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 순황제 (풍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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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 이훈(光宗 李鑫)는 [[대조선국 (빨간풍선)|대조선국]]의 제2대 [[태왕 (빨간풍선)|태왕]]이다.  
광종 이훈(光宗 李鑫)는 [[대조선국 (빨간풍선)|대조선국]]의 제2대 [[태왕 (빨간풍선)|태왕]]이다.  


고조 사후 나선정벌과 양차 대전이라는 비상한 시대를 통치하며 후조선의 기틀을 잡은 명군으로 내치에서 성공을 이끈 부왕과 아들과는 달리 48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 군주로서 내치와 외치 모두 승리를 거듭하여 훗날의 중흥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고 전제군주제였던 조선에서 서구식 양원제를 도입하여 정당정치의 초석을 마련하였으나 말년에는 지나친 인간 불신과 병환으로 인해 스스로가 이룩한 의회정치의 몰락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예조 사후 나선정벌과 양차 대전이라는 비상한 시대를 통치하며 후조선의 기틀을 잡은 명군으로 내치에서 성공을 이끈 부왕과 아들과는 달리 48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 군주로서 내치와 외치 모두 승리를 거듭하여 훗날의 중흥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고 전제군주제였던 조선에서 서구식 양원제를 도입하여 정당정치의 초석을 마련하였으나 말년에는 지나친 인간 불신과 병환으로 인해 스스로가 이룩한 의회정치의 몰락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 즉위 이전 ===
=== 즉위 이전 ===
1878년 [[예조 (빨간풍선)|예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7세의 나이에 왕세자에 봉해졌다. 아버지 고조는 전형적인 사대부 였던 군주였던 것과는 달리, 문무를 모두 겸비하였으나 서구의 학문과 군사학에 모두 능했으며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높았다고 한다.
1878년 [[예조 (빨간풍선)|예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7세의 나이에 왕세자에 봉해졌다. 아버지 예조는 전형적인 사대부 였던 군주였던 것과는 달리, 문무를 모두 겸비하였으나 서구의 학문과 군사학에 모두 능했으며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높았다고 한다.


어린 광종은 세자시강원에서 서양 교사들과 경연관들에게 기초 학문을 익혔다. 광종은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통했으며, 수학과 과학, 지리학, 역사, 예술도 빠르게 깨우쳤다.
어린 광종은 세자시강원에서 서양 교사들과 경연관들에게 기초 학문을 익혔다. 광종은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통했으며, 수학과 과학, 지리학, 역사, 예술도 빠르게 깨우쳤다.

2026년 2월 18일 (수) 11:48 판

[ 소개 ]
휘파람을 불지마 그건 너무 쓸쓸해
촛불을 끄지마 어두운건 싫어
너와 난 빨간 풍선 하늘높이 날아
가슴깊이 묻어둬 너의 슬픔일랑
휘파람을 불지마 그건 너무 정다워
촛불을 끄지마 어두운건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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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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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예조 광종 헌종
제4대 제5대
대종 영강태왕
왕태자 · 추존 태왕 · 태상왕 · 왕후
예조선 · 부여 · 원삼국 · 고구려 · 백제 · 가야
신라 · 탐라 · 발해 · 후삼국 · 고려 · 조선
대조선국 제2대 태왕
광종 | 光宗
이름 훈(鑫)
출생 1878년 11월 22일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現 경성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붕어 1948년 5월 25일 (향년 69세)
경성 한성부 경운궁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885년 5월 28일 ~ 1895년 1월 12일 (9년)
대조선국 왕태자
1895년 1월 12일 ~ 1901년 3월 29일 (6년)
대조선국 제2대 태왕
1901년 3월 29일 ~ 1948년 5월 25일 (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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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왕 예조
모후 문성왕후 김씨
형제자매 동생 흥친왕
왕후 경인왕후 이씨
자녀 장남 신종
차남 강친왕
삼남 금친왕
장녀 인선공주
차녀 인경공주
종교 유교 (성리학)
아명 수성(綏成)
광도(廣道)
묘호 광종(光宗)
존호
시호
연호 광형(光亨, 1895~1901)
계급 대원수

개요

광종 이훈(光宗 李鑫)는 대조선국의 제2대 태왕이다.

