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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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당]]''': 이북 지역이 기반이었던 조선민주당은 분단으로 인해 지역기반을 잃고 고작 한 석만을 확보했던 [[제1회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지난 총선]]에 비해서 19석을 늘리며 민국당과 함께 실질적인 승자가 되었다.
*'''[[조선민주당]]''': 이북 지역이 기반이었던 조선민주당은 분단으로 인해 지역기반을 잃고 고작 한 석만을 확보했던 [[제1회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지난 총선]]에 비해서 19석을 늘리며 민국당과 함께 실질적인 승자가 되었다.


*''[[노농당]]''': 노농당은 반공주의와 경제민주주의를 동시에 내세우며 우파 노동운동 세력과 중도파를 포섭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노농당]]''': 노농당은 반공주의와 경제민주주의를 동시에 내세우며 우파 노동운동 세력과 중도파를 포섭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정당별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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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5일 (월) 13:0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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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선거 결과

정당 지도자 의석 비율
이승만 174석 69.6%
여운형 27석 10.8%
조만식 20석 8%
김성수 15석 6%
전진한 4석 1.6%
무소속 - 10석 4%

개요

1954년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총선. 북한 선거구가 추가되면서 의석 정원이 150석에서 250석으로 100석 늘었다.

주요 사건

민주국민당 분당

1949년 ~ 1950년 초, 민주국민당은 셋으로 갈라졌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넓은 스펙트럼의 집단들이 모인 민주국민당에게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1949년, 지주가 주축인 구 한민당계가 이승만 정부의 토지개혁에 반발하여 탈당, 신 한민당을 창당했다. 1950년 2월에는 전진한을 위시로 한 자유협동주의자들이 이승만 정부의 친기업 정책에 반발해 탈당하여 노농당을 창당했다.

통일전쟁통일

통일전쟁통일만큼 임팩트가 큰 사건은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이 약 8개월만에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남한의 주도로 통일되었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이 먼저 침략하였기에 국민들의 반공주의 정서가 심화되었다. 이로 인해 동아일보 신탁통치 오보사건때부터 좌익에 씌워진 민족반역자 이미지가 좀 더 오래 유지되었다. 또한 통일을 이룩한(?) 이승만의 인기가 크게 올랐고 여당의 지지율도 덩달아 올랐다. 또한 이북에 선거구들이 신설되며 정치적 지형이 크게 변화했다.

결과

정당 및 대표 의석 비고
증감
이승만 174석
69.6%
증가 111석
증가 27.6%
제1당
여운형 27석
10.8%
증가 12석
증가 0.8%
제2당
조만식 20석
8%
증가 19석
증가 6.3%
제3당
김성수 15석
6%
증가 6석
보합 0.0%
제4당
전진한 4석
1.6%
증가 2석
증가 0.3%
제5당
무소속 10석
4%
감소 49석
감소 35.3%
-
  • 민주국민당: 예상대로 여당인 민주국민당이 단독 개헌선까지 확보해 압승을 거두었다. 전쟁이 막 끝나고 통일이 된 참이라 이승만 정부의 반공주의와 국가 재건이라는 어젠다가 잘 먹혀들었던 것이다.
  •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역시 비슷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해당 어젠다는 이미 민주국민당이 선점하고 있었고 토지개혁으로 인해 이미 당의 지지기반이 붕괴했던 터라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 조선민주당: 이북 지역이 기반이었던 조선민주당은 분단으로 인해 지역기반을 잃고 고작 한 석만을 확보했던 지난 총선에 비해서 19석을 늘리며 민국당과 함께 실질적인 승자가 되었다.
  • 노농당: 노농당은 반공주의와 경제민주주의를 동시에 내세우며 우파 노동운동 세력과 중도파를 포섭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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