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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 (대성)|이토 히로부미]] 등을 유럽에 파견하여 헌법과 정치 제도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들은 군주의 권한이 강한 프로이센의 제도를 주요 모델로 삼았다. 이후 정부는 1885년 내각 제도를 도입하고 헌법 제정을 추진하여, [[1889년]] 천황이 국민에게 부여하는 형식으로 헌법을 공포하였다. 헌법은 천황이 국가의 통치권을 총괄하도록 규정하였으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법률이 정하는 범위에서 인정하였다. 1890년에는 [[귀족원 (대성)|귀족원]]과 [[중의원 (대성)|중의원]]으로 구성된 '''제국의회'''가 개설되었다. 귀족원은 황족·화족과 천황이 임명한 의원 등으로 구성되었고, 중의원은 선거로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중의원 선거권은 일정액 이상의 직접 국세를 납부하는 만 25세 이상의 남자에게만 주어져, 정치 참여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이로써 헌법과 의회를 갖춘 입헌 체제가 마련되었지만, 천황과 정부의 권한이 강하고 국민의 정치 참여가 제한되는 특징을 지녔다. | 메이지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 (대성)|이토 히로부미]] 등을 유럽에 파견하여 헌법과 정치 제도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들은 군주의 권한이 강한 프로이센의 제도를 주요 모델로 삼았다. 이후 정부는 1885년 내각 제도를 도입하고 헌법 제정을 추진하여, [[1889년]] 천황이 국민에게 부여하는 형식으로 헌법을 공포하였다. 헌법은 천황이 국가의 통치권을 총괄하도록 규정하였으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법률이 정하는 범위에서 인정하였다. 1890년에는 [[귀족원 (대성)|귀족원]]과 [[중의원 (대성)|중의원]]으로 구성된 '''제국의회'''가 개설되었다. 귀족원은 황족·화족과 천황이 임명한 의원 등으로 구성되었고, 중의원은 선거로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중의원 선거권은 일정액 이상의 직접 국세를 납부하는 만 25세 이상의 남자에게만 주어져, 정치 참여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이로써 헌법과 의회를 갖춘 입헌 체제가 마련되었지만, 천황과 정부의 권한이 강하고 국민의 정치 참여가 제한되는 특징을 지녔다. | ||
===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추진하다 === | |||
근대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던 메이지 정부는 에도 막부가 서양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고자 하였다. 이들 조약은 외국인이 관련된 재판에서 외국 영사의 재판권을 인정하였으며, 수출입 상품에 부과하는 관세를 자주적으로 결정할 권한도 제한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제약을 해소하고 열강과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1871년]] 정부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각국의 정치·산업·교육 제도를 살펴보는 한편, 조약 개정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그러나 서양 열강은 법률과 재판 제도의 정비 등을 요구하며 개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정부는 서양의 법과 제도를 도입하면서 외교 교섭을 이어 갔다. | |||
조약 개정을 추진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국내의 논란도 나타났다. 정부는 서양식 사교 행사 등을 통해 국가의 변화된 모습을 외국에 알리고자 하였으나, 지나친 서양 모방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외국인 판사를 재판에 참여시키는 방안이 제시되자, 사법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반발이 일어났다. 조약 개정은 외국의 동의를 얻는 문제인 동시에 국내의 여론을 조정해야 하는 과제였다. 법률과 사법 제도가 정비되고 국제 정세가 변화하면서 교섭은 점차 진전되었다.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을 경계하던 영국은 대성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1894년]] 영국과 새로운 통상 항해 조약을 체결하여 영사 재판권의 철폐와 관세에 관한 제약의 일부 완화에 합의하였다. 이후 다른 열강과도 조약을 개정하였으며, [[1899년]] 개정 조약이 시행되면서 영사 재판권이 폐지되었다. 다만 관세 자주권을 완전히 회복하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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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메이지 유신과 근대 국가의 성립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다
19세기 중반 개항 이후 에도 막부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외국과 체결한 불평등조약과 사회·경제적 혼란으로 막부에 대한 불만이 커졌으며,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중심으로 막부타도운동이 전개되었다.
1867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계속되는 막부타도운동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조정에 통치권을 반환 한 대정봉환이 일어났다. 그러나 통치권을 돌려받은 메이지 천황의 신정부는 도쿠가와 가문의 지위를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었다. 반막부 세력이 왕정복고를 추진하여 정권을 장악하자 구막부 세력과 신정부 사이에서 보신전쟁이 일어났다.
