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94번째 줄: |
94번째 줄: |
| {{인용문|'''횡빈항 전경을 바라보며 꺼내 든 타바코 한 갑.<br>타바코 끝에서 풍겨오던 그 불내가 내 코를 간질였다.'''<ref>[[첫 문장이 유명한 작품/소설|소설 도입부 첫 구절로,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의 구절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구절 중 하나이다.]]</ref>|《[[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한나라)|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 | {{인용문|'''횡빈항 전경을 바라보며 꺼내 든 타바코 한 갑.<br>타바코 끝에서 풍겨오던 그 불내가 내 코를 간질였다.'''<ref>[[첫 문장이 유명한 작품/소설|소설 도입부 첫 구절로,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의 구절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구절 중 하나이다.]]</ref>|《[[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한나라)|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
| {{인용문|'''교수는 웃었다. 누구보다 힘차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서 흘러 내리던 그 눈물은 무엇이었을까.<br>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그 또렷했던 눈물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A 교수의 여행 (한나라)|A 교수의 여행]]》}} | | {{인용문|'''교수는 웃었다. 누구보다 힘차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서 흘러 내리던 그 눈물은 무엇이었을까.<br>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그 또렷했던 눈물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A 교수의 여행 (한나라)|A 교수의 여행]]》}} |
| '''여일랑'''는 [[대한제국 (한나라)|대한제국]]의 [[소설가]]이다. [[창명 시대 (한나라)|창명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약 11년<ref>이마저도 1941년부터 44년까지는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징병되어 창작 활동을 하지 못했다.</ref>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A 교수의 여행 (한나라)|A 교수의 여행]], [[나는 더 이상 신랑이 될 수 없습니다 (한나라)|나는 더 이상 신랑이 될 수 없습니다]],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한나라)|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와 같은 명작 소설들을 배출해냈다. 창명 시대의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인재였지만, 1945년 5월 요코하마에서 실종된 이후 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그를 대성 어딘가에서 발견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그의 정확한 자취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 | '''여일랑'''는 [[대한제국 (한나라)|대한제국]]의 [[소설가]]이다. |
| | |
| 그의 필명인 여일랑(阿肆)는 그가 병역을 회피하기 위해 만주국에서 사용한 일종의 가명이다.
| |
|
| |
|
| == 생애 == | | == 생애 == |
| 1915년 10월 8일 평안북도 신의주시<ref>현재의 [[의주광역시 (한나라)|의주광역시]] [[중구(의주광역시) (한나라)|중구]].</ref>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판양석은 외무부<ref>현재의 [[외교부 (한나라)|외교부]].</ref> 소속의 외교관이었다. [[요코하마시 (대성)|요코하마]]의 대한제국 외교 공관에서 근무했으며, 그의 어머니인 이숙자는 신의주의 공립학교에서 근무하던 국어교사였다. 아버지는 요코하마에서 근무하며 대한제국과 대성을 들락거렸기에, 어머니와 홀로 큰 여일랑는 그의 아버지가 구해다 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 작품을 읽으며 문학적 역량을 길렀다.
| |
|
| |
| 이후 교내에서 준수한 성적으로 [[평양대학교 (한나라)/역사|평양제국대학]] 법문학과를 수료한 그는 아버지의 인맥으로 간도-온성 간 무역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이 당시 함경도 지역 문학 잡지였던 관북문예(關北文藝)에 여일랑의 첫 단편 소설인 간도(間島)를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의 첫 단편 소설인 간도는 [[아메리칸 드림|간도 드림]]을 꿈꾸며 간도로 넘어왔지만, 간도의 척박한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몰락하는 일가족을 다룬 소설이다.
| |
|
| |
| 그가 소설가로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작품은 1935년작 단편 소설인 관북(關北)이다. 관북은 함경북도의 유명한 도적단의 두목인 일랑(逸朗)과 [[무산군 (한나라)|무산군]]에 살고 있는 시골 소녀인 연서(漣序)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은 소설로, 해당 소설이 함경북도는 물론 한반도 북부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면서 그는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A 교수의 여행 (한나라)|A 교수의 여행]],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등 유명한 장·단편 소설을 발표한다.