예조 사후 나선정벌과 양차 대전이라는 비상한 시대를 통치하며 후조선의 기틀을 잡은 명군으로 내치에서 성공을 이끈 부왕과 아들과는 달리 48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 군주로서 내치와 외치 모두 승리를 거듭하여 훗날의 중흥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고 전제군주제였던 조선에서 서구식 양원제를 도입하여 정당정치의 초석을 마련하였으나 말년에는 지나친 인간 불신과 병환으로 인해 스스로가 이룩한 의회정치의 몰락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즉위 이전

1878년 예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7세의 나이에 왕세자에 봉해졌다. 아버지 예조는 전형적인 사대부 였던 군주였던 것과는 달리, 문무를 모두 겸비하였으나 서구의 학문과 군사학에 모두 능했으며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높았다고 한다.

어린 광종은 세자시강원에서 서양 교사들과 경연관들에게 기초 학문을 익혔다. 광종은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통했으며, 수학과 과학, 지리학, 역사, 예술도 빠르게 깨우쳤다.

광종은 자라나며 성리학보다는 서구의 사상과 군사학에 관심을 가지며 중신들의 우려를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왕이 태자를 전적으로 지지하며 광종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제왕학을 익혀갔고, 1893년 15세가 되던 나이부터는 부왕과 함께 국사에 참여하며 후계자 수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고, 부왕의 건강이 악화되던 1898년부터는 대리청정을 수행하며 정무의 대부분을 직접 처리했다.

이렇듯 광종은 태왕에 등극하기 전 3년이라는 시간동안 태왕으로써의 무게와 역할을 배우며 스스로의 치세에 대한 신념을 굳히기 시작하였다.

즉위

1901년 3월 29일, 부왕 예조가 붕어하자 태자는 연호를 주역에 나오는 합홍대 품물광(含弘大 品物咸. 품은 것이 크고 넓으니, 만물은 모두 형통하다.)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광형'으로 정하고 즉위했다.

광종이 보위에 올랐을 때 신생 제국인 조선은 혼란스러웠다. 권비의 난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조일 연합군과 러시아군은 만주를 갈라먹으며 대치했고 만주의 의화단은 국경을 넘어 조선을 약탈하려 시도하였고, 헌법 제정 논의가 대두되었다.

광종은 차근차근 엉킨 실타래처럼 꼬인 일들을 해결하기 시작했다. 군을 동원하여 남만주를 점령하는 한편 경찰과 헌병을 동원하여 만주평정작전을 개시, 광종실록에 따르면 권비나 청군 패잔병이 잔존하는 것으로 의심되던 부락을 완전 초토화 시키켰다고 하며[1] 이러한 광종의 신중하지만 과감한 통치는 예조 사후 비통과 불안으로 얼룩진 조선 땅을 안정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군신

권비의 난이 끝나고도 조일 양국간의 유착은 더욱 공고해졌다. 1902년 영일동맹 채결과 동시에 조선은 일본과 조일동맹을 채결하여 반러연대를 천명하였고, 1904년 양국이 기습적으로 제물포 앞 바다에서 러시아 순양함에 선제공격을 가하며 광형노국전쟁이 시작되었다.

