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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9일 (금) 16:42 판
녹우크라이나 최고의회 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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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디 멜라쉬치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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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녹우크라이나 최고의회 후반기 의장 호르디 페트로비치 멜라쉬치 Гордій Петрович Мелашич | |
출생 | 1882년 12월 7일 |
러시아 제국 체르니히우 현 탈룰라이우카 | |
국적 | 러시아 제국 → 녹우크라이나 |
사망 | 1951년 9월 16일 (향년 67세) |
대한민국 한성부 고려대학교병원 | |
임기 | 제8대 녹우크라이나 총리 |
1934년 5월 22일 ~ 1936년 11월 11일 | |
제6대 녹우크라이나 최고의회 후반기 의장 | |
1938년 4월 1일 ~ 1940년 3월 3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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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녹우크라이나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 제8대 녹우크라이나 총리와 제7대 녹우크라이나 최고의회 후반기 의장을 역임했다.
생애
1916년의 멜라쉬치 |
멜라쉬치는 러시아 제국령 우크라이나의 체르니히우 현 탈룰라이우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극동으로 이주한 가족을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했다. 굉장히 똑똑했으나 집이 가난해서 광산 노동자가 되기 위해 호주 브리즈번으로 출국하려고 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장학금을 받아 흐루키우 대학교에서 8년여 간 경제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하르키우 대학교에서 준박사 학위까지 딴 멜라쉬치는 1909년 극동으로 돌아와 한 은행의 경제 분석 전문가로 취직했다. 와중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에도 큰 관심을 보여 러시아 정부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고, 국가 분열 혐의로 조사를 받아 직장을 잃을 뻔 하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자 극동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대회를 조직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공동체에는 경제 전문가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경제학 준박사 학위 보유에 현직으로 경제 관련 직업응가지고 있던 멜라쉬치가 경제서기에 추대되었다. 추가로 그는 국민대회 집행부인 서기국 전체를 총괄하는 서기국장도 잠시 맡게 되었다.[1] 멜라쉬치는 부족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경제서기로서 새로 태어날 국가의 경제 제도를 설계했다.
한국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녹우크라이나 건국에 파란불이 들어오자 제헌의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멜라쉬치는 선거에 무소속 후보 자격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녹우크라이나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면서 멜라쉬치는 녹우크라이나의 초대 재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멜라쉬치는 약 4년간 재무부 장관을 맡으면서 새 나라의 재정 제도를 확립하였고 초대 총리였던 페디르 다닐렌코와 함께 녹우크라이나 국가은행 설립을 주도했다.
재무부 장관에서 퇴임한 후에는 국민전선에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여 활동했고, 최고의회 경제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경제에서 이상신호가 나오고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1929년, 실제로 그의 우려대로 세계 대공황이 발생했다. 대공황 피해를 성공적으로 막지 못한 모졸레우스키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실망을 인민전선의 안드루셴코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또다시 총리로 기용된 다닐렌코의 추천으로 또다시 재무부 장관을 맡게 되었다. 멜라쉬치는 시스템 개선을 통해 정부의 재정 적자를 최소화하면서도 확장 재정을 통해 경제를 부흥시키는 줄타기를 선보였고, 다행히도 녹우크라이나의 경제는 느리게나마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멜라쉬치는 이 공을 인정받아 훗날 흐레샤티츠키 정부의 첫 총리로 임명돼 2년 넘게 총리직에 머물렀다.
총리직에서 퇴임한 멜라쉬치는 이반 프란코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로 부임하였으나 그의 교수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41년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하고 소련군이 빠른 속도로 남진하자 멜라쉬치는 급히 가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했고 최종적으로 한성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우크라이나인 망명자 공동체를 이끌던 멜라쉬치는 1951년 고려대학교 병원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소속 정당
소속 정당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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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 1917 - 1941 | 정계 입문 |
1941-1952 | 입당 사망 |
소속 정당연합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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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1931 | - |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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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기국장을 맡기로 했던 모바가 개인 사정으로 늦게 합류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