신정부는 천황의 권위를 바탕으로 세력을 결집하여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 에도성을 넘겨받은 뒤 각지의 저항을 진압하였으며, 1869년 하코다테에 남아 있던 구막부 세력을 제압하였다. 이를 통해 신정부는 전국을 통치할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와 함께 신정부는 5개조의 서약문을 발표하여 공론에 따른 정치와 외국 지식의 수용을 개혁의 방향으로 제시하였다.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고 교토에서 도쿄로 정치적 중심지를 욺기며, 태정관을 중심으로 중앙 통치 기구를 정비하였다.
하나, 위아래 마음을 하나로 하여 세상을 활발히 다스릴 것.
하나, 문무관이 하나가 되고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뜻을 이루게 하여 인심으로 하여금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
하나, 지금까지의 나쁜 관습을 깨고 천지의 공도에 기초할 것.
하나, 지식을 세계에서 구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기초를 크게 분발시키고 일으킬 것.
번을 폐지하고 중앙의 통치권을 강화하다
신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각 번은 토지와 주민을 지배하고 독자적인 재정과 군사력을 유지하였다. 정부는 전국에 통일된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지방의 통치권을 중앙으로 모으고자 하였다. 먼저 1869년 번주들이 토지와 인민에 대한 지배권을 조정에 반환하도록 하는 판적봉환을 시행했다. 그러나 기존 번주들이 지번사에 임명되어 지방을 계속 다스렸기 때문에, 번의 영향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에 정부는 1871년 번을 폐지하고 부와 현을 설치하는 폐번치현을 단행한다.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관이 행정을 담당하게 되면서, 각 번에 나뉘어 있던 통치권이 중앙정부에 집중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행정구역을 통합하여 지방 통치 체계를 정비하였다. 중앙정부는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조세 제도와 군사 제도를 마련하였다.
조세와 군사 제도를 정비하다
폐번치현으로 지방의 통치권을 장악한 메이지 정부는 안정적인 재정을 확보하고 중앙정부가 지휘하는 군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지역마다 달랐던 조세 제도를 통일하고, 무사 중심의 군사 제도를 개편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1873년 지조개정을 실시하였다. 토지 소유자에게 소유권을 증명하는 지권을 발급하고, 토지 가격을 기준으로 그 가격의 3%를 화폐로 납부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은 수확량을 기준으로 현물을 거두던 방식에서, 토지 소유자에게 일정한 금액을 거두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메이지 정부는 이를 통해 해마다 수확량과 쌀값에 따라 달라지던 세입을 안정시키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농민은 흉년이 들어도 정해진 세금을 내야 했으며, 납세에 필요한 화폐를 마련해야 하였다. 세금 부담에 반발하는 농민의 저항이 이어지자, 정부는 1877년 지조의 세율을 토지 가격의 2.5%로 낮추었다.
군사 제도의 개편도 추진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1873년 징병령을 공포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병역을 부담한다는 국민개병의 원칙을 내세웠다. 만 20세가 된 남자는 징병 검사를 받았으며, 합격자 가운데 선발된 사람은 원칙적으로 3년 동안 현역으로 복무하였다. 이를 통해 무사에게 의존하던 군사 체제에서 벗어나 국민을 징집하여 군대를 편성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다만 초기에는 호주나 상속인 등에 대한 면제 규정이 있었고, 일정한 돈을 내면 병역을 면제받을 수도 있어 부담이 고르게 부과되지는 않았다. 농촌에서는 일손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징병에 반발하기도 하였다. 조세와 군사 제도의 개편은 중앙정부의 재정과 군사력을 강화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백성의 부담과 저항도 나타났다.
