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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궈펑은 '당의 영도, 인민의 소유, 법의 통치'를 통한 삼통일 사상을 견지했다. 문화혁명의 한 가지 오점은, 조반과 총화가 성숙하고 명확한 기준 아래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수의 폭력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당의 영도력을 재건하기 위한 방침이라고 믿었다. | |||
그는 체제를 보전하기 위해 당과 국가를 분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중앙정부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ref>이러한 시도는 당내 개방파와 혁명파의 조율을 견지하며 국가기관이자 개혁가로서 본인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한 그의 시도에 가깝다.</ref> 장기적으로 중국 체제의 문제가 당과 정부의 분리가 이뤄지지 않아 중앙정부와 각급 위원회에 비효율과 명확한 권한 구분, 이로 말미암은 부패가 발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
즉, 당은 영도자의 위치에서 보다 성숙해지기 위해 '정당적 지위'를, 인민은 성숙한 도덕 관념을, 법은 통치기구로서 명확하고 친민중적인 정치 의식을 건설해야 한다고 봤던 것이다. | |||
==== 군대건설이론(军队建设理论) ==== | |||
==== 문화건설이론(文化建设理论)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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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7일 (목) 17:41 판
마오주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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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삼건부정이론(三建不停理论)은 화궈펑의 정치사상의 총합이다.
이론적 기원
문화대혁명이 후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은 두 가지 큰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덩샤오핑을 필두로 한 개방파가 점차 세력을 얻어가며 인민공사의 해체와 사회주의시장경제로의 후퇴를 공공연히 주장했고, 농촌과 시골 전역에 은밀한 관행,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토지 사유화, 당 관료와의 유착을 통한 반혁명적 문화양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편 도회지에서는 당의 권위와 조직이 일신되는 동시에 정부 조직에 대한 조반의 기틀이 되었는데, 이러한 건전하고 토론 중심적인 민주토양을 중심으로 왕훙원은 모든 당무와 치법 사무의 민주화를 통해 개방파의 반관행적·퇴행적 무력 행사를 차단하고자 했다.
1978년 10월 6일, 덩샤오핑, 리셴녠, 양상쿤, 예젠잉 등 4인방이 10.6사변을 일으켜 왕훙원, 야오원위안, 장춘차오, 장칭, 캉성을 불법적으로 체포하는 상황에 이르자, 풍운과 같이 모여든 군중들이 친청동란으로 이들을 구출해내고 석산 혁명을 일으켜 4인방이 구타 당한 끝에 공개재판으로 처리되며 문화혁명의 완수를 알렸다.
기존부터 마오쩌둥의 공공연한 후계자로 취급 받던 혁명파의 왕훙원과 당내 관료·보수세력을 대변하던 화궈펑의 지위를 놓고 갈등을 빚었으나, 왕훙원 스스로가 행정 경험의 미흡을 이유로 몇몇 조건을 대며 양보했다.[1]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화궈펑의 필수 과업은 경제와 정치, 문화 토양의 건설이 우선 되어야 했고, 농촌 세력의 끝없는 반동에 항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신의 정통성 기반이 단순 당내 헤게모니와 이해다툼으로 이루어진 것을 고려한 그는 당내 좌익과 보수파 세력의 가운데에서 행동하며 권력을 회복해야 했고, 이것이 삼건부정이론의 근간이 된 행동 원리이다.
주요 내용
1992년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삼건부정이론의 주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삼건(三建)
정치건설이론(政治建设理论)
화궈펑은 '당의 영도, 인민의 소유, 법의 통치'를 통한 삼통일 사상을 견지했다. 문화혁명의 한 가지 오점은, 조반과 총화가 성숙하고 명확한 기준 아래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수의 폭력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당의 영도력을 재건하기 위한 방침이라고 믿었다.
그는 체제를 보전하기 위해 당과 국가를 분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중앙정부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2] 장기적으로 중국 체제의 문제가 당과 정부의 분리가 이뤄지지 않아 중앙정부와 각급 위원회에 비효율과 명확한 권한 구분, 이로 말미암은 부패가 발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당은 영도자의 위치에서 보다 성숙해지기 위해 '정당적 지위'를, 인민은 성숙한 도덕 관념을, 법은 통치기구로서 명확하고 친민중적인 정치 의식을 건설해야 한다고 봤던 것이다.
