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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제3차 극동전쟁에서 전통적인 열강 러시아까지 제압한 한국은 만주에 대한 이권을 공고히하였으며, 일본과 함께 서구 열강들로부터 열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한국은 협상국의 편에 서서 참전, 독일령 칭다오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한국은 전장인 유럽으로부터 거리가 멀어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사실상 전무하였고, 총력전을 치르고 있는 유럽 국가들에 막대한 군수품을 수출하면서 경제가 대호황을 맞이했다. | 1904년 제3차 극동전쟁에서 전통적인 열강 러시아까지 제압한 한국은 만주에 대한 이권을 공고히하였으며, 일본과 함께 서구 열강들로부터 열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한국은 협상국의 편에 서서 참전, 독일령 칭다오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한국은 전장인 유럽으로부터 거리가 멀어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사실상 전무하였고, 총력전을 치르고 있는 유럽 국가들에 막대한 군수품을 수출하면서 경제가 대호황을 맞이했다. | ||
1930년대 세계대공황 속에서 한국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1920년대부터 이루어진 복지 확충과 대공황 시기에 이루어진 강력한 경제 부흥 정책 덕에 타국에 비해 타격을 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흐름에서 따라 부흥한 극단주의의 출현을 완전히 봉쇄할 수 없었고, 민족단결연맹과 대한공산당 등의 극단주의 정당이 출현해 정치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이에 한국 정부는 기성 정당들의 주도로 국가보안법을 제정, 해당 정당들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여 극단주의의 발호를 억제하려고 시도하였다. | |||
1940년, 소련과 일본이 한국, 만주, 녹오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하면서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했다. 대공황과 경제 재건의 과정에서 강력한 군축을 시행해 군사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던 한만오 3국은 소련과 일본의 침공에 맥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안창호 총리가 초기 대응 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고, 김창암을 총리로 하는 전시 거국내각이 출범하였다. | |||
만주와 목오가 완전히 패퇴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 한국군은 북으로는 압로깡과 마천령 산맥을, 남으로는 한강을 최후 방어선 삼아 결사항전하였다. 다행히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한국과 소련은 미국의 중재로 앵커리지 조약을 체결, 양국 사이에 휴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빼앗긴 한반도 남부 영토를 수복하고 영국에게 할양했던 제주도에 상륙작전을 전개하는 등의 작전을 전개하였다. | |||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한국은 승전국의 대열에 들 수 있었다. | |||
=={{테두리|[[파일:만주 국기 (개화).png|50px|link=만주 (개화)]]}} 만주국== | =={{테두리|[[파일:만주 국기 (개화).png|50px|link=만주 (개화)]]}} 만주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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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3일 (수) 20:1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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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 만주국 | 녹우크라이나 |
개요
개화 세계관에서 주로 다뤄지는 세 국가. 각각 대한민국, 만주국, 우크라이나 극동공화국이다.
대한민국
동아시아에 위치한 의원내각제 공화국. 현 대통령은 ###, 현 국무총리는 유승민이다. 국민의당과 새천년민주당이 연정을 이루어 집권하고 있다. GDP 세계 3위의 경제대국으로, 중국,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강국이다.
1884년 갑신혁명으로 김옥균으로 대표되는 급진개화파가 국정을 장악하였고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대대적인 개혁정책이 펼쳐지게 되었다. 1894년, 한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청나라를 공격, 제1차 극동전쟁을 이르켰다. 전쟁에서 한일 동맹군이 승리하면서 한국은 간도 합병과 남만주 철도 부설권 등을 얻어냈다. 또 청과의 사대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칭제건원을 실시하여 대한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1895년, 황권이 사실상 무력화되고 개화파 내각이 국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것에 불만을 품은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아관파천을 일으켰다. 개화당을 제거하고 친러 성향의 근왕파 내각을 구성해 황권을 되찾는 것이 고종의 목표였지만 김옥균 내각은 근왕파의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중추원은 이 사건을 고종의 반역이라고 판단, 고종을 폐위하고 국체를 공화정으로 전환하여 대한민국을 선포하였다.
1904년 제3차 극동전쟁에서 전통적인 열강 러시아까지 제압한 한국은 만주에 대한 이권을 공고히하였으며, 일본과 함께 서구 열강들로부터 열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한국은 협상국의 편에 서서 참전, 독일령 칭다오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한국은 전장인 유럽으로부터 거리가 멀어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사실상 전무하였고, 총력전을 치르고 있는 유럽 국가들에 막대한 군수품을 수출하면서 경제가 대호황을 맞이했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 속에서 한국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1920년대부터 이루어진 복지 확충과 대공황 시기에 이루어진 강력한 경제 부흥 정책 덕에 타국에 비해 타격을 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흐름에서 따라 부흥한 극단주의의 출현을 완전히 봉쇄할 수 없었고, 민족단결연맹과 대한공산당 등의 극단주의 정당이 출현해 정치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이에 한국 정부는 기성 정당들의 주도로 국가보안법을 제정, 해당 정당들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여 극단주의의 발호를 억제하려고 시도하였다.
1940년, 소련과 일본이 한국, 만주, 녹오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하면서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했다. 대공황과 경제 재건의 과정에서 강력한 군축을 시행해 군사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던 한만오 3국은 소련과 일본의 침공에 맥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안창호 총리가 초기 대응 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고, 김창암을 총리로 하는 전시 거국내각이 출범하였다.
만주와 목오가 완전히 패퇴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 한국군은 북으로는 압로깡과 마천령 산맥을, 남으로는 한강을 최후 방어선 삼아 결사항전하였다. 다행히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한국과 소련은 미국의 중재로 앵커리지 조약을 체결, 양국 사이에 휴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빼앗긴 한반도 남부 영토를 수복하고 영국에게 할양했던 제주도에 상륙작전을 전개하는 등의 작전을 전개하였다.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한국은 승전국의 대열에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