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벨트크리그 (빌레펠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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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f7be81; color:#;" |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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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fff; color:#000;" |  1914년 11월 1일
| style="background:#fff; color:#000;" |  1914년 11월 1일
| style="background:#fff; color:#000;" |  영국 해군성 장관 윈스턴 처칠이 오스만이 주문한 신조 전함 2척을 먹튀를 하자 반영여론이 대폭발. 반대로 피할 곳이 없어서 오스만으로 도망친 독일해군 지중해전대 소속 순양전함을 공짜로 준다는 빌헬름 2세의 선언에 친독 여론이 강해진다. 그래도 정부는 중립 입장을 견지했으나, 이스마일 엔베르의 독단과 오스만 깃발을 단 독일 해군의 흑해 러시아 항구 공격으로 인해 결국 세계 대전에 휩싸이게 된다.
| style="background:#fff; color:#000;" |  영국 해군성 장관 윈스턴 처칠이 오스만이 주문한 신조 전함 2척을 먹튀를 하자 반영여론이 대폭발. 반대로 피할 곳이 없어서 오스만으로 도망친 독일해군 지중해전대 소속 순양전함을 공짜로 준다는 빌헬름 2세의 선언에 친독 여론이 강해진다. 그래도 정부는 중립 입장을 견지했으나, 이스마일 엔베르의 독단과 오스만 깃발을 단 독일 해군의 흑해 러시아 항구 공격으로 인해 결국 세계 대전에 휩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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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f7be81; color:#;" |  [[대한국 (빌레펠트)|대한국]]
| style="background:#fff; color:#000;" |  1915년 3월 27일
| style="background:#fff; color:#000;" |  한국은 본래 친협상국 국가였으나 고종의 친정 이후 서서히 친동맹국 국가로 선회하고 있었다. 1905년 한러전쟁 이후로 한일동맹의 갱신을 고종이 거부하여 파기되었고, 이미 그 이전에 있었던 무술환국 당시 고종이 정부 각료들을 대거 친독 인사들로 채워 넣었다. 물론 그랬다고 해서 한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바랐던 것은 아니라 동맹국에 정식으로 가입하거나 전쟁에 참전하지는 않고 있었고, 무술환국으로 친독인사들이 상당수 기용됐다고 해도 여전히 친영을 비롯한 협상국에 우호적인 관료가 많았으므로 참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도 고종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전쟁 대비를 위한 그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고종의 행보로 한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여기고 있던 일본이 [[야요이 호 사건 (빌레펠트)|야요이 호 사건]]을 빌미로 선전포고도 없이 [[부산 기습 (빌레펠트)|한국을 침공하며]] 대전쟁의 불길에 빨려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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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81bef7; color:#;" |  아시르 이드리드 토후국<ref>아라비아 반도에 있던 작은 국가로 이후 아라비아에 흡수됨.</ref>
| style="background:#81bef7; color:#;" |  아시르 이드리드 토후국<ref>아라비아 반도에 있던 작은 국가로 이후 아라비아에 흡수됨.</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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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fff; color:#000;" |  1915년 5월 23일
| style="background:#fff; color:#000;" |  1915년 5월 23일
| style="background:#fff; color:#000;" |  본래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대전 직후에는 그 의무를 내팽개치고 중립을 선언<ref>다만 이탈리아는 의무를 그냥 방기한 것이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을 상호방위조약으로 해석하고 있었으므로, 독일이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 공격전쟁에는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실제로 독일과 같은 편에서 참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야, 이탈리아? 너네 왜 참전 안 해?"라고 나오기는커녕 "제발 그대로 중립 좀 지켜줘. OK?"라는 태도를 보였다.</ref>했다. 