군대건설이론(军队建设理论)
문화건설이론(文化建设理论)
부정(不停)
양개범시
중국특색 사회주의
제한된 사회주의상품경제
화궈펑에게 있어서 문화대혁명은 정적인 왕훙원의 입지를 키워주는 것이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치세에 일 할의 수정사항이 있다'고 평하며 사회주의의 본질을 재탐구하고 경제문제를 주로 다루고자 노력했다. 즉, 일부 시골 지역에서 기존의 암시장을 양지화시키되, 당의 규율을 통제하며 '우'적 오류를 당외에서 검토할 수 있도록 문화혁명위원회를 설치하며 일부 시장경제 조치를 활성화 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개방 조치를 철저하게 현급 지자체에서 당조에 의한 통제 아래에서만 비공유제 경제가 이뤄질 수 있도록 장려했고, 20년이라는 기한 설정을 두어 우경적인 퇴행 조치를 예방하였다.
형성 과정
- 1977년 8월 14일, 화궈펑이 중국공산당 제1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경제 건설이 현대화를 위한 기본 명제다.'라고 표현하며 기본이론명제가 제시됨
- 1979년 12월, 일본 대표단과의 회담에서 화궈펑은 '온건한 번영'을 위해 '중국식 현대화는 단순히 서구의 것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유한 개념인 샤오캉(小康)이다. 우리는 경제, 문화, 정치 전반에서 하부구조의 건설이 필요하며 그 중 한 가지도 양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현대화 목표를 달성하고 선진 생산력 요구를 반영하는 것은 국내의 노력 뿐 아니라 국제외교와 병행되는 문제다.'라고 표현하며 외교 노선 전환과 개방을 시작했다.
-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통과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당의 특정 역사적 문제에 대한 결의안'에서 중국의 역사적 단계가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무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건설과 정치건설, 문화건설을 동일선상에 놓고 병행하여 전진해야만 후퇴가 없을 것이라는 삼건부정이론의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 1982년 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특색 사회주의가 주장되었으며, '샤오강' 개념을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이를 20세기 말의 전략적 목표로 삼았다. 이는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공격을 무릅쓰고 선진 생산력 요구를 달성하고 장차의 사회로 발전하기 위한 인민민주주의 독재의 중간 과정을 중국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1984년 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공유경제를 주체로 하고, 비공유제경제로 농촌을 진흥'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방향성을 통해 삼건부정이론의 이론 성숙 및 체계 확립이 이뤄졌다. 이로 인해 성사성자(姓社姓资) 논쟁이 일어나 시장경제에 대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 1987년 제1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특색 사회주의가 당장에 명시되었으며, 삼건부정이론이 제기되었다.
- 1988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제한된 사회주의상품경제가 생산력 요구에만 부응하며, 시장경제와 상품경제가 서로 연관되어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계획된 상품경제는 관료주의와 자원배분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제한적인 기간 동안만 이뤄질 수 있다고 표현했다.
- 1992년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삼건부정이론이 당장에 명시되어 중국공산당의 지도사상 중 하나가 되었다.
영향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 ↑ 당시 왕훙원의 선택이 어찌 보면 옳은 것이, 민중 혁명으로 다시 권력을 잡았으나 여전히 군권을 쥐고 있는 당 원로들과는 사이가 원활하지 못했으며, 나이가 지나치게 젊어 곱게 보는 시선이 적었던 것도 한 몫 한다. 왕훙원이 문화혁명 기간 동안 중앙정치국에서 두각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학력도 부족하고 경력이 짧은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세력의 존속을 우선하며 당내 좌파의 헤게모니를 쥐는데 우선하는데 집중했다.
- ↑ 이러한 시도는 당내 개방파와 혁명파의 조율을 견지하며 국가기관이자 개혁가로서 본인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한 그의 시도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