광종은 원수부와 조정을 서경 행궁으로 이전시키며 친정에 나섰다. 조일연합군은 육상과 해상에서 분전을 거듭하였고, 마침내 1904년 5월 28일 조일연합함대가 대마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격파하며 조선은 일약 일본 다음가는 동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하였다. 동시에 친정을 하며 군을 이끈 광종은 광개토대왕과 부왕 예조를 이어 군신의 지위에 올랐고, 부왕에게 물려받은 막강한 왕권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군민공치의 길

갈대보다는 소나무

1929년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증가하자 광종은 대공황 시기 긴축 재정을 유지하며 산업 합리화를 추진하였다. 1931년 대한은 영국에 이어 금본위제를 정지하고, 원화 약세와 함께 무역을 확대하고 식민지 및 종속지역과의 무역을 급속히 확대함으로써 대공황 이전의 GDP 수준을 회복하였다. 이를 통해 서구 열강에 비해 일찍 경기를 회복했지만, 그 과정에 서구의 블록 경제와 대립하는 측면이 있어서 열강의 비판과 제약을 받았다. 이에 광종은 이른바 자력갱생 운동을 전개하여 경제블럭을 공고히 하였지만, 1940년대까지 경제 침체를 피할 수 없었다.

이 당시 대한은 경제적 혼란으로 영토 팽창론과 극우파가 부상하여 5.16 사건처럼 테러나 정변 시도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이 여럿 발생했다. 이 당시 광종은 당근과 칼을 교묘하게 휘둘렀다. 명목상 중국의 영토였지만, 실질적으로 대한이 지배하던 북만주 일대를 분리시키는 흑수독립공작으로 흑수번을 세우고, 내지로 편입하여 국내의 팽창주의자들의 불만을 달래는 동시에 광형옥사로 극우파들을 무지막지하게 숙청하고, 영토 확장론을 일축했다. 광종은 서백리 출병 이후 최소한의 팽창만을 추구하는 온건 전략에 따라 2차대전이 발생할 당시 대한은 엄정 중립을 선언하고, 광종 사후 신종이 전쟁 막판에 미국에 줄을 서서 연합국 쪽에 붙었다.

사망

광종이 어지간하면 내각에서 처리하던 일도 편집증적으로 자신이 전부 처리하였기에 광종의 몸은 엉망이었다. 게다가 1930년대,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와 정치 혼란, 사회 문제들을 자신이 일일히 수습하며 광종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말년엔 순현인황후와의 다툼으로 육체적으로 한계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더더욱 정무에 열을 올렸다.

결국 1943년 10월 11일 인정전에서 집무를 보던 중 쓰러졌고, 10월 14일 다시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자 마자 다시 밀린 정무를 보며 이미 쇠약해진 몸이 더욱 위독해져 10월 17일 다시 쓰러져 10월 18일 오후 3시경 창덕궁 대조전에서 향년 64세를 일기로 황후와 황태자를 비롯한 황족들이 보는 앞에서 붕어한다.

여담

가계

  • 증조부 : 완성군 희(完城君 爔, 1771 ~ 1830)
  • 증조모 : 남양군부인 홍씨(南陽郡夫人 洪氏, 1772 ~ 1808)
    • 조부 : 완창대원왕 시인(完昌大院王 時仁, 1805 ~ 1843)
    • 조모 : 경주대원비 김씨(慶州大院妃 金氏, 1816 ~ 1863)
      • 부친 : 예조 교(藝祖 㚁, 1842 ~ 1901)
      • 모친 : 문성왕후 김씨(文成王后 金氏, 1837 ~ 1888)
  • 왕후 : 원명왕후 홍씨(元明王后 洪氏, 1883 ~ 1932)
    • 장남 : 신종 숙(神宗 淑), 1916 ~ 1978)
      • 며느리 : 원명왕후 홍씨(元明王后 洪氏, 1913 ~ 1992)
    • 차남 : 강친왕 만(康親王 滿), 1919 ~ 1988)
      • 며느리 : 강친왕비 안씨(康親王妃 安氏, 1919 ~ 1990)
    • 삼남 : 금친왕 주(錦親王 瀯), 1921 ~ 1998)
      • 며느리 : 금친왕비 민씨(錦親王妃 閔氏, 1923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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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대조선국 제실의 계보도 (빨간풍선) 틀:대조선국 제실 (빨간풍선)


  1. 이때 초토화된 부락에는 조선의 이민자들이 대규모로 이주하여 만주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