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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 실력이 거의 6단으로 고수였다. 2007년에는 동료 의원이자 7단인 요사노 가오루와 바둑 승부를 했는데 승리하기도 했었다. 요사노가 봐준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진짜로 졌다고 요사노가 인정했을 정도니 대단한 고수였던 모양. | * 바둑 실력이 거의 6단으로 고수였다. 2007년에는 동료 의원이자 7단인 요사노 가오루와 바둑 승부를 했는데 승리하기도 했었다. 요사노가 봐준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진짜로 졌다고 요사노가 인정했을 정도니 대단한 고수였던 모양. | ||
*엄청난 다혈질이였다. 1990년 분탕종자 출당사태 당시 오자와의 독선적 태도를 카메라 앞 면전에서 비판한 의원이 있었는데, 오자와의 일갈은 '''한 번 해볼까?'''였다. 열이 뻗친 의원이 "한 번 해보자고!"라고 맞서자 그 의원을 향해 뚜벅뚜벅 걸으며 진짜 싸우려 했다. 주변 사람들이 말려서 앉기는 했다만.[https://www.youtube.com/watch?v=11-6wuPq6zA] | *엄청난 다혈질이였다. 1990년 분탕종자 출당사태 당시 오자와의 독선적 태도를 카메라 앞 면전에서 비판한 의원이 있었는데, 오자와의 일갈은 '''한 번 해볼까?'''였다. 열이 뻗친 의원이 "한 번 해보자고!"라고 맞서자 그 의원을 향해 뚜벅뚜벅 걸으며 진짜 싸우려 했다. 주변 사람들이 말려서 앉기는 했다만.[https://www.youtube.com/watch?v=11-6wuPq6zA] | ||
=== 암살설 === | |||
== 소속 정당 == | == 소속 정당 == | ||
2025년 8월 28일 (목) 16:36 기준 최신판
| 오자와 이치로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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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국 제12대 전반기 대의원 의장 오자와 이치로 小沢一郎 | Ozawa Ichir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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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42년 5월 24일 | ||||||||||||||||||||||
| 일본 도쿄부 도쿄시 시타야 (현 일본 도쿄도 다이타구) | |||||||||||||||||||||||
| 사망 | 2007년 1월 4일 (향년 65세) | ||||||||||||||||||||||
| 일본 이와테현 오슈시 | |||||||||||||||||||||||
| 재임기간 | 제35대 지방대신 | ||||||||||||||||||||||
| 1985년 12월 28일 ~ 1986년 7월 22일 | |||||||||||||||||||||||
| 제44대 국가공안위원장 | |||||||||||||||||||||||
| 1985년 12월 28일 ~ 1986년 7월 22일 | |||||||||||||||||||||||
| 제12대 전반기 대의원 의장 | |||||||||||||||||||||||
| 2003년 5월 14일 ~ 2006년 5월 13일 | |||||||||||||||||||||||
|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 |||||||||||||||||||||||
| 2006년 2월 5일 ~ 2007년 1월 4일 |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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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본의 정치인.
생애
정계 입문
1968년 아버지의 급사로 인해 급히 세습이 결정되어 자민당 공천을 받아 미즈사와 선거구[4]에 출마해 그 해 중의원 선거에서 27세의 나이로 당선되었다. 특히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기시 노부스케와 정치적 숙명의 라이벌 관계로 알려진 다나카 가쿠에이의 눈에 띄며 정치적 수제자로 성장하게 되었다.
다나카는 스스로가 겉으로는 기시에게 열정적으로 충성하는 복심인척 했지만, 실용성 측면에 있어 대립 구도 속에 있었던 만큼 기시의 후계 그룹을 견제하기 위해 젊고 유능한 정치인을 발탁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다나카와의 관계를 기반으로 지방대신, 국가공안위원장 등을 맡으며 착실히 경력을 쌓아갔다. 다나카는 전성기에 메지로에 3000평에 달하는 대저택을 지어놓고 자택정치를 즐겼는데 오자와도 세타가야 후카사와의 1000평에 달하는 저택에 의원들을 초청해 파티를 여는 등 다나카와 비슷한 자택정치를 하였다.
