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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7일 (금) 20:54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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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극동
일본은 애당초 조선을 식민지화할 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선의 근대화가 빠르게 이루어지며 조선의 식민화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해군의 의견을 따라 남방으로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조선은 북방으로 진출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북방으로 진출하려는 조선과 남방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은 공통적으로 청나라를 상대해야만 했다. 양측의 공동의 적이 생기면서, 조선과 일본은 1892년 비밀리에 동맹조약을 체결했다.[1]
새로운 농경기술은 조선에서의 식량 생산량을 크게 늘렸으나 인구가 천만이 훌쩍 넘어가며 한반도의 인구압은 극한에 도달했다. 이로 인해 많은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청나라 영토인 간도에 정착했다.
간도의 조선인들은 청국인들과 농토를 두고 마찰을 빚었다. 이에 청나라는 지역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개의 영[2]을 파견하였고 조선 역시 간도의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2개 육군연대를 파견했다. 간도방어사로 임명된 참장(소장) 이용익이 간도에 주둔한 청군을 기습공격해 간도 밖으로 몰아내자 청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대응하며 조선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와 합의를 거친 뒤 청에 공동으로 선전포고했다. 동시에 청과의 사대관계를 완전히 폐지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한국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청나라는 당황하였으나 곧 대규모 병력을 준비해 간도를 공격한다.
시베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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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의 전쟁·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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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시베리아 전쟁은 러시아 내전의 일부로, 시베리아에서 러시아 적군과 러시아 백군 및 간섭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하바리우스크 전쟁을 통해 마무리되었으며, 러시아 적군은 동시베리아 대부분의 지역을 합병했고 녹우크라이나는 연해주 지방을 영토로 하여 독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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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갑오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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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군란 Manchurian Coup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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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청사를 향하는 반란군 전차 (19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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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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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월 일 ~ 1954년 1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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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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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하르빈 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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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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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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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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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내전 촉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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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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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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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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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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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정부 만주국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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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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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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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약 1천 3백 명 야포 2문 장깁차 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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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1만 5천 명 전차 39대 장갑차 50대 야포 32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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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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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134명 부상 196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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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56명 부상 14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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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 국군의 극우 전체주의 사조직인 흑우회가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일으킨 쿠데타. 쿠데타군은 청와대와 방송국 등 몇몇 국가중요시설을 점거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국군 지휘 체계 차단에 실패해 실패하였다. 소령 최용건을 비롯한 주모자들은 사살되거나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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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갑오내란
12.5 반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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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반란사건 December 5 C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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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사들을 선동하는 최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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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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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2월 5일 ~ 1933년 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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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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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한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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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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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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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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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 총리 사퇴 대대적인 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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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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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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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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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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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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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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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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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약 1천 3백 명 야포 2문 장깁차 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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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1만 5천 명 전차 39대 장갑차 50대 야포 32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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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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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134명 부상 196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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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56명 부상 14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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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행군하는 정부군, 착검 후 일제히 돌격하는 공산당군, 구성연군을 향해 무반동포로 포격하는 정부군, 내전으로 폐허가 된 치치하르
- ↑ 이 항목의 세력들이 한 편이었던 것은 아니며, 서로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협력하기도 하며 이합집산을 벌인 세력들이다. 다만 이들은 모두 만주국 중앙정부와 싸웠다는 공통점이 있어 반란군으로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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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 국군의 극우 전체주의 사조직인 흑우회가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일으킨 쿠데타. 쿠데타군은 청와대와 방송국 등 몇몇 국가중요시설을 점거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국군 지휘 체계 차단에 실패해 실패하였다. 소령 최용건을 비롯한 주모자들은 사살되거나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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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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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44년 11월 20일, 태평양전쟁 도중 대한민국의 제18대 국무총리인 김창암이 대한청년전위대 단원 김천호 일당에게 백주대낮에 살해된 사건.
전개
1944년 11월 20일,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은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날 역시 김창암 총리는 관저에서 나와 기자들과 짧은 질의응답을 하고 총리부 청사로 출근하기 위해 집 앞에서 대기하던 관용차를 탔다.
차가 이동하던 중 다른 차 한 대가 김참암이 타고 있던 차를 들이박았다. 다행히도 김칭암 총리와 운전기사가 가벼운 부상을 입은 걸로 끝났고 사고 직후 두 명의 청년이 사고 현장에 모여든 인파 속에서 나와 차로 접근하더니 김창암 총리와 일행이 차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맙네, 자네들. 김창암이 자신을 도와준 청년들에게 한 말.[3] 이 말이 사실상 그의 유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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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그 두 명의 청년은 품 속에서 기관단총을 꺼내 김창암과 김창암의 보좌관인 선우진[4], 운전기사에게 총을 난사했다. 특히 암살범들은 김창암에게만 최소 30여 발을 쏘았다.
사람들이 급작스러운 총격에 놀라 흩어지자 암살범들은 도망쳤다. 보좌관 선우진과 운전기사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으나 김창암 총리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김창암을 살해한 범인 2명은 도주하였으나 사건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장경찰들의 총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범인과 배후
경찰은 사살된 남자들의 지문을 통해 그들이 과거 대한공산당 산하조직인 대한청년전위대에서 활동하다가 수감되었었던 이들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곧 대한공산당을 사건의 배후라고 판단, 수사를 시작하였다.
영향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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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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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 제목은 '김총리 급서에 각계애도'
- ↑ 실제로 암살을 실행한 인원 수. 준비와 계획 과정에 연루된 사람의 수는 더 많다.
- ↑ 보좌관 선우진과 운전기사의 증언.
- ↑ 성이 선우고 이름이 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