이후 전황의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협상국의 승리가 유력하다고 판단<ref>사실 삼국동맹을 믿기엔 불안한 감이 있어서 이탈리아는 전쟁 발발 몇 년 전 프랑스와 비밀 동맹을 맺어둔 상태였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튀니지를 두고 사이가 안 좋았지만 어디까지나 식민지 하나 늘리냐 마느냐의 문제여서 심각한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고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는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 일부를 점유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을 가로막는 역사적인 숙적이고 프랑스는 사르데냐의 이탈리아 통일을 도와준 우방이었다.</ref><ref>또한 오스트리아가 점유한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 달마티아 일대는 이탈리아계가 다수인 지역이었고 이탈리아는 통일 완수라는 이유로 이 일대의 회복을 외치는 상황이었다. 삼국 동맹 소속인데다가 오스트리아에겐 독일이란 빽이 있어서 대놓고 드러내질 못했을 뿐. 영국과 프랑스는 협상국 측에 참전하면 전쟁 후 이 일대의 점유를 인정해주겠다고 꼬드겼다. 즉, 2대전의 제3인터내셔널이나 추축동맹 마냥 견고한 동맹은 아니었던 셈.</ref>, 영국과 비밀 협상을 맺어 말을 갈아타고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 style="background:#fff; color:#000;" |  본래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대전 직후에는 그 의무를 내팽개치고 중립을 선언<ref>다만 이탈리아는 의무를 그냥 방기한 것이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을 상호방위조약으로 해석하고 있었으므로, 독일이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 공격전쟁에는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실제로 독일과 같은 편에서 참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야, 이탈리아? 너네 왜 참전 안 해?"라고 나오기는커녕 "제발 그대로 중립 좀 지켜줘. OK?"라는 태도를 보였다.</ref>했다. 이후 전황의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협상국의 승리가 유력하다고 판단<ref>사실 삼국동맹을 믿기엔 불안한 감이 있어서 이탈리아는 전쟁 발발 몇 년 전 프랑스와 비밀 동맹을 맺어둔 상태였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튀니지를 두고 사이가 안 좋았지만 어디까지나 식민지 하나 늘리냐 마느냐의 문제여서 심각한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고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는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 일부를 점유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을 가로막는 역사적인 숙적이고 프랑스는 사르데냐의 이탈리아 통일을 도와준 우방이었다.</ref><ref>또한 오스트리아가 점유한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 달마티아 일대는 이탈리아계가 다수인 지역이었고 이탈리아는 통일 완수라는 이유로 이 일대의 회복을 외치는 상황이었다. 삼국 동맹 소속인데다가 오스트리아에겐 독일이란 빽이 있어서 대놓고 드러내질 못했을 뿐. 영국과 프랑스는 협상국 측에 참전하면 전쟁 후 이 일대의 점유를 인정해주겠다고 꼬드겼다. 즉, 2대전의 제3인터내셔널이나 추축동맹 마냥 견고한 동맹은 아니었던 셈.</ref>, 영국과 비밀 협상을 맺어 말을 갈아타고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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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f7be81; color:#;" |  불가리아 왕국 
| style="background:#fff; color:#000;" |  1915년 10월 14일
| style="background:#fff; color:#000;" |  전통적으로 친 러시아, 반 오스만 국가였으나 국왕 페르디난트 1세는 독일 출신인지라 친독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고 불가리아 여론도 제2차 발칸 전쟁의 패배로 인해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빼앗아 간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복수하자는 보복주의가 팽배했다. 협상국과 동맹국 모두 발칸 전쟁 당시 불가리아군의 활약과 불가리아의 지정학적 가치에 주목하여 불가리아를 포섭하려 시도했으나 불가리아는 참전 조건으로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갖고 있는 마케도니아 중 일부 지역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세르비아와 그리스의 눈치를 봐야 했던 협상국과 달리 두 나라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던 동맹국은 온갖 당근<ref>북마케도니아 전체와 세르비아의 동쪽 절반, 그리스나 루마니아가 참전할 경우 제2차 발칸 전쟁으로 두 나라에게 넘어갔던 지역의 합병 인정, 막대한 차관 제공 등.</ref>으로 적극적으로 불가리아를 꼬드겼고 이에 넘어간 불가리아가 동맹국과 우호조약을 맺은 후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하면서 동맹국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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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1일 (월) 21:08 판

