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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시(市)또한 이때 처음 생겼는데 종전의 행정구역인 부(府)를 도(道)와 동급인 행정구역으로 격상시키며 기존의 부(府) 중 [[한성부/역사 (한나라)|한성부 | 오늘날 시(市)또한 이때 처음 생겼는데 종전의 행정구역인 부(府)를 도(道)와 동급인 행정구역으로 격상시키며 기존의 부(府) 중 [[한성부/역사 (한나라)|한성부]]를 제외한 부(府)를 시로 개칭하하였다. 또한 종전의 부(府) 영역을 시가지(또는 개항장) 일대로 축소하고, 잔여 지역을 별개 [[군(행정구역)/대한제국 (한나라)|군(郡)]]으로 분리하거나 인접 군과 병합하는 이른바 '''도농(都農)분리제''' 역시 이때 도입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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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일 (화) 01:0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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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시군면 통폐합(市郡面統廢合)은 순종 효황제가 1911년 3월 1일에 반포한 칙령 「부·도의 위치·관할구역 변경 및 시·군의 명칭·위치·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에 따라 1911년 4월 1일에 단행한 행정구역 개편이다.
본문
부·도의 위치·관할구역 변경 및 시·군의 명칭·위치·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 융희 5년 3월 1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
개편 전까지 상황
개편 사항
하위 문서로 분리된 행정구역 개편 사항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비교적 인구가 많고 면적이 작은 군이 많았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역 군이 많이 통폐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으면서 면적이 넓은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지역은 통폐합된 군이 적다.
개편 방향
1911년 3월 1일 부로 중·남부 지방에 존재한 수많은 군을 2~4개씩 합쳐 군 하나로 통합했다. 북부지방인 평안도와 함경도, 중부지방인 강원도는 대부분 산간 지방이라 인구 밀도가 적어 면적이 방대한 군들이 많아서, 통폐합되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었다. 오히려 함경남도 함흥군 동북부와 홍원군 서부를 분리해 신흥군이 북청군 개마고원 지역과 갑산군 남부를 분리하여 풍산군이 신설되었다. 1911년 3월 1일에 군뿐만 아니라 면도, 1911년 4월 1일부터 1914년까지 동·리(洞里)도 몇 개씩 통합하여 한 면, 동·리로 바꿨다. 통합지명을 정하는 규칙이 있다.
- 통합된 2~3개 군 중 중심지 군명을 통합군명으로 정했다. 통합될 군이 군세(면적, 인구, 자산, 생산력)가 전부 대등했거나, 일부 군만 동등해 중심지가 어디인지 애매한 경우에는 두 군 명칭에서 하나씩 따서 합성하거나, 아예 새로 지었다. 전자 예로 부천군(부평군 + 인천부), 연백군)연안군 + 배천군-白川郡(백천군)-), 후자 예로 평안남도 평원군(영유군 + 숙천군 + 순안군) 등이 있다.
- 우리말 독음마저도 같은 곳이 있어서 새로 짓기도 했다. 영천(榮川)군 + 풍기군 + 순흥군에서는 영천군이 중심이었으므로 '영천군'이 되어야 했으나, 하필이면 경북에 영천(永川)군이 또 있었기 때문에 영천(榮川)군을 영주(榮州)군으로 바꾸었다.
- 원래 명칭이 약간 변하거나 역사적 명칭을 끌어와 쓴 경우도 있는데, 연일군 + 장기군 + 흥해군 + 청하군에서는 연일이 중심이었으므로 '연일군'이 되어야 했으나, 연일의 역사적 이칭(異稱)인 '영일'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여 '영일군'이 되었다.
- 철도 부설 등 교통이 발달로 인해 새로운 시가지가 발달한 지역은 해당 철도역 및 신시가지 명칭을 전체 고을 이름으로 채택했다. 대전군(회덕군 + 진잠군)[1], 논산군(은진군 + 연산군 + 노성군)[2], 김천군(김산군 + 개령군 + 지례군)[3] 등이 그 예다.
- 개항장 지명으로 바뀌어 사라진 기존 부명 대부분이 도농분리(부군분리) 정책으로 신설된 군명이 되었다. '삼화'는 진남포부 개항장 (증남포) 이외 지역을 '삼화군'으로 분리하지 않고 용강군에 편입하면서 유일하게 사라졌다.
- 면이나 동·리 명칭도 대부분 한자어로 바꾼, 통합되기 전 면이나 동리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것이 많다. 의왕면('의'곡면 + '왕'륜면), 신갈동('신'촌리 + '갈'천리) 같은 예가 있다.
해당 지역 중심지를 철도나 도로, 수운교통이 발달한 지역으로 중심지를 이전하고 기존 중심지를 쇠락시키는 일도 동시에 진행했다. 경기도 광주군청이 남한산성에서 경안(현 광주시내)으로(1917년)[4], 용인군청이 구성에서 김량장(현 용인시내)으로 이전한 것(1911년)도 이 시기다. 두 지역은 모두 광복 이후에도 읍을 거쳐 분동될 정도로 지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았고, 기존에 군청이 있었던 곳은 당연히 쇠락을 면치 못했는데 구성은 그래도 도시화가 이루어져 중흥한 반면, 남한산성은 그 길로 완전히 쇠락하고 말았다.
오늘날 시(市)또한 이때 처음 생겼는데 종전의 행정구역인 부(府)를 도(道)와 동급인 행정구역으로 격상시키며 기존의 부(府) 중 한성부를 제외한 부(府)를 시로 개칭하하였다. 또한 종전의 부(府) 영역을 시가지(또는 개항장) 일대로 축소하고, 잔여 지역을 별개 군(郡)으로 분리하거나 인접 군과 병합하는 이른바 도농(都農)분리제 역시 이때 도입되었다.
각 도 개편사항
개편 후 변천
문제점
관련 문서
- ↑ 공주군 산내면 대전리에 경부본선 대전역이 개통되며 근대적인 시가지가 형성되고 1906년에 월경지 및 땅거스러미 정리로 회덕군에 편입되면서 새 회덕군 중심지가 되었고, 1914년에 회덕군과 진잠군을 통합할 시 '회덕군'이 아닌 '대전군'이란 명칭을 채택하게 되었다.
- ↑ 은진군 화지산면 논산리에 호남본선 논산역이 개통되며 근대적인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새 은진군 중심지가 되었고, 1914년에 은진군, 연산군과 노성군을 통합할 시 '은진군'이 아닌 '논산군'이란 명칭을 채택했다.
- ↑ 김산군 김천면에 경부본선 김천역이 개통되며 근대적인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새 김산군 중심지가 되었고, 1914년에 김산군, 개령군과 지례군을 통합할 시 '김산군'이 아닌 '김천군'이란 명칭을 채택했다
- ↑ 단, 이 쪽은 서울에서 충주를 잇는 영남좌로의 길목이라 역참이 있고 장이 서는 상당히 번화한 곳이었다. 영남좌로는 경충국도라는 이름의 신작로로 정비되어 영남대로 구간과 합쳐졌고, 광주시내에 역동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도 그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