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친왕 (풍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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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파병 당시 참모장이었던 채명신 정장과 의기투합하여 월남에서 대전과를 이룩하고 1968년 본토로 복귀하여 제1야전군 사령관에 임명된다. 제1야전군 사령관 시절에는 중공의 기습공격으로부터 국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선 만주 일부를 확보해야 한다는 윤관계획을 제안하고, 1969년 홍위병의 도발을 빌미로 대규모 기습공격을 감행, 남만주 전역을 확보하는 대성과를 이룬다.  
월남파병 당시 참모장이었던 채명신 정장과 의기투합하여 월남에서 대전과를 이룩하고 1968년 본토로 복귀하여 제1야전군 사령관에 임명된다. 제1야전군 사령관 시절에는 중공의 기습공격으로부터 국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선 만주 일부를 확보해야 한다는 윤관계획을 제안하고, 1969년 홍위병의 도발을 빌미로 대규모 기습공격을 감행, 남만주 전역을 확보하는 대성과를 이룬다.  


이후 장충친왕은 상무대장, 공수특전사령관이라는 요직을 두루 역임한다. 특전사령관 재임 당시 열종이 후계구도를 확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정부장의 총에 맞아 붕어하고 정국에 혼란이 고조되자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군 내의 사조직 [[혁명일심회 (풍아)|혁명일심회]]의 군맥을 동원하여 한성을 장악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고종 효황제 이영|원친왕]]을 차기 황제로 추대하며 스스로 계엄사령관에 취임하여 정국을 장악한다.
이후 장충친왕은 상무사령관, 공수특전사령관이라는 요직을 두루 역임한다. 특전사령관 재임 당시 열종이 후계구도를 확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정부장의 총에 맞아 붕어하고 정국에 혼란이 고조되자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군 내의 사조직 [[혁명일심회 (풍아)|혁명일심회]]의 군맥을 동원하여 한성을 장악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고종 효황제 이영|원친왕]]을 차기 황제로 추대하며 스스로 계엄사령관에 취임하여 정국을 장악한다.


실권을 장악한 장충친왕은 의정부 관제를 개정하여 기존의 의정부 수장이었던 의정대신직을 폐지하고 의원내각제 국가의 총리와 비슷한 의정부총리대신직을 신설하고 1948년 계엄령 이후 무기한적으로 선거가 중단된 중추원 선거를 재개하며 민주정치의 재개를 선포해 국내적 반발을 잠재웠다. 이와 동시에 언론통폐합과 천통대역에 관한 수사로 반대피를 철저하게 억누르며 새로운 독재정권의 탄생을 전세계에 알렸다.
실권을 장악한 장충친왕은 의정부 관제를 개정하여 의정부라는 회의체의 수장에 국한되었던 의정대신직을 폐지하고 의원내각제 국가의 수상과 동격인 의정부총리대신직을 신설하고 1948년 계엄령 이후 무기한적으로 선거가 중단된 중추원 선거를 재개하며 민주정치의 재개를 선포해 국내적 반발을 잠재웠다. 이와 동시에 언론통폐합과 천통대역에 관한 수사로 반대피를 철저하게 억누르며 새로운 독재정권의 탄생을 전세계에 알렸다.


== 생애 ==
== 생애 ==

2025년 8월 9일 (토) 20:39 기준 최신판

[ 문서 보기 ]
[ 세계관 설명 ]
[ 세계관 설명 ]
오월오일 오늘인가 집집마다 창포주라
뱃노래 두어 가락에
멱라에서 빠져 죽은 굴원이 슬프구나
아마도 일년 중 좋은 계절에 생각나는 굴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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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의정부총리대신_(풍아)
대한제국 의정부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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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장충친왕 장친왕

