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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년 11월부터 1925년 12월까지 약 7년 1개월간 이어진,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한 내각. [[대한국민회 (개화)|대한국민회]]의 첫 내각이었다. | | 1918년 11월부터 1925년 12월까지 약 7년 1개월간 이어진,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한 내각. [[대한국민회 (개화)|대한국민회]]의 첫 내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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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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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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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당에서 탈당한 후 이승만을 주축으로 한 대한국민회는 [[제8회 대한민국 중추원 의원 선거 (개화)|1918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보수당 (개화)|보수당]]과 연립해 집권하였고, 총재였던 [[이승만 (개화)|이승만]]이 국무총리에, [[대한민국 국군 (개화)|국군]] 명장 출신 [[이용익 (개화)|이용익]]이 부총리에 취임했다. 하지만 과반 의석 확보 실패는 내각에게 있어 정치적 부담이 되었고, 이승만은 이듬해인 1919년 중추원을 해산하고 [[제9회 대한민국 중추원 의원 선거 (개화)|새 총선]]를 치렀다. 총선에서 국민회가 과반 의석을 획득하면서 이승만 내각의 정치적 기반은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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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내각은 외교적 성과와 복지 정책을 통해 민심을 사로잡았으나 우두머리인 이승만의 독선적인 태도와 권력과 재정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서서히 지지를 잃었다. 이후 1923년에 치러진 [[제10회 대한민국 중추원 의원 선거 (개화)|10회 총선]]에서 여당인 대한국민회가 과반에 한 석 모자른 122석을 얻었다. 비록 결선투표에서 이승만이 총리로 선출되기는 하였으나 총선에서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던 와중 의외의 부진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내각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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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회 총선 이후 이승만 내각은 권력 누수를 겪었고 당내외의 사퇴 압박이 이어지자 결국 이승만은 1926년 국무총리직을 사퇴했다. 그의 후임 국무총리으로는 당시 현직 부총리 겸 건공성총판이었던 [[손정도 (개화)|손정도]]가 선출되며 [[손정도 내각 (개화)|손정도 내각]]이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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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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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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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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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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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ass="wikitable" style="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font-size:10pt; border: 3px solid #254170; float: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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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1" style="background-color:#fff; border:1px solid #254170; text-align: center;" | <div style="margin: -4.5px -9px">[[파일:이용익.png|24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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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1" style="color:#fff; background-color:#254170; text-align: center; width: 200px; font-size: 10pt;" | '''부총리 겸 국방총판 이용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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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내각은 대외적으로 적극적 팽창주의와 평화적 국제주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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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리인 이승만이 한국의 [[제1차 세계대전 (개화)|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만든 장본인인만큼 기본적으로는 다소 팽창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승만이 직접 파리로 가 평화회담에 참여하여 동아시아에서의 이권 확보에 힘썼고, 그 결과 국제사회로부터 기존에 한국이 사실상 지배하던 간도를 한국 영토로 정식 인정받았으며 남만주에 대한 배타적 권리 역시 인정받았다. 또 만주의 친한 성향 군벌과 사상가들을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하며 만주 전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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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내전 말기에는 러시아 적군이 백군을 밀어내며 동시베리아로 진출하자 체코 군단 지원을 명분으로 서방 국가들과 함께 간섭군을 편성, 동시베리아를 공격하여 [[시베리아 전쟁 (개화)|시베리아 전쟁]]에 개입했다. 이루 다른 간섭국들이 차례로 철수할 동안에도 계속해서 소비에트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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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지나친 팽창을 경계한 면도 있었다. [[제2차 극동전쟁 (개화)|2차 극동전]] 당시 이름을 떨친 명장이자 이승만 내각의 첫 부총리 겸 국방성총판이었던 [[이용익 (개화)|이용익]]은 수시로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였으며 팽창을 외치는 군국주의적 장교들을 직무에서 배제시켰다. 또 이승만 내각은 시베리아 전쟁을 마무리짓는 조약인 [[하바리우스크 조약 (개화)|하바리우스크 조약]] 당시에도 트란스아무르 지방을 합병하거나 괴뢰국화하지 않고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과 반공 성향의 러시아인들이 [[녹우크라이나 제1공화국 (개화)|녹우크라이나 제1공화국]]을 건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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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대한민국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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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워크 예정
개요
1918년 11월부터 1925년 12월까지 약 7년 1개월간 이어진,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한 내각. 대한국민회의 첫 내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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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오른쪽 세 번째가 이승만, 두 번째가 안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