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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태자 시절 === | === 왕태자 시절 === |
2023년 12월 22일 (금) 09:02 판
경조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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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제3대 대군주 경조 | 景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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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2년 11월 15일 |
황성 한경부 사동궁 | |
즉위 | 1917년 3월 22일 |
황성 한경부 경복궁 태극전 | |
천붕 | 1991년 4월 5일 (향년 79세) |
황성 한경부 창덕궁 양관 | |
능묘 | 경릉(景陵) |
재위기간 | 대조선국 왕태자 |
1895년 1월 12일 ~ 1917년 3월 22일 | |
대조선국 제3대 대군주 | |
1917년 3월 22일 ~ 1991년 4월 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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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휘는 우(鍝)이며, 연호는 문성(文成), 묘호는 경조(景祖), 시호는 인황제(仁皇帝)[1]이다.
1917년 고작 5살이라는 조선사를 통틀어 최연소로 즉위하여 1991년 79세의 나이로 붕어하기까지 조선사와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긴 74년이라는 세월 동안 최장기로 재임한 황제이다. 경조는 조선 근현대사를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성군(聖君)으로 꼽히며, 현대 조선에서도 대제(大帝)나 성제(聖帝)[2]라는 칭호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황제로 평가받는다.
경조의 치세는 세계사적으로 가장 격동의 시기였다. 1차 대전의 종전부터 대공황과 냉전, 문성 데모크라시, 소련의 해체 직전까지 경조의 명의로 총 nn명에 달하는 수상의 임명장이 발행되었고, 죽기 수일 전까지 수상과 국정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는등 성실히 공무를 수행하고 황실의 특권을 줄이는 등 스스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려는 모습을 자주 보여 전 세계적 존경과 경의를 받아왔다. 이렇듯 조선의 최전성기를 지켜보며 조선과 심양, 화태를 위하여 평생을 바친 끝에 1991년 4월 5일, 경조는 74년에 달하는 재위 끝에 향년 79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붕어하였고 전 세계의 국가 정상들과 기업, 유명 인사와 수많은 대중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1912년(경덕 18년) 11월 15일, 사동궁에서 부왕 의왕과 모친 의왕비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1913년 12월 23일 신종의 양자로 입적되게 된다. 신종은 순정효황후와 결혼했으나 사별하였고, 두 번째로 순현효황후와 결혼했지만 두 황후 사이에서 모두 자식이 없었다. 1916년 후궁 공혜황귀비 전씨 사이에서 딸 경선공주 (이진완, 李辰琬)를 낳았다. 하지만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신종은 1913년 익왕의 차남 이우를 양자로 입적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당시 순현효황후가 익왕에게 종사의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고 하소연하자 익왕이 직접 이우의 손을 잡고 양자로 추천했다고 하며, 관련된 이야기가 신종실록부록에 적혀 있다.
이렇게 입적된 경조는 1917년 3월 22일 양부이자 선황인 신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함에 따라 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선황 신종이 향년 46세라는 젊은 나이에 붕어하고, 너무도 어린 새 황제가 즉위하자 국민들은 이에 위기의식을 가졌고, 생부였던 의왕이 섭정을 담당하게 된다. 의왕은 섭정에 취임하자 섭정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격상시키기 위해 개화당과 자유당의 요인들을 번갈아가며 수상에 임명하게 하여 권력을 자신의 관저인 사동궁에 집중시켰다. 경조가 즉위한 1912년부터 문성유신이 일어난 1931년까지 23번 수상이 바뀌었고, 의회와 섭정인 의왕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땅에 처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황 이전까지 경덕 시대와 성흥 시대의 원로들과 재벌들의 지지를 받던 의왕의 위세는 막강했는데, 황제인 경조가 친정을 시도하자, 성년인 만 20세가 안되었다는 이유로 장성한 경조의 친정을 차일피일 미루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을것 같던 의왕의 섭정기는 1931년 문성유신으로 막을 내린다.
5
생애
출생과 입적
왕태자 시절
즉위 이후
가족관계 및 후사
어록
대중 매체에서
기타
상훈(賞勳)
둘러보기
- ↑ 명목상 시호는 대왕으로 칭해야 하지만 문성유신 이후로 역대 대군주들과 태조, 성조의 5대조들의 묘호를 황제로 추증한 이후 공식 용어보다도 황제국의 용어로 칭하는것이 빈번해지면서, 일반 국민들은 대군주라는 칭호보다 금상이나 황제 폐하라고 칭하는 것이 대다수이며, 내각과 궁내부에서 사용하는 호칭이나 종묘에 모신 신위에서 황제로 칭하는등,‘왕’과 ‘대군주’라는 칭호보다는 ‘황제’ 라는 칭호가 더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 ↑ 명목상 시호는 대왕으로 칭해야 하지만 문성유신 이후로 역대 대군주들과 태조, 성조의 5대조들의 묘호를 황제로 추증한 이후 공식 용어보다도 황제국의 용어로 칭하는것이 빈번해지면서, 일반 국민들은 대군주라는 칭호보다 금상이나 황제 폐하라고 칭하는 것이 대다수이며, 내각과 궁내부에서 사용하는 호칭이나 종묘에 모신 신위에서 황제로 칭하는등,‘왕’과 ‘대군주’라는 칭호보다는 ‘황제’ 라는 칭호가 더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