라며 사표를 반려하였다. 하지만 이는 최악의 수가 되고말았다.
자살 직후부터 법무부와 검찰에게 향한 화살은 점차 이명박 총리를 향해가고 있었다. 노무현 총리 사후 불타오르는 여론의 의식한 검찰이 박연차 게이트에 대해 비공개 진행으로 전환할것을 발표했고, 이것은 법무대신과 검찰총장의 사표가 반려된것에 이어 그저 여론을 덮기 위한 검찰과 내각의 전국민적인 기만으로 여겨졌다.
리얼미터의 조사에 따르면 안그래도 30%대의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던 이명박 총리에 대한 지지율은 13%로 반토막났으며, 10%대에 불과했던 사민당의 지지율은 30%대로 급상승했다.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80% 가까운 국민들이 노무현 전 총리의 자살 원인이 이명박 총리의 정치보복 떄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답하였으며, 이명박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은 70%, '''지금 당장 의회를 해산하거나 이명박 총리가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은 60%에 달했다.'''
결국 이명박 총리가 같은달 열린 대정부 질의에서 사민당에게 맹공을 당하고, 이명박 총리가 결국 국민의 의견에 승복한다고 하며 '''총리직에서 사임한다.''' 이명박 총리가 사임하면서 총리직은 임시로 부총리였던 한덕수가 대리하였고, 얼마 뒤 열린 의정총리대신 선거에서는 박희태 총재권한대행이 총리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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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8일 (수) 14:0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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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대한제국의 주요선거 (오도루프) 틀:대한제국 제49대 민의원 의원 선거 (오도루프)

대한제국 제49대 민의원 의원 선거

출구조사 발표 영상
2009년 10월 21일
제49대 총선
(노무현 총선)
2012년 5월 1일
제50대 총선
(여당 분열 총선)
투표율 80.28% ▲14.45%
선거 결과

사민 503석 (60.90%)
(28.45%) 235석 민정
정당 지역구 권역비례 총합 비율
357석 146석 503석 60.90%
154석 81석 235석 28.45%
26석 12석 38석 4.60%
14석 20석 34석 4.12%
2석 4석 6석 0.73%
3석 2석 5석 0.61%
2석 1석 3석 0.36%
1석 1석 2석 0.24%

개요

2009년 10원 21일 치루어진 민의원 의원 선거. 이명은 노무현 총선으로 불리며 여러의미로 역대급 선거로 불린다. 투표율은 80.28%를 기록하여 2000년대 이후 최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그 정도로 전국민적 관심이 뜨거웠으며, 양당에 쏠린 관심으로 인해 아래 설명할 자유당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군소정당이 최저의 성적을 올린 선거이다.

선거 직전 상황


2008년 촛불집회로 지지율을 끌어올린 사회민주당과 야당은 본격적으로 이명박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연차 게이트와 이로 인해 여전히 당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던 노무현 전 총리의 최측근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결국 검찰이 노무현 총리를 직접 불러 조사하게 되면서 노무현 전 총리는 사상 최초로 검찰에 소환된 전직 총리가 되었다. 이에 언론들은 참여내각의 최대 장점으로 뽑혔던 도덕성의 우월성이 무너지는 순간이라며 연이은 비리소식과 구속, 사민당과 노건평의 이권개입 등을 연일 특종으로 보도하였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무능해도 도덕적 가치에는 하자가 없다고 하였던 참여내각과 사민당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실망감을 표출했다.

이렇게 참여내각의 인사들이 벼랑끝에 몰린상황에서도 검찰은 굉장히 신중했다. 당시 검찰 내 분위기도 노 전 총리의 구속수사에는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하였고, 이명박 당시 총리와 검찰 내 원로인사들도 이미 방향성을 불구속 수사로 잡고있었다. 하지만 이에 우병우 등 2기 검찰수사진은 구속수사를 강하게 주장하였고 "어짜피 재판으로 가면 실형을 선고받을테니 그냥 불구속 수사하는것이 좋겠다"라고 검찰수뇌부에 의견을 전달한것을 씹고 구속수사를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전국민의 75%가량이 노무현 전 총리의 구속에 반대했고 찬성하는 의견은 15%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민정당은 검찰수사와 발맞추어 노무현 전 총리와 사민당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으나 이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싸늘하였다. 그제서야 국민 여론이 본인들에게서 떠났음을 판단한 당과 내각, 검찰수뇌부는 불구속수사를 주장하였으나 2기 수사진이 이에 반대하면서 점차 미궁 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노 전 총리의 출석 3주 뒤...

노무현 전 총리의 선거

노무현 전 총리가 5월 23일 본인의 고향인 진영 봉하마을에서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하여 사망하고 만다. 노 전 총리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끝내 숨졌다.

자살 직후 김경한 법무대신과 검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하겠다 발표했고, 법무대신 김경한과 검찰총장이 사의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상황이 급하니 사임은 이르다라며 사표를 반려하였다. 하지만 이는 최악의 수가 되고말았다.

자살 직후부터 법무부와 검찰에게 향한 화살은 점차 이명박 총리를 향해가고 있었다. 노무현 총리 사후 불타오르는 여론의 의식한 검찰이 박연차 게이트에 대해 비공개 진행으로 전환할것을 발표했고, 이것은 법무대신과 검찰총장의 사표가 반려된것에 이어 그저 여론을 덮기 위한 검찰과 내각의 전국민적인 기만으로 여겨졌다.

리얼미터의 조사에 따르면 안그래도 30%대의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던 이명박 총리에 대한 지지율은 13%로 반토막났으며, 10%대에 불과했던 사민당의 지지율은 30%대로 급상승했다.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80% 가까운 국민들이 노무현 전 총리의 자살 원인이 이명박 총리의 정치보복 떄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답하였으며, 이명박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은 70%, 지금 당장 의회를 해산하거나 이명박 총리가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은 60%에 달했다.

결국 이명박 총리가 같은달 열린 대정부 질의에서 사민당에게 맹공을 당하고, 이명박 총리가 결국 국민의 의견에 승복한다고 하며 총리직에서 사임한다. 이명박 총리가 사임하면서 총리직은 임시로 부총리였던 한덕수가 대리하였고, 얼마 뒤 열린 의정총리대신 선거에서는 박희태 총재권한대행이 총리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