신타로 시대
아베 신타로가 국무경 직에 오르자 적극적으로 신타로를 보필하는 모션을 취하면서도 신타로의 개혁개방 정책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특히 본인을 비롯한 다나카파의 기조는 실용적 개방 노선을 취해 한국을 비롯한 서방권으로부터 지원과 돈을 받아내는 것에 중점을 두었지만, 신타로는 적극적인 통일, 개혁, 개방 정책을 폈기 때문에 때로는 신타로와 부딪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내 강경파와는 확실히 거리를 두었고, 신타로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자 어느정도의 각본이 있었다 가정하더라도 경제 부분에 있어서는 적극적 개방을 지지하는 행보를 보이며 다나카파 일부와 충돌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나카가 집권하고 본인이 자유민주당 간사장이 된 이후 일본의 정치체제가 다시 신타로 집권 초기로 회귀하였음을 생각할 때, 결국에는 겉보기에만 신타로에게 어느정도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지 내부적으로는 크게 달라진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전관 4인 시대
신타로가 세상을 떠나고 마침내 다나카가 국무경 자리에 오르면서 더불어 오자와 역시 자유민주당 간사장 직을 맡게 되었다. 당시는 이미 다나카가 사망하기 3년 전이였던 시기로, 다나카의 건강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기에 대부분의 국정 업부는 당 내 2인자였던 오자와가 처리하게 되었다. 이 시기 오자와는 일본의 경제적 혁신이나 민주화보다는 당 내 급진파를 견제하고 보수적 안정세력을 지탱하는 역할을 맡아 "다나카의 우파적 균형추"로 불리기도 했다.
1993년 다나카의 사망 이후, 그는 다케시타 노보루 등 이른바 보수파 원로 그룹과 함께 "전관 4인 시대"라 불리는 집단지도체제를 이끌었다. 이 시기는 일본 정치사에서 정경유착, 금권정치가 절정에 달한 동시에, 급격한 개혁이 도중에 강력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생긴 부작용으로 인해 개혁의 성과로 치부되었던 경제성장이 꺾이고 장기 불황의 전조가 나타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어떤 시대보다 안정된 시대였으며, 제한적으로 언론의 자유와 출판, 결사가 허용되는 등 최근 일본 국내를 중심으로는 당시를 재평가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다케시타, 오부치, 하타 등과 교류하면서 정권 운영의 중심에 있었고, 당내에서는 관료적·조정형 리더로서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아베 신조 체제
2000년대 초반, 모리 요시로의 퇴진 직후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오자와는 자유민주당 총재 자리에 도전하였다. 오랜 당내 경험과 네트워크, 간사장으로서의 실적을 바탕으로 대다수가 총재직은 오자와의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일부는 오자와가 기시에 이어 초장기집권을 하리라는 예상 또한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아베 신타로의 아들 아베 신조. 아베는 아버지가 물려준 개혁적 이미지와 젊음을 무기로 내세우며 출마를 선언했고, 대중적 인기에서 밀린 오자와는 결국 불출마를 결단하며 아베 신조를 지지하는 길을 택했다. 이 선택은 당시에는 "당의 세대교체를 수용한 결단"으로 평가받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다.
아마도 당시 오자와의 행적을 보자면 아베 신조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고 지속해서 간사장으로서 상왕으로 군림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오자와는 생각보다 쉽게 총재직을 포기하였고, 당 내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보수파에서 의구심의 목소리가 나오자 이를 설득하려고 시도했다는 증언 또한 있다. 그러나 아베 신조는 오자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만만한 인물이 아니였다.
아베가 총재직과 국무경 자리에 오르자, 그는 단 하루만에 장기간 맡아온 간사장직에서 해임되었고, 대신 당일 날 부총재직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부총재 직에서 반강제적으로 사임한 뒤 더욱 상징적 위치에 불과한 대의원 의장직으로 밀려나면서, 순식간에 아베 신조 체제에서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와 동시에 주요 요직에 있던 친오자와파도 대거 축출되면서 당 내 발언권 또한 대거 축소되었다.
