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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에 대해 김종필계와 소장파는 친박정희계가 비민주적인 행태로 신군부가 민주공화당을 장악할 수 있게 길을 터준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친박정희계는 즉각 부인했고, 선동과 날조로 당의 내분을 초래하고 있는 김종필계, 소장파를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역으로 몰아세웠다. 이후 김종필계와 친박정희계의 관계는 더욱 급속도로 험악해지기 시작했고 민주공화당의 분열이 최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 이 사건에 대해 김종필계와 소장파는 친박정희계가 비민주적인 행태로 신군부가 민주공화당을 장악할 수 있게 길을 터준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친박정희계는 즉각 부인했고, 선동과 날조로 당의 내분을 초래하고 있는 김종필계, 소장파를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역으로 몰아세웠다. 이후 김종필계와 친박정희계의 관계는 더욱 급속도로 험악해지기 시작했고 민주공화당의 분열이 최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 ||
끝내 1980년 3월 1일, 김종필 의장은 | 끝내 1980년 3월 1일, 김종필 의장은 비민주적인 행태를 보이는 친박정희계에 유감을 표하면서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완전한 정당민주주의를 이루겠다며,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ref>여기서 친박정희계를 제명하면 되지 않겠냐고 할 수 있는데, 당시 민주공화당의 당내 구도를 보면 친박정희계 세력이 어느정도 건재했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0월 유신 이후 국민의 지지와 독자적인 정당 조직력, 의회 정치 능력을 모두 상실했기 때문에 신당 창당을 통해 쇄신감을 불러일으키고 잔류한 친박정희계를 서서히 몰락시키는 것이 제명하는 것보다 실익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ref> | ||
더불어 박찬종, 오유방 등, 김종필계와, 친박정희계 둘 다 반대하는 일부 소장파도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 더불어 박찬종, 오유방 등, 김종필계와, 친박정희계 둘 다 반대하는 일부 소장파도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 ||
2025년 12월 8일 (월) 19:29 기준 최신판
개요
1980년 초에 이루어진 민주공화당 분당이다. 이 분당은 대한민국 보수정당 역사상 최대의 분당으로 꼽힌다.
발단
1979년, 10.26 사건 이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당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김종필을 비롯한 김종필계(청구동계)가 당을 운영하는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긴 친박정희계를 중심으로 김종필을 서서히 견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사실상 군권을 장악하자 전두환과 고향이 인접한 TK를 지역구로 둔 국회의원을 필두로 신당 창당설이 퍼지기도 했다.
또한, 박찬종, 오유방, 남재희, 이태섭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유신체제를 지지하고 옹호한 과거를 반성하자는 취지에서 일명 '정풍운동'을 일으켰으나, 정풍운동의 대상으로 지목된 이후락, 김진만 등이 김종필 지도부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렇듯 민주공화당은 10.2 항명 파동 이후 최대 분열 위기를 맞았고 더구나 10월 유신 이후 야당인 신민당보다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국민의 지지와 독자적인 정당 조직력, 의회 정치 능력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다. 따라서 김종필 의장을 비롯한 김종필 지도부는 당을 제대로 운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를 두고 이만섭과 일부 김종필계 의원들은 김종필 의장에게 신당을 창당해서 새출발할 것을 조언했지만, 김종필 의장은 그렇게 쉬운 결정이 아니라며 사실상 고사했다.
그러나 1980년 2월, 이효상 전 국회의장과 박준규, 이후락 등 친박정희계 세력이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들을 민주공화당에 입당시켜서 친박정희계 세력을 크게 확대한 후, 사흘 안에 속전속결로 김종필 지도부를 붕괴시키고 신군부 세력의 지도자인 전두환을 민주공화당 의장 겸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계획인 이른바 ‘김옥균 작전’에 대한 녹취록이 발견되자[1]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 대해 김종필계와 소장파는 친박정희계가 비민주적인 행태로 신군부가 민주공화당을 장악할 수 있게 길을 터준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친박정희계는 즉각 부인했고, 선동과 날조로 당의 내분을 초래하고 있는 김종필계, 소장파를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역으로 몰아세웠다. 이후 김종필계와 친박정희계의 관계는 더욱 급속도로 험악해지기 시작했고 민주공화당의 분열이 최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끝내 1980년 3월 1일, 김종필 의장은 비민주적인 행태를 보이는 친박정희계에 유감을 표하면서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완전한 정당민주주의를 이루겠다며,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2]
더불어 박찬종, 오유방 등, 김종필계와, 친박정희계 둘 다 반대하는 일부 소장파도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전개
세력분화
| 민주공화당 | → |
| 민주공화당 | |
| 한나라당 | |
| 개혁신당 |
잔류파 중심 민주공화당
분당 과정에서 잔류한 친박정희계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재편된 민주공화당은 1980년 3월 6일, 임시 당대회에서 이효상 전 국회의장을 당의장으로 선출했다. 이어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전원이 민주공화당에 입당하면서 의석 수가 25석에서 102석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후 5월 항쟁에서 민주공화당은 신군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한나라당, 신민당, 개혁신당, 민주통일당 등 민주화 세력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신군부 세력이 몰락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신군부와 같이 내란 세력으로 엮이게 되었다. 게다가 유력 대권주자인 김종필, 김영삼은 헌법재판소에 의한 합법적인 민주공화당 해산을 선언하여 존립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제11대 대선을 통해 출범한 문민정부는 민주공화당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했고 1982년 5월 21일에 헌법재판소의 청구 인용 결정에 따라 민주공화당은 해산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종필 신당 '한나라당'
김종필 전 민주공화당 의장을 비롯해 김종필계와 일부 소장파, 이만섭 등을 중심으로 창당한 신당이다.
1980년 3월 16일, 창당대회에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결정하고 8개의 강령과 55개의 기본정책을 채택한 뒤 김종필 전 민주공화당 의장을 당대표로 선출했다.
박찬종 신당 '개혁신당'
박찬종, 오유방 등, 김종필계와 친박정희계 둘 다 반대하는 일부 소장파를 중심으로 창당한 신당이다. 당명은 개혁신당으로 결정했다.
1980년 4월, 창당대회에서 박찬종 국회의원이 당대표로 추대되었다.
박찬종 대표는 창당대회에서 제11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독자 완주를 통해 정당의 기본 목적 중 하나인 '자체 후보에 의한 집권 가능성'을 보여주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