공지
| 빌레펠트 연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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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벨트크리그 | 대전쟁
第一次世界大戰 | 大戰爭
Erster Weltkrieg | Großer Krieg
날짜 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
장소 유럽, 지중해, 중동, 아프리카, 카리브해, 동북아시아, 태평양
원인 사라예보 사건과 그 사건으로 폭발한, 오랜 시간 축적되던 열강들 간의 갈등과 민족주의의 충돌 등의 복합적 원인
결과 동맹국의 승리
영향 독일과 동맹국의 패권 장악
협상국 국가 적화
유럽 국가 독립, 중동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독립선언
전제군주제의 몰락 및 공화제의 대두[1][2]
생디칼리즘 열풍의 시작
미텔오이로파, 라이히스팍트 창설
제2차 벨트크리그의 원인[3]
교전국
동맹국
협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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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차르국
중화민국[4]
시암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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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
러시아 제국[5]
프랑스
벨기에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
포르투갈
루마니아 왕국[6]
미국[7][8]
헤자즈 왕국
그리스 왕국
라이베리아

병력
동맹국
협상국
약 3000만명 이상 약 4700만명 이상
피해규모
동맹국
협상국
사망(군 병력) 5,386,000명
부상(군 병력) 10,388,000명
실종 4,029,000명
총 사상자 19,803,000명
사망(군 병력) 6,525,000명
부상(군 병력) 14,831,500명
실종 4,621,000명
총 사상자 25,977,500명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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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제1차 벨트크리그는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여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 세계적으로 전개된 전쟁이다. 2014년 1차 세계 대전 개전 100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 11월 11일에 종전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서론

배경

발발 과정 - 7월 위기

전개

피해

영향

참전국

국명 날짜 참전 과정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914년 7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對세르비아 최후통첩이 거부되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세르비아 왕국 1914년 7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하여 침공을 당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전쟁으로 뛰어들었다.
러시아 제국 1914년 8월 2일 같은 슬라브 국가이며 후견국이기도 했던 러시아에게 세르비아는 발칸 전쟁의 영향으로 더욱 중요성이 커졌고,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러시아는 즉시 총동원령을 선포했으며 이를 해제하라는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자 독일의 선전포고를 받게 된다.
독일국 1914년 8월 2일 러시아가 세르비아 지원을 위해서 총동원령을 선포하자, 삼국 동맹[9]에 의거하여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프랑스 제3 공화국 1914년 8월 3일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한 독일이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키며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물론, 프랑스도 삼국협상[10]에 의해 대독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벨기에 1914년 8월 3일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킨 독일군이 벨기에 영토를 통과하려는 것을 벨기에군이 거부, 끝내 영토통과 승인을 받지 못하게 되자 독일은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략한다.
영국 1914년 8월 4일 삼국협상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키려던 영국이었지만, 독일이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략을 하자 이를 이유로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몬테네그로 왕국 1914년 8월 5일 발칸반도 남부의 소왕국이었던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언어, 문화, 종교적 동질성 및 오스트리아에 대한 강한 반감 등으로 인해 세르비아를 지지한다.
일본 제국 1914년 8월 23일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은 영일동맹의 의무를 들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11][12]
오스만 제국 1914년 11월 1일 영국 해군성 장관 윈스턴 처칠이 오스만이 주문한 신조 전함 2척을 먹튀를 하자 반영여론이 대폭발. 반대로 피할 곳이 없어서 오스만으로 도망친 독일해군 지중해전대 소속 순양전함을 공짜로 준다는 빌헬름 2세의 선언에 친독 여론이 강해진다. 그래도 정부는 중립 입장을 견지했으나, 이스마일 엔베르의 독단과 오스만 깃발을 단 독일 해군의 흑해 러시아 항구 공격으로 인해 결국 세계 대전에 휩싸이게 된다.
대한국 1915년 3월 27일 한국은 본래 친협상국 국가였으나 고종의 친정 이후 서서히 친동맹국 국가로 선회하고 있었다. 1905년 한러전쟁 이후로 한일동맹의 갱신을 고종이 거부하여 파기되었고, 이미 그 이전에 있었던 무술환국 당시 고종이 정부 각료들을 대거 친독 인사들로 채워 넣었다. 물론 그랬다고 해서 한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바랐던 것은 아니라 동맹국에 정식으로 가입하거나 전쟁에 참전하지는 않고 있었고, 무술환국으로 친독인사들이 상당수 기용됐다고 해도 여전히 친영을 비롯한 협상국에 우호적인 관료가 많았으므로 참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도 고종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전쟁 대비를 위한 그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고종의 행보로 한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여기고 있던 일본이 야요이 호 사건을 빌미로 선전포고도 없이 한국을 침공하며 대전쟁의 불길에 빨려들고 만다.
아시르 이드리드 토후국[13] 1915년 5월 사이 영국의 전쟁수행에 합류
이탈리아 왕국 1915년 5월 23일 본래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대전 직후에는 그 의무를 내팽개치고 중립을 선언[14]했다. 이후 전황의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협상국의 승리가 유력하다고 판단[15][16], 영국과 비밀 협상을 맺어 말을 갈아타고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불가리아 왕국 1915년 10월 14일 전통적으로 친 러시아, 반 오스만 국가였으나 국왕 페르디난트 1세는 독일 출신인지라 친독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고 불가리아 여론도 제2차 발칸 전쟁의 패배로 인해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빼앗아 간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복수하자는 보복주의가 팽배했다. 협상국과 동맹국 모두 발칸 전쟁 당시 불가리아군의 활약과 불가리아의 지정학적 가치에 주목하여 불가리아를 포섭하려 시도했으나 불가리아는 참전 조건으로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갖고 있는 마케도니아 중 일부 지역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세르비아와 그리스의 눈치를 봐야 했던 협상국과 달리 두 나라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던 동맹국은 온갖 당근[17]으로 적극적으로 불가리아를 꼬드겼고 이에 넘어간 불가리아가 동맹국과 우호조약을 맺은 후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하면서 동맹국에 가담했다.