승명문 항쟁과 정치적 몰락
2004년, 일본 정치를 공포에 빠트린 사건인 승명문 항쟁이 일어났다. 약 50만 명에 달하는 국민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에서, 그는 직접 신풍관[5]까지 달려가 아베 신조 국무경 앞에서 강경 진압에 반대하는 공개적 목소리를 냈다. 심지어는 시위 현장에 직접 나가 일부 사안에 협조를 얻어보겠다던지, 부디 자발적으로 해산해달라던지를 요청하며 사실상 시위대측 편을 들게 되었다. 이는 강제 진압 목소리가 바글바글하던 자민당 내부에서 보기 드문 발언이었고, 그로 인해 완전히 아베 신조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결국 승명문 항쟁의 강제 진압 이후 대의원 의장직 재선에도 실패하며, 전반기 의장 임기만 채운 채 물러나게 되었다. 이 시점부터 오자와는 정치적 실세가 아닌 상징적 존재로 전락하였다.
최후와 사망
정계 은퇴에 가까운 처지로 몰린 그는 이후 명목상의 대의원직을 유지했으나 실질적인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또한 당시 일본이 핵무장 등을 선언한 시국상, 직접적인 발언을 자제해야 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직이라는 상징적 직책을 맡았다. 오자와는 어떻게든 정치적 실권을 되찾기 위해 구주, 아이누 자유민주당에 대한 지원 강화 등 여러 실무적 조치를 취했으나 할수있는건 이게 전부였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직은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웠으며, 정치적 실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점차 당대회라던지 국무경탄신일 등 주요 행사에 조차 얼굴을 비추지 않게되었다.
2007년 1월, 오자와는 갑작스러운 돌연사로 생을 마감하였다. 향년 65세였다. 자유민주당의 당보였던 자유민주(自由民主)에서는 오자와의 죽음을 5면 구석에 짧게 실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여파로 그의 지역구이자 본적지였던 이와테현, 그리고 주요 대도시 일부에서 소규모 시위가 발생하였으나 큰 반향은 없었다. 오히려 당 내에서는 이미 실권을 상실한 이후였기에 정치적 파장은 크지 않았다.
평가
일부에서는 "만약 그가 아베와의 대결을 선택했더라면 일본 정치의 흐름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평가가 있다.
미화? 고평가?
여담
- 바둑 실력이 거의 6단으로 고수였다. 2007년에는 동료 의원이자 7단인 요사노 가오루와 바둑 승부를 했는데 승리하기도 했었다. 요사노가 봐준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진짜로 졌다고 요사노가 인정했을 정도니 대단한 고수였던 모양.
- 엄청난 다혈질이였다. 1990년 분탕종자 출당사태 당시 오자와의 독선적 태도를 카메라 앞 면전에서 비판한 의원이 있었는데, 오자와의 일갈은 한 번 해볼까?였다. 열이 뻗친 의원이 "한 번 해보자고!"라고 맞서자 그 의원을 향해 뚜벅뚜벅 걸으며 진짜 싸우려 했다. 주변 사람들이 말려서 앉기는 했다만.[1]
암살설
소속 정당
| 소속 | 기간 | 비고 |
|---|---|---|
| 자유민주당 | 1965 - 2007 | 정계 입문 사망 |
선거 이력
|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 1969 | 1969년 재보궐선거 | 미즈사와 선거구 | 자유민주당 | (%) | 당선 (1위) | 초선 |
| 1973 | 제7대 대의원선거 | (%) | 재선 | |||
| 1979 | 제8대 대의원선거 | (%) | 3선 | |||
| 1985 | 제9대 대의원선거 | (%) | 4선 | |||
| 1991 | 제10대 대의원선거 | (%) | 5선 | |||
| 1997 | 제11대 대의원선거 | 시이기 선거구 | (%) | 6선 | ||
| 2003 | 제12대 대의원선거 | (%) | 7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