장충친왕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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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무종의 황손
대한제국 초대 의정부총리대신
장충친왕 | 長忠親王
이름
출생 1931년 5월 11일
황성 한성부 장친왕부
사망 2020년 5월 14일 (향년 89세)
황성 한성부 황군수도병원
재임기간 초대 의정부총리대신
1972년 3월 15일 ~ 2020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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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황 장평친왕
적모 장평친왕비 서씨
생모 장씨
형제자매 2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정실 장충친왕비
첩실 2명
자녀
슬하 3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장광친왕
차남 원산군
삼남 경산군
장녀 효원군주
차녀 효성군주
학력 강학원 유치원 (수료)
강학원 초등과 (졸업)
강학원 중등과 (졸업)
종교 유교 (성리학)
신체 약 171cm
소속 파벌
아명
작호 장친왕(長親王)[1]
시호 충(忠)
군사 경력
복무 대한제국 육군
1948년 ~ 2015년[2]
임관 육군무관학교 23기
최종 계급 부원수 (대한제국 육군)
최종 보직 계엄사령관
주요 보직 주월대한제국군사령관
상무대장
공수특전사령관
계엄사령관

개요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군인 출신 정치인. 초대 의정부총리대신을 지냈다.

1931년 장평친왕과 백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로 인하여 장충친왕은 태어날때부터 일부 황족들 사이에서 미운오리로 취급되어 따돌림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장충친왕 또한 황족들을 경멸하고 그들이 기피되던 무관의 길을 걸었다.

1948년 국공내전이 발생하고 대한제국도 간도 수복을 위해 참전하자 열종에게 혈서를 바쳐 22사단 전초대대에 배속되어 전쟁에 참전하였고, 전선에서 전초대대를 이끌며 종횡무진하여 장친왕이라는 이름이 공비[3]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다른 황족들이 후방에서 사치를 즐기며 전방 재치를 꺼리던 상황에서 장충친왕의 대활약은 황족들과 비교되며 금세 널리 퍼졌다. 이는 군에 애정을 가진 열종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장충친왕은 고속승진의 가도를 달려 월남파병군 사령관을 역임하게 된다.

월남파병 당시 참모장이었던 채명신 정장과 의기투합하여 월남에서 대전과를 이룩하고 1968년 본토로 복귀하여 제1야전군 사령관에 임명된다. 제1야전군 사령관 시절에는 중공의 기습공격으로부터 국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선 만주 일부를 확보해야 한다는 윤관계획을 제안하고, 1969년 홍위병의 도발을 빌미로 대규모 기습공격을 감행, 남만주 전역을 확보하는 대성과를 이룬다.

이후 장충친왕은 상무사령관, 공수특전사령관이라는 요직을 두루 역임한다. 특전사령관 재임 당시 열종이 후계구도를 확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정부장의 총에 맞아 붕어하고 정국에 혼란이 고조되자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군 내의 사조직 혁명일심회의 군맥을 동원하여 한성을 장악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원친왕을 차기 황제로 추대하며 스스로 계엄사령관에 취임하여 정국을 장악한다.

실권을 장악한 장충친왕은 의정부 관제를 개정하여 의정부라는 회의체의 수장에 국한되었던 의정대신직을 폐지하고 의원내각제 국가의 수상과 동격인 의정부총리대신직을 신설하고 1948년 계엄령 이후 무기한적으로 선거가 중단된 중추원 선거를 재개하며 민주정치의 재개를 선포해 국내적 반발을 잠재웠다. 이와 동시에 언론통폐합과 천통대역에 관한 수사로 반대피를 철저하게 억누르며 새로운 독재정권의 탄생을 전세계에 알렸다.

생애

출생과 유년기

무관의 길

충용무쌍한 친왕전하

칼을 돌리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이상을 펼치고

현실에 맞서다

사망

사건사고 및 논란

소속 파벌

소속 기간 비고
1958 - 현재 창설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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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작호는 전라도 장흥(長興)에서 유래했다.
  2. 대한제국군의 부원수는 타국의 원수처럼 종신토록 복무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3. 중공군을 지칭하는 멸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