기타

연표

사용 장비

관련 문서

관련 어록

  1. 전쟁은 전제군주제 국가로 이루어진 동맹국이 승리하였지만, 협상국 국가들에서 연쇄적으로 혁명 및 왕정의 붕괴가 일어나면서 이 시점 부터 공화제가 왕정을 밀어냈다.
  2. 전제군주제 국가던 동맹국 국가들도 전후 입헌주의 개혁에 나섰다. 대표적으론 독일의 3월 개혁과 한국의 융희민권운동이 있다.
  3. 1차 벨트크리그에서의 참상으로 인한 전쟁에 대한 공포와 협상국에 대한 징벌의식의 부조화는 2차 벨트크리그 발발의 단초를 강하게 제공했다.
  4. 비전투 노무자(노동자) 25만명을 서부전선과 한국전선에 보내는 수준으로만 참전했다.
  5.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협상국 이탈
  6. 부쿠레슈티 조약에 따라 협상국 이탈
  7. 1917~
  8. 독일 U보트의 무차별 공격과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인해 1917년 4월에 독일 측에 선전포고하여 참전함.
  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10. 프랑스, 러시아, 영국
  11. 영일동맹은 양국간의 공수동맹이지만 상대국의 자동 참전 의무같은 조항은 없었기 때문에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한 후에 14년 8월 1일 주일 영국대사관을 통해 일본에게는 이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독일의 동양함대가 홍콩과 웨이하이를 위협할 수 있었고 8월 4일에 영국 외무부는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2. 워낙 갑작스러운 참전으로 독일은 일본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다. 발발 당시 칭다오의 순양함급 이상은 2척에 불과했다. 8월15일 최후통첩 이후 1주일 만에 병력을 증강시키기에는 칭다오는 너무 멀었으며 이후 전개는 칭다오 전투 참조.
  13. 아라비아 반도에 있던 작은 국가로 이후 아라비아에 흡수됨.
  14. 다만 이탈리아는 의무를 그냥 방기한 것이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을 상호방위조약으로 해석하고 있었으므로, 독일이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 공격전쟁에는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실제로 독일과 같은 편에서 참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야, 이탈리아? 너네 왜 참전 안 해?"라고 나오기는커녕 "제발 그대로 중립 좀 지켜줘. OK?"라는 태도를 보였다.
  15. 사실 삼국동맹을 믿기엔 불안한 감이 있어서 이탈리아는 전쟁 발발 몇 년 전 프랑스와 비밀 동맹을 맺어둔 상태였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튀니지를 두고 사이가 안 좋았지만 어디까지나 식민지 하나 늘리냐 마느냐의 문제여서 심각한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고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는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 일부를 점유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을 가로막는 역사적인 숙적이고 프랑스는 사르데냐의 이탈리아 통일을 도와준 우방이었다.
  16. 또한 오스트리아가 점유한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 달마티아 일대는 이탈리아계가 다수인 지역이었고 이탈리아는 통일 완수라는 이유로 이 일대의 회복을 외치는 상황이었다. 삼국 동맹 소속인데다가 오스트리아에겐 독일이란 빽이 있어서 대놓고 드러내질 못했을 뿐. 영국과 프랑스는 협상국 측에 참전하면 전쟁 후 이 일대의 점유를 인정해주겠다고 꼬드겼다. 즉, 2대전의 제3인터내셔널이나 추축동맹 마냥 견고한 동맹은 아니었던 셈.
  17. 북마케도니아 전체와 세르비아의 동쪽 절반, 그리스나 루마니아가 참전할 경우 제2차 발칸 전쟁으로 두 나라에게 넘어갔던 지역의 합병 인정, 막대한 차관 제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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