산업을 육성하고 새로운 교육을 실시하다
메이지 정부는 국가의 부강과 군사력 강화를 위해 근대 산업을 육성하는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였다. 서양의 기계와 생산 기술을 도입하고 외국인 기술자를 초빙하였으며, 관영 공장과 광산을 운영하여 산업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들 사업장은 새로운 생산 방식을 도입하는 한편, 기술 인력을 양성하여 민간에 기술을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산업 발전을 뒷받침할 교통·통신 시설도 정비하였다. 1872년에는 신바시와 요코하마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우편 제도와 전신망이 도입되어 사람과 물자의 이동 및 정보 전달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각 지역의 시장을 연결하고 중앙정부의 정책이 지방에 전달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정부는 새로운 제도를 운영하고 산업 발전을 이끌 인재를 기르기 위해 교육 개혁을 추진하였다. 1872년 학제를 공포하여 근대적인 학교 제도의 틀을 마련하고, 신분과 성별에 관계없이 국민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각지에 소학교를 설립하고 교원을 양성하는 사범학교를 두었으며, 읽기와 쓰기, 산술 등 기초 지식과 실용적인 학문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교육 제도가 곧바로 정착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비용의 상당 부분을 지역 주민이 부담하였고, 학생에게도 수업료를 거두었다. 농촌에서는 자녀가 학교에 다니면 집안일과 농사에 필요한 일손이 줄어드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따라 취학이 더디게 이루어졌으며, 지역과 성별에 따른 교육 기회의 차이도 나타났다. 정부는 학교와 교원을 확충하고 제도를 보완하면서 근대 교육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자유민권운동이 전개되다
메이지 정부가 주도하는 개혁이 추진되는 가운데,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의 일부 인물이 권력을 장악한 번벌 정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서양의 자유주의와 국민의 권리에 관한 사상이 확산되면서, 국민의 대표가 정치에 참여하고 정부의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타났다. 1874년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은 국민이 선출한 대표로 의회를 구성할 것을 요구하는 민선의원 설립 건백서를 제출하였다. 이를 계기로 의회 설립과 헌법 제정, 국민의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이 전개되었다. 각지에서는 정치 단체가 조직되어 연설회와 청원 운동을 벌였으며, 민간에서 헌법 초안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신문과 집회에 대한 규제를 통해 민권 운동을 억제하는 한편, 점진적으로 입헌 체제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의회 설립 요구가 높아지자 1881년에는 1890년까지 국회를 개설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의회 정치의 실시를 앞두고 자유당과 입헌개진당 등의 정당도 조직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 등을 유럽에 파견하여 헌법과 정치 제도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들은 군주의 권한이 강한 프로이센의 제도를 주요 모델로 삼았다. 이후 정부는 1885년 내각 제도를 도입하고 헌법 제정을 추진하여, 1889년 천황이 국민에게 부여하는 형식으로 헌법을 공포하였다. 헌법은 천황이 국가의 통치권을 총괄하도록 규정하였으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법률이 정하는 범위에서 인정하였다. 1890년에는 귀족원과 중의원으로 구성된 제국의회가 개설되었다. 귀족원은 황족·화족과 천황이 임명한 의원 등으로 구성되었고, 중의원은 선거로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중의원 선거권은 일정액 이상의 직접 국세를 납부하는 만 25세 이상의 남자에게만 주어져, 정치 참여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이로써 헌법과 의회를 갖춘 입헌 체제가 마련되었지만, 천황과 정부의 권한이 강하고 국민의 정치 참여가 제한되는 특징을 지녔다.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추진하다
근대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던 메이지 정부는 에도 막부가 서양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고자 하였다. 이들 조약은 외국인이 관련된 재판에서 외국 영사의 재판권을 인정하였으며, 수출입 상품에 부과하는 관세를 자주적으로 결정할 권한도 제한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제약을 해소하고 열강과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1871년 정부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각국의 정치·산업·교육 제도를 살펴보는 한편, 조약 개정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그러나 서양 열강은 법률과 재판 제도의 정비 등을 요구하며 개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정부는 서양의 법과 제도를 도입하면서 외교 교섭을 이어 갔다.
조약 개정을 추진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국내의 논란도 나타났다. 정부는 서양식 사교 행사 등을 통해 국가의 변화된 모습을 외국에 알리고자 하였으나, 지나친 서양 모방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외국인 판사를 재판에 참여시키는 방안이 제시되자, 사법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반발이 일어났다. 조약 개정은 외국의 동의를 얻는 문제인 동시에 국내의 여론을 조정해야 하는 과제였다. 법률과 사법 제도가 정비되고 국제 정세가 변화하면서 교섭은 점차 진전되었다.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을 경계하던 영국은 대성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1894년 영국과 새로운 통상 항해 조약을 체결하여 영사 재판권의 철폐와 관세에 관한 제약의 일부 완화에 합의하였다. 이후 다른 열강과도 조약을 개정하였으며, 1899년 개정 조약이 시행되면서 영사 재판권이 폐지되었다. 다만 관세 자주권을 완전히 회복하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