| |
|
| |
| 여일랑는 이후 1937년 발발한 [[중성전쟁 (한나라)|중성전쟁]] 당시 대한제국의 징병을 회피하기 위해 만주국으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작가 활동을 이어나간다.<ref>이 시기부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일랑(阿肆, 아쓰)라는 필명을 사용한다.</ref> 이 곳에서 그는 신경(新京)<ref>신경에 사는 24세의 청년 광쑨(光勳)이 만주군에 징병되고 나서 여러 전투에 참여하다 결국 전사하는 내용을 담은 반전주의 소설.</ref>, 신의주 청년(新義州靑年)<ref>신의주에 사는 이름 모를 청년이 이미 징집당한 자신의 친구들이 보내는 편지를 읽고 자신도 똑같이 징집당할까 두려워 하다, 결국 자살을 택하는 결말의 반전주의 소설.</ref>과 같은 반전주의 소설은 물론 [[나는 더 이상 신랑이 될 수 없습니다 (한나라)|나는 더 이상 신랑이 될 수 없습니다]]와 같은 에로티시즘 소설에, 황금로(黃金路)<ref>현재의 [[충무로 (한나라)|충무로]].</ref><ref>황금로에서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중년 남성 김성식(金聖植)이 미모의 여성에 홀려 자신의 재산, 집, 가정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내용의 단편 소설.</ref>, 경성 랩소디와 같은, 일명 '''창명 로망'''<ref>[[다이쇼 로망]]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창명 시대 (한나라)|창명 시대]]의 [[낭만주의]] 사조를 뜻하는 용어이다.</ref>이 녹아든 작품 등 여러모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한다.
| |
|
| |
| 한편, 그는 1940년 사망한 그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요코하마로 입국한다. 그는 이 곳에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갔는데, 이 시기에 집필된 작품이 바로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한나라)|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이다. 이렇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와중에 그는 [[대성공산당 (대성)|대성공산당]]에 입당하고, [[아카하타]]에 중성전쟁을 비판하는 논평문까지 투고하는 등의 반전주의 활동을 이어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한나라)|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결국 [[대한제국군 (한나라)|대한제국군]]에 징집당하게 된다.
| |
|
| |
| 1944년 대한제국의 항복 이후 귀국한 그는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군 복무 시절을 회상한 청진항(淸津港)<ref>요코하마에서 청진항까지, 청진항에서 중국 전선까지 이동하는 내용을 다룬 장편 소설.</ref>, 유성선(流星線)<ref>대한제국의 항복 이후 중국의 항구에서 인천항으로 복귀하는 내용을 다룬 단편 소설.</ref>을 발표하였으며, 다음해엔 중국에서 대한제국으로 복귀하면서 본 [[히키아게샤]]를 다룬 단편 소설인 지나촌(支那村)을 발표하였다.
| |
|
| |
| 이후 그는 본인 왈 '최후의 역작'이 될 아이덴티티의 집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청년인 여일랑, 즉 본인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인 아이덴티티는 총 3편<ref>한반도와 간도에서의 이야기를 다룬 1편, 대성 열도에서의 이야기를 다룬 2편, 만주와 중국 일대에서의 이야기를 다룬 3편.</ref>으로 나뉘어 발간될 예정이었다. 아이덴티티 1편의 성공적인 발간 이후 그는 2편 집필을 위해 자신의 정신적인 고향이기도 한 요코하마로 가기 위해 요코하마행 배에 몸을 싣게 된다. 이 때가 1945년 1월이었다.
| |
|
| |
| [[파일:여일랑 요코하마행.jpg|500px]]
| |
|
| |
| '''이후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 |
| 현대 학계에서는 그가 45년 5월 29일 발발한 요코하마 대공습에 휘말려 사망한 것으로 사실상 확정짓고 있다.<ref>실제로 그가 45년부터 생활했다고 전해진 요코하마의 하숙집은 불타 없어진 상태이다.</ref> 하지만 1951년 요코하마에서 최초로 그의 목격담이 전해진 것을 시작으로 59년, 61년, 77년에도 그의 목격담이 전해졌다고 한다. 가장 마지막으로 전해진 목격담은 1989년에 전해진 목격담으로, 이 목격담을 끝으로 더 이상 그의 비공식적인 자취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 |
|
| |
|
| == 특징 == | | == 특징 == |
| 신경, 신의주 청년,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와 같이 그의 활동 초·중반기에 쓰여진 작품들은 대부분 반전주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 |
|
| |
|
| == 작품 목록 == | | == 작품 목록 == |
| 176번째 줄: |
154번째 줄: |
|
| |
|
| == 여담 == | | == 여담 == |
|
| |
| == 소속 정당 ==
| |
|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 10pt;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text-align: center; border:2px solid #000; "
| |
| |-
| |
| ! colspan="1" style="background: #000; color: #fff" | 소속
| |
| ! colspan="1" style="background: #000; color: #fff" | 기간
| |
| ! colspan="1" style="background: #000; color: #fff" | 비고
| |
| |-
| |
| | <span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4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DB001C; font-size: 0.9em">[[파일:대성공산당 흰색 로고 (대성).svg|x15px|link=대성공산당 (대성)]]</span>
| |
| | 1940 - 1941
| |
| | 입당
| |
| |-
| |
| | {{무소속2}}
| |
| | 1941 - 1945
| |
| | 탈당<br>실종
| |
| |-
| |
| |}
| |
|
| |
|
| == 어록 == | | == 어록 == |